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63년 파르티아-로마 전쟁 영어: Roman–Parthian War of 58–63 | ||
시기 | 58년 ~ 63년 | |
장소 | 아르메니아 | |
원인 | 동생인 티리다테스 1세를 아르메니아 왕국의 군주로 세우려고 했던 볼로가세스 1세의 아르메니아 침공 | |
교전 세력 | 로마 제국 이베리아 왕국 헤로데 왕조 | 파르티아 아르샤쿠니 왕조 |
지휘관 | 네로 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코르불로 움미디우스 콰드라투스 루키우스 유니우스 카이세니우스 파에투스 라다미스투스 티그라네스 6세 | 볼로가세스 1세 모나세스 티리다테스 1세 |
병력 | 6개 군단 | 불명 |
피해 | 불명 | 불명 |
결과 | 로마 제국과 파르티아 제국의 타협.[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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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서기 58~63년, 아르사케스 왕조 파르티아 제국의 샤한샤였던 볼로가세스 1세가 동생인 티리다테스 1세를 아르메니아 왕국의 군주로 옹립하기 위해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 로마 제국의 속국인 아르메니아 왕국을 침공하면서 벌어진 전쟁이다. 5년간의 전쟁 끝에 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코르불로의 중재로 양국이 만족할 수 있는 합의가 맺어졌다.2. 배경
기원전 53년 카르헤 전투의 참사가 벌어진 이래, 로마 공화국 및 로마 제국과 파르티아 제국은 여러 차례 충돌했다.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카이사르의 내전에서 승리하여 종신 독재관이 된 뒤 카르헤 전투의 참패를 복수하겠다는 명분으로 파르티아 원정을 준비했으나 암살당했다. 그후 로마 공화국이 카이사르파와 '해방자파'간의 내전(해방자 내전)으로 혼란스러워진 틈을 타, 파르티아는 기원전 40년 시리아를 전격적으로 침공했다. 당시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의 부관이었던 푸블리우스 벤티디우스 바수스가 맹활약하여 이들의 침략을 격퇴했지만, 로마 공화국은 그 과정에서 여러 총독이 죽고, 동방 속주의 질서가 파괴되는 등 상당한 손실을 입었다.마르쿠스 안토니우스는 이에 보복하고 카이사르가 이루지 못한 사명을 자신이 이뤄서 불후의 명성을 얻고자 기원전 36년 100,000명의 대군을 동원하여 파르티아 원정을 감행했으나 실패했다. 그 후 안토니우스를 악티움 해전에서 꺾고, 로마 제정을 출범시킨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의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는 기원전 20년 유프라테스 강변에 대군을 배치한 뒤 파르티아의 샤한샤 프라아테스 4세와 협상한 끝에 양국의 경계를 유프라테스 강으로 확정짓고, 파르티아로부터 지난날 빼앗겼던 군단기들을 돌려받았다. 또한 안토니우스를 따랐다가 포로가 된 로마군 병사들도 돌려받았다. 다만 카르헤 전투의 포로들은 이미 시간이 많이 지나 다 죽어버렸기에 돌려받지 못했다.
이때 프라아테스 4세는 아우구스투스가 티그라네스 3세를 아르메니아 왕위에 앉히는 걸 인정했고, 아르메니아 왕국은 이때부터 로마 제국의 속국이 되었다. 서기 12년, 파르티아의 샤한샤 보노네스 1세는 아르타바노스 2세를 상대로 내전을 치르다가 불리해지자 아르메니아로 이동하여 아르탁세스 왕조의 마지막 군주였던 티그라네스 5세와 에라토를 몰아내고 아르메니아의 국왕이 되었다. 그는 로마 제국의 지원을 받으며 6년간 버텼지만, 서기 18년 아르타바노스 2세가 아들인 오로데스를 아르메니아의 왕위에 세우고자 침공하면서 위기에 직면했다.
