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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미상 |
사망 | 404년 10월 6일 |
콘스탄티노폴리스 | |
배우자 | 아르카디우스 |
자녀 | 플라킬리아, 아일리아 풀케리아, 아르키디아, 테오도시우스 2세, 마리니아 |
아버지 | 플라비우스 보토 |
로마 제국의 아우구스타 | |
왕조 | 테오도시우스 왕조 (Theodosian Dynasty) |
전임 | 플라비아 갈라 |
후임 | 아일리아 풀케리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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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제국 테오도시우스 왕조의 아우구스타, 로마 황제 아르카디우스의 황후.2. 생애
아리우스파 교회 역사가 필로스토르기오스가 저술한 <교회사>에 따르면, 에우독시아는 380년대 초 로마 제국 서방의 마기스테르 밀리툼을 역임한 프랑크 전사 플라비우스 보토의 딸이라고 한다. 반면 안티오키아 총대주교인 세드레(Sedre)의 요한은 그녀가 테오도시우스 1세와 맞선 플라비우스 아르보가스트의 누이라고 기록했다. 현대 역사가들은 필로스토르기오스의 기록이 사실일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어머니는 로마인이라고 전해지나, 확실하지 않다. 보토는 388년경 사망했고, 그녀는 콘스탄티노폴리스로 건너가 아버지와 연관이 깊었던 동방의 마게스테르 밀리툼 프로모투스에게 의탁했다. 392년 프로모투스가 사망한 후, 그의 두 아들은 테오도시우스 1세 황제의 두 아들 아르카디우스, 호노리우스와 함께 궁정에서 살았다. 이때 에우독시아도 그들과 함께 살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시기 그녀를 가르쳤던 판소피우스(Pansophius)는 402년경 니코메디아의 주교로 서임되었다.395년 1월 17일, 테오도시우스 1세가 사망했다. 서방과 동방은 각각 호노리우스와 아르카디우스가 맡았다. 그러나 두 사람 모두 어렸기 때문에, 플라비우스 스틸리코가 서방을 책임졌고, 프라이펙투스였던 루피누스가 동방을 책임졌다. 루피누스는 탐욕스러운 인간이어서 막대한 재산을 착복하였다. 여기에 제위에 접근할 기회를 노려 자신의 딸을 아르카디우스와 결혼시키려 했다. 하지만 침실 관리인으로서 역시 아르카디우스에게 영향을 끼치던 환관 에우트로피우스가 이를 저지했다. 그는 루피누스가 원하는 대로 황제의 장인이 되면 자신은 무사하지 못할 거라 여기고, 루피누스가 안티오크에 가서 유명한 관리의 처형을 감독하는 틈을 타서 에우독시아를 황궁으로 들여보냈다. 일부 기록에는 아르카디우스는 이때 그녀를 처음 보았고, 아름다운 외모에 홀딱 반했다고 기술되었다. 그러나 에우독시아는 이전부터 아르카디우스와 함께 지낸 바 있었기에, 이것은 호사가들이 지어낸 이야기일 뿐이다. 아무튼 두 사람은 루피누스가 돌아오기 전에 결혼했다.[1]
아르카디우스는 아름다운 아내를 무척 사랑했고, 두 사람 사이에 플라킬리아, 아일리아 풀케리아, 아르키디아, 테오도시우스 2세, 마리니아가 잇따라 태어났다. 동 시대의 의사 마르티우스에 따르면, 에우독시아는 2명의 사산아도 낳았다고 한다. 하지만 마르티우스는 열성적인 요한 크리소스토모 대주교 지지자로 에우독시아 황후에게 매우 적대적인 입장이었기 때문에, 이 기록이 사실인지는 의심스럽다. 396년 11월 27일, 루피누스는 군대를 사열한 뒤 자신이 공동 황제로 취임하는 데 동의하라고 호소하던 중 병사들에게 살해당했다. 아마도 환관 에우트로피우스가 병사들을 매수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 후 에우트로피우스는 온갖 부패, 횡령, 매관매직을 벌였고, 급기야 399년 집정관에 취임하는 등 절대권력을 구가했다.
그러던 399년 봄 프리지아의 고트족 이주민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동방의 마기스테르 밀리툼 가이나스가 이들을 진압하기 위해 출전했지만, 곧 반란 세력과 합세하고 군대 내부의 로마 병사들을 제거해 현지를 완전히 장악했다. 그는 겉으로는 여전히 아르카디우스를 지지하는 것처럼 가장하면서, 전령을 보내 폭도들이 너무 많아 무력으로 진압하기 어려우니 그들과 협상하겠다고 보고했다. 그러면서 먼저 에우트로피우스를 반란군에게 넘겨야 한다고 했다. 일설에 따르면, 아르카디우스는 이 요구를 듣고 망설였지만, 에우독시아가 강력히 요구해 결국 넘겨주기로 했다고 한다. 에우트로피우스는 소피아 대성당으로 피신해서 요한 크리소스토모의 보호를 받았으나, 몇 달 후 목숨을 살려준다는 조건하에 성당 밖으로 갔다가 키프로스로 유배된 뒤, 가이나스에게 넘겨진 후 "목숨을 살려준다는 조건은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만 통용된다"라는 이유로 칼케돈에서 재판을 받고 처형되었다.
