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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스티니아누스 왕조 Domus Justinian | ||
518년 ~ 602년 | ||
성씨 | 유스티니아누스 | |
창건자 | 유스티누스 1세 (518~527) | |
주요 황제 | 유스티니아누스 1세 티베리우스 2세 마우리키우스 | |
로마 제국의 왕조 | ||
레오 왕조 | 이라클리오스 왕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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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제국의 세습왕조. 518년부터 602년까지 84년간 로마 제국을 다스렸다. 로마법 대전 반포, 아야 소피아 성당 건립, 서로마 고토 수복 전쟁, 라벤나 총독부와 아프리카 총독부 설립 등 초기 동로마 제국의 역사에서 대중에 잘 알려진 업적 및 사건들이 이 시대에 벌어졌다. 80여 년간 5명의 황제를 배출했는데 부자 상속은 전혀 이뤄지지 않았고, 숙질 계승이 2번, 장인-사위 계승이 2번씩 이뤄진 것이 특징이다.2. 역사
- 자세한 내용은 각 황제의 개별 항목 참조
2.1. 유스티누스 1세(518~527)
스코페 출신의 트라키아인으로, 본명은 이스토크였다. 10대에 군대에 입대한 뒤 여러 직책을 거쳐 아나스타시우스 1세의 엑스쿠비토룸(근위대장)으로 발탁되었다. 518년 7월 9일 황제가 죽자 근위대를 동원하여 황궁을 장악한 뒤, 시민들에게 돈을 뿌려 환심을 사고 원로원의 동의를 얻어내면서 다음날 황위에 올랐다. 하지만 그리스어를 거의 말하지 못하고 문맹이기까지 해서, 머리가 매우 좋고 학식이 뛰어난 조카 플라비우스 페트루스 사바티우스를 수도로 소환하여 유스티니아누스라는 이름을 하사한 뒤, 제국 전반의 행정을 돌보게 하였다. 519년 레오 1세 때부터 50년간 끌어온 아카키오스 분열을 종결하였으며, 사산 왕조와 동로마 제국간의 국경을 따라 요새들을 광범위하게 설치했다. 526년 지진으로 파괴된 안티오키아 복구 작업을 진두지휘하다가 건강이 악화되자 조카에게 황위를 물려주겠다고 밝히고 527년 8월 1일에 사망했다.2.2. 유스티니아누스 1세(527~565)
스코페 근방의 지방 도시 타우레시움(Tauresium) 출신의 트라키아인. 본명은 플라비우스 페트루스 사바티우스였다. 삼촌 유스티누스가 아나스타시우스 1세의 근위대장으로 발탁된 뒤 수도로 와서 유스티니아누스라는 이름을 부여받고 다방면에서 공부하여 탁월한 지식인이 되었다. 이후 황위에 오른 삼촌을 보좌하여 국정을 실질적으로 이끌었고, 525년 서커스 단원 출신 테오도라와 결혼했다. 527년 8월 1일 삼촌의 뒤를 이어 황위에 오른 뒤, 역사에 길이남을 치적을 쌓기 시작한다. 우선 529년 4월 로마법 대전을 공표하였고, 사산 왕조와의 전쟁을 지속적으로 치른 끝에 532년 9월 호스로 1세와 '영원한 평화 조약'을 체결했다. 그해 니카의 반란이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발발하면서 황위에서 축출될 위기에 몰렸지만 벨리사리우스와 나르세스의 활약으로 진압하고, 폭동으로 파괴된 아야 소피아를 재건하였으며, 절대권력을 확립하였다.서기 535년 벨리사리우스를 파견해 북아프리카의 반달 왕국을 공격하게 한 것을 시작으로, 장장 20여 년간 서로마 고토 수복 전쟁을 단행했다. 반달 왕국의 경우에는 벨리사리우스의 활약으로 순조롭게 공략하고, 북아프리카를 제국의 영역으로 복귀시키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이탈리아의 동고트 왕국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한때는 벨리사리우스의 탁월한 활약으로 이번에도 순조롭게 정복하는 듯 했으나, 호스로 1세가 평화 협약을 파기하고 대대적으로 쳐들어오는 바람에 군대를 동방으로 돌려야 했으며, 설상가상으로 페스트가 제국 전역에 창궐하면서 막대한 인명 손실을 입고 세수가 급격히 줄어들어 병사들에게 급료를 지급하기도 힘든 지경이 되고 말았다. 동고트 왕국의 명군이자 명장 토틸라는 이 틈을 타 대대적인 공세를 개시, 빼앗겼던 영토를 대부분 수복하였다. 하지만 552년 안정을 되찾은 제국의 든든한 지원을 받은 나르세스 장군이 이탈리아로 진격, 타기나이 전투에서 토틸라를 패사시키고 뒤이어 프랑크 왕국과의 전쟁에서도 승리하면서 이탈리아 수복을 완수했다. 또한 552년 리베리우스가 이끈 로마군이 카르타헤나에 상륙한 뒤 안달루시아 일대를 공략하였다.
