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단 전쟁 영어: Ḥamdan's wars | ||
시기 | 945년 ~ 967년 | |
장소 | 아나톨리아, 시리아 | |
원인 | 쿠르쿠아스의 아랍 원정에 격앙된 무슬림의 여론을 등에 업어 세력을 키우려는 함단 왕조의 아미르 사이프 앗 다울라의 야망. | |
교전 세력 | 동로마 제국 | 함단 왕조 |
지휘관 | 판테리오스 대 바르다스 포카스 니키포로스 포카스 레온 포카스 요안니스 치미스키스 바실리오스 레카피노스 미하일 부르체스 페트루스 포카스 | 사이프 알 다울라 아부 알 아시아르 나지야 |
결과 | 동로마 제국의 승리. | |
영향 | 함단 왕조의 로마 복속, 동로마 제국과 파티마 왕조의 대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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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945~967년, 함단 왕조의 알레포 아미르 사이프 알 다울라와 동로마 제국 간의 전쟁.
2. 배경
926~944년, 동로마 제국은 명장 요안니스 쿠르쿠아스의 아랍 원정을 통해 멜리테네 토후국을 병합하고, 시리아 북부와 아르메니아의 여러 토후국을 복속시켰으며, 에데사에 보관되고 있었던 성유물인 만딜리온을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로 가져오는 등 큰 성과를 거두었다. 이로 인해 위기의식을 느낀 무슬림들은 동로마 제국에 대항하여 지하드를 선포해야 한다고 외쳤다. 그러나 당시 아바스 왕조는 극심한 내부 분열로 인해 동로마 제국에 대항할 여력이 없었고, 각지에 똬리를 튼 아랍 토후국들은 경쟁자를 물리치고 세력을 확대하는 데 열중할 뿐, 지하드엔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하지만 지하드에 열성적인 군주가 한 명 있었으니, 그는 바로 모술에서 형 나시르 앗 다울라와 함께 함단 왕조를 이끌었던 사이프 알 다울라였다. 그는 요안니스 쿠르쿠아스의 원정에 최선을 다해 맞서 싸웠다. 936년 동로마 제국의 카르페테 요새를 공략하고, 요안니스가 급파한 전위대를 격파했으며, 939년 테오도시오폴리스를 탈환하려는 요안니스의 군대를 저지했다. 하지만 아바스 왕조의 분쟁에 깊이 관여하느라 더 이상의 관여를 하지 못했다.
그러던 944년 알레포에 자리를 잡은 사이프 앗 다울라는 본격적으로 지하드에 전념하기로 했다. 때마침 명장 요안니스 쿠르쿠아스가 두 아들 스테파노스 레카피노스와 콘스탄티노스 레카피노스의 이간질에 현혹된 황제 로마노스 1세에 의해 직위해제되었기에, 시기 역시 적절했다. 쿠르쿠아스의 뒤를 이어 아나톨리아 방면군 총사령관직을 맡은 판테리오스는 944년 겨울, 알레포 인근을 공격하다가 사이프 알 다울라에게 격파당했다. 그는 동로마군이 예전처럼 강하지 않다는 것을 확인하고, 본격적으로 동로마 제국과의 전쟁에 돌입했다.
3. 전개
945~946년, 사이프 알 다울라는 아나톨리아 반도의 카파도키아 테마를 습격해 전리품을 다소 확보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잡은 포로들은 전원 아랍인 포로 교환에 쓰였다. 948년 대 바르다스 포카스의 알레포 침공을 저지했지만, 바르다스의 아들 레온 포카스가 유프라테스 강 연안의 수그르 지역의 주요 거점인 하다스를 약탈하는 것을 막지 못했다. 949년, 사이프 앗 다울라는 라칸도스 테마를 급습했으나 방비를 뚫지 못했다. 동로마군은 즉시 역공을 가해 게르마니케이아를 약탈하고, 안티오키아까지 급습했다.950년, 사이프는 대규모 함단군을 이끌고 아나톨리아 반도의 라칸도스와 하시아논 테마로 쳐들어가 철저하게 약탈했다. 그러나 귀환하던 중 레온 포카스의 매복 공격을 당했다. 가즈와트 알-무시바(ghazwat al-musiba : 죽음의 원정)로 알려진 이 전투에서, 사이프 앗 다울라는 8,000명의 병사를 잃은채 가까스로 포위망을 뚫고 탈출했다. 그러나 그는 동로마 제국과 평화협약을 맺기를 거부하고 라탄도스와 멜리테네를 공격해 약탈을 자행한 뒤 겨울이 될 즈음 철수했다.