보노네스 1세는 로마 제국에 지원을 호소했고, 제2대 황제 티베리우스는 의붓아들인 게르마니쿠스를 파견했다. 하지만 게르마니쿠스는 전쟁을 원하지 않는 황제의 뜻에 따라 아르타바노스 2세를 파르티아 제국의 샤한샤로 인정하고, 그 대신 로마 제국이 지정한 아르메니아 왕 아르탁세스 3세를 파르티아 제국이 인정하기로 했다. 게르마니쿠스와 아르타바노스 2세는 유프라테스 강의 한 섬에서 만나 우호조약을 체결했다. 보노네스 1세는 시리아로 이송된 뒤 시리아 총독 실라누스 크레티쿠스의 감시하에 망명 정부를 구성했지만, 아르타바노스 2세의 강력한 항의를 받은 로마 정부가 킬리키아의 폼페이오폴리스로 강제 이주시키는 걸 피하려다가 피살당했다.
서기 34년 아르탁세스 3세가 사망한 뒤, 아르타바노스 2세는 장남인 아르사케스 1세를 아르메니아의 왕위에 앉히기로 마음먹고, 강력한 군대를 맡겨 아르메니아로 진격하도록 했다. 이에 티베리우스 황제는 로마가 아르메니아 왕을 선임하는 것에 동의해놓고 또다시 아르메니아 왕위를 노리는 파르티아에 분개하여 시리아 총독 루키우스 비텔리우스에게 반격하라고 명령했다. 비텔리우스는 이베리아 왕국(현재 조지아)의 왕자였던 미트리다테스를 아르메니아의 왕으로 세우기로 했다. 이에 이베리아인들이 호응하여 중앙아시아 출신의 유목민족들을 용병으로 기용하여 아르메니아로 진격했다. 또한 비텔리우스는 제3 갈리카 군단, 제6 페라타 군단, 제10 프레텐시스 군단, 제12 풀미나타 군단 등 4개 군단에게 파르티아군과의 일전을 준비하라고 명령했다.
이렇듯 로마와 파르티아 간에 전운이 감돌던 중, 아르사케스 1세가 서기 35년 경 돌연 사망했다. 하인들이 미트리다테스의 사주를 받고 그를 독살했다는 소문이 파다했지만, 사실 여부는 불명확하다. 그리하여 미트리다테스가 아르메니아의 왕위에 오르자, 아르타바노스 2세는 또다른 아들인 오로데스를 아르메니아의 왕으로 세우고자 아르메니아 왕국에 대규모 원정군을 파견했다. 하지만 미트리다테스는 알바니아인 및 사르마티아 지원군과 함께 이들을 물리쳤다. 그 사이에 비텔리우스의 로마 군대가 유프라테스 강 너머의 파르티아 영토에 진주했고, 파르티아 귀족들이 반란을 일으켜 수도 크테시폰에서 티리다테스 2세를 샤한샤에 올렸다. 결국 아르타바노스 2세는 티리다테스 2세와 내전을 치러야 했고, 미트리다테스는 그 사이에 아르메니아 왕국을 수월하게 장악할 수 있었다.
그러나 37년 3월 16일 티베리우스 황제가 붕어한 후 제3대 황제가 된 칼리굴라는 알 수 없는 이유로 미트리다테스를 폐위시키고 로마로 소환했다. 마침 내전을 수습하고 파르티아 전역을 다시 장악한 아르타바노스 2세는 이때를 틈타 아들인 오로데스를 아르메니아의 왕위에 앉혔다. 이후 시리아 총독이었던 루키우스 비텔리우스와 아르타바노스 2세가 유프라테스 강둑에서 만나 협상했다. 협상 결과, 파르티아는 로마와 동등한 주권을 갖는 걸 인정받고 오로데스의 아르메니아 집권도 인정받았으나 아르메니아 왕이 로마 황제를 섬겨야 한다는 걸 인정해야 했다. 이에 더해 다리우스라는 이름의 왕자를 로마 제국에 인질로 보내야 했다.
