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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루시아 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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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루시아 내전
영어: War of Perusia
시기 기원전 41~40년
장소 이탈리아 로마, 페루시아
원인 옥타비아누스마르쿠스 안토니우스 세력의 분쟁.
교전 세력 파일:rome_octavian_mon_256.png 옥타비아누스파일:rome_antony_mon_256.png 안토니우스
지휘관 파일:rome_octavian_mon_256.png 옥타비아누스
파일:rome_octavian_mon_256.png 마르쿠스 빕사니우스 아그리파
파일:rome_octavian_mon_256.png 퀸투스 살비우스 살비디에누스 루푸스
파일:rome_antony_mon_256.png 루키우스 안토니우스
파일:rome_antony_mon_256.png 풀비아
파일:rome_antony_mon_256.png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네로
파일:rome_antony_mon_256.png 푸블리우스 벤티디우스 바수스
파일:rome_antony_mon_256.png 가이우스 아시니우스 폴리오
파일:rome_antony_mon_256.png 루키우스 무나티우스 플란쿠스
파일:rome_antony_mon_256.png 퀸투스 푸피우스 칼레누스
파일:rome_antony_mon_256.png 가이우스 푸르니우스
병력 10개 군단→21개 군단24개 군단[1]
피해 불명불명
결과 옥타비아누스의 승리.
영향 브룬디시움 협약 체결
1. 개요2. 배경3. 전개4. 결과5.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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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기원전 41~40년, 이탈리아내 안토니우스파를 이끌던 루키우스 안토니우스풀비아옥타비아누스의 실각을 노리고 정변을 일으키면서 벌어진 내전. 옥타비아누스가 이탈리아에서 세력을 굳히는 계기가 된 전쟁이다.

2. 배경

기원전 42년 필리피 전투에서 마르쿠스 유니우스 브루투스가이우스 카시우스 롱기누스의 '해방자파' 군대를 무찌르고 로마 전역을 평정한 뒤, 제2차 삼두정치를 결성한 옥타비아누스,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그리고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는 관할 영역을 나누어가졌다. 필리피 전투의 승리에 가장 큰 기여를 한 안토니우스는 발칸 반도와 소아시아, 시리아 등 지중해 동방 전역을 차지했으며, 이전부터 자신의 세력권이었던 갈리아에 대한 권리도 인정받았다. 옥타비아누스는 히스파니아를 가졌고, 필리피 전투에 참여하지 않고 이탈리아를 지켰던 레피두스는 북아프리카에 대한 권리를 인정받았다. 이탈리아는 명목상 공동 관리 구역이었지만, 실제로는 옥타비아누스가 실권을 가졌다.

그러나 상황은 옥타비아누스에게 좋지 않게 흘러갔다. 그가 새로 확보한 히스파니아는 본래 레피두스의 세력권이었던 만큼 여전히 레피두스를 지지하는 인사들이 여럿 있었다. 그리고 이탈리아에는 안토니우스를 지지하는 세력이 안토니우스의 아내 풀비아와 동생 루키우스 안토니우스를 중심으로 강력한 위세를 떨치고 있어서, 옥타비아누스 혼자서 정국을 주도할 수 없었다. 게다가 시칠리아와 사르데냐 섬에 자리잡고 막강한 해군을 갖춘 섹스투스 폼페이우스가 이탈리아를 해상 봉쇄하는 바람에 식량이 들어올 길이 막혀버렸고, 이로 인해 이탈리아 각지에서 기아가 창궐했다.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옥타비아누스에 대한 시민들의 불만이 갈수록 심화되었다.

한편, 옥타비아누스는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승리에 기여했고 제2차 삼두정치가 해방자파를 상대로 승리하는 데에도 기여한 고참병들이 정착할 토지를 지급하는 문제도 떠맡아야 했다. 당시 이탈리아에는 28개 이상의 군단이 있었는데, 이들을 정착시키려면 대규모의 토지가 필요했다. 하지만 이탈리아 내 토지들에는 소유자가 이미 존재했다. 따라서 옥타비아누스는 시민의 토지를 강제로 몰수해 군단병에게 지급하느냐, 아니면 토지 분배를 포기하느냐의 양자택일을 해야 했다. 옥타비아누스는 고심 끝에 고참병들에게 토지를 분배하기 위해 시민들로부터 토지를 강제 몰수하기로 했다. 병사들의 지지를 받지 못한다면 모든 게 끝장이라는 걸 잘 알았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캄파니아, 삼니움, 움브리아, 피케눔, 에트루리아, 북부 이탈리아 등지의 최소 40개 도시의 토지가 몰수되어 병사들에게 분배되었다.

졸지에 토지를 잃고 다른 곳으로 피난가야 했던 시민들은 당연히 이 조치에 분노했는데, 특히 옥타비아누스가 강력한 영향력을 갖춘 원로원 계급 및 기사계급 인사들의 눈치를 봐서 그들의 토지를 건드리지 않거나 약간만 몰수한 데 비해, 평민들의 토지를 가차없이 몰수했기에 반감이 더욱 컸다. 그들은 로마로 몰려가서 당시 집정관을 맡고 있던 루키우스 안토니우스에게 호소했다. 반면에 병사들은 원로원 의원들이 토지 분배를 격렬하게 반대하는 걸 보고 토지를 얻을 기회를 잃을까 두려워해 로마 시로 몰려가 폭동을 일으켰다.

