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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5f5f5,#2d2f34><colcolor=#8b0000> 가족 | 아버지 가이우스 옥타비우스 · 계부 루키우스 마르키우스 필리푸스 · 양아버지 율리우스 카이사르 · 어머니 아티아 · 누이 소 옥타비아 | ||
부인 | 첫째 부인 클로디아 풀크라 · 둘째 부인 스크리보니아 · 셋째 부인 리비아 드루실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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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란 | 일리리아 대반란 | ||
기타 | |||
장소 | 아우구스투스 영묘,(), · 판테온 | ||
기타 | 칭호 · 기원전 23년 로마 헌정위기 |
쿠시-로마 전쟁 영어: Kush-Roman war | ||
시기 | 기원전 25~21년 | |
장소 | 이집트, 수단 공화국 | |
원인 | 갈루스의 아라비아 원정을 틈탄 쿠시 왕국의 이집트 침공. | |
교전 세력 | 로마 제국 | 쿠시 왕국 |
지휘관 | 가이우스 페트로니우스[1] | 아마니레나스 |
병력 | 10,800명 | 30,000명 |
피해 | 불명 | 불명 |
결과 | 로마 제국과 쿠시 왕국의 평화협정 체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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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기원전 25~21년, 로마 제국과 쿠시 왕국이 맞붙은 전쟁.
2. 배경
기원전 30년, 아우구스투스는 악티움 해전의 승리를 잘 활용해 최후의 경쟁자인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 7세를 죽음으로 몰아넣고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이집트 왕국을 정복했다. 이 일은 오랫동안 이집트와 교류했던 쿠시 왕국에게 심대한 충격을 안겼다. 그들은 새로운 외세와 국경을 마주하게 된 것에 긴장했고, 그들이 이집트를 넘어 자기들까지 정복하려 들 것을 우려했다.당시 쿠시 왕국의 군주는 아마니레나스 여왕이었다. 그녀는 한쪽 눈이 보이지 않았으나 웬만한 남성을 능가하는 용력과 탁월한 궁술을 갖춘 여걸이었다고 전해진다. 기원전 40년경부터 메로에에서 통치하며 나라를 안정적으로 다스렸고, 북쪽의 이집트와의 무역을 통제해 막대한 부를 쌓았다. 기원전 29년 이집트 남부(상이집트)의 중심도시인 테베에서 이집트인들이 로마의 통치에 반기를 들자, 아우구스투스에 의해 행정장관으로 임명된 가이우스 코르넬리우스 갈루스가 즉시 군대를 이끌고 진압했다. 그는 질서를 되찾은 뒤 쿠시의 아마니레나스 여왕에게 필레 섬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했다. 그녀는 로마와 마찰을 벌이는 걸 회피하고자 이를 받아들였다.
코르넬리우스는 필레에 세워진 큰 석판에 자신의 업적을 새기도록 했다. 이 기념비에는 라고 쓰여 있었다. 그러나 필레 섬에서 로마인의 지배를 받게 된 주민들은 막대한 속주세를 뜯어내는 코르넬리우스와 로마 제국에게 반감을 품었다. 한편, 아우구스투스는 코르넬리우스가 자신의 업적을 자화자찬하는 기념비를 세운 것을 좌시하지 않았다. 그는 코르넬리우스가 장차 자신의 권위에도 도전하려 들 거라 여기고, 그를 해임한 뒤 재판에 회부하여 전 재산을 몰수하는 벌을 받게 했다. 이에 코르넬리우스는 법령이 시행되기 전에 자살했다.
기원전 26년, 새 이집트 행정관에 임명된 가이우스 아일리우스 갈루스는 아우구스투스의 명령에 따라 아라비아로 출정했다.(갈루스의 아라비아 원정) 이로 인해 이집트의 방비가 약해지자, 쿠시의 아마니레나스 여왕은 이 틈을 타 이집트로 쳐들어가 큰 타격을 입힘으로써 로마 제국이 쿠시 왕국을 만만히 보지 못하게 하기로 마음먹었다. 이리하여 쿠사-로마 전쟁이 발발했다.
3. 경과
수단의 메로에에서 발견된 아우구스투스 청동 두상. 대영박물관 소장.
기원전 25년, 아마니레나스 여왕은 30,000명의 쿠시군을 이끌고 나일 강을 따라 북상하여 시에네, 필레, 엘리펀틴을 포함한 트리아콘타스코이노스(Triakontaschoinos) 지역 전체를 정복했다. 스트라본에 따르면, 쿠시인들은 이 지역의 주민들을 노예로 삼았으며, 카이사르의 동상을 내던졌다고 한다. 그후 쿠시군은 약탈품과 로마인 및 이집트인 포로 수천 명을 이끌고 남쪽으로 돌아갔다. 이때 아우구스투스의 두상을 잘라서 함께 가지고 갔다. 메로에로 돌아온 아마니레나스 여왕은 아문 신전의 현관 계단 아래에 묻어서 사람들이 신전으로 들어올 때 두상을 밟도록 했다.
