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로마-아바르 전쟁 영어: Avar–Byzantine wars | ||
시기 | 568년 ~ 626년 | |
장소 | 발칸반도 | |
원인 | 아바르 칸국의 팽창 욕구. | |
교전국 | 동로마 제국 안테스족 | 아바르 칸국 사비르족 쿠트리구르족 슬라브족 스칼베니족 불가르족 사산 왕조 |
지휘관 | 유스티누스 2세 티베리우스 2세 마우리키우스 이라클리오스 프리스쿠스 페트루스 코멘티올루스 필리피쿠스 세르지오 1세 보노스 테오도로스 | 바얀 1세 바얀 2세 호스로 2세 샤흐르바라즈 샤힌 바흐만자데간 |
결과 | 아바르 칸국의 쇠락 동로마 제국의 발칸 반도 내륙 통제력 붕괴 슬라브족의 발칸 반도 내륙 진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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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서기 568~626년, 아바르 칸국과 동로마 제국의 전쟁.
2. 배경
아바르족의 기원은 불분명하다. 크리스토프 바우머(Christoph Baumer) 등 많은 역사가들은 그들이 몽골에서 발흥한 유연 제국에서 유래했으며, 유연이 돌궐에 의해 멸망하던 시기인 6세기경에 서쪽으로 이주했다고 추정한다. 반면 피터 벤자민 골든(Peter Benjamin Golden)을 비록한 일부 학자들은 튀르크 계열의 오구르족에서 유래했다고 주장했으며, 또다른 학자들은 아랄해 지역에서 우아르족과 시오니테스족이 결성한 연합체에서 유래했다고 추정했다. 한편, 캐나다의 중국 사학자 에드윈 조지 풀리블랭크(Edwin George Pulleyblank)는 한나라 시기 허베이성, 랴오닝성, 산시성, 베이징 인근과 내몽골 등에 거주한 유목민이었던 오환족에서 유래했다고 추정했다.로마 역사에서 아바르족에 대한 최초의 언급은 448년 훈족의 왕 아틸라에게 평화 협상을 요청하는 사절단의 일원이었던 프리스쿠스가 훗날 집필한 저서 <비잔티움의 역사(Ἱστορία Βυζαντιακή)>에 있다. 프리스쿠스에 따르면, 아바르는 "식인 그리폰"을 피해 도망친 이들에 의해 축출된 뒤 사비르족을 밀어냈고, 사비르족은 다시 사라구르족과 오노구르족을 밀어냈다고 한다. 하지만 많은 학자들은 이 아바르족이 6세기경에 아바르 칸국을 결성한 아바르족과 같은 민족이 아니라고 본다.
북부 캅카스 일대에 거주하던 아바르족은 557년 동로마 제국에 사절을 보내 유스티니아누스 1세 황제와 협상한 끝에 매년 제국으로부터 금을 받는 대가로 동로마 제국의 영역에 속한 다뉴브 강 이남의 발칸 반도를 침략하는 이민족들을 물리쳐주기로 합의했다. 그 후 그들은 지속적인 원정을 통해 쿠트리구르족과 사비르족을 정복했으며, 안테스족을 격파했다. 562년, 아바르족은 다뉴브 강 하류 유역에서 흑해 북쪽의 대초원까지 이어지는 영역을 확보한 아바르 칸국을 건설했다. 서기 6세기 중반에 활동한 역사가 '수호자 메난데르(Menander the Guardsman)'에 따르면, 괵튀르크족 왕자 툼간(Tamgan)이 565년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사절단을 보내 아바르족과 동맹을 맺은 것에 항의했다고 한다. 이들은 아바르족을 "탈출한 튀르크인 노예"라고 비하하며, 이들과 손잡는 건 제국에게도 이롭지 않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임종을 눈앞에 둔 황제는 이들의 경고를 무시했다.
