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카이아 전쟁 Achaean War | ||
시기 | 기원전 146년 | |
장소 | 그리스 | |
교전국 | 로마 공화국 | 아카이아 동맹 |
지휘관 | 퀸투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 마케도니쿠스 루키우스 뭄미우스 아카이쿠스 | 크리톨라오스† 디아에오스† |
결과 | 코린토스의 파괴, 로마 공화국의 그리스 완전 제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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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기원전 146년 로마 공화국과 아카이아 동맹의 짧은 전쟁이다. 아카이아 동맹의 중심국인 코린토스가 완전히 파괴되었고, 그리스 전역이 로마 공화국에 완전히 종속되는 결과를 야기했다.2. 배경
로마 공화국과 아카이아 동맹은 초기에는 공동의 적인 안티고노스 왕조 마케도니아 왕국을 상대로 마케도니아 전쟁을 함께 치르면서 돈독한 관계를 유지했다. 그러나 로마 공화국이 갈수록 발칸 반도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그리스 도시국가들의 내정에 간섭하는 일이 많아지자, 아카이아 동맹 내부에서 로마 공화국에 대한 경계심이 강해졌다. 아카이아의 스트라테고스 필로포이멘과 리고르타스 등은 로마에게 이대로 끌려가서는 안 된다며, 공동으로 힘을 합쳐 로마의 간섭을 배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아리스테노스, 디오파네스 등 온건파는 로마의 요구를 가급적 받아들이고, 그들의 심기를 거스르는 일은 하지 말아야 한다고 반박했지만, 여론은 점차 강경론쪽으로 기울었다.그러던 기원전 171년, 로마 공화국이 마케도니아 국왕 페르세우스를 상대로 전쟁을 선포했다.(제3차 마케도니아 전쟁) 아카이아 동맹은 처음에는 로마 편을 들었지만 페르세우스가 로마군을 상대로 수차례 승리를 거두자 마케도니아와 연합하여 로마에 대항하기로 했다. 그러나 기원전 168년 피드나 전투에서 마케도니아군이 섬멸당하고, 페르세우스가 생포되어 로마로 끌려갔다. 이후 로마는 아카이아 동맹에
"1,000명의 인질을 보내면 보호국으로 삼고, 침공하지 않겠다."
라고 제안했다. 아카이아 동맹은 요구에 응하여 인질 1,000명을 보내줘야 했다. 이중에는 스트라테고스 직책을 맡은 리고르타스의 아들 폴리비오스도 있었다. 아카이아 동맹의 도시국가들은 사회의 저명한 인사들을 로마에 대거 인질로 보내야 하는 현실에 분통을 터트렸고, 로마에 대한 반감은 갈수록 증폭되었다.기원전 150년, 스파르타가 자신들이 자치권을 더 많이 누리는 것을 허락하지 않은 아카이아 동맹을 상대로 반란을 일으켰다. 아카이아 동맹은 신속하게 스파르타를 격파했지만, 기원전 149년 스트라테고스를 맡고 있었던 데모크리투스는 로마의 압력을 두려워하여 더 이상의 공세를 취하지 않기로 했다. 그러나 그의 소극적인 정책은 극심한 반발을 사 추방되었고, 기원전 148년 스트라테고스로 선임된 디아에오스는 스파르타와의 전쟁을 강행했다. 로마 당국은 양측에 협상으로 문제를 해결하라고 권고했지만, 아카이아 동맹은 이를 묵살하고, 전쟁을 이어나가 1,000명의 적병을 사살하고, 스파르타 시를 점거했다.
로마 원로원은 자신들의 요구가 무시당하자 기원전 147년 루키우스 아우렐리우스 오레스투스가 이끄는 사절단을 아카이아 동맹의 중심지인 코린토스로 보냈다. 오레스투스는 아카이아 동맹의 일부인 스파르타, 헤라키아 트라친스카, 아르고스, 오르코메노스를 아카이아 동맹에서 독립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도시들은 지난날 마케도니아 국왕 필리포스 5세의 지배에 놓였거나 아카이아 동맹에 속하지 않았던 도시들이니, 아카이아 동맹이 계속 지배하는 것은 원칙에 어긋난다는 것이었다. 이에 주민들은 격분했고, 로마 사절단은 폭도들의 공격을 받으며 가까스로 코린토스를 빠져나갔다.
