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데사 전투 영어: Battle of Edessa | ||
포로로 잡힌 발레리아누스 황제 앞의 샤한샤 샤푸르 1세를 새긴 부조[1] | ||
시기 | 260년 봄 | |
장소 | 에데사 | |
원인 | 시리아의 패권을 둘러싼 로마 제국과 사산 왕조 페르시아 제국의 격돌 | |
교전 세력 | 로마 제국 | 사산 왕조 |
지휘관 | 발레리아누스◎ 수케시아누스◎ | 샤푸르 1세 |
병력 | 70,000명[2] | 불명 |
피해 | 발레리아누스 황제를 포함한 수뇌부 및 다수의 로마군 생포 | 불명 |
결과 | 사산 왕조의 승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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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서기 260년 봄, 발레리아누스 황제가 이끄는 로마군과 사산 왕조의 샤한샤 샤푸르 1세가 이끄는 페르시아군이 맞붙은 전투였다. 이 전투에서 역사상 최초로 로마 황제가 적국에 사로잡히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고, 로마 제국은 이 여파로 내우외환에 시달리게 되었다.
2. 상세
사산 왕조는 서기 224년 아르다시르 1세가 건국한 이래 아케메네스 왕조 시대의 영광을 되찾겠다는 사명을 이루기 위해 아나톨리아 반도, 시리아, 메소포타미아, 아르메니아 등지에서 로마 제국과 격돌했다. 240년 아버지의 뒤를 이어 샤한샤에 오른 샤푸르 1세 역시 로마 제국과의 전쟁에 전력을 기울였다. 242년, 메소포타미아를 침공하여 여러 도시를 함락시키고 시리아의 주도인 안티오키아를 위협했다. 그러나 고르디아누스 3세가 장인이자 근위대장인 티메시테우스와 함께 반격에 나서면서 상황이 반전되었다. 로마군은 잃어버린 영토를 전부 탈환하고 레세나 전투에서 샤푸르 1세를 격파했다. 고르디아누스 3세는 원로원에 서한을 보내"우리는 니시비스까지 침투했으며, 곧 크테시폰까지 도달할 것이다"
라고 보고했다.그런데 243년, 티메시테우스가 돌연 사망했다. 이질 때문에 사망했다고 하는데, 향간에서는 독살당했다는 소문이 돌았다고 한다. 젊은 고르디아누스 3세는 믿었던 장인의 허망한 사망에 큰 충격을 받았지만, 후임 근위대장으로 필리푸스 아라부스를 세우고 244년 2월 원정을 지속했다. 이후의 전개는 양측의 기록이 판이하게 다르다. 로마측 기록에 따르면, 필리푸스가 병사들을 선동하여 고르디아누스 3세를 암살했다고 한다. 하지만 사산 왕조측 비문에 따르면, 크테시폰을 사이에 두고 격전이 벌어졌는데, 로마군은 참패했고 고르디아누스 3세는 낙마 후 전사했다고 한다.
로마군은 키르케시움 인근으로 후퇴한 뒤 필리푸스를 새 황제로 세웠다. 그는 어서 로마로 돌아가 원로원의 승인을 받고 싶어했다. 그래서 샤푸르 1세와 평화협상을 벌인 끝에, 로마군이 점령한 영토를 페르시아에게 돌려주고 아르메니아가 페르시아의 영향권 내에 있다는 것에 동의했다. 또한 필리푸스는 금화 500,000데나리우스를 페르시아에게 배상금 명목으로 바치는 데 동의했다. 하지만 필리푸스는 나중에 이 조약을 파기하고 아르메니아가 계속 로마 제국의 영도하에 있도록 했다. 이에 분노한 샤푸르 1세는 아르메니아를 전격적으로 침공해 타격을 입혔다. 당시 로마 제국은 필리푸스가 막대한 배상금 지불을 위해 부과한 세금에 반발하는 동방 속주의 주민들이 마르쿠스 요타피아누스의 지휘로 반란을 일으키는 바람에 샤푸르 1세의 침공을 막을 여력이 없었다.
250년, 샤푸르 1세는 메소포타미아를 재차 침략했다. 당시 안티오키아의 사제였던 마리아데스가 전차 부대를 육성하기 위해 적립한 공금을 횡령했다가 추방된 뒤 샤푸르 1세를 찾아와서 안티오키아를 바치겠다고 제안하자, 즉시 군대를 일으켜 야밤을 틈타 안티오키아를 공략한 후 약탈하면서 불태웠다. 하지만 승전한 샤한샤는 마리아데스가 조국을 배신했다며 참수했다. 그후 253년에는 바르바리소스를 기습하여 그곳에 주둔한 로마 군단을 섬멸시켰다. 사산 왕조측 기록에는 이때 로마군 60,000명이 격멸되었다고 기술했지만, 역사학계는 이를 과장으로 보고 있다. 샤푸르 1세는 이후 로마 제국의 시리아 속주와 그 주변 속국들을 파괴하고 약탈을 일삼았다. 254년, 샤푸르 1세는 재차 침략을 개시했지만 우라니우스 안토니누스가 사산조 페르시아군을 격파했다. 그러나 우라니우스는 황제를 자칭하고 자신의 모습을 묘사한 동전을 주조했다가 발레리아누스에게 토벌되었다.