아바르 칸국은 초기엔 동로마 제국의 후원을 받으며 도나우 강 이북의 이민족들을 정복했고, 그 다음엔 북서쪽의 게르마니아로 진격했다. 그러나 프랑크 왕국이 이를 저지하자, 이들은 562년 동로마 제국 쪽으로 눈길을 돌려 트라키아를 침공하여 약탈을 자행했다. 565년 11월 14일 유스티니아누스 1세가 사망하고 유스티누스 2세가 동로마 제국의 새 황제로 등극하자, 아바르 칸국은 사절단을 콘스탄티노폴리스에 파견해 황제 즉위를 축하하면서 선황제가 자기들에게 주겠다고 약속한 금을 달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유스티누스 2세는 아바르족을 신용할 수 없는 족속이라고 여겼고, 재정이 파탄 지경에 이른 상황에서 보조금 지급을 지속하는 건 무리라고 판단하고 사절단의 요구를 거부했다. 이후 그는 유스티니아누스가 보조금 지불을 약속한 다른 부족들과 사산조 페르시아에게도 보조금 지불을 거부했다.
그러던 중 랑고바르드족의 지도자 알보인이 아바르 칸국에 사절을 보내 자신과 함께 게피드 왕국을 협공해주면 그들의 땅을 넘기겠다고 제안했다. 아바르 칸 바얀 1세는 흔쾌히 수락하고 랑고바르드족과 연합해 게피드족을 협공해 567년경 완승을 거두었다. 이후 바얀 1세는 랑고바르드족을 압박한 끝에 그들이 이탈리아로 이동하게 만들고 게피드족과 랑고바르드족이 치열한 경쟁을 벌였던 판노니아를 동로마 제국에 귀순한 시르미움을 제외하고 대부분 장악했다. 그 후 바얀 1세가 동로마 제국을 향한 공세를 본격적으로 벌이기 시작하면서, 장장 58년간 이어질 전쟁의 막이 올랐다.
3. 전개
3.1. 유스티누스 2세와 티베리우스 2세 시기의 전쟁
568년, 아바르족은 동로마 제국에 귀순한 시르미움을 포위 공격했지만 공성전 역량이 충분하지 않았기 때문에 공략에 실패했다. 여기에 아바르 칸국에 복속된 유목민족인 쿠트리구르족 10,000명이 동로마 제국의 영역인 달마티아를 침략해 심각한 약탈을 자행했다. 유스티누스 2세는 황실 친위대인 엑스쿠비토레스 병단의 코메스를 맡고 있던 티베리우스를 급히 파견해 아바르 칸국과 평화 협상을 하도록 했다. 티베리우스는 여러 아바르족 족장들과 협상한 끝에 그들이 데려갔던 포로를 제국군이 확보한 아바르족 포로와 교환하고 아바르족이 발칸 반도의 동로마 제국 영토에 정착하는 것을 허용하기로 했다. 그러나 유스티누스 2세는 아바르 칸 바얀 1세의 가족을 인질로 보내야 한다고 주장했고, 바얀 1세가 이를 거부하면서 전쟁이 재개되었다.570년, 티베리우스는 트라키아에서 아바르족 군대를 격파하고 콘스탄티노플로 돌아왔다. 그러나 570년 말 또는 571년 초, 그는 또다시 승리를 쟁취하려고 아바르족 군대와 맞붙었으나 대패하고 가까스로 죽음을 모면했다. 더이상 전쟁을 벌여봐야 소용 없겠다고 판단한 티베리우스는 유스티누스와 조약 조건을 의논하려는 아바르족 특사들에게 호위병을 제공했다. 이때 특사들이 지역 주민들에게 공격당해 물품을 강탈당하고 도와달라고 호소하자, 티베리우스는 책임자를 추적해 훔친 물건을 돌려주게 했다. 이후 유스티누스는 8만 솔리두스를 아바르족에게 매년 넘겨주는 조건으로 평화 조약에 합의했다.
그 후 아바르족은 574년 시르미움을 한 차례 습격한 것을 제외하고 동로마 제국의 영토를 위협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579년, 새 황제 티베리우스 2세가 이탈리아와 이베리아 반도의 로마 영토를 지키기 위해 병력을 파견하느라 발칸 반도 방면의 병력이 줄어들자, 바얀 1세는 다시 한 번 공세를 가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동로마 제국이 제때에 연공금을 지불하지 않았다는 명목을 내세워 시르미움을 포위해 581년 또는 582년에 함락에 성공했다.