서기 42년 오로데스가 사망하자, 로마 제국의 제4대 황제였던 클라우디우스 1세는 미트리다테스를 아르메니아 왕에 복위시켰다. 당시 파르티아는 바르다네스 1세와 고타르제스 2세 형제 간의 내전으로 인해 로마가 아르메니아를 가져가는 걸 막지 못했다. 로마군 수비대는 아르메니아의 수도인 아르탁사타 인근의 고르니(Gornae) 요새에 주둔하며 미트리다테스의 왕위를 보장했다. 그러나 미트리다테스는 입지가 여전히 불안하다고 여기고 위험인물로 간주된 인사들을 학살하며 백성들을 폭압적으로 다스렸다. 결국 서기 51년, 미트리다테스의 공포 통치에 반감을 품은 아르메니아 백성들의 추대를 받은 이베리아 왕자 라다미스투스가 이베리아인들을 이끌고 아르메니아로 쳐들어왔다. 그는 아르메니아군을 격파하고 고르니 요새에서 폭군 미트리다테스를 포위했다.
라다미스투스는 폴리오에게 뇌물을 줘서 게르니의 성문을 열게 하려고 했다. 폴리오는 이에 따르려 했지만, 카스페리우스는 강하게 반대하면서 카파도키아 총독 율리우스 파엘리그누스에게 개입을 요청했다. 그러나 폴리오는 결국 카스페리우스의 반대를 물리치고 성문을 열어 이베리아군이 성안으로 들어오도록 했다. 로마군의 배신으로 체포된 미트리다테스는 가족과 함께 목이 졸려 질식사했다. 율리우스 파엘리그누스는 아르메니아 탈환을 위해 출정했지만, 도중에 계획을 바꿔 라다미스투스를 아르메니아의 왕으로 인정했다.
서기 51년 파르티아 제국의 샤한샤에 등극한 볼로가세스 1세는 동생인 티리다테스를 아르메니아의 왕으로 옹립하기로 마음먹었다. 볼로가세스 1세는 장남이지만 친모가 후궁이어서 적통인 동생 티리다테스보다 정통성이 밀렸다. 그러나 티리다테스가 '장자가 즉위하는게 옳다'라며 양보해서 샤한샤에 즉위할 수 있었다. 그래서 볼로가세스는 동생에게 보답하고 귀족들의 반발을 달래기 위해 티리다테스를 아르메니아의 왕으로 올려주려 한 것.
그는 찬탈자를 몰아낸다는 명분을 내세우며 아르메니아로 진군하여 적의 미약한 저항을 가차없이 물리치고, 수도 아르탁사타를 공략한 후 동생을 왕위에 올렸다. 그러나 혹독한 겨울과 식량 부족에 시달리다가, 메디아와 히르카니아에서 아들인 바르다네스 2세가 반란을 일으키자 어쩔 수 없이 파르티아로 돌아갔다. 폐위된 라다미스투스는 이베리아로 피신했다가 파르티아군이 돌아가자 아르메니아로 돌아간 뒤 파르티아인들에게 항복한 아르메니아 도시들을 엄벌에 처하고 많은 인사들을 처형했다. 이에 서기 55년 아르메니아인들이 반란을 일으켜 라다미스투스를 추방하고 티리다테스를 왕으로 추대했다.
그러나 로마 제국은 파르티아 제국이 아르메니아 왕국을 이대로 장악하는 걸 원하지 않았다. 55년 초, 시리아 총독 움미디우스 콰드라투스는 프레텐시스 제10군단과 풀미나타 제12군단을 편성했다. 여기에 카파도키아 사령관 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코르불로가 3군단 갈리카와 6군단 페라타를 재편성했다. 두 지휘관 모두 볼로가세스 1세에게 사절을 보내 외교적인 해결을 모색했다. 아들인 바르다네스 2세의 반란 진압에 몰두하고 있었던 볼로가세스 1세는 이에 응해 시리아 총독 움미디우스에게 인질을 보냈다. 그러나 티리다테스가 아르메니아의 왕이 되기를 고수했고, 58년에 기병대를 보내 로마령 시리아 속주를 급습했다. 이리하여 로마 제국과 파르티아 제국 간의 전쟁이 발발했다.
