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그리콜라의 칼레도니아 침공 영어: The invasion of Caledonia | ||
시기 | 78년 ~ 84년 | |
장소 | 칼레도니아 | |
교전 세력 | 로마 제국 | 칼레도니아 |
지휘관 | 그나이우스 율리우스 아그리콜라 | 칼가쿠스 |
결과 | 로마 제국의 칼레도니아 정복 실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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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서기 78~84년, 플라비우스 왕조 로마 제국의 브리타니아 총독이었던 그나이우스 율리우스 아그리콜라가 칼레도니아(스코틀랜드) 정복을 위해 벌인 전쟁이다.
2. 배경
서기 81년 9월 14일 형 티투스의 갑작스런 사망으로 제위에 오른 도미티아누스는 아버지 베스파시아누스와 형에 비해 군무 경험이 없어 군사적인 위업을 갖추지 못했다. 그래서 그는 국방비를 증진하고 병사들의 연봉을 인상하며 복지를 향상시키는 등 군대를 강화한 뒤, 이민족을 상대로 한 원정을 성사시켜 군사적 위업을 얻으려고 했다. 그런 황제의 눈에 띈 지역이 있었으니, 바로 칼레도니아였다.로마 제국은 서기 43년 클라우디우스의 브리타니아 침공 이래 브리타니아를 꾸준히 공략했다. 도중에 부디카의 난에 직면하여 그동안 쌓았던 모든 걸 잃어버릴 위기에 몰렸으나 61년 와트링 스트리트 전투에서 반란군을 섬멸하고 부디카를 죽음으로 몰아넣으면서 위기를 극복했다. 이후 브리타니아로 부임한 총독들은 원정을 꾸준히 이어나갔고, 78년 이전에 웨일즈와 잉글랜드 일대를 정복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브리타니아 북쪽의 칼레도니아만은 여전히 로마 제국에게 복종하지 않았고, 칼레도니아의 부족들은 물산이 풍요롭고, 기후가 상대적으로 온화한 로만 브리튼을 수시로 침략하여 약탈과 파괴를 자행했다.
이에 도미티아누스 황제는 칼레도니아인을 복종시키기로 마음먹고, 지난날 브리타니아에서 군단장으로서 맹활약했고, 갈리아 아퀴타니아 속주 총독으로서도 훌륭한 치적을 쌓았으며 집정관을 역임했던 그나이우스 율리우스 아그리콜라를 브리타니아 총독으로 선임했다. 그는 77년 브리타니아에 도착한 뒤 먼저 웨일즈 북부의 오르도빅족의 반란을 물리쳤다. 이후 드루이드교의 성지이며 60년에 가이우스 수에토니우스 파울리누스가 공략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브리튼인에게 도로 내줬던 모나 섬(오늘날 앵글시 섬)을 공략했다. 또한 속주민들이 내야 하는 세금을 감면해주고 부정부패를 일삼는 관료들을 처벌했으며, 잉글랜드 북부의 로마화를 가속화하기 위해 로마를 모델로 삼은 도시를 건설하게 하고, 토착 귀족의 아이들을 로마 방식으로 교육하도록 했다. 그렇게 내정을 다진 뒤, 제2 아두트릭스 군단, 제2 아우구스타 군단, 제9 히스파니아 군단, 제20 발레리아 빅트리스 군단의 4개 군단과 현지 보조군 부대로 구성된 40,000명의 병력을 이끌고 칼레도니아 원정에 착수했다.
3. 경과
78년 칼레도니아 원정을 개시한 아그리콜라는 같은해 베니코넨스족을 격파한 후 타나우스 강 하구로 진격하여 개스크 산맥을 따라 요새를 건설했다. 80년에는 클로타 강과 보도트리아 강 사이의 칼레도니아 중부 지역을 순조롭게 점령한 뒤, 이곳의 방어 체계를 확립하는 데 힘을 기울였다. 81년엔 로마 함대를 이끌고 칼레도니아 남서부의 해안가를 따라 진군하다가 노바테족과 둠노니아족의 연합 함대를 격파했다.타키투스에 따르면, 아그리콜라는 바다를 건너 지금까지 로마인에게 알려지지 않은 지역에서 이민족을 물리쳤다고 한다. 그러나 그가 어느 바다를 건넜는지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았다. 다수의 학자들은 퍼스 강 또는 클라이드 강 어귀를 가리키는 것이라고 추정하지만, 일각에서는 히베르니아(아일랜드)로 원정을 갔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실제로 아그리콜라는 브리타니아 건너편의 히베르니아 섬에도 관심을 가졌다. 그는 히베르니아 근처의 해안가에 요새를 여러 개 세웠고, 히베르니아의 부족장에게 무법자들에게 피난처를 계속 제공한다면 응징하겠다고 경고하기도 했다. 하지만 아그리콜라가 정말로 히베르니아로 항해했다는 것을 입증할 증거가 부족해 확실하지는 않다.