3.2. 마우리키우스 시기의 전쟁
582년 8월 14일 티베리우스 2세가 사망한 후 황위에 오른 마우리키우스는 사산 왕조의 지속적인 침략에 맞서고자 주력군을 동방 전선으로 파견했다. 이로 인해 다뉴브 강 유역의 동로마 수비대가 약화되자, 아바르족은 피지배 민족인 슬라브족, 불가르족 등을 총동원해 대대적인 공세를 준비했다. 583년, 바얀 1세는 동로마 제국에 공물을 10만 솔리두스로 늘리면 공격하지 않겠다고 제의했다. 마우리키우스는 이를 받아들이면 아바르족이 추가로 요구할 게 분명하다고 여기고 공물을 더 이상 바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이에 바얀 1세는 대대적인 공세에 착수해 싱기두눔을 공략하고 뒤이어 아우구스타이(Augustae), 비미나키움(Viminacium)을 공략했으며, 안키알루스(Anchialus)를 포위했다.로마 사절단이 안키알루스 인근에서 바얀 1세를 찾아와 평화 협상을 요청했다. 바얀 1세는 병력을 좀더 끌어모아 더 많은 영토를 정복할 거라며 고압적인 태도를 보였지만, 안키알로스가 좀처럼 함락되지 않자 마음을 바꿔 협상에 임했다. 584년 마우리키우스는 바얀 1세가 처음에 요구한 대로 10만 솔리두스를 매년 공물로 바치기로 동의했다. 그러나 아바르 칸국에 귀속되었던 슬라브족은 이 협약에 별다른 방해를 받지 않고 아테네 인근 아티카와 펠로폰네소스 반도까지 쳐들어가서 약탈을 자행했다. 584/585년에는 트라키아를 습격하고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아나스타시우스 장성까지 이르렀다가 코멘티올루스 장군에게 격파되었다. 마우리키우스는 수도를 지킨 코멘티올루스에게 마기스테르 밀리툼 프라 에센탈리스(magister militum praesentalis)이란 직책을 내렸고, 얼마 후엔 파트리키우스 칭호를 하사했다.
586년, 아바르족은 평화 협약을 무시하고 다뉴브 강 유역의 요새화된 도시인 라티아리아(Ratiaria)와 오에스쿠스(Oescus)를 파괴하고 뒤이어 테살로니키를 포위했다. 코멘티올루스가 지휘하는 로마군은 수적으로 열세인 상황에서 전면전은 승산이 없다고 판단하고, 유격전과 야간 습격을 벌여서 적군을 괴롭히는 작전을 구사했다. 이로 인해 식량 보급이 힘들어진 데다 테살로니키가 좀처럼 함락될 기미가 없자, 바얀 1세는 본국으로 후퇴했다. 587년 안키알루스에서 10,000명의 정예병을 집결한 코멘티올루스는 또다시 다뉴브 강을 넘어 발칸 반도를 휘젓고 있던 바얀 1세를 흑해 연안의 토미스에서 습격했다. 바얀 1세는 이로 인해 목숨을 잃을 뻔했지만 부하들의 분전 덕분에 가까스로 목숨을 건지고 석호 모양의 해안을 통해 달아났다. 코멘티올루스는 다시 발칸 반도 남쪽 경사면에서 바얀 1세를 습격하려 했지만, 매복군 간의 의사소통이 잘못되어 병사들이 "도망쳐라"는 명령이 내려진 줄 알고 달아나는 바람에 실패했다.
588년 동방 전선으로 보내진 코멘티올루스를 대신해 다뉴브 전선을 맡은 프리스쿠스는 국고가 바닥나는 상황을 만회하기 위해 군대 급료를 4분의 1로 삭감한다는 마우리키우스 황제의 칙령에 분개한 병사들의 반란에 직면했다. 그는 가까스로 목숨을 건져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달아났고, 병사들은 포에니케 공작 게르마누스를 지도자로 선출하고 마우리키우스에게 대적했다. 하지만 마우리키우스가 계획을 취소하고 군심을 수습한 덕분에 반란은 곧 진압되었고, 프리스쿠스는 다시 다뉴브 전선을 맡아 아바르족에 맞서 원정을 벌이는 임무를 맡았다. 그러나 원정군은 페린투스에서 아바르족의 측면 공격으로 패퇴했고, 아바르족은 치랄룸(Tzirallum)으로 퇴각한 프리스쿠스를 포위했다.
