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9F0807><colcolor=#FCE774> | |
이름 | 프랑스의 아녜스 (Agnès de France) |
지위 | 동로마 황후(Imperatrix) |
1180/83년 - 1185년 | |
출생 | 1171년 프랑스 왕국 |
사망 | 1220년/1240년 |
배우자 | 알렉시오스 2세 콤니노스 (1180년 결혼/1183년 사망) |
안드로니코스 1세 콤니노스 (1183년 결혼/1185년 사망) | |
테오도로스 브라나스 (1204년 결혼) | |
자녀 | 딸 1명[1] |
아버지 | 루이 7세 |
어머니 | 샹파뉴의 아델 |
형제 | 필리프 2세 |
[clearfix]
1. 개요
프랑스 국왕 루이 7세와 그의 세번째 아내 샹파뉴의 아델의 딸이자 필리프 오귀스트의 유일한 친여동생이다.
알렉시오스 2세와 안드로니코스 1세와의 결혼으로 동로마 제국의 황후로 등극하였다. 아름답고 총명한 여인으로 동방과 서방 간의 우호를 상징하리라고 기대를 모았지만, 난장판이 되어버린 동로마 제국의 정세 속에서 팔자에도 없는 기구한 인생을 살았다.
2. 생애
1178년에 동로마 황제 마누일 1세가 황태자 알렉시오스의 배필로 아녜스를 점찍었고 때마침 성지 순례를 마치고 귀환 중에 콘스탄티노플을 방문한 플랑드르 및 베르망두아, 발루아 백작 필리프 1세를 통하여 프랑스 국왕 루이 7세에게 혼담을 넣었다.루이 7세는 "이것을 듣고 기뻐하며 즐거워했다. 딸에게 이보다 더 좋은 혼처는 없으리라 보았다." 루이 7세의 세 번째 왕비인 샹파뉴의 아델이 속한 샹파뉴 일족들은 반동로마파의 선두였고, 이로 인해 혼담이 맺어지는 과정에서 루이 7세와 왕비 아델이 갈등을 빚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8세인 1180년에 동로마 황제 알렉시오스 2세와 결혼했다. 당대의 사가는 첫만남을 이렇게 회고한다.
다른 사람들은 그들이 교묘하지 않게 서로를 응시하는 방식에 놀랄 것이다. 그리고 공주는 자신의 욕망의 대상인 보랏빛 새싹에게 시선을 던지고, 허락된 대로, 땅에 시선을 던지고, 겸손의 휘장에 자신을 가리고, 얼굴 전체가 보랏빛으로 붉히는 상태를 유지했다. 알렉시오스는 열렬히 그리고 즐겁게 그녀를 바라보고, 눈빛을 발산하고, 더 이상 그것을 억누를 수 없게 되어, 신부의 얼굴을 무아지경으로 응시했다.
역시 어렸던 남편은 1183년에 친척인 안드로니코스 1세가 일으킨 쿠데타로 살해당했다. 11세에 과부가 된 아녜스는 서유럽 혐오자이자 첫 번째 남편의 원수이며 65세나 된 안드로니코스 1세와 강제결혼을 했다.
이 결혼은 막장의 가도를 달리던 동로마 제국조차 발칵 뒤집어지게 했다. 니키타스 호니아티스는 안드로니코스 1세가 수도에 있는 안티오키아의 마리아의 그림들을 그 자신과 어린 신부가 함께 그려진 것으로 바꿨다고 증언하며,
늙은이 악취를 풍겨대는 그가 그의 조카의 아직 11세도 못 채운 분홍빛 뺨의 미숙한 신부와 불법적으로 동침하는 것을 창피해 하지 않았다. 그 쭈그렁한 구혼자가 설익은 처녀를 꼭 껴안았다. 그 노망 난 노인이 처녀를 꽉 움켜잡았다. 그 주름지고 기력이 달린 노인이 장밋빛 손가락을 하고 이른 아침 사랑의 이슬을 뚝뚝 떨어뜨리는 소녀에게 집착했다.
테살로니키 대주교는 이렇게 적었다.
