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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7-02 08:57:57

차리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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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차리토
(Charito)
출생 미상
사망 미상
아버지 루킬리아누스
남편 요비아누스
자녀 바로니아누스

1. 개요2. 생애

[clearfix]

1. 개요

로마 제국아우구스타. 로마 황제 요비아누스의 황후.

2. 생애

판노니아 속주 출신의 로마 장군 루킬리아누스의 딸이다. 루킬리아누스는 콘스탄티우스 2세 치하에 들어가 동방 전선에서 사산 왕조군을 상대했다. 350년 마그넨티우스콘스탄스를 살해하고 황위를 찬탈하자, 콘스탄티우스 2세는 이를 진압하기 위해 서방으로 진군하면서 루킬리아누스에게 코메스 레이 밀리타리스(Comes rei militaris)에 선임해 동방 방면 로마군 전체를 지휘하게 했다. 354년 코메스 도메스티카룸(Comes domesticarum)에 선임되어 동방에서 실정을 저지르고 있던 카이사르 콘스탄티우스 갈루스를 메디올라눔(오늘날 밀라노)까지 호송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358년 프로코피우스와 함께 사산 왕조에 사절단으로서 방문하여 외교 활동을 벌였다.

이렇듯 콘스탄티우스 2세의 두터운 신임을 받던 루킬리아누스는 모종의 시기에 역시 판노니아 출신의 근위대장인 요비아누스와 딸의 결혼을 성사시켰다. 콘스탄티우스 2세부터 발렌스까지의 기간을 연구하는 학자들로부터 주요 역사가로 취급받는 암미아누스 마르켈리누스는 루킬리아누스의 딸과 요비아누스의 결혼을 거론하면서도 정작 그녀의 이름을 언급하지 않았고, 콘스탄티노폴리스 세계 총대주교인 니키포로스 1세가 저술한 <간략 연대기(Chronographikon syntomon)>에 그녀의 이름이 처음 언급되었다. 현대 역사가 티모시 반스는 암미아누스가 발렌스 황제의 황후인 알비아 돔니카도 전혀 거론하지 않았던 점을 들어 그가 정치적 영향력이 거의 없는 황후들의 이름을 굳이 언급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으리라 추정했다.

360년 율리아누스가 콘스탄티우스 2세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키자, 그는 율리아누스가 도나우 전선군과 합류하는 것을 저지하기 위해 시르미움 북쪽의 보노니아에 주둔했다. 그러나 율리아누스가 급파한 분견대의 야습으로 인해 생포되었다. 얼마 후 콘스탄티우스 2세가 사망하면서 율리아누스가 단독 황제가 된 뒤 사면받았지만 곧 모든 지위를 반납하고 시르미움에서 은퇴 생활을 해야 했다. 363년 율리아누스의 페르시아 원정 도중 율리아누스가 사망하면서 율리아누스의 근위대장이자 루킬리아누스의 사위인 요비아누스가 황제로 추대되었다. 요비아누스는 즉시 장인을 복권시키고 제국 서방 방면군 사령관으로 임명하고 메디올라눔으로 가서 율리아누스의 사망을 전하게 했다.

그러나 율리아누스를 절대적으로 추종하던 갈리아 방면 로마군은 율리아누스가 사망했다는 소식을 믿을 수 없으며 요비아누스를 새 황제로 받들지 않겠다는 입장을 표명했다. 이에 루킬리아누스는 갈리아 벨키카 속주의 수도인 레미로 가서 병사들을 달래려 했다. 이때 그는 병사들의 마음을 사기 위해 병사들의 급료를 중간에서 빼돌리는 부패한 관료들을 닥치는 대로 잡아들여 처벌했다. 그런데 적발되지 않은 한 장교가 병사들에게 율리아누스 황제는 아직 살아있고 요비아누스는 황제 참칭자일 뿐이니 율리아누스를 위해 싸우라고 선동했다. 이에 병사들은 봉기했고, 루킬리아누스는 미처 피하지 못하고 피살되었다. 당시 루킬리아누스의 호위대장이자 미래의 황제가 될 발렌티니아누스 1세는 가까스로 탈출해 동방으로 돌아갔다.

한편, 요비아누스는 사산 왕조와 평화 협약을 맺은 뒤 콘스탄티노폴리스로 귀환하다가 364년 2월 17일 다다스티나에서 갑작스럽게 사망했다. 사인은 공식적으로는 중독사였는데, 독버섯을 잘못 먹었다는 말도 있고 가스(일산화탄소) 중독으로 죽은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암미아누스 마르켈리누스는 그의 죽음을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의 의문사와 비교하며 암살을 의심했다. 요한 크리소스토모가 380년 저술한 <젊은 과부에게 보내는 편지>에 따르면, 요비아누스의 아내는 권력자들이 자신과 자식을 암살하려 들 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속에 살아가고 있다고 한다. 그녀가 언제 사망했는지는 전해지지 않는다.

아들 바로니아누스는 아버지 요비아누스가 황위에 올랐을 때 노빌리시무스(Nobilissimus, 가장 고귀한 자) 칭호를 수여받았고 364년 앙카라에서 아버지와 함께 집정관에 선출되었다. 그러나 아버지가 사망했을 때 아직 어리다는 이유로 황위 계승에서 배제되었다. 요한 크리소스토모의 <젊은 과부에게 보내는 편지>에 따르면, 권력자들이 황제의 아들이었던 자신을 위험인물로 간주하고 제거하려 할 지도 모른다고 두려워해 한쪽 눈을 스스로 멀게 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