7세기 역사가인 시모카타의 테오필락토스에 따르면, 프리스쿠스는 한 병사를 시켜 마우리키우스가 프리스쿠스에게 보낸 것으로 위조한 편지를 들고 아바르족에게 일부러 체포되게 했다. 편지의 내용은 황제가 친히 해군을 동원하여 아바르 칸국 본토를 급습하려 하니 좀더 버티라는 것이었다. 바얀 1세는 이 편지가 사실이라고 믿고 서둘러 철수하기로 마음먹었다. 이후 프리스쿠스와 협상한 끝에 연간 공물을 다시 받는 대가로 평화 협약을 맺었다고 한다. 12세기 신학자이자 역사가인 시리아인 성 미하일에 따르면, 동로마 제국은 연간 60,000 솔라두스를 아바르 칸국에 지급하기로 했다고 한다.
590년, 마우리키우스는 안키알루스 등 트라키아의 여러 도시를 방문해 재건을 감독하고 군대와 지역 주민들의 사기를 높였다. 그리고 591년 마우리키우스의 지원 덕분에 샤한샤에 복위할 수 있게 된 호스로 2세가 아르메니아 대부분을 동로마 제국에 헌납하고 전쟁을 종식하면서, 동로마 제국은 마침내 발칸 전선에 집중할 수 있게 되었다. 마우리키우스는 동방 전선에서 정예병을 차출해 다뉴브 전선에 투입시켜서 전력을 보강한 뒤 592년부터 반격을 개시했다. 이해에 그의 군대는 싱기두눔과 시르미움을 탈환했다. 또한 로마 분견대는 모이시아에 침입한 슬라브족 약탈자들을 토벌하는 임무를 착실하게 수행해 로마 도시들간의 교통을 재구축했다.
593년, 프리스쿠스는 다뉴브 강 연안도로스톨론으로 진군한 뒤 강을 건너려고 준비하던 슬라브 부족들을 야간 기습해 전멸시켰다. 이후 다뉴브 강을 도하한 뒤 그해 가을까지 현재 루마니아 문테니아의 여러 늪과 숲에서 슬라브족들을 여러 차례 격파했다. 그러나 마우리키우스가 다뉴브 강 북부 강둑에서 겨울을 보내라는 지시를 내리자, 병사들이 반란을 일으키려 했다. 프리스쿠스는 황제의 명령을 거부하고 도나우강 남쪽의 오데소스(현재 비르나)에서 겨울을 보냈다. 로마군이 물러나자, 593년 겨울 슬라브족이 모이시아와 마케도니아 속주로 쳐들어가 도브루자의 아퀴스, 스쿠피, 잘다파 마을을 파괴했다. 여기에 프리스쿠스가 마우리키우스의 승인도 받지 않은 채 바얀 1세에게 보상금을 지급받는 대가로 5,000명의 아바르 포로들을 돌려보내고 휴전 협상을 추진하자, 마우리키우스는 격분해 프리스쿠스를 해임하고 형제 페트루스를 새 지휘관으로 선임했다.
594년 새 지휘관에 부임한 페트루스는 모이시아로 재차 쳐들어온 슬라브족과 맞붙었다. 초기에는 슬라브족에게 패배했지만, 군대를 수습한 뒤 마르키아노플리스에서 슬라브족을 격파하고 노바에(현재 스비슈토프)와 흑해 사이의 다뉴브 강을 순찰했다. 그해 8월 말에 노바에 서쪽에서 다뉴브 강을 도하한 뒤 새로운 약탈 원정을 벌이려던 적을 격파했다. 595년 마우리키우스의 용서를 받고 다뉴브 상류의 또다른 로마군 지휘관으로 부임한 프리스쿠스는 다뉴브 강의 로마 함대와 연합해 싱기두눔을 공략하려던 바얀 1세의 군대를 효과적으로 격퇴했다. 이에 바얀 1세는 달마티아로 이동한 후 프리스쿠스와의 직접적인 대결을 피하면서 여러 요새를 약탈했다. 로마 병사들이 구석진 곳인데다 빈곤해서 약탈물을 챙기기 어려운 달마티아로 가서 목숨 바쳐 싸우려 하지 않자, 프리스쿠스는 소규모 분견대만 파견해 아바르족의 진군을 방해하고 적이 확보한 전리품 일부를 탈취하는 정도로 그쳤다.