기원전 23년, 아우구스투스는 지난해 아라비아 원정 실패 후 이집트 행정관 직책에서 물러난 갈루스를 대신하여 대행 행정관을 맡고 있었던 가이우스 페트로니우스(또는 푸블리우스 페트로니우스)에게 쿠시 왕국을 공격하라고 명령했다. 페트로니우스는 800명의 기병대와 10,000명의 로마 보병대를 이끌고 출발했다. 그들은 프셀키스에서 쿠시군 30,000명과 마주쳤다. 쿠시군은 날 소가죽으로 만든 커다란 방패를 들고 도끼, 창, 검으로 무장했으나, 로마군에 비하면 지극히 열악한 무장 수준이었다. 로마군은 이들을 단숨에 격파했고, 많은 쿠시군 전사들은 도시나 사막, 또는 나일 강 유역의 섬으로 도주했다. 로마군은 함대를 보내 섬들을 공략하고 여러 포로와 쿠시 왕국의 선박들을 확보했다.
페트로니우스는 뒤이어 쿠시 왕국의 영역 깊숙이 진군했다. 이때 페트로니우스는 포로가 된 쿠시군 장수들에게 정보를 캐낸 끝에 아마니레나스 여왕의 아들인 아키니다드 왕자가 쿠시 왕국의 고대 수도이자 성지인 나파타에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페트로니우스는 그곳을 공략하면 쿠시 왕국을 완전히 제압할 수 있으리라 판단하고 곧바로 쳐들어갔다. 그러나 아키니다드는 그곳에 없었고, 쿠시 왕국의 중심지는 그곳이 아니라 330마일 이상 남쪽에 있는 메로에라는 것이 밝혀졌다. 페트로니우스는 나파타를 불태우고 주민들을 포로로 잡았다.
하지만 로마군은 시네에서 출발해 나파타까지 570마일 이상 이동했으며, 이 이상 진군하기엔 보급 계획이 제대로 잡혀 있지 않았다. 그는 어쩔 수 없이 대부분의 병력을 이끌고 이집트로 철수했으며, 새로 확보한 도시인 프리미스에 일부 수비대를 남겼다. 기원전 22년, 아마니레나스 여왕은 대군을 이끌고 프리미스로 진격했다. 사전에 이러한 정보를 입수한 페트로니우스가 먼저 프리미스에 도착하여 방어를 강화했고, 여왕은 도시를 완전 포위한 뒤 공세를 퍼부었다. 쿠시군은 로마군의 완강한 방어 태세로 도시를 공략할 수 없었고, 로마군은 수적으로 월등한 적의 끈질긴 공세로 인해 프리미스에서 빠져나갈 수 없었다.
결국 페트로니우스는 협상하자고 제안하면서, 여왕에게
"카이사르를 직접 만나 문제를 해결하십시오"
라고 촉구했다. 이에 여왕이 "카이사르가 누구인지, 어디서 그를 찾을 수 있는 지 모른다"
라고 하자, 그는 카이사르가 그리스의 사모스 섬에 있다며 자신이 안내하겠다고 대답했다. 이에 여왕은 자신이 직접 가는 대신 사절단을 사모스 섬으로 보내기로 했다. 당시 파르티아를 상대로 한 원정을 준비하고 있었던 아우구스투스는 쿠시 사절단을 맞이했다. 그들은 카이사르에게 황금 화살 다발을 선물하며 "여왕이 이 화살을 당신에게 보냅니다"
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다음과 같은 말을 덧붙였다."당신이 평화를 원한다면, 그것은 여왕의 따뜻함과 우정의 표시입니다. 만약 전쟁을 원한다면, 당신은 그것들을 필요로 하게 될 겁니다."
아우구스투스는 고심 끝에 파르티아와 전쟁을 벌이게 될 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쿠시 왕국과 쓸데없이 전쟁을 벌일 수는 없다고 판단했다. 그리하여 기원전 21년, 양국의 평화협정이 체결되었다. 로마 제국은 쿠시 왕국의 주권을 인정하며 모든 공물 요구를 면제했다. 또한 로마군은 프리미스에서 철수했고, 양측 국경 사이의 30마일 영토를 쿠시 왕국에 할양하기로 했다. 이리하여 로마의 이집트 속주는 도데카스초이노스(Dodekaschoinos)로 국경을 후퇴시켰다. 그리고 아우구스투스는 행정관들에게 칼립샤의 사원 확장과 덴두르의 다른 사원 건립에 대해 누비아의 지역 사제들과 협력하라고 지시했다. 이리하여 양국의 전쟁은 종결되었다.4. 이후
아마니레나스 여왕은 전쟁으로 인해 큰 피해를 입은 쿠시 왕국을 재건하고 로마 제국과의 무역을 이어나갔다. 그녀는 기원전 10년 경에 죽었고 수단의 게벨 바르칼에 묻혔다.이후 양국은 우호 관계를 맺고 무역 거래를 이어갔다. 일설에 따르면, 로마의 제5대 황제 네로는 쿠시 왕국을 정벌하기 위한 원정을 계획했다고 한다. 이것이 사실인지는 알 수 없으나, 실제로 이행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로마 제국과의 무역으로 번영하던 쿠시 왕국은 서기 2세기부터 노바테인과 에티오피아의 전신인 악숨 왕국의 거듭된 침략으로 쇠락했고, 350년에 악숨 왕국이 메로에를 공략하면서 멸망했다.
[1] 또는 푸블리우스 페트로니우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