이 일련의 전쟁으로, 동로마 제국은 이탈리아, 북아프리카, 이베리아 남부 일대를 수복하였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막대한 인명과 재정을 쏟아부어야 했고, 재위 말년에는 아바르족의 습격을 물리칠 여력이 부족해 연공금을 납부해야 했다. 이로 인해 재정이 바닥을 드러내면서, 동로마 제국은 유스티니아누스 황제가 사망한 뒤 쇠퇴의 길을 걸었다.
2.3. 유스티누스 2세(565~578)
둘키디오스와 유스티니아누스 1세의 누이 비길란티아 사이에서 태어난 황족으로, 유스티니아누스 1세 사후 대신 칼리니쿠스의 추대로 황위에 올랐다. 그러나 즉위했을 때는 재정이 바닥을 드러냈기 때문에 긴축 정책을 강제로 실시해야 했고, 아바르족과 사산 왕조에게 바칠 연공금을 더 이상 지불하지 못하겠다고 하였다. 그러자 아바르족과 사산 왕조는 대대적으로 발칸 반도와 동방을 침략하였고(동로마-아바르 전쟁), 제국은 이로 인해 큰 피해를 입고 더 많은 연공금 지불을 약속해야 했다. 그 사이, 랑고바르드족이 이탈리아로 쳐들어가 유스티니아누스 1세가 기껏 수복했던 이탈리아 대부분을 빼앗았다. 단지 라벤나, 나폴리, 칼라브리아, 시칠리아, 베네치아 등 주요 도시 및 남부의 일부 도시만이 제국의 치하에 남아 있었고, 로마 시는 랑고바르드족의 거듭된 침략에 시달려야 했다. 유스티누스는 이 일련의 상황에 절망한 나머지 미쳐버렸고, 황후 아일리아 소피아와 섭정 티베리우스 2세가 대신 통치해야 했다.2.4. 티베리우스 2세(578~582)
황실 근위대인 엑스쿠비토레스 병단의 코메스를 역임하면서 유스티누스 2세와 친분을 맺었고, 아바르족과의 전쟁을 진두지휘했다. 574년 정신병에 걸린 황제를 대신하여 황후 아일리아 소피아와 함께 제국을 통치했다. 578년 10월 5일 유스티누스 2세가 사망한 뒤 황위에 올랐다. 소피아는 티베리우스 2세와 결혼하려 했지만, 티베리우스는 이미 아내 이노가 있었기 때문에 거절하고 이노를 아일리아 아나스타시아로 개명하고 황후로 삼았다. 소피아는 분노하여 쿠데타를 꾀하였지만, 곧 발각되어 수도원으로 보내졌다.티베리우스는 즉위 후 유스티누스 2세 치세 내내 밀리기만 했던 전황을 회복하는 데 성공하였다. 마우리키우스 등 유능한 장군들이 동방 전선에서 활약하여 사산 왕조를 격퇴하여 전선을 안정시켰고, 북아프리카에서도 겐나디우스 1세가 베르베르인들의 반란을 토벌했다. 또한 라벤나에 추가 병력을 파견하여 랑고바르드족이 더 이상 영토를 빼앗지 못하게 하였다. 그러나 전쟁이 지속되면서 재정에 큰 부담이 된 데다, 티베리우스가 인심을 사기 위해 돈을 펑펑 쓰는 바람에 파탄 지경에 이르렀다. 그러던 582년 8월 14일 숨을 거두면서, 사위 마우리키우스를 차기 황제로 지명했다.