596년, 바얀 1세는 프랑크 왕국으로 눈길을 돌렸다. 그가 이끄는 아바르군은 드라바 강에서 바이에른군을 격파한 뒤 튀링겐을 침공해 심각한 약탈을 자행했고, 프랑크인들로부터 막대한 조공을 확보한 뒤 귀환했다. 이 성과에 고무된 아바르족은 597년 가을 도나우강을 기습 도하한 뒤 토미스에서 프리스쿠스의 군대를 포위했다. 그러나 598년 코멘티올루스가 구원군을 이끌고 토미스에서 30km 떨어진 지키디바에 이르자, 지난날 자신을 상대로 탁월한 활약을 선보였던 코멘티올루스를 경계한 바얀 1세가 코멘티올루스부터 무찌르기로 하면서 토미스 포위가 풀렸다. 프리스쿠스는 모종의 이유로 코멘티올루스로 향하는 아바르군을 요격하지 않았고, 코멘티올루스는 이아트루스로 후퇴한 뒤 고지대에서 아바르족에 맞섰으나 끝내 패배를 면치 못하고 하이무스 산맥 남쪽으로 퇴각했다.
바얀 1세는 기세를 이어가 아드리아노폴리스와 콘스탄티노폴리스 사이에 있는 아르카디오폴리스를 포위 공격했으나, 전염병이 창궐하는 바람에 7명의 아들을 비롯한 다수의 병력을 상실했다. 마우리키우스는 코멘티올루스를 일시적으로 해임하고 필리피쿠스로 대체하는 한편, 킵소스에서 병사들을 소환해 콘스탄티노폴리스 서쪽의 아나스타시우스 성벽을 지키게 했다. 그러면서 바얀 1세에게 평화 협상을 제의하면서 여러 아바르 귀족들을 매수했다. 바얀 1세는 아들들을 전염병으로 잃은 것에 깊은 충격을 받은 데다 귀족들이 철수를 종용하자 이를 받아들이기로 하고, 평화 협정을 맺은 뒤 돌아갔다. 그 직후, 마우리키우스는 협약을 파기하고 프리스쿠스와 코멘티올루스에게 아바르 칸국에 대한 대대적인 공세를 벌일 준비를 하라고 명령했다.
599년, 프리스쿠스와 코멘티올루스는 다뉴브 강 하뉴의 비미나키움에서 강을 도하한 뒤 아바르족을 상대로 대승을 거두었다. 그후 프리스쿠스는 아바르 칸국의 중심지인 판노니아 평야지대로 진격했고, 코멘티올루스는 다뉴브강 인근에 남아서 보급을 담당했다. 프리스쿠스는 아바르족과 슬라브족이 발칸 반도에서 했던 것과 거의 같은 방식으로 티서 강 동쪽의 광대한 지역을 황폐화시켰고, 여러 아바르 부족과 게피드족을 학살했다. 599년 가을, 프리스쿠스는 수십년 동안 사용되지 않았던 트라야누스 관문을 재개통해, 발칸 반도 도시들간의 연락망을 정상화시켰다. 그러나 마우리키우스 황제가 아바르족이 잡아간 제국군 포로 1만 2천 명의 몸값을 지불하는 것을 거부해 포로들이 모조리 학살당하는 비극을 초래했다.
601년, 페트루스가 이끄는 로마군이 티사 강으로 진격해 아바르 칸국의 세력을 다뉴브 강 삼각주로부터 몰아냈다. 이 덕분에 로마 다뉴브 함대가 시르미움과 싱기두눔으로의 접근을 유지할 수 있게 했다. 602년 페트루스는 왈라키아에서 아바르-슬라브 연합군을 상대로 대승을 거둬 2만여 명을 사살했고, 동로마 제국와 동맹을 맺은 안테스족이 아바르 칸국의 영역을 침범해 심각한 약탈을 자행했다. 여기에 여러 아바르 부족이 대규모 반란을 일으키면서, 아바르 칸국은 해체될 위기에 직면했다. 심지어 일부 아바르족은 동로마 제국에 귀순하기도 했다. 이렇게 아바르 칸국이 지리멸렬해지면서, 다뉴브 강 방어선을 성공적으로 재구축하고 왈라키아와 판노니아에서 아바르족을 몰아낸다는 마우리키우스의 목표가 현실화되는듯 했다.