3. 전개
서기 58년 아르메니아군과 로마군 사이의 전초전이 벌어진 후, 코르불로는 아르메니아의 수도인 아르탁사타로 진격했다. 파르티아-아르메니아 연합군은 로마군의 침략에 맞섰지만, 코르불로는 트라페준타와 흑해의 여러 항구들에 정박한 로마 함선들의 지원을 받아 여러 도시를 점령하고 파괴했다. 그의 전략은 아르메니아인들에게 가능한 한 많은 공포심을 유발하여 파르티아군을 돕거나 로마군에 저항할 의지를 꺾는 것이었다. 아르탁사타의 주민들은 이에 공포를 느끼고 로마군이 접근했을 때 저항하지 않은채 항복했다. 아르메니아에서 아르탁사타 다음으로 중요한 요새 도시였던 티그라노케르타 역시 별다른 저항을 하지 않고 항복했다. 59년, 티리다테스 1세는 더 이상 저항할 여력이 없자 본국인 파르티아로 피신했다.티리다테스 1세를 축출한 뒤, 로마군은 헤롯 대왕의 후손이며 헤롯 아그리파 2세의 친척이었던 티그라네스 6세를 아르메니아의 왕으로 옹립했다. 이후 로마군이 겨울 숙영을 위해 시리아 속주로 돌아가자, 티리다테스 1세가 아트로파테네에서 아르메니아 북부로 이동했다. 그러나 60년 봄 로마군의 압박으로 다시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아르메니아의 새 왕이 된 티그라네스 6세는 61년 파르티아의 샤한샤 볼로가세스 1세의 동생인 파코로스가 다스리고 있었던 메디아 아트로파테네를 습격했다.
동방에서 일어난 바르다네스 2세의 반란을 진압하느라 아르메니아 문제에 직접 개입하지 않았던 볼로가세스 1세였지만, 이제는 더 이상 좌시할 수가 없었다. 그는 귀족회의를 소집하여 형제인 티리다테스가 아르메니아의 정당한 왕임을 선언하고, 바르다네스 2세와 휴전협약을 맺은 뒤 아르메니아로 향하는 반격을 개시했다. 볼로가세스 1세는 모나세스(Monaeses) 장군을 파르티아군 사령관으로 임명하여, 메디아 아트로파테네의 군대와 합세해 아르메니아로 쳐들어가도록 했다. 티그라네스 6세는 수도 아르탁사타에서 티그라노케르타로 이동한 뒤 그곳에서 농성했고, 파르티아군은 성의 보급로를 차단한 후 포위 공격을 가했다. 하지만 티그라노케르타는 좀처럼 함락되지 않았고, 코르불로는 유프라테스 강변에 로마 군대를 집결시키면서, 여차하면 메소포타미아를 직접 치려고 했다. 그러자 볼로가세스 1세는 코르불로에게 사절을 보내 평화협상을 제안했다. 이때 코르불로는
"티리다테스를 아르메니아의 왕으로 세우는 걸 인정하겠지만, 즉위식을 로마에서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라고 권유했다. 볼로가세스 1세는 이를 호의적으로 받아들여 이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로마에 사절단을 보내는 한편 모나세스에게 포위망을 푼 후 철수하라고 지시했다.한편, 루키우스 유니우스 카이세니우스 파에투스 장군이 마케도니아 제5군단, 스키티카 제3군단, 풀미나타 제12군단 등 3개 군단을 이끌고 북방 전선에 도착했다. 그는 코르불로와 파르티아 간에 평화협상이 이뤄지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지만, 공적을 세우고 싶은 마음에 이를 무시하고 스키티카 제3군단과 풀미나타 제12군단 등 2개 군단을 이끌고 아르메니아 왕국으로 쳐들어갔다. 그들은 유프라테스 강을 건너 티리다테스에게 충성했던 아르메니아의 여러 요새를 공략했다. 그러나 샤한샤 볼로가세스 1세는 즉시 반격을 가하여 파에투스를 격파하고, 아르사모사타 인근 란데이아에서 그들을 포위했다. 코르불로는 아군을 구하고자 달려갔으나, 그가 도착하기 전에 파에투스가 항복하면서 무위로 그쳤다. 볼로가세스 1세는 로마와 평화협상을 하고 싶었기 때문에 2개 군단을 무장해제시킨 뒤 고향으로 돌려보내는 관대한 조치를 내렸다.