951년, 사이프 알 다울라는 게르마니케이아와 하다스를 포함한 킬리키아와 시리아 북부 요새를 재건하는 데 힘을 기울였다. 대 바르다스 포카스는 이를 저지하고자 군대를 이끌고 킬리키아로 진입했지만 사이프에게 격퇴당했다. 953년, 대 바르다스 포카스는 대군을 이끌고 다시 침공했지만 게르마니케아 인근의 마라쉬 전투에서 참패했고, 그의 막내 아들 콘스탄티노스 포카스는 포로 신세로 전락했다. 사이프를 "진정한 투사"로 칭송했던 아랍 역사가들은 마라쉬 전투에 많은 찬사를 보냈다. 954년, 사이프는 다시 바르다스 포카스를 물리치고 사마사타와 하다스를 탈환했다. 955년, 바르다스 포카스는 재차 원정에 착수했으나 또다시 패배했다. 이 일련의 패전으로 인해 위신을 잃은 대 바르다스 포카스는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소환되었고, 장남 니키포로스 포카스가 아나톨리아 방면군 총사령관으로 부임했다.
956년, 사이프 알 다울라는 카파도키아 테마를 재차 습격했다. 니키포로스 포카스의 부관 요안니스 치미스키스는 매복 공격을 준비했지만, 이를 간파한 사이프의 역공으로 4,000명을 잃고 패퇴했다. 이에 니키포로스 포카스가 보복에 나서 시리아로 쳐들어가 사이프의 사촌인 아부 알 아시아르를 격파하고 사로잡았다. 956년 후반, 사이프 알 다울라는 타르수스로 가서 키비라이오트 테마 소속 동로마 함대의 타르수스 침공을 저지했다.
957년, 니키포로스 포카스는 하다스를 함락시키고 철저히 파괴했다. 사이프는 이에 대한 보복으로 동로마군 포로 180명을 처형하고, 200명 이상을 신체 절단형에 처했다. 958년 봄, 요안니스 치미스키스는 자지라를 침공하여 다라를 공략하고, 사이프 알 다울라의 심복인 체르케스인 나지야가 이끄는 10,000명의 함단군을 상대로 아미다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이후 환관 바실리오스 레카피노스와 함께 사모사타를 습격하고, 사이프 본인이 직접 이끌고 온 함단군 구원부대를 격파했다. 959년, 레온 포카스는 키루스 일대를 침공해 여러 요새를 약탈했다.
960년, 사이프 알 다울라는 니키포로스 포카스가 한닥스 공방전을 치르기 위해 상당수의 아나톨리아 방면 로마군을 크레타 섬으로 이끌고 간 틈을 노리기로 했다. 그는 자신이 동원할 수 있는 최대 병력인 30,000명을 이끌고 제국의 국경을 넘어 타우로스 산맥 동쪽의 협곡들을 무사히 통과하여 멜리테네 부근의 샤르시아논 요새로 가서 동로마군 수비대를 죽이고 많은 포로를 잡았다. 니키포로스 포카스를 대신하여 수비를 맡았던 레온 포카스는 수적으로 열세인 상황에서 정면 대결을 벌이는 건 무의미하다고 보고, 길고 험한 원정으로 지친 함단군을 상대로 매복 공격을 펼치기로 했다. 그는 산악 지대에 주둔하여 주요 길목에 병력을 세심하게 배치한 뒤 사이프가 본국으로 돌아가기만을 기다렸다.
