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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7-03 21:43:44

아일리아 소피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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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제국의 아우구스타
아일리아 소피아
Aelia Sophia | Σοφία[1]
파일:아일리아 소피아.jpg
출생 미상
사망 601년
동로마 제국 트라키아 콘스탄티노폴리스
남편 유스티누스 2세
자녀 유스투스, 아라비아
1. 개요2. 생애

[clearfix]

1. 개요

동로마 제국 유스티니아누스 왕조아우구스타, 동로마 황제 유스티누스 2세의 황후.

2. 생애

에페소의 요한이 저술한 교회사에 따르면, 소피아는 유스티니아누스 1세의 황후 테오도라의 조카딸이었다. 그녀는 유스티니아누스 1세 치세 기간에 테오도라의 주선으로 황제의 조카 유스티누스 2세와 결혼했다. 두 부부는 아들 유스투스와 딸 아라비아를 낳았는데, 유스투스는 565년 이전에 사망했다. 565년 11월 13~14일 유스티니아누스 1세가 사망하자, 유스티니아누스의 5촌 조카이자 라지카 전쟁에서 활약한 동명이인 유스티누스가 새 황제로 추대될 가능성이 높아졌다. 그러나 황제의 임종을 지켜본 유일한 대신인 칼리니쿠스는 당시까지 사람들에게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유스티누스를 황제로 추대했다. 유스티누스 장군은 황궁에 초대된 뒤 2인자 자리를 보장받았으나, 다음날 체포되었고, 이집트 행정 총독으로 좌천되었다가 암살되었다. 그의 목은 콘스탄티노폴리스 황궁으로 보내졌다. 에페소의 요한에 따르면, 암살을 주동한 인물은 바로 소피아 황후였다고 한다.

568년, 이탈리아 총독을 역임하고 있던 나르세스 장군이 은퇴했다. 파울 부제에 따르면, 소피아는 여성의 방에서 바느질하는 소녀들의 감독관으로 임명하겠다는 뜻을 나르세스에게 알렸지만, 나르세스는 거부하고 나폴리에서 노년을 보냈다고 한다. 나르세스는 몇년 후 사망하여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보내졌는데, 에페소의 요한은 나르세스가 자신이 설립한 수도원에서 황제 유스티누스 2세와 소피아 황후가 지켜보는 가운데 묻혔다고 기록했다.

유스티누스 2세는 초기엔 정력적으로 국정에 전념하였는데, 금전 관리에 일가견이 있는 소피아 황후에게 국가 재정을 맡겼다. 소피아는 유스티니아누스 대제 시절 오랫동안 전쟁을 치르면서 쌓인 막대한 빚을 갚기 위해 온 힘을 기울였다. 그녀는 필요 이상의 지출을 대폭 삭감하고 세금을 효율적으로 걷어 국고를 충당하려 했으며, 채권자들에게 빌린 돈을 최대한 갚으려 노력했다. 또한 종교 정책에도 상당히 관여했다. 569년, 유스티누스와 소피아는 독일 튀링겐의 왕비 라데군트(Radegund)에게 성십자가의 유물을 보냈으며, 교황 요한 3세에게도 십자가를 보냈다. 그리고 단성론과 정통교회를 화해시키려 노력했지만 끝내 실패하자 단성론 탄압을 이어갔다.

571년, 유스티누스 2세는 외세의 거듭된 침략으로 제국이 쇠약해지자 미쳐버렸다. 에페소의 요한에 따르면, 황제는 광기가 가라앉았을 때 작은 수레에 앉아서 시종에게 수레를 밀고 숙소를 몇 바퀴 돌게 하면서 즐거워했다고 한다. 하지만 광기가 폭발하면 주변 사람을 폭행했고, 심지어 사람을 잡아먹는다는 소문까지 돌았다고 한다. 소피아는 그런 남편을 대신해 제국을 이끌어야 했다. 574년, 사산 왕조의 왕중왕 호스로 1세에게 4만 5천 노미스마타의 돈을 주고 1년간의 휴전에 합의했다.

하지만 황제의 광기가 갈수록 심해져 창밖으로 몸을 던지려하는 지경에 이르자, 소피아는 창살로 궁전의 창문을 봉인하게 하였다. 그녀는 혼자서는 도저히 공무를 감당할 수 없다고 여기고, 원로원과 논의 후 티베리우스 2세를 카이사르로 삼기로 결정, 정신이 잠깐 돌아온 남편을 설득해 574년 12월 7일 공식적으로 카이사르로 승격시켰다. 그러나 소피아와 티베리우스는 곧 갈등을 벌였다. 에페소의 요한과 투르의 그레고리오에 따르면, 소피아는 왕실 경비를 최대한 줄이려 했지만 티베리우스는 군사비를 증액해야 한다고 주장해 숱한 마찰이 일어났다고 한다. 또한 에페소의 요한에 따르면, 소피아는 이 시기에 티베리우스와 결혼하려 했다고 한다. 이는 아우구스타 자리를 최대한 이어가서 권력을 유지하려는 계획이었다. 하지만 아내 이노와 두 딸이 있던 티베리우스는 거절했다. 이에 화가 난 소피아는 이노와 그의 두 딸이 황궁에 한 발짝도 들어오지 못하게 하였다.

578년 10월 5일 유스티누스 2세가 사망하였고, 티베리우스 2세가 유일한 황제가 되었다. 에페소의 요한에 따르면, 소피아는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에우리티키우스를 티베리우스에게 보내 이노와 이혼하는 대신 자신이나 딸 아라비아와 결혼하라고 권했다. 그러나 티베리우스는 거부하고 이노를 아일리아 아나스타시아로 개명해 황후로 삼았다. 결국 소피아는 티베리우스를 제거하기로 마음먹고, 지난날 자신이 살해했던 유스티니아누스 장군의 동생을 추대할 음모를 꾸몄다. 그러나 이 음모는 발각되었고, 티베리우스는 그녀의 궁정을 빼앗고 별궁에 유폐시켰다.

582년 8월 14일 티베리우스 2세가 사망하였고, 마우리키우스가 새 황제로 등극했다. 그 직후 소피아는 유폐에서 풀려나 자유의 몸이 되었다. 601년경에 사망한 것으로 추정되며, 성 사도 교회에 안장된 남편의 무덤에 합장되었다.




[1] 그리스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