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니움 전쟁 Samnite Wars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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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기 | 1차: 기원전 343-341년 2차: 기원전 326-304년 3차: 기원전 298-290년 | |
장소 | 이탈리아 반도 중부 및 남부 | |
교전국 | 로마 공화국 라틴 동맹 캄파니아 | 삼니움 에트루리아 세노네스 움브리아 아이퀴 아풀리아의 몇몇 도시들 |
지휘관 | 마르쿠스 발레리우스 코르부스 아울루스 코르넬리우스 코수스 아르비나 퀸투스 푸블릴리우스 필로 루키우스 파피리우스 쿠르소르 가이우스 유니우스 부불쿠스 브루투스 퀸투스 아이밀리우스 바르불라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 룰리아누스 티투스 베투리우스 칼비누스 스푸리우스 포스투미우스 알비누스 카우디누스 퀸투스 마르키우스 트레물루스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아르비나 티베리우스 미누키우스 아우구리누스† 루키우스 포스투미우스 메겔루스 마르쿠스 풀비우스 쿠르부스 파이티누스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바르바투스 마르쿠스 포에텔리우스 리보 가이우스 술피키우스 롱구스 퀸투스 아울리우스 케레타누스† 푸블리우스 데키우스 무스† 가이우스 마르키우스 루틸루스 켄소리누스 마르쿠스 아틸리우스 레굴루스 루키우스 볼룸니우스 플람마 비올렌스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카이쿠스 스푸리우스 카르빌리우스 막시무스 루키우스 파피리우스 쿠르소르 그나이우스 풀비우스 막시무스 켄투말루스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 구르게스 마니우스 쿠리우스 덴타투스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루피누스 | 가이우스 폰티우스☠ 겔리우스 에그나티우스† |
병력 | 불명 | 불명 |
피해 | 불명 | 불명 |
결과 | 삼니움과 에트루리아가 로마 공화국에게 복속되어, 로마가 이탈리아 반도를 제패하는 기반을 마련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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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Samnite Wars기원전 343년부터 기원전 290년까지 53년 동안 있었던 로마 공화국과 삼니움 사이에서 벌어진 전쟁이다.
로마와 삼니움 사이에는 전쟁이 총 세 번 있었는데, 기원전 343년부터 341년까지를 제1차 삼니움 전쟁, 기원전 326년부터 304년까지를 제2차 삼니움 전쟁, 그리고 기원전 298년부터 290년까지 있었던 싸움을 제3차 삼니움 전쟁으로 분류한다.
각 전쟁들이 벌어진 원인도 달랐다. 제1차 전쟁은 로마가 캄파니아인의 도시인 카푸아를 삼니움의 공격으로부터 구하기 위해 개입한 것이었고, 제2차 전쟁은 로마가 네아폴리스의 정치에 개입하여 네아폴리스를 종속시키려다가 그것이 이탈리아 남부의 세력 싸움으로 번진 것이었다. 마지막 제3차 전쟁은 이탈리아 남부에 지배력을 행사하기 위한 패권 싸움이 원인이었다.
전쟁은 반세기 넘게 지속되었고, 크게 삼니움과 로마, 그리고 세노네스[2]가 관여되었다. 덧붙여서 삼니움은 초기 고대 로마의 강력한 라이벌 중 하나였다.
2. 제1차 삼니움 전쟁(기원전 343~341)
2.1. 배경
기원전 4세기, 로마 공화국은 라틴 연합을 굴복시키고 라티움 전역을 석권했다. 이제 그들의 남쪽 경계는 라티움과 캄파니아 사이를 가로지르는 리리스 강(현재 가리글리아노 강)에 이르렀다. 한편, 이탈리아 중부의 아펜니노산맥 일대를 지배하고 있었던 삼니움인들은 켈트족(갈리아인)의 압력에 맞서기 위해 로마에 우호적인 태도를 취했고, 로마 역시 북방의 에트루리아, 그리고 켈트족과의 전쟁에 전력을 쏟기 위해 삼니움족과 친선 관계를 맺기로 했다. 티투스 리비우스 파타비누스와 디오도로스 시켈로스는 두 민족이 기원전 354년에 우호조약을 체결했다고 밝혔다. 이 우호조약의 내용은 전해지지 않으나, 일부 역사가들은 리리스 강을 경계로 삼고 북쪽은 로마, 남쪽은 삼니움이 지배한다고 명시했을 거라고 추정한다.그러던 기원전 4세기 중반, 삼니움인들은 아펜니노 산악지대보다 훨씬 비옥한 캄파니아를 공략하기로 마음먹고 캄파니아의 도시국가들을 연이어 공격했다. 이에 캄파니아의 도시국가들은 동맹을 맺고 공동대응했지만, 삼니움인들의 기세를 막기엔 역부족이었다. 기원전 343년, 캄파니아의 핵심 도시인 카푸아는 삼니움의 위협에 시달린 끝에 로마에 사절을 보내 동맹을 맺어달라고 요청했다. 로마는 삼니움과 동맹을 맺었던 터라 이에 응하려 하지 않았다. 리비우스에 따르면, 카푸아 사절은 동맹을 꺼리는 의원들을 이렇게 설득했다고 한다.
"오 로마인들이여! 그들이 악한 행위로 우리 땅을 차지하게 두지 말고 오히려 선한 마음으로 그것을 차지하십시오. (중략) 오 로마인들이여, 당신들의 도움의 그림자가 우리를 안전한 편으로 만들기에 충분할 것입니다.(중략) 카푸아는 당신들을 위해 새로운 장정을 제공할 것입니다. 당신들은 우리에게 창립자, 아버지, 불멸의 신이 될 것이며 당신의 어떤 식민도시도 헌신과 충실도에서 우리를 능가할 수 없을 겁니다. (중략) 우리는 로마인의 손에 캄파니아 사람들, 카푸아市, 신들의 사원, 모든 인간적이고 신적인 권리, 앞으로 짊어져야 할 모든 것을 맡기며 당신의 신민으로서 살아가겠습니다."
카푸아가 복속을 자청하자, 로마는 이를 받아들이기로 했다. 이후 로마에서 파견된 사절단이 삼니움 지도자들에게 카푸아가 자국의 식민도시가 되었으니 더이상 공격하지 말라고 요청했다. 리비우스에 따르면, 삼니움 지도자들은 오만하게 반응했고, 삼니움군 사령관은 로마 사절이 보는 앞에서 군대에게 즉시 캄파니아 지역을 약탈하라는 명령을 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 이야기는 동맹을 맺은 삼니움을 공격한 로마의 행위를 정당화하고자 리비우스가 윤색했을 가능성이 높다. 현대 학계는 삼니움족이 캄파니아를 제패하면 지나치게 강력해질까 우려했고, 로마 역시 캄파니아를 눈독들였으리라고 추정한다. 이리하여 제1차 삼니움 전쟁이 발발했다.
2.2. 전개
삼니움을 상대로 전쟁을 선포한 로마 원로원은 두 집정관 마르쿠스 발레리우스 코르부스와 아울루스 코르넬리우스 코수스 아르비나에게 각각 2개 군단을 맡겼다. 발레리우스는 캄파니아로 진격했고, 코르넬리우스는 삼니움으로 이동했다. 삼니움인들은 로마군이 캄파니아로 전력을 쏟아부을 거라 여기고 캄파니아 방면에 병력을 집중했다. 얼마 후, 발레리우스 코르부스가 이끄는 로마군과 삼니움군이 가우루스 산에서 마주쳤다.발레리우스 코르부스는 며칠 동안 척후병을 잇따라 보내 소규모 접전을 치르게 함으로써 삼니움군의 전투력을 확인한 뒤 전면전을 벌이기로 했다. 이후 보병끼리 벌어진 접전에서 승패가 쉽사리 갈리지 않자, 적진을 무너뜨리기 위해 기병대를 투입했다. 그러나 기병대 역시 삼니움군의 전열을 뚫는데 실패하고 상당한 피해를 입은 채 물러났다. 그러자 발레리우스 코르부스는 말에서 내린 뒤 직접 보병대를 이끌고 공세를 이끌었다. 이 공세는 삼니움인들에게 많은 손실을 입혔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적의 대열을 무너뜨리지는 못했다.
이윽고 날이 어두워지자, 발레리우스 코르부스는 최후의 공세를 시도해보고 역시 통하지 않으면 본진으로 물러나기로 했다. 그런데 로마군이 남아있는 힘을 다해 돌진하자, 그때까지 버티고 있었던 삼니움인들이 돌연 도주했다. 로마군은 이들을 추격해 닥치는 대로 살육하다가, 해가 완전히 져서 앞을 분간하기 어려워지자 물러났다. 리비우스에 따르면, 이날 로마군과 대결했던 삼니움인들은 로마인들이 마지막으로 돌격했을 때 눈에서 불을 뿜는 듯한 인상을 받았다고 한다. 이튿날 로마군은 텅 빈 적진을 점거한 뒤 그네들의 승리를 축하하기 위해 찾아온 캄파니아인들을 맞이했다.(가우루스 산 전투)
한편, 삼니움으로 진군한 코르넬리우스 코수스는 아펜니노 산맥에 진입해 사티쿨라 계곡으로 내려가는 산길로 군대를 이끌었다. 그러나 그는 삼니움인들이 사티쿨라 계곡 주변 고지에 매복한 채 로마군이 계곡으로 내려오기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이윽고 사티쿨라 계곡에 내려온 로마군은 적이 주변에 매복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챘지만, 그때는 이미 퇴로가 막혀 있었다. 병사들이 이러다가 꼼짝없이 전멸하겠다는 공포에 질려 있을 때, 트리부누스 밀리툼(Tribunus Militum)을 역임하고 있었던 푸블리우스 데키우스 무스는 삼니움 진영이 내려다보이는 언덕 꼭대기에 적이 없다는 것을 눈치채고 코르넬리우스 코수스에게 2,400명 가량인 분견대를 맡겨달라고 요청했다. 코수스가 허락하자, 그는 이들을 이끌고 언덕을 향해 진격했다. 삼니움인들은 무스의 분견대가 언덕 정상에 거의 도달할 때까지 그들의 움직임을 보지 못하다가 뒤늦게 이 사실을 눈치채고 즉시 언덕을 포위했다. 삼니움인들이 언덕 포위에 신경을 쏟는 사이, 코수스는 방어에 좀더 유리한 지점으로 군대를 후퇴시켰다.
집정관 코르넬리우스 코수스가 빠져나가자, 삼니움인들은 하룻밤을 푹 쉰 뒤 내일 언덕 꼭대기에 있는 로마군을 섬멸하기로 결의했다. 데키우스 무스는 밤중에 켄투리오들과 함께 적진을 정찰한 뒤 병사들을 모아놓고 오늘 밤에 탈출할 생각이며, 가능하면 조용히, 발각되면 무력으로 뚫겠다고 선언했다. 그들은 데키우스 무스의 지휘 아래 숨죽인 채 이동했지만, 적진 중간 지점에 이르렀을 때 발각당했다. 이에 데키우스와 병사들이 요란한 함성을 지르며 달려들자, 삼니움인들은 혼란에 빠져 달아났다.