서기 82년, 아그리콜라는 재차 칼레도니아 원정에 착수했다. 그는 킨타이어 또는 아가일 해안으로 항해하여 그곳 부족들을 복속시키고 공물을 받아냈다. 도중에 칼레도니아인들이 제9 히스파니아 군단의 진영을 야습하는 일이 벌어졌지만, 아그리콜라가 기병을 이끌고 이들을 물리쳤다. 이 일련의 공세에 위기를 느낀 칼레도니아 부족들은 힘을 합쳐 로마 제국에 대항하기로 하고 지휘관으로 칼가쿠스를 선임했다. 그는 로마군과 정면 대결하는 건 자살 행위라 여기고, 적의 보급로를 끊고 치고 빠지는 유격전술을 동원하여 로마군을 지치게 만들기로 했다.
83년 칼레도니아 원정을 개시한 아그리콜라는 칼레도니아인들의 연이은 습격으로 고전했다. 아그리콜라는 결정적인 승리를 거둬 그들을 굴복시키려고 했지만, 칼가쿠스는 이에 응하지 않았다. 이에 아그리콜라는 칼레도니아의 주요 곡물 창고를 공략해, 적에게 겨울 동안 굶어죽거나 싸우는 것 중 하나를 선택할 수 밖에 없도록 했다. 결국 칼가쿠스는 회전을 벌이기로 마음먹었고, 양군은 몬스 그라우피우스에서 맞붙었다.
타키투스에 따르면, 칼가쿠스가 이끄는 칼레도니아 연합군은 30,000명 이상이었다고 한다. 그들의 최전방 부대는 평지에 배치했지만 다른 부대는 고지대에 주둔했으며, 칼레도니아 전차는 양 군대 사이의 평야에 있었다. 이에 맞선 아그리콜라의 로마 군대는 17,000명에서 30,000명 사이로 추정된다. 아그리콜라는 8,000명의 보조군 보병대를 중앙에 배치하고 3,000명의 기병을 양측면에 배치했으며, 로마 군단병을 예비대로 세웠다. 타키투스에 따르면, 칼가쿠스는 전투 직전에 다음과 같이 연설했다고 한다.
"이 전쟁의 기원과 우리에게 필요한 것들을 생각할 때마다, 오늘 우리의 연합이 브리타니아 전체를 자유롭게 할 시작이 되리라고 확신한다. 노예제는 우리 모두에게 미지의 것이다. 우리 너머에는 육지가 없고 바다조차도 안전하지 않다. 우리는 로마 함대에게 위협을 받고 있다. 그리하여 용감한 자가 영광을 얻는 전쟁과 전투에서 겁쟁이라도 안전을 얻을 것이다. 다양한 운명과 함께 로마인들에 저항했던 이전의 부족들은 브리튼의 가장 유명한 자들로, 브리타니아의 중심부에 거주하며, 우리는 정복자들의 해안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심지어 노예의 전염에 의해 우리의 눈조차 오염되지 않게 할 수 있다는 점에서 마지막 희망으로 남아 있었다.
땅과 자유의 경계에 사는 우리에게 브리타니아의 영광이라는 외딴 성역은 지금까지 지켜져왔다. 그러나 이제 브리타니아의 가장 먼 한계선이 열려 있고, 미지의 것은 항상 경이로운 것으로 통한다. 우리 너머에는 어떤 부족도 없고, 실제로 파도와 바위 뿐이다. 이보다 훨씬 무서운 로마인들에게 순종과 굴종으로 압제를 피하려 하는 건 어리석은 짓이다. 저 세계의 강도들은 끊임없이 약탈하여 땅을 고갈시키고 심연을 파괴했다. 적이 부자이면 탐욕을 채우려들고, 적이 가난하면 지배권을 갈망한다. 동쪽과 서쪽도 그들을 만족시킬수 없었다. 그들은 강도, 살육, 약탈에 제국이라는 거짓 이름을 붙인다. 그들은 폐허를 만든 뒤 평화라고 부른다."