이후 샤푸르 1세는 호스로프 2세의 암살로 혼란에 빠진 아르메니아 왕국을 공략하고 아들인 호르미즈드 1세를 아르메니아의 왕위에 앉혔다. 살해당한 호스로프 2세의 아들이었던 티리다테스 3세는 추종자들과 함께 로마 제국으로 망명했다. 아르메니아 왕국이 정복되자 조지아 역시 사산 왕조에게 굴복하고, 페르시아 관리의 감독하에 들어갔다. 발레리아누스는 그런 샤푸르 1세의 사산조 페르시아군을 상대로 시리아 속주 내에서 여러 전투를 벌였다. 257년, 그는 안티오키아를 탈환하고 시리아 속주를 로마 제국의 지배하에 돌려놨다. 발레리아누스는 원로원에게 승전보를 보냈고, 원로원은 세계의 복구자라는 칭호를 수여했다.
그러던 중 고트족이 흑해를 건너 아나톨리아 반도를 습격했다. 그들은 폰토스 일대를 황폐화시키고 카파도키아로 남하했다. 발레리아누스는 이를 저지하기 위해 안티오키아에서 병력을 규합했다.그러나 하필이면 이때 전염병이 도는 바람에 병사들이 대거 죽거나 드러누워버리면서 막대한 손실을 입었다. 그런데 이때 샤푸르 1세가 메소포타미아 북부를 전격적으로 침공했다.(260. 봄) 당시 60대였던 발레리아누스는 이를 막기 위해 동쪽으로 이동했다.
샤푸르 1세가 카바예 자르토슈트에 남긴 비문에 따르면, 발레리아누스가 이끌고 온 로마 군대의 규모는 70,000명에 달했으며 게르마니아, 다키아, 판노니아, 모에시아, 트라키아, 아시아, 이사우리아, 리가오니아, 갈라티아, 루키아, 킬리키아, 카파도키아, 유대, 아라비아, 마우레타니아, 리디아, 그리고 메소포타미아 등 다양한 지역에서 차출되었다고 한다. 이들은 에데사와 카르헤 사이의 평원 지대에서 페르시아군과 맞붙었으나, 전염병에 시달려서 전투력이 급격히 떨어졌기 때문에 제 기량을 발휘하지 못했고, 결국 상대에게 압도당하여 포위되었다. 결국 발레리아누스는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페르시아군의 포로가 되었다. 카바예 자르토슈트에 세워진 비문에서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우리가 카르헤와 에데사를 포위하고 있을 때 발레리아누스 카이사르가 우리를 공격했고, 그와 함께 고트족과 게르만족에서 온 군대가 있었다. 그리고 카르헤와 에데사의 서쪽에서 발레리아누스 카이사르와 함께 대전투가 벌어졌다. 우리는 발레리아누스 카이사르와 이 군대의 지휘관인 근위대장(수케시아누스), 원로원 의원들을 포로로 잡았다. 그리고 장교들을 모두 포로로 잡아 페르시스로 끌고 갔다. 우리는 불을 지르고 황폐화시켰다. 시리아, 킬리키아, 카파도키아를 정복하고 로마인들을 포로로 잡았다. 우리는 로마 제국, 즉 이란이 아닌 땅에서 온 사람들과 전리품을 가지고 떠났다. 우리는 그들을 페르시아, 파르티아, 우제스탄, 슈소리스탄에 정착시켰다.
에우트로피우스, 페스투스, 아우렐리우스 빅토르는 발레리아누스가 단순히 전투에서 패배한 뒤 페르시아군에게 붙잡혔다고만 언급했지만, 조시무스는 추가 설명을 했다. 이에 따르면, 260년 4~5월에 샤푸르 1세로부터 신변의 안전을 보장받는 조건으로 평화회담을 하러 갔다가 샤푸르 1세의 배신으로 현장에서 생포되었다고 한다.발레리아누스는 돈을 내줘서 전쟁을 끝내고자 샤푸르에게 사절을 보냈다. 그러나 샤푸르는 아무런 조건 없이 그들을 돌려보내겠다며, 그 대신에 로마 황제와 직접 만나서 필요한 것을 논의하고 싶다고 밝혔다. 이를 받아들인 발레리아누스는 몇 명의 병사와 함께 무심코 샤푸르에게 향하다가 뜻밖에 적에게 붙잡혔다. 그는 포로로 잡힌 채 페르시아인들 사이에서 죽어 로마의 이름에 큰 불명예를 안겼다.