2.5. 마우리키우스(582~602)
카파도키아 아라비수스 태생의 군인으로, 동방 전선에서 탁월한 활약을 선보여 승진을 거듭하다 577년 동방군 총사령관으로 부임했다. 582년 티베리우스 2세의 딸 콘스탄티나와 결혼하였고, 그해 8월 14일 차기 황제로 지명을 받아 43세의 나이에 황위를 계승했다. 당시 그가 해결해야 할 문제는 산더미였다. 거듭된 전쟁과 티베리우스 2세의 사치로 인해 재정은 파탄 지경에 이르렀고, 이탈리아 전선은 여전히 위태로웠으며, 사산 왕조는 끈질기게 침략했다. 여기에 발칸 반도에서도 아바르족과 슬라브족이 밀고 내려와 약탈과 살육을 자행했다.마우리키우스는 이 많은 문제들을 착실하게 해결했다. 먼저, 584년에 라벤나 총독부를 창설하고 뒤이어 아프리카 총독부를 세웠다. 이 두 총독부의 총독들은 군사 뿐만 아니라 내정 관리까지 도맡으면서, 자발적으로 해당 지역을 다스릴 권한이 부여되었다. 다만 황제에게 보고서를 정기적으로 보내야 했고, 황제가 파견한 관리들의 조사를 성실히 받아야 했다. 총독들은 막강한 권한을 활용하여 랑고바르드족과 베르베르인 등 외적의 침략에 자발적으로 대처했고, 그 결과 혼란스럽기 짝이 없던 서방 전선이 안정화되었다.
588년, 사산 왕조에서 대규모 내란이 일어났고, 호스로 2세가 바흐람 추빈에게 축출된 뒤 마우리키우스에게 자신을 복위시켜달라고 간청했다. 마우리키우스는 이를 호기로 보고, 호스로 2세를 적극적으로 도왔다. 그 결과 호스로 2세는 591년 크테시폰을 탈환하고 바흐람 추빈을 몰아냈다. 이후 사산 왕조는 아르메니아와 조지아를 동로마 제국에 넘겼고, 그동안 정기적으로 지급받던 공물을 더 이상 받지 않기로 했다. 이리하여 동방 전선은 동로마 제국에 매우 유리한 환경으로 안정되었다.
서방과 동방을 안정시키는 데 성공한 뒤, 마우리키우스는 발칸 반도에서 날뛰는 아바르족과 슬라브족을 향해 대대적으로 반격했다. 591년부터 반격을 개시한 마우리키우스는 592년에 시르미움을 회복하였고 593년에는 아바르 - 슬라브 - 게피데 연합군을 격파한 후 다뉴브 강을 도하하여 북진하였다. 599년까지 다뉴브 강 이남의 야만인들은 일소되었고, 602년에 왈라키아에서 슬라브족을 섬멸했다.
한편, 마우리키우스는 긴축 정책을 실시했다. 그는 주요 행사에 더 이상 돈을 투자하지 않았고 시민들에게 보너스를 지급하는 걸 중단했다. 또한 국고가 탕진될 지경에 이르자 지출을 줄이기 위해 군 감축을 감행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잡음이 일어났다. 588년에 모든 군량의 4분의 1을 감축해 동방군이 폭동을 일으키게 만들었고 599년에는 아바르족이 잡아간 제국군 포로 1만 2천 명의 몸값을 지불하는 것을 거부해 포로들이 모조리 학살당하는 비극을 초래했다. 이에 시민과 군은 반감을 품었고, 602년 포카스가 반란을 일으키자 적극적으로 호응했다.
마우리키우스는 사산 왕조로 망명하려 했다가 도중에 체포되었고, 602년 11월 27일 다섯 아들과 함께 처형되었다. 이리하여 유스티니아누스 왕조는 무너졌고, 포카스가 집권했다. 그러나 포카스는 폭정을 일삼으며 동로마 제국이 사산 왕조의 침략과 연이은 반란으로 쇠락하게 만들었고, 610년 10월 이라클리오스가 포카스를 처단하고 이라클리오스 왕조를 창건한다.
3. 역대 황제
대수 | 이름 | 재위 기간 |
1대 | 유스티누스 1세 | 518년 7월 10일 ~ 527년 8월 1일 |
2대 | 유스티니아누스 1세 | 527년 8월 1일 ~ 565년 11월 14일 |
3대 | 유스티누스 2세 | 565년 11월 14일 ~ 578년 10월 5일 |
4대 | 티베리우스 2세 | 578년 10월 5일 ~ 582년 8월 14일 |
5대 | 마우리키우스 | 582년 8월 14일 ~ 602년 11월 27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