이윽고 전투가 개시되자, 양측은 서로를 향해 원거리 무기를 쏟아부었다. 이후 아그리콜라의 명령이 떨어지자, 전방에 배치된 보조군 부대가 정면 공격을 개시했다. 언덕 아래에 배치되었던 칼레도니아인은 순식간에 압도당하여 패주했다. 정상에 있었던 칼레도니아인들은 측면 공격을 시도했지만, 로마군 기병에게 역공당하여 격파되었다. 그들은 인근 삼림지대의 피난처로 도망쳤지만, 잘 조직된 로마군에게 추격당해 모조리 살해당했다. 이 몬스 그라우피우스 전투에서 칼레도니아인 10,000명이 죽었고, 보조군 360명이 전사했다. 로마 군단병은 전투가 벌어지는 내내 예비대로 남아 있었다. 하지만 20,000명 가량의 칼레도니아인은 추격대를 피해 산속 깊숙이 숨을 수 있었다.땅과 자유의 경계에 사는 우리에게 브리타니아의 영광이라는 외딴 성역은 지금까지 지켜져왔다. 그러나 이제 브리타니아의 가장 먼 한계선이 열려 있고, 미지의 것은 항상 경이로운 것으로 통한다. 우리 너머에는 어떤 부족도 없고, 실제로 파도와 바위 뿐이다. 이보다 훨씬 무서운 로마인들에게 순종과 굴종으로 압제를 피하려 하는 건 어리석은 짓이다. 저 세계의 강도들은 끊임없이 약탈하여 땅을 고갈시키고 심연을 파괴했다. 적이 부자이면 탐욕을 채우려들고, 적이 가난하면 지배권을 갈망한다. 동쪽과 서쪽도 그들을 만족시킬수 없었다. 그들은 강도, 살육, 약탈에 제국이라는 거짓 이름을 붙인다. 그들은 폐허를 만든 뒤 평화라고 부른다."
몬스 그라우피우스 전투 이후, 아그리콜라는 함대를 이끌고 칼레도니아의 동부 및 북부 해안을 따라 항해했다. 칼레도니아는 이때까지 대륙으로 알려졌지만, 실제로는 섬이었다는 것이 이 항해로 밝혀졌다. 아그리콜라는 항해를 마친 뒤 칼레도니아 고원과 북동부의 저지대 전체에 도로와 요새를 구축하여 지배력을 강화하고자 했다. 그는 여기에 더해 칼레도니아 고지대와 히베르니아 섬까지 공략하려고 했다. 그러나 서기 85년 다키아 왕국이 다뉴브(도나우, 다누비우스) 강 전선을 침공해 로마 군단을 섬멸하는 사건이 벌어지자, 도미티아누스 황제가 아그리콜라에게 로마로 귀환하라고 명령하면서, 원정 계획은 취소되었다.
4. 이후
아그리콜라의 후임 총독들은 칼레도니아 원정을 원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아그리콜라가 칼레도니아에 세웠던 모든 요새들은 몇년 안에 버려졌고, 로마 제국과 칼레도니아의 경계선은 전쟁 이전으로 돌아갔다. 이는 막대한 원정 비용에 비해 칼레도니아를 정복하면서 얻을 수 있는 수익이 빈약해서 굳이 전쟁을 벌일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기 때문인 것으로 추정된다.그 후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의 제3대 황제인 하드리아누스가 122년에 하드리아누스 방벽을 세워 칼레도니아인의 침략을 저지하도록 했고, 20년 뒤 안토니누스 피우스 황제가 글래스고-에든버러로 이어지는 안토니누스 방벽을 새로 세우고 하드리아누스 방벽과 안토니누스 방벽 사이의 영역을 속주로 삼았다. 그러나 안토니누스 방벽은 완공 후 8년 만에 버려졌고, 칼레도니아인들은 종종 하드리아누스 방벽을 돌파하여 로만 브리튼을 약탈하고 로마 제국에 반감을 품은 브리튼 부족들을 부추겼다. 이에 세베루스 왕조의 초대 황제였던 셉티미우스 세베루스는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려면 칼레도니아인들을 완전히 복속시켜야 한다고 판단한 후, 서기 208년에 칼레도니아를 전격적으로 침공했다.(세베루스의 칼레도니아 침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