사절단이 공격당하는 사태가 벌어졌지만, 당시 로마 공화국은 제3차 포에니 전쟁을 치르고 있었기 때문에 아카이아 동맹과 전쟁을 벌이고 싶어하지 않았다. 원로원은 섹스투스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이끄는 두 번째 사절단을 보내 아지온에서 협상을 재차 벌였다. 그러나 기원전 147년 스트라테고스로 집권한 크리톨라오스는 로마에 강경한 입장이었기 때문에 협상에 제대로 응하지 않았다. 섹스투스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기원전 146년 봄에 아카이아 회의에 참석해 계속 이런 식으로 나온다면 전쟁을 치를 수밖에 없다고 경고했지만, 코린토스 시민들은 사절단에게 비난과 모욕을 퍼부으며 도시에서 내쫓았다. 그 후 크리톨라오스는 자신의 정적들이 로마에 스파이 행위를 했다고 비난하며 모조리 축출했다. 이에 로마 원로원이 아카이아 동맹에 전쟁을 선포하면서, 아카이아 전쟁의 막이 올랐다.
3. 전개
로마 공화국은 아카이아 동맹을 무너뜨리기 위해 2개의 로마 군단을 동원했다. 하나는 안드리스코스의 반란을 진압함으로써 마케도니아를 완전히 평정한 법무관 퀸투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 마케도니쿠스의 군대였고, 다른 하나는 이탈리아 반도에서 출진한 현직 집정관 루키우스 뭄미우스 아카이쿠스 휘하의 군대였다. 메텔루스의 군대가 먼저 펠레폰네소스 반도로 진입했을 때, 크리톨라오스는 상대적으로 적은 병력을 이끌고 헤르클레아 트라친스카를 포위 공격하고 있었다. 로마군이 이렇게 빨리 올 줄은 상상도 못했던 그는 급히 엘라테아로 후퇴하다가 스카르파에파(Skarfaefa)에서 따라잡혀 전군이 궤멸되고, 자신 역시 목숨을 잃었다.(스카르파에파 전투) 이후 메텔루스는 군대를 겨울 숙영지에 배치하고, 날이 개는 즉시 코린토스로 향하기로 했다.한편, 디아에오스가 이끄는 1,000명의 아카이아군은 크리톨라오스를 돕기 위해 북상했다가 크리톨라오스가 참패했다는 소식을 접하자 뿔뿔이 흩어졌고, 엘리스와 메세네 등 여러 도시가 로마군에 귀순했다. 하지만 코린토스 등은 도시에 돌아온 디아에오스를 스트라테고스로 재선임하고 계속 대항하기로 결의했다. 디아에오스는 부자들로부터 막대한 세금을 징수하고 로마에 내통한 것으로 간주된 자들을 살해했으며, 이들의 재산을 몰수해 군자금을 마련했다. 얼마 후 로크리 전투에서 아카이아군을 물리치고 테베에 무혈 입성한 메텔루스가 평화협상을 제의했지만, 디아에오스는 이를 거부하고 알카메네스에게 4,000명의 병력을 맡겨 메가라를 지키게 한 뒤, 자신은 모든 아카이아 병력을 코린토스에 집결시켜 대규모 회전을 준비했다.
기원전 146년 여름, 펠로폰네소스 반도에 도착한 뭄미우스는 메텔루스를 마케도니아에 돌려보낸 뒤 23,000명의 보병과 3,500명의 기병을 이끌고 코린토스로 진격했다. 디아에오스는 이에 맞서 13,500명의 보병과 650명의 기병을 이끌고 코린토스 외곽에 포진했다. 이후 벌어진 전초전에서 우세한 전과를 거둔 디아에오스는 자신감을 얻고 로마군과 전면전을 벌였으나, 뒤이은 회전에서 기병대가 로마 기병대에게 압도되어 뿔뿔이 흩어진 뒤 측면이 1,000명의 로마 정예 보병대에게 급습당해 궤멸되자 속절없이 무너졌다. 살아남은 장병들은 코린토스 시내에 들어가 농성을 준비했지만, 디아에오스는 메갈로폴리스로 달아난 뒤 그곳에서 아내를 죽인 후 자살했다.(코린토스 전투)
디아에오스가 죽어버리자 아카이아군과 코린토스 시민들은 저항을 포기하고 성문을 열어 항복의사를 밝혔다. 뭄미우스는 매복을 경계해 3일 동안 잠자코 있다가 안전을 확인하자 코린토스 시에 입성했다. 그후 벌어진 광경은 참혹했다. 로마군 병사들은 뭄미우스의 지시에 따라 코린토스인들을 닥치는 대로 죽이거나 노예로 삼았고, 도시 곳곳을 약탈하며 불태웠다. 수많은 그리스 예술품들이 로마로 옮겨졌는데, 그 과정에서 뭄미우스에게 가치를 인정받지 못한 많은 예술 작품이 파괴되거나, 장난감처럼 함부로 다뤄져서 훼손되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