이후 62년/63년 겨울에 다시 평화협상이 재개되었다. 샤한샤 볼로가세스 1세는 코르불로의 제안대로 하자고 권했지만, 로마 당국은 패배한 뒤 협정을 맺는 걸 굴욕으로 여겨 거부하고 또다시 전쟁을 준비했다. 63년 봄, 코르불로는 4개 군단을 이끌고 아르메니아로 진군했다. 볼로가세스 1세와 티리다테스는 이번에는 승리할 가망이 없다고 여겼다. 하지만 코르불로 역시 적이 산악 지형에서 버틴다면 공략하기 매우 어렵고, 아르메니아인들이 티그라네스 6세보다는 티리다테스 1세를 지지한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더 이상 전쟁을 벌이는 건 무익하다고 판단했다.
결국 양자는 전쟁을 멈추고 평화협약을 맺기로 합의했다. 코르불로와 티리다테스는 란데이아에서 조우했다. 티리다테스는 로마군 진영에 이르러 왕관을 벗어 로마 황제 네로의 동상 앞에 놓고, 로마에서 개최되는 대관식에서 네로로부터 왕관을 돌려받기로 했다. 로마는 티리다테스 1세를 아르메니아의 왕으로 인정하는 대신, 로마군 수비대를 소펜에 영구적으로 주둔하도록 했다. 네로 황제는 협상 결과에 만족을 표했고, 66년 10월 네아폴리스(나폴리)에 도착한 티리다테스 1세를 친히 맞이하며 극진한 대접을 해줬다. 이후 티리다테스 1세는 로마에서 즉위식을 거행하고 네로에게 충성을 맹세한 뒤, 막대한 선물을 받고 아르메니아 왕국에 귀환했다. 이리하여 양대 제국의 전쟁은 종결되었다.
4. 이후
티리다테스는 아르메니아 왕국으로 돌아간 뒤 수도 아르탁사타의 재건을 위해 숙련된 많은 장인들을 고용했고, 도시가 재건되었을 때 네로 황제를 기리기 위해 '네로니아'라는 이름을 지었다. 또한 인근의 가르니에 있는 왕궁을 눈부시게 풍요로운 기둥과 기념물로 장식했으며, 로마식 목욕탕도 갖추고, 조로아스터교 사원을 건설했다. 아르메니아는 그의 치세 동안 로마 제국과 파르티아 제국 간의 완충국이자 로마 황제에 진심으로 충성하는 동맹국으로서 번영을 구가했다. 한편, 파르티아 제국 역시 티리다테스가 아르메니아의 왕이 되는 걸 받아들인 네로 황제에게 감사를 표했고, 서기 67년 유대 반란이 발발하자 로마군을 돕기 위해 40,000명의 파르티아군 기마 궁수대를 지원했다.그러나 양 제국의 밀월 관계는 68년 네로가 자살한 뒤 악화되었다. 샤한샤 볼로가세스 1세는 로마 제국에서 내란(네 황제의 해)이 벌어지자, 유대 반란 진압군 사령관이었던 베스파시아누스에게 황제가 되도록 지원해주겠다고 제안했지만 거절당했다. 이후 제위에 오른 베스파시아누스는 로마의 속국이었던 콤마게네 왕국을 완전히 병합하기로 결정했다. 콤마게네의 왕자였던 에피파네스와 칼리니코스는 파르티아 제국으로 망명했지만, 샤한샤 볼로가세스 1세는 벨리우스 루푸스라는 이름의 로마 장교와 협상한 뒤 두 왕자를 로마 제국에 넘겼다. 72년 알란족이 아르사케스 왕가의 일원이 통치하는 아르메니아와 메디아 아트로파테네를 침략하여 재물을 약탈했다. 볼로가세스 1세는 베스파시아누스에게 지원을 요청했지만 거절당했다. 파르티아는 유대 반란 때 도움을 받았으면서 정작 자신들을 돕지 않는 로마 제국에 분개했고, 양국의 사이는 악화되었다.