960년 11월 초, 사이프 앗 다울라는 본국으로 귀환하다가 쿨린드로스 고개 전투에서 레온 포카스가 이끄는 동로마군의 기습을 받고 다수의 병력을 잃은채, 오직 300명의 기병만을 이끌고 전속력으로 도망쳤다. 그러나 그를 따르던 함단군 병사들은 절반 가까이가 죽었고, 붙잡힌 병사들은 노예로 전락했다. 그 후 크레타 정복을 완수하고 귀환한 니키포로스 포카스는 962년 초, 동생 레온 포카스와 함께 70,000명의 대군을 이끌고 킬리키아로 진군하여 불과 3주만에 킬리키아의 도시 55개를 공략했다.
사이프 앗 다울라는 동로마군의 대공세에 대응하기 위해 킬리키아로 향했다. 그러나 니키포로스 포카스는 킬리키아에 그대로 머물 생각이 없었다. 그는 부활절에 잠시 휴식을 취한 뒤 진군을 재개해 알렉산드레타 근처의 시리아 성문을 통과했다. 이후 그의 군대는 남쪽으로 서서히 이동하면서 도상의 촌락들을 불태웠고, 마침내 962년 12월 사이프 앗 다울라의 수도 알레포에 도착했다. 알레포는 제대로 저항하지 못하고 12월 23일에 함락되었으며, 사이프는 알레포 성벽 바깥에서 사로잡혔다가 가까스로 빠져나왔다. 동로마군 병사들은 알레포 시내로 물밀듯이 쏟아져 들어와 지칠 때까지 학살을 계속했고, 390,000 디나르의 은, 낙타 2,000 마리, 노새 1,400마리,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아랍산 종마들을 약탈하고 궁궐을 불태웠다.
963년 황제 로마노스 2세가 급사한 뒤 병사들에 의해 새로운 황제로 추대받은 니키포로스 포카스는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진군하여 자신을 막으려 했던 환관 요세프 브링가스를 몰아내고, 로마노스 2세의 황후이자 바실리오스 2세, 콘스탄티노스 8세 형제의 모후인 테오파노와 결혼한 뒤 공동 황제로 등극했다. 그리하여 사이프 앗 다울라는 겨우 한 숨을 돌릴 수 있게 되었지만, 당시 장염과 소변이 제대로 나오지 않는 병에 시달리면서 정상적인 활동을 하는 데 애를 먹어 군사 활동에 지장을 미쳤고, 알레포가 파괴되는 것을 막지 못했기 때문에 부하들로부터 신임을 잃었다.
급기야 조카이자 하란 총독인 히바트 알라가 사이프의 신임을 받던 기독교 비서를 죽인 후 반란을 일으켰다. 사이프는 나지야를 파견해 반란을 진압하도록 했다. 나지야는 히바트 알라를 물리쳤지만, 곧 사이프 앗 다울라에게 반란을 일으키고 사이프의 부인이 거주하고 있었던 마이야파리킨을 부와이 왕조에게 넘겨주고자 공격했다. 사이프는 이를 물리쳤지만, 나지야는 아르메니아로 피신한 뒤 반 호수 주변의 몇 개 요새를 공략했다. 964년, 나지야는 재차 마이야파리킨을 공격하려 했다가 그가 새로 확보한 아르메니아 영토에서 반란이 일어나는 바람에 군대를 돌려야 했다. 965년, 사이프는 군대를 끌어모은 뒤 아르메니아로 진군해 나지야를 생포한 후 마이야파리킨으로 끌고 갔다. 그는 나지야를 살려주고 싶어했지만, 그의 부인이 나지야를 죽여야 한다고 강권하자 결국 처형했다.