그러던 602년 가을, 마우리키우스 황제는 원정의 성과를 더욱 많이 거두고 귀환에 필요한 비용을 절약하기 위해 다뉴브 강 남쪽의 겨울 숙영지로 돌아오지 말고 판노니아에서 겨울을 보내라는 지시를 내렸다. 593년 프리스쿠스가 같은 명령을 황제로부터 접수받았으나 병사들이 반발하자 명령을 거부하고 귀환한 적이 있었지만, 마우리쿠스의 형제인 페트루스는 황제의 명령에 복종했다. 병사들은 이에 격분해 포카스를 새 황제로 내세우며 반란을 일으켰고, 마우리키우스에게 반감을 품고 있던 콘스탄티노폴리스 시민들이 호응하면서 결국 마우리키우스 정권은 붕괴되었다. 이리하여 동로마군의 아바르 칸국에 대한 공세는 중단되었고, 아바르 칸국은 멸망 위기에서 가까스로 벗어날 수 있었다.
3.3. 이라클리오스 시기의 전쟁
마우리키우스를 무너뜨리고 새 황제에 오른 포카스 황제는 자신을 복위시켜줬던 마우리키우스의 원수를 갚겠다는 명분을 내세워 쳐들어온 호스로 2세의 사산 왕조군에게 연전연패했고, 이로 인해 동로마 제국의 동방 전선은 매우 위급해졌다. 반면, 발칸 전선은 포카스의 치세 내내 평온했다. 아바르 칸국이 마우리키우스 황제의 대대적인 원정으로 인해 막심한 피해를 입고 반란에 휘말렸기 때문에 전쟁을 재개할 여력이 되지 않기도 했을 테지만, 포카스를 황제로 옹립한 발칸 방면군의 충성도가 강력했기 때문에 변고가 일어날 여지가 적었기 때문인 것으로 추정된다. 포카스는 아바르족에게 상당한 공물을 보내 평화 협약을 맺고 발칸 전선군을 동방으로 보내 사산 왕조의 공세를 최대한 막아보려 노력했다. 몇몇 사료에서는 슬라브인들이 그의 치세에 테살로니카를 습격했다고 기술되었지만 다른 사료와 교차검증되지 않기에 신빙성은 의심된다.그러던 614년, 아바르 칸국의 새로운 칸인 바얀 2세는 포카스를 몰아내고 제위에 오른 이라클리오스가 사산 왕조군을 상대로 연전연패한 틈을 타 달마티아를 습격해 달마티아의 수도 살로나를 공략하고 그곳에 살던 주민들을 노예로 삼았다. 뒤이어 니스를 공략한 뒤 발칸 반도로 깊숙이 침투해 여러 마을과 농촌들을 파괴했으며, 슬라브 해군은 펠로폰네소스 반도와 에게 해 섬까지 침략했다. 615년 아바르 족이 유스티아나 프리마와 살로나, 나이소스, 세르디카, 노바에를 공략하고 철저하게 파괴했다. 테살로니카 역시 615년과 617년에 2차례 포위되었지만, 동로마 해군의 물자 지원 덕분에 함락을 모면했다. 619년 마르마라 해 연안인 헤르클레아 페린토스에서 동로마 해군이 슬라브 해군에게 격파당했고, 623년 슬라브 해군이 크레타를 습격해 심각한 파괴를 자행했다.
이라클리오스는 가뜩이나 사산 왕조군이 대대적으로 쳐들어와서 시리아, 이집트, 소아시아 상당수를 상실한 상황에서 아바르 칸국과 전쟁을 이어가는 건 무익하다고 판단했다. 그는 아바르 칸국에 막대한 연공금을 바침으로써 평화 협약을 이루는 데 성공한 뒤, 사산 왕조와의 전쟁에 전력을 기울였다. 이후 이라클리오스의 활약으로 전세가 갈수록 불리하게 돌아가자, 사산 왕조 샤한샤 호스로 2세는 아바르 칸국에 사절을 보내 동로마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합동 공격하자고 제안했다. 마침 동로마 제국을 정복하고 발칸 반도를 완전히 제패하기 위한 원정을 기획하고 있던 바얀 2세는 이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626년, 아바르족과 슬라브족 연합군이 트라키아로 진입한 뒤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접근하면서 발렌스 수로를 파괴했다. 여기에 샤흐르바라즈가 이끄는 페르시아군은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보스포루스 해협 건너편 도시인 칼케돈으로 이동하여 바다를 건너려 했다. 그러나 동로마 해군이 보스포루스 해협을 통제했기 때문에 바다를 건널 수 없었고, 공성 능력이 탁월했던 사산 왕조군의 지원을 받을 수 없게 된 아바르-슬라브 연합군은 콘스탄티폴리스 공략에 애를 먹었다. 그러다가 가까스로 무거운 공성 장비를 제작한 아바르족과 슬라브족이 테오도시우스 성벽을 향해 한달 동안 공성전을 벌였지만, 지휘관 보노스의 지휘를 받은 수비대가 결사적으로 항전해 쉽사리 공략하지 못했다. 여기에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세르지오 1세가 성모 마리아의 이콘을 들고 성벽을 행진하면서 병사들을 독려했고, 시민들 역시 합심하여 수비대를 지원했다.