80년 또는 81년, 자신을 네로라고 사칭한 테렌티우스 막시무스가 파르티아로 망명했다. 당시 파르티아의 아르사케스 왕실은 네로가 명장 코르불로의 간언을 받아들여 파르티아 왕자 티리다테스 1세가 아르메니아의 왕이 되는 걸 용인해준 것에 깊이 감사하고 있었고, 그런 네로를 몰아내고 자신들에게 딱딱한 태도를 보이는 플라비우스 왕조에 반감을 품고 있었다. 그래서 파르티아인들은 테렌티우스 막시무스를 기꺼이 보호했다. 그러나 그는 곧 정체가 탄로나는 바람에 처형되었다고 한다. 88년 또는 89년, 가짜 네로가 또다시 출현했다. 그의 이름과 신분은 알려진 바 없다. 그는 테렌티우스 막시무스처럼 파르티아로 가서 파코로스 2세에게 인정받았다. 그러나 도미티아누스 황제가 당장 넘겨주지 않으면 전쟁을 각오하라고 협박했고, 이에 파코로스 2세는 전쟁을 피하기 위해 가짜 네로를 넘겨줬다. 이 인물이 어찌 되었는지는 기록된 바 없지만 십중팔구 처형되었을 것이다.
이후 양 제국은 별다른 무력 충돌을 벌이지 않고 조용히 지냈지만, 많은 로마인은 이러한 상황을 만족스러워하지 않았다. 그들은 세계 제일의 나라로 자부하는 자국이 파르티아만 온전히 굴복시키지 못한 것을 거슬려 했으며, 파르티아가 아시아와 유럽간의 중개 무역을 통해 벌어들인 막대한 부를 탐냈다. 이런 마음을 품은 이들 중에는 당시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의 제2대 황제였던 트라야누스가 있었다. 그는 105년에 다키아 전쟁을 벌여 로마 제국의 북방 전선을 위협하던 다키아 왕국을 정복해 막대한 수익을 얻어냈고, 이를 통해 대대적인 토목 공사와 공공 사업을 실시해 원로원과 민중으로부터 '지고의 황제'라는 찬사를 받았다. 이제 파르티아를 정복하고 그들의 부를 거머쥔다면, 이제까지 로마의 어떤 인물도 누리지 못한 영원불멸의 명예를 얻을 것이었다. 트라야누스는 비티니아 총독을 맡고 있었던 소 플리니우스에게 군대가 행군할 때 필요한 보급품을 미리 마련하고 속주민들에게 추가 비용을 마련하라고 지시하는 등, 오래 전부터 파르티아 원정을 준비했다.
그러던 113년, 파르티아의 샤한샤였던 오스로에스 1세가 로마 황제의 승인 없이 아르메니아의 왕 악시다레스를 축출하고, 동생인 파르타마시리스를 아르메니아의 새로운 왕으로 옹립했다. 트라야누스는 이를 빌미삼아 아르메니아 왕국을 공략하고, 한 걸음 더 나아가 파르티아 제국을 정복하기로 마음먹으면서 전쟁을 감행했다.(트라야누스의 파르티아 원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