다음날 아침 데키우스 무스와 병사들이 무사히 귀환하자, 코수스는 몹시 기뻐하며 그들을 반겨줬다. 이후 병사들에게 삼니움인들을 공격하라고 명령했고, 전투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았던 삼니움인들이 뿔뿔이 흩어져서 진영이 점령되었다. 리비우스에 따르면, 숙영지로 도망친 삼니움 사람 30,000명이 모두 죽었다고 한다. 하지만 현대 학자들은 리비우스가 로마군의 군공을 의도적으로 띄워주고자 수치를 부풀렸다고 여긴다.
코수스는 전투가 끝난 뒤 데키우스 무스에게 황금 목걸이, 소 100마리, 금박 뿔이 달린 흰 소 1마리를 선물했고, 그의 부하들에게 각각 소 1마리와 속옷 2벌을 지급했다. 병사들은 데키우스에게 월계관 2개를 수여했는데, 하나는 군대 전체를 구한 공로로, 다른 하나는 부하들을 곤경에서 구한 공로 때문이었다. 데키우스는 마르스 신에게 경배를 올리는 희생제에 흰 소를 바쳤고, 그를 따르는 사람들에게 소 100마리를 주었다고 한다.(사티쿨라 전투)
삼니움인들은 가우루스 산 전투와 사티쿨라 전투에서 로마군에게 패배했지만, 이에 굴하지 않고 캄파니아에서 로마군을 몰아내기 위해 대규모 병력을 파견했다. 당시 카푸아에서 장기 주둔하기 위해 보급품 마련에 분주하던 집정관 마르쿠스 발레리우스 코르부스는 적군이 다가오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자 숙영지와 보급품을 보호하기 위해 상당한 병력을 남겨놓고, 나머지 병력을 이끌며 수에술라로 행진했다. 이후 삼니움군과 가까운 곳에 숙영지를 세우고 대치했다.
상당한 병력을 카푸아에 남겨둔 채 이동했기 때문에, 로마군 진영은 평소보다 훨씬 작았다. 삼니움 병사들은 이를 보고 지휘관들에게 즉시 공격하자고 주장했지만, 장군들은 뭔가 함정이 있다고 여겨 섣불리 공격하지 않았다. 그렇게 한동안 대치하던 중 식량이 부족해지자, 삼니움인들은 로마인들이 수적으로 열세하니 섣불리 진영 바깥으로 나오지 못하리라 여기고, 식량 수집병들을 들판으로 보내기로 했다.
그렇게 적이 식량 수집에 열중하느라 진영 수비에 큰 신경을 쓰지 않자, 발레리우스 코르부스는 부하들을 이끌고 삼니움 진영을 급습해 단숨에 점령했다. 그 후 적 진영에 다수의 병력을 배치하고, 발빠르고 용맹한 병사들을 엄선한 뒤 삼니움의 식량 수집병들을 습격하게 했다. 갑작스런 공격을 받은 삼니움인들은 살해당하거나 뿔뿔이 흩어졌다. 리비우스에 따르면 로마군은 방패 40,000개와 군기 170개를 노획했다고 한다.(수에술라 전투)
그 후 발레리우스 코르부스는 동료 집정관인 아울루스 코르넬리우스 코수스와 함께 로마로 귀환해 개선식을 거행했다. 파스티 카피톨리니의 《개선장군 목록》에는 발레리우스 코르부스와 코르넬리우스 코수스가 각각 기원전 343년 9월 21일과 9월 22일에 삼니움족에 대한 승리를 축하했다고 밝혔다. 이후 로마는 기원전 342년 캄파니아에 주둔했던 로마군이 반란을 일으켜 전쟁을 더 지속하기 힘들었고, 삼니움 역시 일전의 패배로 인해 큰 손실을 입어서 전쟁을 벌이기 힘들었다. 이에 기원전 341년 삼니움이 캄파니아와 로마의 동맹을 받아들이고, 로마와 삼니움간 조약을 갱신하기로 하면서 제1차 삼니움 전쟁은 막을 내렸다.
3. 제2차 삼니움 전쟁(기원전 326~304)
3.1. 배경
기원전 334년, 로마는 리리스 강 건너편에 있는 프레겔라스에 식민도시를 건설했다. 이것은 로마와 삼니움족간의 협약 위반이었기에, 삼니움 측은 사절을 보내 항의했지만 묵살당했다. 삼니움족은 이에 불만을 품었지만 당시 이탈리아 남부의 그리스 도시국가들(마그나 그라이키아)과 전쟁을 벌이고 있었고, 기원전 331년에는 그리스 도시국가들을 돕기 위해 이탈리아 반도에 출진한 에페이로스 왕국의 국왕 알렉산드로스 1세 에페이로스를 상대하느라 로마쪽에 별다른 신경을 쓰지 못했다.그 후 삼니움족이 알렉산드로스 1세를 패사시키며 위세를 떨치자, 기원전 328년 캄파니아의 네아폴리스에서 친 삼니움파가 정권을 장악하고, 삼니움인들에게 자신들을 지켜달라고 요청했다. 이에 삼니움 병사 4,000명과 놀라 출신 병사 2,000명이 도시에 진주했다. 이 소식에 놀란 로마는 삼니움족이 지난 제1차 삼니움 전쟁 이후 캄파니아에 병력을 일절 보내지 않겠다고 했던 협약을 위반했다며 항의했지만, 삼니움인들은 로마가 먼저 약속을 위반했다며 거들떠보지 않았다. 이에 로마는 전쟁을 선포하고 집정관 퀸투스 푸블릴리우스 필로에게 2개 군단을 줘서 네아폴리스를 공략하도록 했다.
퀸투스 푸블릴리우스 필로는 로마군을 네아폴리스와 또다른 그리스계 도시인 필레오폴리스 사이의 지점에 진군시켜서 둘 사이의 연락로를 차단했다. 이후 네아폴리스를 포위 공격했지만 피해만 누적될 뿐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자 도시 내 친 로마파와 연락해 내부에서 호응하도록 유도했다. 어느 날 밤 도시 내부의 친 로마파가 성문 하나를 열자, 로마군은 즉시 네아폴리스 시내로 진입했다. 삼니움과 놀라 병사들은 제대로 저항하지 못한채 도주했고, 네아폴리스는 로마의 수중에 넘어갔다.(네아폴리스 공방전) 이후 로마와 삼니움은 제2차 전쟁에 돌입했다.
3.2. 로마의 연이은 승리와 카우디움 협곡 전투
제2차 삼니움 전쟁에 돌입한 로마군은 삼니움족을 상대로 시종일관 승리를 거두었다. 기원전 325년 임브리니움 전투에서 삼니움족 20,000명이 전사했다.[3]. 기원전 324년 독재관 루키우스 파피리우스 쿠르소르가 알려지지 않은 장소에서 삼니움을 상대로 큰 승리를 거뒀다. 이에 삼니움 측이 평화협약을 맺자고 요청했고, 독재관은 철수했다. 이후 양자는 1년간 휴전을 맺었지만, 삼니움의 귀족 브루툴루스 파피우스가 로마가 제시한 요구 조건을 거부하며, 전쟁을 재개하자고 촉구하자 이에 호응한 삼니움 정부가 전쟁을 재개했다. 기원전 323년, 로마군은 삼니움과 삼니움의 동맹이 된 아풀리아인들을 상대로 공세를 개시했다. 그들은 삼니움군을 만나지 못해 전투를 치르지는 못했지만 진군로 주변의 마을과 농지를 황폐화시켰다.기원전 322년 용병을 고용한 삼니움인들이 자기들의 영역으로 재차 쳐들어온 로마군을 상대로 반격을 시도했다. 처음에는 실수로 불리한 지형에 숙영지를 세운 로마군을 삼니움 기병들이 몰아치고, 뒤이어 삼니움 보병대가 압박해 들어오면서 삼니움이 드디어 승리하는 듯했다. 그런데 삼니움 기병대가 로마군 전체가 뛰쳐나와서 싸우는 터라 적진이 비어있는 것을 보고 적진에 뛰어들어 약탈을 자행하느라 전투에서 이탈했다. 그 사이에 로마 기병대가 재정비한 뒤 아군 진영을 약탈하느라 정신없는 삼니움 기병대를 물리치고, 뒤이어 적 보병대의 측면과 후방을 요격하자, 삼니움인들은 크게 패배했다. 리비우스에 따르면, 삼니움인들이 로마 기병대에 의해 살해된 군대 사령관을 포함하여 매우 큰 손실을 입었다고 한다.
삼니움인들은 더 이상 승산이 없다고 판단한 후, 전쟁 재개를 주도했던 브루툴루스 파피우스를 잡아다가 로마에 바치려 했지만, 파피우스는 그 전에 자살했다. 이후 전쟁 중에 포로로 잡힌 모든 로마군 포로와 막대한 보물을 로마에 바치면서 평화협약을 맺어달라고 호소했다. 그러나 거듭된 승리에 의기양양해진 로마 원로원은 이참에 삼니움을 완전히 정복하기로 마음먹고 삼니움족의 요청을 거부했다. 기원전 321년, 집정관 티투스 베투리우스 칼비누스와 스푸리우스 포스투미우스 알비누스 카우디누스는 각각 2개 군단씩 총 4개 군단을 이끌고 삼니움족의 영역으로 쳐들어갔다. 이에 삼니움인들은 가이우스 폰티우스를 지휘관으로 삼고 로마군에 대적했다.
폰티우스는 정면승부로는 로마군을 절대로 이길 수 없으니 유인책을 쓰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먼저 삼니움 병사 10명쯤을 양치기로 변장시킨 뒤 일부러 로마군의 진군로 주변에서 양을 방목하게 했다. 로마군이 평범한 양치기로 여기고 불러다가 삼니움인들의 동향을 묻자, 그들은 삼니움인들이 로마와 동맹을 맺은 아풀리아의 루케리아를 포위하고 있다고 답했다. 이에 두 집정관은 서둘러 루케리아로 가서 삼니움족을 완벽하게 섬멸하기로 했다.
리비우스에 따르면 도로 2개가 아펜니노산맥에서 루케리아로 이어졌다. 아드리아 해를 따라 있는 첫 번째 도로는 평평하고 장애물이 없었지만 멀리 돌아서 가야 했기에 루케리아까지 가는 데 많은 시간이 들었다. 카우디움 협곡을 통과하는 산길은 훨씬 짧아서 빠른 시일에 루케리아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길은 두 사람이 간신히 통과할 수 있을 정도로 매우 좁고 산악지대가 끊임없이 펼쳐졌다. 좁은 산길을 가다보면 중간에 풀이 무성하고 물이 잘 공급되는 평원을 만날 수 있었지만, 평원을 통과하면 루케리아에 이르기까지 좁고 험준한 길을 가야 했다고 한다.