이렇듯 함단 왕조내의 분열이 심해졌고, 병세가 악화되는 데다 기근도 닥쳤지만, 사이프 앗 다울라는 963년 소아시아를 3차례 습격해 아이코니움까지 약탈하는 등 지하드를 멈추지 않았다. 이에 요안니스 치미스키스가 963년 겨울, 킬리키아로 쳐들어가서 아다나 인근에서 함단군을 격파한 뒤 모프수에스티아를 포위했으나 보급품이 떨어지자 철수했다. 964년 가을, 니키포로스 2세가 아랍 원정에 착수하여 모프수에스티아를 포위했지만 기근이 닥치자 철수했다. 하지만 니키포로스 2세는 965년에 또다시 40,000명의 대군을 일으켜 모프수에스티아를 공격해 기어이 함락시켰고, 뒤이어 트리폴리를 포위해 2주 만인 965년 8월 16일, 함락시키고 재기독교화 사업을 실시했다.
상황이 이처럼 좋지 않게 돌아가자, 사이프 알 다울라는 966년 초 사모사타를 점거하고 있었던 동로마군에 사절을 보내 단기 휴전과 포로 교환을 요청했다. 제국이 이에 응하면서 많은 아랍군 포로들을 보내자, 이를 통해 무너진 병력을 재건한 뒤 자신의 영지에 창궐하던 민란을 제압했다. 그러나 966년 10월 니키포로스 2세가 또다시 남하해오자 안전한 사자르 요새로 피신했다. 니키포로스 2세는 아미타, 다라, 니시비스를 습격한 뒤 히에라폴리스를 점거한 후, 안티오키아를 포위했지만 보급품이 떨어지자 철수했다. 사이프 앗 다울라는 적이 물러간 후 967년 2월 초에 알레포로 돌아왔다가 967년 2월 8일 또는 9일에 승하했다.
4. 이후
동로마 제국을 상대로 오랜 세월 대적했던 사이프 알 다울라가 승하한 후, 아들 샤리프 사드 알 다울라가 뒤를 이어 알레포의 아미르가 되었다. 니키포로스 2세는 968년 안티오키아에서 알렉산드레타로 가는 길에 있는 바그라스 요새에 1,500명의 병사들을 배치하고, 안티오키아 주변에 여러 요새를 세운 뒤 미하일 부르체스에게 안티오키아를 포위해서 굶주림에 시달리도록 유도하되 옛 총대주교좌로서 위상이 드높은 안티오키아를 손상입히지 말라고 지시했다.하지만 부르체스는 도시에서 내응하겠다는 유력자의 권고를 수락하고, 포카스 가문의 일원인 페트로스 포카스와 함께 안티오키아를 기습 공격해 함락시켰다. 니키포로스 2세는 부르체스가 황명에 불순종했다는 이유로 해임했고, 이에 분노한 부르체스는 969년 12월 11일 요안니스 1세의 니키포로스 2세 암살에 가담했다.
한편, 부르체스를 대신하여 아랍 전선을 맡은 페트로스는 969년 12월에서 970년 1월 사이에 함단 왕조의 서부 수도인 알레포를 압박했다. 샤리프 사드 알 다울라는 도저히 대항할 여력이 없었기에 동로마 제국의 봉신이 되기로 한 사파르 조약을 맺었다. 이 조약에는 아미르 지명 권한, 연공 바치기, 동로마 제국으로부터의 수입품에 10% 관세를 매기고 그것을 집행 및 감독하기 위한 동로마 제국 관원 파견, 다른 이슬람 군대가 함단 왕조의 영토를 넘나드는 것에 대한 금지, 시리아 지역에서의 동로마군의 활동을 지원할 것, 함단 왕조 내 기독교인 지위 인정, 동로마 제국 출신 탈주자 및 다른 이슬람 세력의 스파이 송환 등, 동로마 제국에 매우 유리한 조건이 많았다.
이리하여 동로마 제국은 오랜 숙적이었던 함단 왕조를 복속시키고 아랍 전선에서 절대적인 우위를 차지하게 되었다. 하지만 얼마 후 이집트를 완전 장악한 쉬아파 파티마 왕조가 시리아로 진출하면서, 양국은 함단 왕조를 사이에 놓고 대치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