그 해 8월 7일, 보스포로스 해협을 건너 군대를 수송하려던 페르시아 함대가 동로마 함대에 포착되어 파괴되었다. 여기에 아바르 칸국에 동원된 스칼베니족 함대가 골든 혼 건너편에서 바다쪽 성벽을 공략하려 했다가 보노스가 동원한 갤리선에게 격퇴되었고, 아바르족의 지상 공격 역시 격퇴되었다. 얼마 후 이라클리오스의 형제 테오도로스가 샤힌 바르마자데간이 이끄는 군대를 시리아에서 격파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연합군의 사기는 바닥나 버렸다. 8월 8일 아바르족과 슬라브족은 철수하면서 공성 탑을 파괴했고, 뒤이어 블라케르나이 성당에 불을 질렀다. 하지만 로마인들이 불을 끄러 성당에 갔을 때는 이미 불이 꺼져 있었다고 한다. 샤흐르바르즈는 이후에도 칼케돈에 남아있었지만 해군이 무너졌기에 별다른 공세를 취하지 못하다가 결국 시리아로 철수했다.
4. 결과
626년 제2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방전에서 막대한 희생만 치른 아바르 칸국은 급격하게 쇠락했다. 630년 바얀 2세가 사망하자, 그동안 아바르족의 지배를 받았던 불가르족과 슬라브족이 대대적으로 반란을 일으켰고, 동로마 제국과의 전쟁을 치르면서 전력 손실이 컸던 아바르족은 이를 조기에 진압하지 못했다. 여기에 이라클리오스가 연공금 지불을 중단해버리면서, 아바르 칸국의 경제적 기반이 박탈되었다. 슬라브인들은 사모(Samo)와 쿠브라트(Kubrat)를 중심으로 독립에 성공해 판노니아 평원에서 독자적인 왕국을 세웠지만, 사모와 쿠브라트가 각각 658년과 665년에 사망한 뒤 하자르의 침략으로 쇠락했다. 그동안 아바르 칸국은 지금의 헝가리 일대에서 겨우 영역을 보전했지만, 자기들끼리 내전을 치르다가 788년부터 카롤루스 대제가 이끄는 프랑크군의 대규모 공세에 속절없이 밀린 끝에 796년 항복하고 기독교로 개종한 뒤 프랑크 왕국의 지배를 받았다.한편, 동로마 제국은 사산 왕조와의 힘겨운 전쟁에서 승리했지만 뒤이은 이슬람 제국의 침략으로 인해 동방 속주를 모조리 상실하는 악재가 닥치면서, 아바르 칸국이 붕괴된 상황을 잘 살리지 못했다. 이로 인해 발칸 반도 내륙지대에 힘의 공백이 생겼고, 그동안 아바르 칸국의 지배를 받던 슬라브족은 다뉴브강을 대거 건너 발칸 반도 각지에 대거 진출했다.(슬라브족의 이동) 원주민들은 술라브인들이 살지 않거나 접근하기 힘든 험한 산지나 섬으로 이주하거나 행정력이 온전한 몇몇 거점들로 도망치기도 했지만, 상당수는 그대로 잔류해 슬라브인들과 함께 살다가 자연스럽게 동화되었다. 이리하여 동로마 제국의 통제를 받는 그리스 일대를 제외한 발칸 반도의 주류 민족은 슬라브족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