두 집정관은 삼니움군이 도망칠 틈을 주지 않기 위해 카우디움 협곡을 통과하는 산길로 가기로 했다. 로마군은 몇 시간 동안 좁은 길을 강행군한 끝에 평원에 이르렀다. 평원에 숙영지를 세워서 휴식을 취한 뒤 행군을 재개했지만, 두 번째 산길을 지나가던 중에 바위 덩어리와 도끼에 베인 나무 줄기로 앞길이 완전히 막혀버린 것을 발견했다. 그때 삼니움인들이 협곡 위 언덕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로마군은 그제야 함정에 걸렸다는 것을 깨닫고 서둘러 돌아가려 했지만, 첫 번째 산길마저 막혔다는 것을 곧 확인했다. 그리하여 로마군은 협곡에 갇힌 채 훨씬 높은 언덕에 자리잡은 삼니움군에게 둘러싸여 궤멸될 위기에 몰렸다.
리비우스에 따르면, 삼니움군의 지휘관 가이우스 폰티우스는 수많은 로마군을 협곡에 가둬버리는 작전이 성공한 것에 무척 흥분했지만, 한편으로는 그들을 어찌 처리해야 할지 선뜻 판단하지 못했다. 공격을 시작한다면 궁지에 몰린 저들이 격렬하게 저항하여 큰 피해를 볼 게 자명했다. 그렇다고 굶겨죽이자니 언제 끝날지 기약하기 어렵고 또다른 로마군이 구원하러 달려올 수도 있었다. 그래서 삼니움인 중 가장 현명하다는 평을 받던 아버지 헤렌니우스 폰티우스에게 조언을 요청하는 서신을 보냈는데, 헤렌니우스는 아래와 같이 답했다.
"그들 전원을 정중하게 대접한 후 로마로 살려보내라."
삼니움인들이 "어떻게 잡은 적병들인데 그냥 돌려보냅니까?"
라며 반발하자, 폰티우스는 아버지에게 재차 서신을 보내 다른 방안은 없냐고 물었다. 그러자 헤렌니우스는 이렇게 답했다."그들을 모두 죽여라."
폰티우스는 아버지가 먼저는 모두 살려보내라고 해놓고 이제는 또 다 죽이라고 권고하니 이상하게 여겨서, 아버지를 전장으로 모셔오게 하여 어찌된 영문이냐고 물었다. 이에 헤렌니우스가 답했다."우리가 저들을 잘 대접해서 돌려보낸다면, 저들은 우리가 베푼 선행에 감동할 것이며, 우리는 매우 강력한 국가와 평화와 우호를 확립할 것이다. 반면에 저들을 모두 죽인다면, 로마는 두 집정관의 군대를 전부 잃어버렸으니 힘을 회복하는데 어려움을 겪고 여러 세대 동안 전쟁을 미뤄야 할 것이다."
폰티우스는 아버지의 설명을 듣고 고심하다가 재차 물었다."둘 중 하나를 택하지 않고, 중간의 길을 택하는 건 어떻습니까? 삼니움은 마땅히 받아야 할 승리를 받을 것이며, 로마인들은 마땅히 받아야 할 패배를 받을 겁니다."
헤렌니우스가 눈에 띄게 화를 내며 답했다."그것은 친구를 구하지도 않고 적을 제거하지도 않는 짓이다. 로마인들은 패배하더라도 가만히 있을 줄 모르는 자들이다."
마르크 가브리엘 샤를 글레르(Marc Charles Gabriel Gleyre) 작, <멍에 아래 로마인>, 1838년.
그러나 폰티우스는 아버지의 충고를 듣지 않고 자기 방식대로 문제를 해결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곧 전령을 로마군에 보내 자신의 뜻을 전했다. 로마군은 프레겔라스를 비롯한 삼니움의 영역에 세워진 모든 식민도시에서 철수해야 하며, 병사들은 모든 무장을 해제하고 튜니카만 입은 채 멍에[4] 아래로 기어가라는 것이었다. 두 집정관은 병사들을 살리기 위해 이를 받아들였고, 로마 장병들은 삼니움 전사들의 조롱과 비웃음을 받으며 멍에 아래를 통과해야 했다. 이를 거부한 로마 병사들은 가차없이 살해당했다고 전해진다. 또한 로마군은 카우디움에서 맺은 협약을 준수하겠다고 보장하기 위해 장교 및 재무관들, 기병 600명을 인질로 넘겼다.
리비우스에 따르면, 로마 원로원은 폰티우스와 협약을 맺은 두 집정관을 삼니움인들에게 넘기며 협약이 파기되었다고 밝혔다. 폰티우스는 그들의 인도가 위장된 것이라고 판단해 받아들이길 거부했고, 두 집정관은 로마로 귀환했다. 그 후 재개된 전쟁에서 로마군이 승기를 잡았고, 기원전 318년에 삼니움족이 평화협약을 맺자고 요청하자 이를 받아들이지는 않았지만 2년 동안 휴전을 맺기로 했다고 한다. 그러나 리비우스는 다른 사료에서는 로마군이 카우디움에서 맺어진 협약을 존중했다는 내용이 있다고 밝혔고, 에드워드 토고 살몬은 로마군이 기원전 316년에 적대 행위가 재개될 때까지 카우디눔 평화협약을 존중했으며 기원전 321년과 기원전 316년 사이 로마 - 삼니움 전쟁은 리비우스가 순전히 꾸며낸 이야기라고 주장했다. 현대 학계에서는 로마가 카우디눔에서 맺은 조약을 인정하지 않고, 전쟁을 곧바로 재개했을 개연성은 충분하다며 확답을 내리지 않고 있다.
3.3. 소모전과 에트루리아의 참전
기원전 316년, 삼니움족과 휴전 중이던 독재관 루키우스 아이밀리우스 마메르키누스 프리베르나스의 주도하에 삼니움과 동맹을 맺은 사티쿨라를 포위 공격했다. 삼니움은 사티쿨라를 구하기 위해 군대를 파견했지만, 로마군은 삼니움군과 사티쿨라 수비대의 합동공격을 물리쳤다. 삼니움은 로마군의 관심을 돌리기 위해 로마의 동맹시인 플리스티카를 공격했으나 공략에 실패했고, 재차 사티쿨라를 구하려 했으나 격퇴되었다.결국 기원전 315년 사티쿨라가 로마군에 함락되자, 삼니움인들은 재차 플리스티카를 습격해 며칠만에 함락시켰다. 이후 리리스 강변의 소라를 통제하고 현지 주민들을 징발하여 군대 규모를 늘렸다. 당시 기원전 315년 집정관이었던 루키우스 파피리우스 쿠르소르와 퀸투스 푸블릴리우스 필로가 이끄는 로마군은 각각 아풀리아와 캄파니아로 진군해 삼니움족을 물리치려 했고, 새 독재관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 룰리아누스가 이끄는 로마군은 사티쿨라를 공략한 뒤 소라로 진군했다. 로마군이 한창 소라를 포위하고 있을 때, 정찰병들이 대규모 삼니움군이 필로의 군대를 격파했거나 회피하고, 라티움으로 진격하고 있다고 보고했다.
파비우스는 즉시 군대를 이끌고 라우툴레에서 이들을 저지했다.(라우툴레 전투) 리비우스에 따르면, 한 기록에서는 양측이 하루종일 싸웠으나 승패를 가리지 못했다고 하며, 다른 기록에서는 기병장관 퀸투스 아울리우스 케레타누스가 이끄는 기병대가 격파당했고 케레타누스는 적장을 손수 죽이는 등 분전했으나 끝내 전사했다고 한다. 디오도로스 시켈로스에 따르면, 로마군은 라우툴레 전투에서 참패했다고 한다. 학계에서는 리비우스가 인용한 무승부를 거뒀다는 기록은 왜곡되었으며, 실제로는 참패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삼니움족이 승리한 후, 아우소네스, 아우소나, 민투르노 등 리리스 강변의 도시 세 곳과 캄파니아와 라티움 경계에 위치한 베스키아는 삼니움의 편으로 돌아섰다. 이에 로마는 아우소나에 군대를 파견했고, 몇몇 귀족들이 로마군과 내통하여 성문을 열어준 덕분에 별다른 피해 없이 공략한 뒤 대량 학살을 자행했다. 리비우스에 따르면, 학살이 끝난 뒤 아우소나에 남은 인구는 거의 없었다고 한다. 그 후 루케리아가 로마 수비대를 삼니움인들에게 넘기고 투항했지만 인근에 있었던 로마군에게 도로 공략당한 뒤, 그곳 주민들 역시 학살당하거나 노예로 팔려간 후 로마 시민 2,500명 남짓이 루케리아로 이주되었다.
기원전 314년, 카푸아의 몇몇 귀족들이 로마의 지배에 불만을 품고 삼니움에게 캄파니아로 쳐들어와 준다면 호응하겠다고 제안했다. 이에 혹한 삼니움인들은 캄파니아로 진군했다. 당시 집정관 마르쿠스 포에텔리우스 리보와 가이우스 술피키우스 롱구스가 이끄는 로마군은 소라를 공략하고 아우소네스, 민투르노를 잇따라 점거했다. 그러다가 삼니움군이 캄파니아로 진군해 카푸아를 위협할 수 있는 카우디움에 접근하고 있다는 정보가 전해지자, 그들은 카우디움으로 이어지는 산길의 끝으로 이동해 적의 진군로를 차단했다. 삼니움군은 다른 산길 끝에 주둔했고, 양자는 서로 대치하기만 할 뿐 별다른 전투를 벌이지 않았다.
그러다가 삼니움 측이 다른 길을 택해 캄파니아의 평평한 지역으로 이동하자, 로마군은 이들을 추격하여 타라키나에서 따라잡았다. 이후 양측간의 기병 전투에서 로마군이 우세하자, 두 집정관은 전투를 벌이기로 결의했다.(타라키나 전투) 로마군은 평상시처럼 군단을 중앙에, 기병을 측면에 배치했지만 기병은 로마 진영을 방어하는 데 집중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포에텔리우스는 상대적으로 밀집대형을 갖춘 좌익 부대를 지휘했고, 술피키우스 롱구스는 좀더 개방된 대형을 갖춘 우익 부대를 배치했다. 포에텔리우스는 밀집대형으로 상대의 진형을 단숨에 허물기를 희망했고, 술피키우스 롱구스는 삼니움군의 우세한 병력이 아군을 포위하는 것을 저지하기 위해 전열을 가급적 얇게 확장했다.