그러나 가이나스의 권세도 오래가지 못했다. 400년 초, 그는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들어가서 황궁을 장악하려는 음모를 꾸몄다. 그러나 그해 여름 민중이 봉기하여 가이나스를 따르는 고트족 병사들을 모조리 죽였다. 가이나스는 남은 병력을 이끌고 아시아로 향했으나 도중에 로마 제국군에게 격파되었고, 다시 도나우 강까지 피신했으나 훈족의 왕 울딘에게 잡혀 죽었다. 울딘은 그의 머리를 베어 아르카디우스에게 선물로 보냈다. 이 일련의 사건에 에우독시아가 깊이 관여했다는 설이 있으나, 확실하지 않다.
에우독시아 황후와 요한 크리소스토모 주교의 대립을 다룬 장면이 그려진 역사화 |
에우독시아가 정치에 얼마나 관여했는지는 확실하지 않으나, 종교 정책에는 확실히 깊게 관여했다. 그녀는 반 아리우스 행사가 수도에서 개최되었을 때 은 십자가를 헌납했으며, 남편과 함께 순교자를 기리는 행사에 참석하기도 했다. 특히 당시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였던 요한 크리소스토모와의 대립이 유명하다. 크리소스토모는 강단에서 여러 차례 사치와 부도덕을 비판했는데, 에우독시아는 이것을 자신에 대한 도전이자 비난으로 받아들였다. 그녀는 총대주교를 파면하기 위해 알렉산드리아 학파의 수장인 키릴루스 등과 연합하였고, 403년 크리소스토모를 전격 파면하고 비티니아로 유배보냈다. 그러자 그를 지지하던 콘스탄티노폴리스 시민들이 봉기했고, 설상가상으로 그날 밤 지진까지 벌어졌다. 그녀는 이에 당황하여 크리소스토모를 복직시켰다.
몇 주 후. 크리소스토모는 소피아 대성당 바깥의 아우구스테움에 에우독시아의 은상을 세우려는 계획에 "시끄러운 은상 제막식 때문에 예배를 볼 수 없다"라는 이유로 반대했다. 이 계획은 3년 전부터 준비 중이었는데, 이제 와서 그걸 거론한 건 황후에 대한 명백한 도전이었다. 이에 분노한 에우독시아는 아르카디우스가 그와 만나는 걸 일절 허용하지 않았고, 두 사람의 갈등은 갈수록 심해졌다. 404년 초, 종교 회의에서 알렉산드리아 인사들과 마찰을 빛은 크리소스토모는 또다시 해임되었다. 이에 부활절에 세례를 준비중이던 2천 명이 콘스탄티노폴리스 목욕탕에서 시위를 벌였고, 군대가 투입되어 이들을 무차별적으로 살육했다. 크리소스토모는 6월 24일 유배를 떠났고, 콘스탄티노폴리스 시민들은 대대적으로 봉기했다. 그날 밤 소피아 대성당은 화재로 파괴되었고, 그 불은 인근의 원로원 의사당까지 태워버렸다. 그로부터 넉달 후인 404년 10월 6일, 에우독시아가 사망했다. 마르티우스에 따르면, 그녀는 이날 아이를 출산할 예정이었으나 신의 저주를 받아 죽었다고 한다.
3. 여담
당대의 많은 역사가들은 에우독시아를 사치스럽고 음탕한 여자라고 기록했다. 일부 기록에 따르면 그녀에게는 여러 연인이 있었는데, 그중 요한네스라는 귀족은 테오도시우스 2세의 생부라고 한다. 또한 에우독시아는 당시 고급 매춘부의 상징이었던, 앞머리를 술 장식처럼 늘어뜨린 차림을 하였다고 한다. 아르카디우스는 그런 그녀를 혐오했고, 두 사람은 결혼 생활 내내 사이가 험악했다고 한다. 하지만 현대의 여러 역사가는 이러한 기록들은 요한 크리소스토모 대주교와 갈등을 벌이다 끝내 추방시킨 그녀를 폄하하려는 의도로 지어진 악성 소문으로 간주한다.로마 디펜스에서 히로인 중 한 명으로 등장. 여기서는 알라리크 토벌전에 지원군을 이끌고 온 호노리우스를 수행하러 동방에 온 주인공과 처음 만나 반하게 되고 그의 아내가 되면서 원역사의 악명은 사라질 가능성이 높아졌으며 이후 아르보가스트의 동생인 자신의 신분을 이용해서 게르마니아쪽 프랑크인 정예부대 설득에도 도움을 주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