조시무스, 《새로운 역사》
12세기 동로마 제국의 역사가 요안니스 조나라스는 로마군 내부에서 반란의 징후가 있자 위협을 느낀 발레리아누스가 샤푸르 1세에게 '정치적 망명'을 요청했다고 기술했다.조시무스, 《새로운 역사》
발레리아누스는 페르시아와의 충돌을 주저했다. 그러나 에데사 병사들이 야만인들에 대해 맹렬히 맞서서 많은 사람을 죽이고 많은 양의 전리품을 노획했다는 소식을 듣고 용기를 냈다. 그는 자신이 동원할 수 있는 모든 군대를 이끌고 힘차게 나아가 페르시아인들과 충돌했다. 그러나 이들은 어느 때보다 훨씬 많아 로마인들을 포위했다. (중략) 발레리아누스가 에데사에 머무는 동안, 굶주림에 시달린 병사들은 황제를 죽이려고 했다. 이를 두려워 한 황제는 자기 백성에게 죽임을 당하지 않기 위해 샤푸르에게 항복했다. 병사들은 황제가 자신들을 버리고 적에게 투항하자 달아났고, 전투에서 손실된 것은 극히 일부에 불과했다. 그 후 황제는 샤푸르에게 불명예스러운 대우를 받았다.
요안니스 조나라스, 《이야기의 전형》
요안니스 조나라스, 《이야기의 전형》
3세기 경의 기독교 계열 학자인 락탄티우스는 발레리아누스 황제가 기독교인을 잔인하게 박해했기 때문에 신에게 벌을 받았고, 이로 인해 여생을 노예로 보내야 했다고 기술했다. 그러면서 처음에는 샤푸르 1세가 말을 탈 때 말 옆에 엎드린 채 등을 밟고 말등에 올라타게 했으며, 나중에 죽은 뒤에는 가죽이 벗겨져 그 속은 지푸라기가 채워지고 박제 인형이 되어 샤푸르 1세의 대승을 기념하는 증거로서 신전에 전시되었다고 했다. 하지만 현재 학계에서는 전혀 아니며, 샤푸르 1세가 발레리아누스를 정중하게 대우해줬을 거라는 주장이 우세하다.
이렇게 발레리아누스가 사로잡히고 황제의 직속 부대가 궤멸된 뒤, 샤푸르 1세는 시리아, 킬리키아, 카파도키아를 휩쓸고, 36개 도시를 모조리 파괴한 후 막대한 수의 포로와 전리품을 끌고 수도 크테시폰으로 돌아갔다. 그러던 중 팔미라의 지도자 오다에나투스가 풀비우스 마크리아누스의 휘하에서 기병대를 이끌고 출진해, 유프라테스 강을 건너던 페르시아군에게 타격을 입히고 많은 포로를 구출했다. 그후 마크리아누스는 두 아들 소 마크리아누스와 퀴에투스를 황제로 세우며 반란을 일으켰지만, 갈리에누스 황제가 파견한 아우레올루스에게 진압되었다. 하지만 갈리에누스는 동방에 신경 쓸 여력이 없어서 반란에 가담했던 오다에나투스를 사면하고, 그를 동방 총독에 임명했다. 오다에나투스는 갈리에누스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동방 지역에서 여전히 갈리에누스에게 적대하는 반란군을 토벌했다.
그후 오다에나투스는 사산 왕조와의 전쟁에서 승승장구했고, 샤푸르 1세가 로마 제국으로부터 빼앗은 모든 영토를 탈환했다. 264년, 오다에나투스는 크테시폰에 이르러 포위했지만, 사산군의 저항이 만만치 않은 데다가 고트족이 소아시아의 해안 지대를 습격하자 포위를 풀고 물러났다. 이후 샤푸르 1세는 죽을 때까지 로마 제국과의 전쟁을 재개하지 않았지만, 발레리아누스 황제가 포로로 잡혀 다시는 돌아오지 못한 사건의 여파는 심히 컸다. 게르만족이 라인 강과 다뉴브 강 전선을 돌파한 뒤 로마 제국의 영역 깊숙이 쳐들어왔고, 게르만 함대들이 흑해를 넘어 지중해 전역으로 확산되어 해적 행위를 자행했으며, 제국 각지에서 황제를 참칭하는 이들이 우후죽순으로 등장하더니 급기야 포스투무스의 갈리아 제국과 제노비아의 팔미라 제국이 로마 정부로부터 독립해버렸다. 이 극심한 혼란은 아우렐리아누스가 274년 로마 제국을 재통합할 때까지 이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