이윽고 전투가 개시되자, 포에텔리우스는 좌익 부대를 이끌고 삼니움군을 향해 돌진했다. 삼니움 보병대가 로마군의 압도적인 기세에 눌려 밀리기 시작하자, 삼니움 기병대가 투입되어 아군을 도왔다. 이에 방어만 하고 있었던 로마 기병대가 출격해 삼니움 기병대와 맞붙었다. 한동안 격전이 이어진 끝에, 삼니움군이 조금씩 밀렸다. 반면 로마군 우익 부대는 술피키우스 롱구스가 기병대를 이끌고 삼니움 기병대와 교전하느라 자리를 비운 사이 삼니움군이 몰아붙이면서 보병 대열이 뚫릴 위기에 몰렸다. 술피키우스는 적 기병을 격퇴한 뒤 상황이 안 좋게 돌아가는 것을 눈치채고 즉시 돌아와서 로마군을 지휘했고, 금방 허물어지는 듯했던 로마 보병대는 안정을 되찾았다.
얼마 후 포에텔리우스가 이끄는 좌익 부대가 삼니움군의 우익 부대를 돌파했다. 이에 삼니움군의 좌익 부대 역시 사기가 급격히 떨어져 달아났고, 로마군은 이들을 추격해 닥치는 대로 살육했다. 리비우스에 따르면, 이날 삼니움군 병사 30,000명이 죽거나 사로잡혔다고 한다. 삼니움군 생존자는 말벤툼[5]으로 후퇴했고, 로마군은 삼니움의 네 부족 중 가장 큰 부족인 펜트리족의 수도인 보비아눔을 포위했다.
독재관 가이우스 포에텔리우스 리보 비솔루스의 지휘하에 보비아눔 공성전이 이어기던 기원전 313년, 삼니움인들이 로마가 리리스 강 동편에 세운 첫 번째 식민도시인 프레겔라스를 점령했다. 로마군은 보비아눔 포위를 풀고 프레겔라스로 이동했지만, 현장에 도착했을 때 삼니움인들은 이미 도시를 버리고 떠났다. 포에텔리우스는 프레겔라스에 수비대를 배치한 뒤 삼니움 편에 선 놀라로 진격해 며칠 만에 함락하는데 성공했다. 이후 삼니움인들이 평화를 제안하자 로마 정부는 이를 고려했지만, 기원전 312년 에트루리아가 로마에 전쟁을 선포하고 삼니움이 이에 호응해 평화협상을 취소했다. 이리하여 로마는 북쪽의 에트루리아, 남쪽의 삼니움을 동시에 상대해야 하는 처지에 놓였다.
기원전 311년, 에트루리아군은 로마에서 북서쪽으로 30마일 남짓 떨어진 수트리움 시를 포위했다.(수트리움 공방전) 로마 원로원은 수트리움을 구하기 위해 당해 집정관인 퀸투스 아이밀리우스 바르불라를 파견했다. 로마군이 접근해오자, 에트루리아군 내부에서는 '그대로 포위하고 있자.'는 주장과 '평원으로 나아가 응전해야 한다.'는 주장이 대립했는데, 결국 후자가 체택되었다. 바르불라가 수트리움 인근에 도착한 지 2일이 지난 후, 양군이 평원에서 전투를 벌였다. 리비우스에 따르면, 전투는 하루 종일 진행되었으며 양자의 사상자가 막대했다. 그러다가 로마군이 예비대를 투입하자 더 이상 전투할 여력이 없었던 에트루리아군이 자기 진영으로 후퇴했다고 한다. 그러나 로마군은 이 전투에서 막대한 손실을 입어 포위를 뚫을 수 없었고, 에트루리아군은 이듬해까지 포위를 이어갔다.
기원전 310년, 새 집정관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 룰리아누스가 지원군을 이끌고 수트리움으로 향했다. 에트루리아 당국 역시 지원군을 보냈고, 양자는 다시 한 번 격전을 벌였다. 리비우스에 따르면 이번에도 로마군이 좀더 우세한 전과를 거뒀지만 포위망을 뚫는데 실패했다고 한다. 이에 룰리아누스는 한 번도 군대가 통과한 적이 없었던 키미니 숲을 돌파한 뒤 에트루리아의 주요 도시국가 중 하나인 페루시아에 접근하면서 각지를 약탈했다. 에트루리아 측은 급히 대군을 편성해 맞섰으나 페루시아 전투에서 패배했다.
수트리움을 포위 공격하고 있었던 에트루리아군은 이 소식을 접하자 급히 포위를 풀고 철수하면서, 로마는 수트리움을 지킬 수 있었다. 그 후 에트루리아 연맹의 페루시아, 코르토나, 아레티움이 평화협약을 요청했고, 로마는 이들과 30년 휴전을 맺기로 했다. 다른 에트루리아 도시국가들은 병력을 규합해 로마에 맞섰지만 바디모 호수 전투에서 패배한 뒤 기원전 308년 역시 30년 휴전을 맺고 전쟁에서 이탈했다.
에트루리아와 로마 사이의 이웃인 움브리아인들은 로마의 위세가 갈수록 강해짐에 두려움을 느꼈다. 그들은 에트루리아를 굴복시킨 로마가 자신들마저 복속시키려 들 거라 여겼다. 이에 일부 에트루리아인들의 지원을 받아 대규모 병력을 편성한 뒤 에트루리아에서 로마로 돌아가던 데키우스를 저지했다. 그리고 그동안 다른 병력으로 로마를 급습해 타격을 입히려고 했다. 이 소식을 접한 원로원은 삼니움과 벌인 전쟁에 투입되었던 룰리아누스를 긴급 소환해 움브리아인을 저지하도록 했다.
룰리아누스는 며칠간 강행군한 끝에 페루시아 남동쪽 움브리아 시인 메바니아에서 움브리아군과 마주쳤다. 움브리아인들은 로마군이 숙영지를 짓는 동안 급습했다.[6] 그러나 이어진 전투에서 로마군이 완승을 거뒀고, 움브리아인들은 죽은 자보다 사로잡힌 자가 많았다고 한다.(메바니아 전투) 이리하여 에트루리아와 움브리아를 굴복시킨 로마는 대(對)삼니움 전쟁에 전념했다.
3.4. 전쟁 종결
기원전 312년 아피아 가도가 건설되어 로마에서 삼니움 전선으로의 보급이 용이해지자, 로마군은 대대적인 공세를 준비했다. 기원전 311년, 삼니움족이 선제 공격을 가해 크루발레 시를 공략하고 사로잡은 로마 수비대를 채찍질하자, 집정관 가이우스 유니우스 부불쿠스 브루투스는 크루발레를 탈환한 뒤 보비아눔을 습격해 약탈을 자행했다. 삼니움인들은 접근하기 힘든 산간 초원에 양떼가 많다는 거짓 정보를 줘서 브루투스가 그곳으로 이동하도록 유도한 뒤 매복 공격하려고 했으나, 이를 눈치챈 브루투스가 병사들을 비탈길로 올려보내 매복한 적병을 공격하게 하는 바람에 또다시 패배했다.기원전 310년, 집정관 가이우스 마르키우스 루틸루스 켄소리누스는 알리파에 등 삼니움의 많은 요새와 마을을 파괴하거나 점령했다. 한편 로마의 소규모 선박들이 캄파니아의 폼페이 시로 보내진 뒤 루케리아의 시골 지역을 약탈하다가 지나치게 깊숙이 진군했다. 하지만 시골 사람들이 결성한 민병대의 습격으로 상당한 손실을 입고 패주했다. 이후 삼니움인들은 루틸루스를 회피해 북상하여 에트루리아인과 연합하기로 했다. 루틸루스는 북상하는 삼니움군을 급히 추격해 알려지지 않은 지점에서 따라잡았으나 뒤이은 전투에서 부상을 입고 여러 장교를 상실하는 등 막대한 피해를 입고 패퇴했다.
기원전 309년, 로마 원로원은 북상해오는 적을 막기 위해 루키우스 파피리우스 쿠르소르를 독재관으로 선임했다. 쿠르소르는 삼니움과의 국경 인근의 볼스키족 마을인 롱구라에서 마르키우스와 합류해 병력을 추스린 뒤 삼니움인을 상대로 알려지지 않은 장소에서 맞붙어 승리한 뒤 로마로 귀환하여 개선식을 거행했다. 기원전 308년 집정관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 룰리아누스가 삼니움을 상대로 공세를 개시했지만 그들이 전투를 회피하고 산악 지대와 성채에 의존했기 때문에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로마군은 이렇듯 삼니움과 전쟁을 재개한 뒤 여러 전투에서 승리하면서도 다른 세력들이 공격해오는 통에 삼니움을 결정적으로 무너뜨리지 못하는 참이었다. 그래서 로마는 에트루리아와 움브리아를 잠잠하게 만든 직후인 기원전 307년에 삼니움을 향해 새로운 공세를 개시했다. 당해 집정관이었던 루키우스 볼룸니우스 플람마 비올렌스는 삼니움에 가담한 아풀리아의 살렌티니인들을 공격해 여러 마을을 점령했고,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 룰리아누스는 총독의 자격으로 삼니움인과 벌인 전쟁을 주도했다. 그는 알리파에로 쳐들어온 삼니움인과 맞붙어 격파하고 그네들의 진영을 포위했다. 리비우스에 따르면, 룰리아누스는 삼니움인들이 자비를 베풀어달라고 호소하자 그들을 살려주는 조건으로 모든 무장을 해제한채 옷 한 벌만 입고, 멍에 아래로 지나가라는 명령을 내렸다고 한다. 이는 카우디움 협곡 전투 당시 로마군이 겪었던 굴욕을 복수한 것이었다.(알리파에 전투)
이때 포로들 중에 로마와 동맹을 맺었던 헤르니키족 몇 명이 있었는데, 그는 이들을 로마로 보내 이들이 징집병인지 삼니움을 위해 자진해서 가담했는지 조사하게 했다. 이 소식을 접한 헤르니키족은 로마가 장차 자신들을 징벌하러 들거라 여기고 반기를 들었다. 파비우스는 급히 삼니움을 떠났고, 삼니움인들은 이 때를 틈타 칼라티아와 소라를 공략하고 로마 수비대를 포로로 삼았다.
기원전 306년, 집정관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아르비나는 삼니움 원정에 착수했다. 그러나 삼니움인들이 진군하는 로마군을 잇따라 습격해 타격을 입힌 데다가 보급로를 차단해버려서 곤경에 처했다. 이때 로마에 반기를 들었던 헤르니키인들을 복종시킨 동료 집정관 퀸투스 마르키우스 트레물루스가 그를 구원하기 위해 달려왔고, 두 집정관은 보급로를 차단한 삼니움군을 협공해 수많은 이들을 살육했다. 그러나 삼니움인들은 캄파니아를 습격하여 약탈을 자행하는 등 저항을 꿋꿋이 이어갔다.