모든 이들은 그녀가 안드로니코스와 이 결혼을 몹시 혐오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녀는 안드로니코스의 광포함을 끔찍해하고, 알렉시오스의 조심스러운 사랑을 그리워했다. 꿈을 꾸며 그를 찾고 이름을 울부짖기도 했다.
한 대중역사가[2]는 유일한 친형제인 존엄왕 필리프가 아녜스를 위해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고 언급하기도 했다.[3]
이 사건은 프랑스 왕국뿐만 아니라 서유럽 전체에 대한 모욕으로 간주되었고, 당대 서유럽 연대기 작가들은 4차 십자군 원정 당시 콘스탄티노폴리스 함락의 명분으로 정당화하게 되었다.
1185년, 안드로니코스 1세가 애첩과 폭동을 피해서 도주할 때 정신없는 와중에도 황후 아녜스를 끝까지 놔주지 않았다. 결국 안드로니코스 1세는 군중들의 린치로 사망하였고, 그의 손녀는 수녀원으로 보내졌으나, 다행히도 아녜스는 동로마 궁정의 막강한 실권자였던 테오도로스 브라나스에게 보호를 받게 되었다. 이후 그들의 관계는 연인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4차 십자군 때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들어선 십자군은 같은 프랑스인이자 비운의 여인인 아녜스에 대해 존경을 표하고 접견하고자 했으나, 아녜스가 단호하게 거절했다. 비록 동로마 제국의 혼란스러운 정국 속에서 많은 풍파를 겪었지만, 그녀는 프랑스어를 잊어버릴 만큼 동로마 제국에 동화되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자신을 프랑스의 아녜스가 아닌 동로마의 안나라고 생각했으며, 서유럽 침략자들에 대해 분노하는 태도를 가지고 있었다.
이후 라틴 제국이 출범하자, 초대 황제인 보두앵 1세는 자신에게 귀순한 테오도로스 브라나스에게 아녜스를 부인으로 맞이하라고 권유하였다. 이에 따라 마침내 1204년에 아녜스는 세 번째 결혼을 하게 되었다. 아녜스는 그 후 1220/1240년까지 생존한 것으로 여겨진다.
3. 형제들
아녜스가 3-4세가 되던 1173~4년에 이복언니들인 샹파뉴 백작 부인 마리(1145–1198)와 블루아 백작 부인 알릭스(1151–1197)[4]가 프랑스 왕궁을 방문한 적이 있었다. 또다른 이복 언니들인 마르그리트(1158–1197)와 아델(1160–1220?)[5]의 남편과 약혼자인 청년왕 헨리와 리처드 1세부터 두 사람의 형제인 조프루아 2세도 프랑스 왕궁을 방문했다. 아녜스는 이복 언니들 중 아델과는 확실히 만난 적이 없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형제들이 하나같이 모친들보다 부친인 루이 7세와 정서적으로 가까웠으며, 염문과 관련해 평판이 하나같이 쟁쟁했다.
4. 그 외
동시대인에게 서유럽 최고의 미녀라는 칭송을 들었다.나이답지 않도록 비상하게 영리했다. 배움에 대한 사랑을 명백하게 보여주었다. 또한 그녀가 아프로디테와 다른 점은 해안에 나타나 화가와 작가에게 영감을 불어넣어 그녀의 아름다움을 찬미하도록 한 것이다.
-테살로니키 대주교
-테살로니키 대주교
[1] 마지막 남편 테오도로스 브라나스 소생으로 추정된다.[2] 존 줄리어스 노리치. 한국에도 번역된 '비잔티움 연대기'로 유명하며, 해외에서도 비잔티움을 대중적으로 소개한 작가로서 상당히 인지도가 있다.[3] Norwich, John Julius, France: A History: from Gaul to de Gaulle (Hodder & Stoughton;John Murray, 2018) 'Philip was in no way concerned for her happiness; he had never lifted a finger to help his other even more pathetic sister Agnes-Anna of Byzantium (...)' 연구 중심의 사학자들의 저서가 아니고, 대중역사가의 저서인지라 이 점을 유의해서 읽을 필요가 있다.[4] 아버지 루이 7세가 첫번째 부인 엘레오노르 다키텐에게서 낳은 딸들이다.[5] 아버지 루이 7세가 두번째 부인 카스티야의 콩스탕스에게서 낳은 딸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