기원전 305년, 로마는 삼니움을 굴복시키기 위한 최종 공세를 개시했다. 집정관 루키우스 포스투미우스 메겔루스는 티페르눔으로 진격했고, 동료 집정관 티베리우스 미누키우스 아우구리누스는 삼니움의 네 부족 중 가장 큰 부족인 펜트리족의 수도인 보비아눔으로 행진했다. 티페르눔에 진격한 메겔루스는 삼니움인과 싸운 전투에서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가까운 고지에 숙영지를 세운채 삼니움군과 대치했다. 그러다가 야밤에 적이 방심하는 틈을 타 숙영지에 수비대를 남겨둔 뒤 나머지 병사들을 이끌고 동료 집정관이 있는 보비아눔으로 강행군했다. 그러면서 아우구리누스에게 '자신이 가고 있으니 어서 전투를 개시하라.'고 독촉하는 서신을 보냈다.
아우구리누스는 서신을 받는 즉시 군대를 출격시켜 대치 중이던 삼니움군과 교전했다. 이리하여 발발한 보비아눔 전투는 늦은 오후까지 이어졌지만 양측 모두 비슷한 사상자만 거둘 뿐 승패가 좀처럼 갈리지 않았다. 이때 메겔루스가 이끄는 로마군이 전장에 등장하자, 삼니움인들은 전의를 급격히 상실했다. 로마군은 그런 삼니움인들을 몰아쳐 섬멸한 뒤 다음날 보비아눔을 포위 공격해 순식간에 함락시켰다. 리비우스는 한 기록에는 두 집정관이 보비아눔을 공략한 뒤 로마로 귀환하여 개선식을 거행했다고 밝혔지만, 다른 기록에는 아우구리누스가 전투에서 부상을 입고 사망했으며, 마르쿠스 풀비우스 쿠르부스 파이티누스가 보결 집정관으로 선임되어 메겔루스와 함께 보비아눔을 공략한 것으로 서술되어있다고 설명했다.
《파스티 카피톨리니》는 <개선장군 목록>에서, 마르쿠스 풀비우스 쿠르부스 파이티누스가 삼니움족을 상대로 승리를 거둔 뒤 개선식을 거행한 사실만 기재했을 뿐 아우구리누스가 개선식을 거행했다는 언급은 하지 않았다. 이로 볼 때 리비우스의 설명대로 전투 중에 중상을 입고 사망했을 가능성이 높다. 또한 메겔루스가 개선식을 거행했다는 언급이 없으므로, 고대 문헌과는 달리 실제로는 삼니움을 상대로 큰 전과를 거두지 못하고, 파이티누스의 공적만 인정받았던 듯하다.
보비아눔의 패전 소식은 삼니움 전역에 전해졌고, 삼니움인들은 더 이상 저항할 여력이 없다고 판단한 후 로마에 평화협정을 맺자고 요청했다. 로마인들은 삼니움과 오랜 전쟁을 벌이느라 지칠대로 지쳤기 때문에 삼니움인들의 요청에 반색했지만, 끈질기게 저항하던 그들이 진짜로 평화를 원하는지 의심스러워 집정관 푸블리우스 셈프로니우스 소푸스를 군대와 함께 삼니움으로 파견했다. 소푸스는 삼니움 전역을 여행하면서 들리는 곳마다 선물을 제공하는 사람들을 만났다. 로마 원로원은 소푸스의 보고를 받고 삼니움인들이 비로소 평화를 진심으로 받아들였다고 확신하며 평화협약을 맺기로 했다. 다만 협약 내용에 대해서는 리비우스가 별다른 설명을 하지 않아서 알 수 없다.
4. 제3차 삼니움 전쟁(기원전 298~290)
4.1. 배경
기원전 304년 제2차 삼니움 전쟁을 종결한 로마 공화국은 삼니움족에 지원 병력을 보내고, 로마에 반기를 든 헤르니키족을 지원한 아이퀴족을 공격해 상당한 영토를 확보하고 식민도시를 장악하는 등 세력을 지속적으로 키웠다. 이에 위협을 느낀 에트루리아 연맹은 기원전 299년 로마가 자신들 영역 가까이에 있는 나니아 시를 새로 건설하자 이제는 자기들 차례라고 여기고 전쟁을 준비했다. 그러던 중 갈리아인들이 그들의 영토를 침략하자, 에트루리아인들은 그들에게 "돈을 줄 테니 우리와 함께 로마를 공격하자."라고 제안했다. 그러나 갈리아인들은 자기들이 에트루리아를 약탈하지 않는 조건으로 돈을 받겠지만 로마와 싸울 의사는 없다고 답했으며, 에트루리아인들은 그들에게 돈을 주고 돌려보냈다.로마 원로원은 첩보원들을 통해 에트루리아의 이같은 움직임을 전해듣고 에트루리아와 전쟁을 재개하기로 결의했다. 그들은 아드리아해 연안에 살면서 북쪽의 갈리아계 민족인 세노네스족, 서쪽의 에트루리아에 압박을 받고 있었던 피센테스족에 사절을 보내 동맹을 제안했고, 피센테스족은 이탈리아 중부에서 가장 강력한 군사력을 갖추고, 연이은 전쟁에서 승리하는 로마와 손잡으면 이로울 점이 많다고 여겨 받아들였다. 이후 보결 집정관 마르쿠스 발레리우스 코르부스[7]가 로마군을 이끌고 에트루리아로 쳐들어가서 여러 마을을 약탈했지만, 에트루리아인들은 전투를 거부하고 성채에 틀어박혔다.
한편, 제2차 삼니움 전쟁에서 로마에게 패배한 뒤 평화협약을 맺었던 삼니움인들은 로마가 세력을 지속적으로 확장하는 모습을 지켜보며 에트루리아인처럼 언젠가 저들에게 병합될지도 모른다고 우려했다. 그들은 로마의 위협으로부터 힘을 기르기 위해 이탈리아 남부의 루카니아인들에게 동맹을 제안했다. 그러나 루카니아인들이 동맹을 거절하자, 로마가 에트루리아에 전력을 쏟느라 자기들을 돌아보지 못하는 틈을 타 루카니아를 빠르게 공략하여 세력을 키우기로 했다. 기원전 298년, 삼니움족의 침략으로 많은 도시와 마을을 빼앗긴 루카니아인들이 로마에 사절을 보내 동맹을 맺겠으니 자신들을 도와달라고 요청했다.
할리카르나소스의 디오니시오스에 따르면, 로마는 루카니아인들의 곤경에 연민을 품었기 때문이 아니라 삼니움인들이 루카니아를 병합한다면 강력한 힘을 갖출 것을 두려워했기에 개입하기로 마음먹었다고 한다. 로마 사절이 삼니움으로 찾아와서 루카니아 침공을 중단하라고 요구하자, 삼니움인들은
"로마는 주변 국가들을 마음대로 칠 수 있는데 우리는 왜 그럴 수 없는가?"
라고 반발하며 사절을 위협해 돌려보냈다. 이에 로마는 삼니움을 상대로 전쟁을 선포했다.4.2. 로마군과 에트루리아 - 삼니움 연합군의 전쟁
리비우스에 따르면, 기원전 298년 대삼니움 공세에 착수한 집정관 그나이우스 풀비우스 막시무스 켄투말루스는 삼니움으로 쳐들어가 보비아눔과 아우피덴나를 공략했다고 한다. 현대 학자들은 켄투말루스가 삼니움 연맹을 구성한 4개 부족 중 가장 큰 부족인 페트리족의 수도인 보비아눔을 전쟁 첫 해에 공략했다는 것은 명백한 과장이라고 간주한다. 다만 켄투말루스가 로마와 전쟁할 준비가 덜 되어 싸우기를 회피한 삼니움족 덕분에 여러 마을과 촌락들을 순조롭게 약탈했을 것으로 추정한다.기원전 297년, 로마 시내에 에트루리아인과 삼니움인이 거대한 군대를 일으켜 로마를 향한 합동 공세를 개시할 거라는 소문이 떠돌았다. 이에 로마인들은 제2차 삼니움 전쟁 당시 맹활약한 명장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 룰리아누스를 만장일치로 집정관에 세우려고 했다. 그러나 룰리아누스는 집정관 선거에 출마하지 않았으며, 단독 집정관이 되어달라는 요구를 거부했다. 그러다가 기원전 308년 동료 집정관이었던 푸블리우스 데키우스 무스를 동료 집정관으로 세워주겠다는 제안을 받자 그제야 받아들였다. 그 후 룰리아누스가 에트루리아로 가서 바르바투스의 군대를 인계받는 동안, 무스는 삼니움 전선으로 가서 켄투말루스의 군대를 인계받았다.
그러던 중 로마와 동맹을 맺고 있었던 에트루리아 남쪽의 도시들인 수트리움, 팔레리, 네피의 사절들이 로마에 찾아와서 에트루리아의 도시국가들이 로마에 평화협약을 호소하기 위한 사절을 보내려 한다는 소식을 전했다. 이에 원로원은 룰리아누스에게 에트루리아에서 삼니움으로 이동해 무스와 연합하여 삼니움족을 공격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룰리아누스는 지시에 따라 남하했지만, 삼니움족은 그가 무스와 연합하는 것을 막기 위해 병력 25,000명 가량을 극비리에 파견했다.
이름이 전해지지 않는 삼니움족 장군은 로마군이 강력한 전투력을 갖추고 있고, 지휘관 역시 수많은 승리를 거둘 정도로 지휘력이 탁월한 만큼 정면 대결로는 도저히 승산이 없다고 여겼다. 그 대신, 로마군이 방심한 채 남하하고 있을 때 산길에 매복하고 있다가 적당한 시기에 급습해 큰 타격을 입히기로 했다. 이에 따라 마테세 산맥의 티페르눔 마을 인근 계곡에 매복한 채 룰리아누스의 로마군이 다가오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삼니움족이 매복에 능하다는 것을 지난 전쟁을 통해 확실히 파악하고 있었던 룰리아누스는 티페르눔 계곡의 지형이 매복 공격에 적합한 것을 보고, 삼니움군이 숨어있을 수 있다고 판단해 정탐 능력이 뛰어난 정찰병들을 파견해 적의 존재 여부를 확인하도록 했다. 정찰병들이 돌아와서 삼니움군이 숨어있다고 보고하자, 룰리아누스는 적의 작전을 역이용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전직 집정관이며 현재 레가투스(Legatus: 군단장)를 맡고 있었던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바르바투스에게 기병대를 맡겨 다른 산길을 통해 삼니움군의 배후로 돌아가게 했다. 이후 적을 속이기 위해 일부러 강행군하다가 계곡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사각형 방진을 결성한 뒤 계곡 안으로 천천히 들어갔다.
삼니움인들은 로마군이 매복을 눈치챘다는 것을 깨달았지만 그렇다고 물러날 수도 없다고 보고, 전 병력을 동원해 로마군을 사방에서 에워싸서 공격했다. 사전에 강력한 방진을 갖춘 로마군은 결연히 맞섰지만, 삼니움족이 수적인 우위를 앞세워 악착같이 몰아붙이자 점차 밀리기 시작했다. 룰리아누스는 삼니움군의 중앙 대열을 돌파하기 위해 후방에 대기중이던 정예병들을 투입했다. 이들은 한동안 훌륭한 검술을 발휘해 많은 적을 사살했지만, 삼니움군이 전열을 유지한 채 맞대응하자 수적 열세를 극복하지 못하고 밀려났다.
그때, 바르바투스가 이끄는 로마군 기병대가 삼니움군 후방의 언덕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삼니움군은 이들이 또다른 로마군 집정관 무스의 군단이라고 오판하고, 전의를 급격히 상실해 도주했다. 로마군은 이들을 추격해 3,400명을 사살하고 830명을 생포했으며 군기 23개를 확보했다. 한편, 무스는 티페르눔에서 수백 km 떨어진 말벤툼에서 삼니움군과 합류하기 위해 북상하던 아풀리아인들을 말벤툼에서 격파했다.
룰리아누스는 티페르눔 전투에서 매복한 삼니움족을 격퇴한 뒤 무스와 합류했다. 그 후 두 집정관은 4개월 동안 삼니움족의 여러 마을과 농지를 파괴했지만, 삼니움족이 전투에 불응했기 때문에 더 이상의 성과를 거두지 못하다가 겨울이 다가오자 캄파니아의 겨울 숙영지로 귀환했다. 그 사이, 삼니움족은 에트루리아와 동맹을 맺고 갈리아인을 끌어들여 로마에 공동으로 대항하기로 하고 에트루리아에 사절을 보내 동맹을 제의했다.
기원전 296년,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카이쿠스와 루키우스 볼룸니우스 플람마 비올렌스가 새 집정관에 선임되었다. 전직 집정관 룰리아누스와 무스는 총독의 자격으로 6개월간 삼니움 전선에서 임페리움을 행사할 권리를 인정받았다. 이후 카이쿠스가 에트루리아 전선에서 에트루리아군과 대결하는 동안, 비올렌스는 삼니움 전선으로 가서 룰리아누스 및 무스와 함께 삼니움 각지를 황폐화시켰다. 이에 삼니움 장군 겔리우스 에그나티우스는 다른 장군들에게 오로지 요새에 틀어박혀 수비에 전념하라고 지시한 뒤 자신은 특별히 차출된 정예병을 이끌고 에트루리아로 이동했다.
에트루리아의 도시국가들이 로마군의 기세를 두려워해 동맹 제의를 거절하자, 에그나티우스는 직접 에트루리아 의회에 참석해 에트루리아와 삼니움이 힘을 합쳐야 하는 이유를 설명했다. 그는 삼니움 스스로 로마를 이길 수는 없지만, 강인한 삼니움인과 이탈리아 반도에서 가장 부유한 에트루리아인이 힘을 합친다면 주변 국가들을 학대하는 호전적인 로마인들을 응징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의 논변에 설득된 거의 모든 에트루리아계 도시국가들이 에그나티우스를 지원하기로 했고, 로마의 강한 압박을 받고 있었던 움브리아인 역시 그를 돕기로 했다. 에그나티우스는 여기에 더해 켈트인을 용병으로 고용하려고 했다. 에그나티우스는 이렇게 확보한 연합군을 이끌고 카이쿠스의 로마군을 몰아붙였다. 티투스 리비우스 파타비누스에 따르면, 카이쿠스는 에그나티우스에게 연전연패해 군대의 신뢰를 잃었다고 한다.
이 무렵, 비올렌스는 삼니움에서 3개 요새를 공략한 뒤 루카니아 평민들의 소동을 진압하기 위해 룰리아누스를 루카니아쪽으로 파견하고 무스에게 삼니움의 농촌 지역을 계속 약탈하게 했다. 그러던 중 동료 집정관이 곤경에 처했다는 것을 알게 되자, 비올렌스는 에트루리아 전선으로 향했다. 리비우스에 따르면, 일부 연대기에는 카이쿠스가 비올렌스에게 구원을 요청하는 서신을 보냈지만 나중에 그런 적이 없다고 잡아뗐다고 한다. 하지만 리비우스 본인은 카이쿠스가 실제로 편지를 보낸 적이 없다고 여겼다.
카이쿠스는 비올렌스가 자신을 돕기 위해 오자 열등감을 느끼고 삼니움으로 되돌려 보내려고 했다. 비올렌스가 그와 함께 연합군을 물리치겠다고 밝히자, 카이쿠스는 동료 집정관의 임페리움을 탐낸다며 비난을 퍼부었다. 그러다가 적군이 로마 진영 가까이에 이르자, 군인들은 두 사람이 힘을 합쳐 적에 맞서 싸우라고 강하게 요구했다. 결국 카이쿠스는 뜻을 접어야 했다.[8] 이후 알려지지 않은 장소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에트루리아-삼니움 연합군은 7,900명이 전사하고 2,010명이 생포되는 참패를 당했다고 한다.
비올렌스는 룰리아누스와 무스의 총독직이 곧 만료되기 때문에 삼니움으로 서둘러 돌아갔다. 그러던 중 삼니움인들이 새 군대를 일으켜 캄파니아의 카푸아와 파레르눔 주변 지역을 약탈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그는 방향을 돌려 캄파니아로 향했다. 막대한 약탈품을 챙긴 채 삼니움으로 귀환하던 삼니움군은 비올렌스의 습격으로 인해 참패하고 뿔뿔이 흩어졌으며, 삼니움군 사령관 스타이우스 미나티우스(Staius Minatius)는 생포되었다. 이후 삼니움 전선에 도착한 비올렌스는 룰리아누스의 군대를 에트루리아 전선으로 북상시켜 카이쿠스와 합세하도록 했다. 룰리아누스는 지시에 따라 에트루리아로 가서 카이쿠스와 합세한 뒤 카메리눔에 군대를 주둔시킨 후 로마로 귀환했다. 또한 비올렌스는 무스의 군대를 인계받은 뒤 삼니움에서 작전을 수행하다가 겨울이 다가오자 겨울 숙영지로 귀환했다.
4.3. 센티눔 전투
기원전 296년 말, 삼니움 - 에트루리아 - 움브리아인들이 대군을 편성하고, 켈트계 종족인 세노네스족까지 대규모 병력을 파견했다는 소식이 로마에 전해졌다. 로마는 지금껏 수많은 전투를 치렀지만 4개 종족의 연합군과 맞서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로마인들은 이에 대응하기 위해 수많은 전투에서 승리해 가장 뛰어난 군사령관으로 인정받고 있었던 룰리아누스를 기원전 295년도 집정관에 재선임하고, 이례적으로 제비뽑기를 하지 않은채 에트루리아 전선으로 낙점했다. 여기에 비올렌스를 집정관에 재선시켜서 룰리아누스와 함께 하도록 했다. 하지만 룰리아누스는 이를 거부하고, 자신과 오랫동안 함께 한 동지인 푸블리우스 데키우스 무스를 동료 집정관으로 삼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원로원은 이를 받아들이고, 그 대신 비올렌스의 임페리움을 1년 연장해 삼니움에서 작전을 계속 수행하도록 했다.그러나 룰리아누스가 로마에 가 있느라 자리를 비운 사이, 카메리눔에 주둔하고 있었던 로마군이 세노네스족의 습격으로 궤멸되었다.(카메리눔 전투)[9] 룰리아누스는 생존병들을 수습한 뒤 무스의 군단과 합세했다. 이후 센티눔 평원에 주둔하고 있는 적군을 향해 진군하던 중, 적진에서 탈영한 병사 3명이 룰리아누스를 찾아와서 연합군의 계획을 보고했다. 삼니움족과 세노네스족이 로마군과 정면 대결하는 동안, 에트루리아인과 움브리아인은 로마군의 측면과 후방을 요격하는 동시에 로마 진영을 공략한다는 것이었다.
룰리아누스는 그 계획이 실행된다면 감당할 수 없다고 판단한 후, 켄투말루스와 메겔루스에게 전령을 보내 에트루리아로 쳐들어가 약탈을 자행하라고 지시했다. 두 장군이 이에 따르자, 에트루리아인들은 자국의 시민과 재산을 지키기 위해 움브리아인들을 데리고 그쪽으로 향했다. 티투스 리비우스 파타비누스는 이에 대해
"센티눔의 삼니움군과 세노네스족의 규모는 로마군과 대등했으며, 전장을 떠난 에트루리아인과 움브리아인의 숫자 역시 이와 동등했다. 만약 그들이 떠나지 않았다면, 로마인에게 재앙이 되었을 것이다."
라고 평가했다.이윽고 센티눔 평원에서 마주친 양군은 언덕에 숙영지를 세우고 대치했다. 삼니움군 지휘관 에그나티우스와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세노네스족 지휘관은 에트루리아인과 움브리아인이 돌아올 때까지 전투를 미루려고 했다. 그러나 가능한 한 빨리 승부를 보고 싶었던 로마군이 기병대를 지속적으로 보내 도발하자, 삼니움군과 세노네스족은 당장 전투를 벌이자고 강권했다. 결국 지휘관들은 로마군과 대치한 지 3일째 되는 날 언덕에서 내려와 전투 대형을 형성했고, 룰리아누스와 무스의 로마군 역시 전투 대형을 갖췄다.
전투가 개시되기 전, 세노네스족은 우측에, 삼니움족은 좌측에 배치되었다. 이에 맞서는 로마군에서는 룰리아누스가 우측을, 무스가 좌측을 지휘했다. 이에 따라, 룰리아누스는 삼니움족을 대적하고, 무스는 세노네스족과 대적하게 되었다. 리비우스에 따르면, 전투가 개시되기 직전에 산에서 늑대와 늑대에게 쫓기는 암사슴 한 마리가 양 군대 사이의 평원을 가로질러 달렸다. 그러다가 암사슴은 세노네스족을 향해 달렸고, 늑대는 로마인들에게 향했다. 세노네스족은 암사슴을 사냥했지만, 로마의 건국자 로물루스와 레무스 형제에게 젖을 먹인 늑대를 신성시한 로마인들은 늑대에게 길을 열어줬다. 로마 군영 내의 예언자가 이것은 로마군이 승리할 징조라고 선언하자, 병사들의 사기가 크게 올랐다고 한다.
삼니움족과 오랜 세월 전쟁을 벌인 경험이 있었던 룰리아누스는 삼니움족이 전투 초반에는 적을 상대로 거세게 몰아붙이지만 시간이 지나면 전투력이 급격히 떨어진다는 것을 잘 알았다. 그는 장병들에게 자신의 명령이 있을 때까지 방어에 전념하라고 지시했으며, 후방에 상당 규모의 보병 및 기병 예비대를 배치했다. 특히 탁월한 승마술을 갖춘 캄파니아 기병 1,000명은 자신과 함께 있게 하면서, 적절한 상황이 왔을 때 그들을 투입하기로 했다. 반면 공격적인 성향이 강했던 무스는 병사들에게 단숨에 세노네스족의 대형을 파고들어 승부를 내라고 주문했다.
이윽고 전투 개시를 알리는 나팔이 양쪽에서 울려퍼지자, 양군이 함성을 지르며 진격했다. 룰리아누스의 로마군은 진형을 유지하면서 천천히 전진하다가 매섭게 달려드는 삼니움인들이 휘두르는 검을 방패로 막아내고 수비에 전념했다. 반면 무스의 로마군은 자신들을 향해 돌진하는 세노네스족을 향해 똑같이 달려들어 격투를 벌였다. 무스는 친히 기병대를 이끌고 세노네스족 기병을 향해 두 차례 돌격해 거의 압도할 뻔했다. 그러나 세노네스족의 후방에 배치되어 있었던 전차가 측면으로 이동한 뒤 로마 기병대를 요격하자, 생소한 전차에 겁을 집어먹은 말들이 날뛰면서 로마 기병들은 순식간에 압도되었다. 그들은 사방으로 도주했고, 일부는 보병 대열로 달려들어 전열을 흐트러놓았다.
세노네스족 기병대와 전차들은 로마 기병들을 격파한 기세를 이어가 로마 보병대의 측면과 후방을 공격했다. 무스가 세노네스군을 가능한 한 빨리 압도하기 위해 예비 병력까지 최전선에 보냈기 때문에, 이 공격에 대처할 병력이 없었다. 많은 로마 군단병들이 겁을 먹고 전장을 이탈했으며, 세노네스족은 승기를 잡자 더욱 거세게 밀어붙이며 로마군을 닥치는 대로 쳐죽였다. 무스는 도주하는 병사들을 수습하려고 애썼지만 소용이 없자, 기원전 340년 아버지 푸블리우스 데키우스 무스가 라틴 전쟁 당시 아군이 무너지려 하자 스스로 전장에 뛰어들어 죽음으로써 병사들의 전의를 끌어올려 승리했던 것처럼 자신 역시 스스로 희생함으로써 신이 로마인들에게 승리를 안겨주기를 서원하는 데보티오(Devotio)를 행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폰티펙스 마르쿠스 리비우스 덴테르를 불러 자신의 뜻을 전한 뒤 하늘을 우러러 바라보며 외쳤다.
"야누스, 유피테르, 마르스, 퀴리누스, 벨로나, 라레스, 노벤실레스(Novensiles), 인디게테스(Indigetes), 그외의 모든 신들이여! 부디 로마인들에게 호의를 베풀어서 그들이 승리를 거둬서 널리 번창하게 해주소서. 그리고 로마인의 적들에게 공포와 경악과 죽음을 안겨주소서. 저는 공화국, 로마인, 군단, 동맹군, 그리고 퀴리테스를 위해 적의 군단과 지원군을 나 자신과 함께 조상의 영혼과 대지에 바칩니다. 저는 적의 군기와 깃발과 갑옷을 공포와 도주, 살육과 피, 천상과 지옥의 신들의 진노로 물들게 할 것이며, 제가 이 땅에서 멸망하듯이 갈리아인과 삼니움 역시 이 땅에서 멸망하게 할 것입니다!"
무스는 말을 마친 뒤 로마 군단병들을 뚫고 세노네스군이 가장 많이 모여있는 적진을 향해 말을 몰았다. 얼마 후, 그는 세노네스족의 병사들에게 에워싸여 살해되었다. 무스가 '데보티오'를 행했다고 덴테르가 선언하자, 금방이라도 도망치려 했던 로마군 병사들은 마음을 다잡고 세노네스군에 대항했으며, 뿔뿔이 흩어지던 로마군 장병들 역시 자기들 때문에 지휘관인 무스가 희생되었다는 죄책감과 책임의식을 느끼고 전장으로 돌아왔다고 한다. 여기에 무스의 로마군이 붕괴될 위험에 처했다는 것을 눈치챈 룰리아누스가 일부 예비 병력을 파견했고, 세노네스족은 로마군의 반격에 주춤하다가 물러나서 전투 대형을 재편성하고 호흡을 가다듬었다.전투가 무르익을 무렵, 그때까지 쉬지 않고 로마군을 공격하던 삼니움족이 탈진한 기색을 내비쳤다. 룰리아누스는 즉각 휘하 장병들에게 돌격 명령을 내렸고, 수비만 하면서 체력을 비축한 병사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삼니움군을 몰아붙였다. 여기에 룰리아누스의 예비군이 추가로 최전선에 투입되어 삼니움군의 대열을 뚫기 시작하자, 삼니움군은 더이상 버티지 못하고 패주했다. 룰리아누스는 다른 병사들은 도주하는 삼니움군을 계속 추격하게 하면서도 일부 병력에게는 방향을 틀어 삼니움인들이 도주하면서 측면이 비게 된 세노네스족을 공격하도록 했다. 여기에 지금까지 자신 주변에 있었던 캄파니아 기병 1,000명에게 전장을 돌아가서 세노네스족의 후방을 공격하게 했다.
세노네스족은 테스투도를 형성하며 악착같이 저항했지만, 사방에서 몰아치는 로마군 앞에 오래 버티지 못하고 무너졌다. 로마군은 도주하는 적을 맹렬히 추격해 적진을 함락했다. 삼니움 - 세노네스 연합군은 센티눔 전투에서 괴멸적인 타격을 입었다. 무려 25,000명이 전사하고 8,000명이 생포되었으며, 삼니움군 지휘관 겔리우스 에그나티우스 역시 전사했다. 반면에 로마군은 8,700명이 전사했는데, 룰리아누스의 군대에선 1,700명만 전사했지만 무스의 군대에선 7,000명이 전사했다. 가까스로 목숨을 건진 삼니움군 5,000명은 피센테스족의 영역을 거쳐 본국으로 돌아가려다가 현지인들에게 공격받고 1,000명이 전사했다.
이후 룰리아누스는 페루시아를 공격해 함락시키고 3,000명을 죽인 뒤 로마로 귀환했다. 한편 센티눔을 떠나 본국을 지키려 했던 에트루리아인과 움브리아인들은 켄투말루스와 메겔루스에게 패배해 수천 명을 잃었다. 또한 무스를 대신해 새 지휘관으로 부임한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카이쿠스는 삼니움 전선으로 내려간 뒤 비올렌스와 함께 리리스 강 유역을 침공한 삼니움인들을 상대로 카푸아 인근의 칼라티아에서 격파해 수천 명을 사살하고 많은 병사들을 생포했다.(칼라티아 전투) 로마에 대항해 삼니움과 동맹을 맺었던 에트루리아, 움브리아, 세노네스족은 막대한 피해를 입고 전장에서 이탈했으며, 삼니움인들은 이제 홀로 로마의 공세에 직면해야 했다.
4.4. 로마의 승리
기원전 294년, 원로원은 집정관 마르쿠스 아틸리우스 레굴루스와 루키우스 포스투미우스 메겔루스에게 삼니움 정벌을 지시했다. 그러나 삼니움인들은 이대로 무력하게 당하고만 있을 생각 따위는 없었다. 그들은 레굴루스의 군대가 로마와 삼니움을 있는 도로에 주둔하고 있을 때 짙은 안개가 낀 틈을 타 로마 진영을 습격해 진영 중앙까지 침투하여 재무관을 포함한 많은 이들을 살육했다. 로마군은 그들을 어렵게 물리쳤지만 안개 때문에 추격하지 않았다. 이후 레굴루스는 소라로 후퇴했고, 병에 걸려서 출발이 지연되었던 메겔루스가 뒤늦게 회복된 뒤 그와 합세했다.이후 메겔루스가 삼니움으로 진군하여 삼니움의 두 마을인 밀로니아와 펜트룸을 공략하는 동안, 레굴루스는 삼니움군에게 포위된 아풀리아 지방의 루케리아를 구원하러 진격했다가 적에게 요격되어 7,800명을 상실했다. 하지만 그는 기병대를 이끌고 돌아가는 삼니움인들을 추격해 비슷한 숫자의 삼니움인들을 살해했다. 한편 메겔루스는 적이 전투에 응하지 않자 원로원의 동의를 구하지 않고 삼니움에서 에트루리아로 이동해 에트루리아 연맹의 일원인 볼시니 시의 영토를 황폐화시키고 이를 막으려는 적군을 잇따라 격파했다. 이에 볼시니, 페루시아, 아레티움 시가 평화협약을 맺자고 로마에 호소했으며, 메겔루스는 배상금 500,000아스를 받는 조건으로 40년 휴전 협약을 맺기로 했다.[10]
이렇듯 어떻게든 로마를 물리치려고 했지만 갈수록 불리해지기만 하자, 삼니움 정부는 특단의 조치를 내리기로 했다. 전투에 참가할 수 있는 장정들 전원에게 소집령을 내렸고, 이에 불응한 이들을 처형한 후, 유피테르를 기리는 희생제를 거행했다. 60,000명 가량이 아퀼로니아 시에 집결했고, 삼니움 사제 오비우스 파키우스(Ovius Paccius)는 아퀼로니아에 집결한 장정들 앞에서 특별한 의식을 거행했다. 티투스 리비우스 파타비누스에 따르면, 진영 중앙에 판자를 치고 리넨 천으로 덮은 200평방 피트의 건물이 세워졌다. 파키우스는 그 안에 들어가서 카푸아를 공략할 때, 조상들이 에트루리아인들로부터 받았다는 아마포 책[11]을 읽었다.
이후 삼니움족 병사가 한 명씩 파키우스가 있는 건물로 들어가서 희생 제물처럼 제단으로 인도되었다. 그는 그곳에서 보고 들은 것을 누설하지 않기로 맹세했고, 자신이 지휘관들이 이끄는 전투에 들어가지 않거나 전투에서 스스로 도망치거나 적병을 즉시 죽이지 않는다면 자신과 가족과 종족이 영원한 저주를 받는 것을 받아들이겠다고 서약해야 했다. 이 맹세를 거부하는 사람들은 즉시 살해되었고, 맹세를 한 이들은 자신과 함께 할 전우 10명을 선택하도록 했다. 리비우스는 이렇게 해서 뽑힌 병사가 16,000명이었는데, 리넨 천으로 가려진 건물 안에서 뽑혔기에 리넨 군단이라는 별칭으로 불렸다고 기록했다. 리비우스는 이들의 갑옷이 은색으로 도배되었다고 밝혔다. 여기에 병력 20,000명 남짓이 추가로 뽑혔는데, 군인의 자질 또는 장비의 우수성에서 리넨 군단보다 결코 못하지 않았다고 한다.
기원전 293년, 집정관 스푸리우스 카르빌리우스 막시무스와 루키우스 파피리우스 쿠르소르는 지난해 집정관들로부터 군대를 인계받은 뒤 삼니움으로 쳐들어갔다. 그들은 각각 아미테름눔과 듀로니아 시를 공략하고 수천 명을 살해했으며, 그보다 많은 이들을 포로로 잡았다. 이후 쿠르소르는 대부분의 삼니움 군대가 집결한 아퀼로니아로 향했고, 카르빌리우스는 약 20마일 떨어진 코미니움으로 진군한 뒤 포위했다. 쿠르소르의 군대와 삼니움군 간에 소규모 접전이 벌어졌지만, 삼니움인들은 회전을 쉽사리 벌이려고 하지 않았다.
그러던 중, 삼니움 진영에서 탈영한 삼니움인 20명이 쿠르소르에게 각각 삼니움 전사 400명으로 구성된 삼니움군 20개 부대가 코미니움으로 향했다고 전했다. 쿠르소르는 즉시 동료 집정관에게 전령을 보내 이 사실을 알린 뒤 전투 대형을 갖추고 적진을 압박했다. 카르빌리우스는 쿠르소르로부터 이 소식을 전해들은 뒤 8,500명 가량인 분견대를 파견해 코미니움으로 향하는 삼니움군을 중간에서 요격하도록 했다. 하지만 그 전사들은 코미니움으로 향하던 중 본진으로 복귀하라는 지시를 받아 본영으로 돌아섰기에, 카르빌리우스는 삼니움군을 만나지 못했다.
쿠르소르는 부관이었던 루키우스 볼룸니우스 플람마 비올렌스에게 우측 부대를 맡겼고,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바르바투스에게 좌측 부대를 맡겼다. 여기에 가이우스 카이디키우스와 티투스 트레보니우스에게 각각 좌익과 우익 기병대를 지휘하게 했다. 보조 부대를 지휘하는 스푸리우스 나우티우스는 수많은 노새와 3개 코호트를 이끌고 인근 언덕으로 보내졌다. 리비우스에 따르면, 이후 벌어진 전투에서 로마인들이 승리를 확신하며 공세를 퍼부은 데 비해, 삼니움인들은 거듭된 패배에 익숙해진 데다가 강제로 끌려와서 공포스러운 의식을 치른 것에 깊은 절망감을 느끼고, 동족을 로마군보다 더 두려워했기 때문에 소극적으로 임했다고 한다.
그러던 중 스푸리우스 나우티우스가 3개 코호트를 이끌고 언덕에서 내려와 삼니움군의 후방에 접근했다. 이때 그의 뒤를 따르는 노새들로 인해 먼지구름이 심하게 일자, 삼니움군은 저들이 또다른 집정관 카르빌리우스의 군대라고 여기고 전의를 상실해 도주하기 시작했다. 대부분의 보병은 자기 진영이나 아퀼로니아로 도주했고, 귀족과 기병은 보비아눔으로 도망쳤다. 볼룸니우스는 적진을 공략했고, 스키피오는 아퀼로니아로 쳐들어가서 필사적으로 저항하는 삼니움군을 무리치고 성문 하나를 공략했다. 이에 도시 수비대는 어둠이 깔려서 로마군이 물러난 틈을 타 탈출했다.
로마군은 아퀼로니아 전투에서 적병 20,000명을 사살하고 4,000명을 생포했으며 군기 97개를 노획했다. 사상자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미미했으리라. 한편 본진으로 귀환하던 삼니움 전사 8,000명은 아퀼로니아 전투 소식을 전해듣고는 도주했는데, 로마군은 이들을 추격해 군기 수십 개를 추가로 노획했다. 이후 구원을 받을 여력이 없어진 코미니움도 카르빌리우스의 로마군에게 함락되었다. 로마군은 여세를 이어가 삼니움의 주요 도시 중 하나인 세피눔을 공략했다. 겨울이 찾아오자 두 집정관은 로마로 귀환해 개선식을 거행했다. 이후 쿠르소르는 캄파니아로 가서 삼니움족의 습격에 대비했고, 카르빌리우스는 로마군이 삼니움 전선에 집중한 사이 로마 동맹국을 공격한 에트루리아로 쳐들어가 트로니움을 공략하고 요새 5곳을 추가로 함락한 뒤 에트루리아인들로부터 막대한 벌금을 받아내고, 로마로 귀환했다.
제3차 삼니움 전쟁에 대해 상세한 서술을 남긴 리비우스의 기록은 카르빌리우스의 에트루리아 침공 이후 소실되었고, 리비우스의 역사서를 요약한 《페리오케》(Periochae)에서 간략한 이야기만 전해지기 때문에, 이후의 전쟁이 어찌 되었는지는 파악하기 어려우며, 단지 몇 가지 일화만 전해진다. 기원전 292년 집정관에 선임된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 구르게스는 삼니움의 영토로 진군했지만 적의 매복으로 큰 피해를 입자, 아버지인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 룰리아누스를 레가투스(Legatus: 군단장)로 초빙했다.
이후 아버지의 조언에 따라 삼니움족을 격파해 삼니움인 20,000명을 사살하고 4,000명을 사로잡았으며, 여러 삼니움 도시를 공략했다. 이때 지난날 카우디움 협곡 전투때 로마군에게 굴욕을 안겨줬던 가이우스 폰티우스 역시 사로잡혔고, 구르게스가 로마로 돌아와서 벌인 개선식때 참수되었다. 또한 그가 개선식에서 4륜 마차를 타고 있는 동안 아버지는 말을 타고 그와 동행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현대의 많은 학자들은 리비우스가 로마에게 굴욕을 안겨준 폰티우스가 개선식에서 처단되었다는 이야기를 꾸며내어 로마 독자들에게 쾌감을 안겨주고, 아들이 아버지의 조언을 받아들여 곤경에서 벗어난 이야기를 만들어 젊은이들에게 교훈을 주기 위해 임의로 꾸며냈다고 주장한다.
디오 카시우스와 요안니스 조나라스에 따르면, 구르게스는 기원전 291년 원로원의 지시에 따라 전직 집정관의 자격으로 삼니움의 코미니움 시를 포위 공격했다. 이때 당해 집정관 루키우스 포스투미우스 메겔루스가 현장에 달려와서 당장 물러나라고 강요했다. 이에 원로원에서 사절을 보내 제지하자, 메겔루스는
"집정관은 원로원의 명령을 받드는 사람이 아니라 스스로 통치를 행사하는 자다."
라며 거부했다. 결국 구르게스는 물러나야 했고, 메겔루스는 코미니움 시 공방전을 진두지휘한 끝에 공략에 성공했다. 뒤이어 베누시아를 공격해 역시 함락시켰다.[12]할리카르나소스의 디오니시오스에 따르면, 로마 원로원은 이 시기에 루카니아와 아풀리아, 삼니움 일대에 식민도시들을 건설하고 로마 시민 20,000명을 이주시켰다고 한다. 에우트로피우스에 따르면 기원전 290년 집정관 마니우스 쿠리우스 덴타투스와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루피누스가 삼니움의 영역으로 재차 침공해 몇 차례의 전투에서 승리한 뒤 삼니움인들로부터 로마와 영원히 동맹을 맺고, 자치권을 유지하는 대가로 공물을 납부하고 병력을 지원하겠다는 서약을 받아냈다고 한다. 이리하여 삼니움은 로마 공화국에 종속되었다.
5. 결과
이 세 차례의 전쟁으로 인해 반(反)로마 동맹은 깨졌고, 삼니움족은 로마에게 영토를 내놓으며 항복했다. 로마는 이들의 감시를 위해 산 한 가운데에 식민지를 건설했다. 삼니움족을 굴복시킨 로마는 이탈리아 중부를 손에 넣었지만 로마의 급격한 팽창을 경계한 이탈리아 남부의 그리스계 도시들(마그나 그라이키아)과 긴장 관계에 놓이게 되었고, 사소한 분쟁은 곧 피로스 전쟁으로 이어지게 되었다.6. 주요 전투
삼니움 전쟁의 전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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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우루스 산 전투 | 사티쿨라 전투 | 수에술라 전투 | 기원전 342년 로마군 반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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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 제1차 삼니움 전쟁
- 가우루스 산 전투(기원전 343년)
- 사티쿨라 전투(기원전 343년)
- 수에술라 전투(기원전 343년)
- 기원전 342년 로마군 반란(기원전 342년)
6.2. 제2차 삼니움 전쟁
- 네아폴리스 공방전(기원전 327년)
- 임브리니움 전투(기원전 325년)
- 카우디움 협곡 전투(기원전 321년)
- 라우툴레 전투(기원전 315년)
- 타라키나 전투(기원전 314년)
- 수트리움 공방전(기원전 311-310년)
- 페루시아 전투(기원전 310년)
- 바디모 호수 전투(기원전 309년)
- 메바니아 전투(기원전 308년)
- 알리파에 전투(기원전 307년)
- 보비아눔 전투(기원전 305년)
6.3. 제3차 삼니움 전쟁
- 티페르눔 전투(기원전 297년)
- 기원전 296년 에트루리아-삼니움 전역(기원전 296년)
- 카메리눔 전투(기원전 295년)
- 센티눔 전투(기원전 295년)
- 아퀼로니아 전투(기원전 293년)
[1] 기원전 500년부터 기원전 218년까지 로마 공화국의 영토 확장 과정[2] 원래는 갈리아 북부에 살던 족속으로, 알프스 산맥을 넘어 이탈리아 반도에 침입하여 북부 지역을 장악했다.[3] 티투스 리비우스 파타비누스의 기록이다. 다만 현대 학계에서는 명백한 과장으로 간주한다.[4] 리비우스는 소의 멍에였다고 밝혔고, 아피아노스는 창을 멍에로 사용했다고 밝혔다.[5] 훗날 피로스 전쟁때 이 곳에서 승리한 로마군이 베네벤툼으로 변경했다.[6] 티투스 리비우스 파타비누스에 따르면, 또다른 기록에는 룰리아누스가 병사들에게 연설하고 있을 때 움브리아인들이 달려들었다고 한다.[7] 원래는 집정관 티투스 만리우스 토르콰투스가 파견될 예정이었으나 승마 사고로 사망했기에 코르부스가 대신 뽑혔다.[8] 다만 현대의 많은 학자들은 카이쿠스가 동료 집정관에게 열등감을 느끼고 그와 함께 싸우려 하지 않았다는 이 기록은 클라우디우스 가문과 카이쿠스 본인을 질시한 경쟁 귀족들이 꾸며낸 이야기라고 주장한다.[9] 리비우스의 또다른 기록에 따르면, 카메리눔의 식량 채집원들이 움브리아족의 습격을 받아 패퇴했다고 한다.[10] 티투스 리비우스 파타비누스는 두 가지의 다른 이야기도 소개했다. 첫 번째 이야기에 따르면, 에트루리아에 가서 승리를 거둔 것은 레굴루스였고, 메겔루스는 삼니움의 일부 도시를 점령한 뒤 아풀리아에서 패배하여 부상을 입은채 루케리아로 피신했다고 한다. 또다른 이야기에 따르면, 두 집정관은 각각 삼니움과 루케리아에서 싸웠고, 모두 막대한 손실을 입었다고 한다.[11] 신에게서 받았다고 전해지는 계시가 담겨 있었다고 한다.[12] 하지만 메겔루스는 집정관에서 물러난 직후인 기원전 290년 원로원의 지시에 불응하고, 제멋대로 행동한 혐의로 고발당해 500,000아스를 벌금으로 납부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