루키우스는 이탈리아와 로마가 혼란에 빠진 상황을 지켜보면서, 옥타비아누스를 실각시킬 절호의 기회가 찾아왔다고 여겼다. 사실 그도 토지 분배 위원회의 일원이었고[2], 형 마르쿠스가 동방에서 돌아올 때까지 토지 분배를 미뤄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하지만 정작 시민들이 토지 분배에 분노를 터트리자, 그는 입을 싹 닦고 농장에서 쫓겨난 농민의 편에 서서 옥타비아누스의 몰수 정책을 비난했다. 형 마르쿠스가 돌아오는 즉시 동방의 막대한 보화를 병사들에게 골고루 나눌 테니 어떤 이탈리아 도시도 토지를 몰수당할 필요가 없으며, 형이 공화국을 회복시킬 거라고 주장했다. 그는 형에 대한 자신의 헌신을 증명하기 위해 이름에 '피우스'라는 명칭을 추가했다.

아피아노스에 따르면, 안토니우스의 아내 풀비아는 처음엔 루키우스가 옥타비아누스를 너무 빨리 적대한다며 우려를 표했지만, 나중에 남편이 클레오파트라 7세와 친밀하게 지내자 이에 질투심을 느껴 남편의 총애를 받기 위해 루키우스를 적극 지지했다고 한다. 그녀는 옥타비아누스를 '폭군', '독재자'로 매도하며 맹공을 퍼부었고,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네로 등 저명한 원로원 인사들을 안토니우스 편으로 끌여들었다. 두 사람이 노골적으로 자신을 비방하자, 옥타비아누스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그는 당초 풀비아와 첫 남편인 푸블리우스 클로디우스 풀케르의 딸 클로디아 풀크라와 정략결혼했는데, 이 시점에서 이혼한 뒤 풀비아가 로마의 지도자가 되려 한다고 비난했다. 이에 풀비아와 루키우스 안토니우스는 무력으로 해결할 수밖에 없다고 판단하고, 기원전 41년 9월 이탈리아 중부 움브리아의 중심도시 페루시아로 내려가서 6개 군단을 동원했다. 이리하여 페루시아 내전의 막이 올랐다.

3. 전개

내전이 발발할 당시, 루키우스에게는 6개 군단이 있었다. 그리고 형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의 부하인 루키우스 무나티우스 플란쿠스, 가이우스 아시니우스 폴리오, 푸블리우스 벤티디우스 바수스의 13개 군단이 이탈리아 전역에 흩어져 있었고, 역시 안토니우스의 측근인 퀸투스 푸피우스 칼레누스의 11개 군단이 갈리아에 주둔했다. 반면 당장 옥타비아누스를 따르는 군단은 4개 군단밖에 없었고, 히스파니아 속주에 6개 군단을 합친다 해도 이들 모두를 대적하기엔 역부족이었다. 그래서 그는 충분히 승산있다고 보고, 페루시아에 집결한 6개 군단을 이끌고 쿠데타를 감행했다. 이에 안코나 일대에 주둔한 2개 군단이 대표단을 보내 옥타비아누스와 루키우스 안토니우스에게 내전을 벌이지 말라고 촉구하며, 자신들이 중재를 해줄 테니 라티움의 가비니에서 협상하라고 제안했다. 옥타비아누스는 이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였지만, 루키우스는 "군인의 장화를 신은 원로원"이라고 조롱하며 무시했다. 이에 안코나의 2개 군단은 자신들의 명예가 실추되었다고 여기고 루키우스를 규탄하며 옥타비아누스의 편에 섰다.

옥타비아누스는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에게 2개 군단을 맡겨 로마를 지키게 한 뒤, 섹스투스 폼페이우스 함대에게 포위된 브룬디시움에 구원병을 보냈다. 그리고 자신은 북상하여 고참 병사들을 소집한 뒤 루키우스 안토니우스에 호응하여 반란을 일으킨 알바 푸센티아를 평정하고, 뒤이어 누르시아의 사비네 시를 공략한 뒤 움브리아의 센티눔 시를 포위했다. 루키우스는 옥타비아누스가 로마를 비운 틈을 타 곧바로 쳐들어갔고, 옥타비아누스의 토지 몰수 정책에 강한 반감을 품고 있던 시민들이 대거 호응했다. 이에 레피두스는 로마를 지킬 가망이 없다고 판단하고 철수했고, 루키우스와 풀비아는 도시에 무혈 입성했다. 루키우스는 즉시 원로원 회의를 소집한 뒤 옥타비아누스와 레피두스를 국가의 적으로 선포하라고 요구해 관철시켰고, 이에 열광한 시민들로부터 임페라토르라는 칭호를 받았다.

센티넘 시에서 공성전을 벌이고 있던 옥타비아누스는 로마가 공략당했다는 소식을 접하자 수도를 향해 진군했다. 센티넘 수비대 지휘관 가이우스 푸르니우스는 군대를 이끌고 옥타비아누스를 추격했지만, 그 사이에 퀸투스 살비우스 살비디에누스 루푸스가 히스파니아에서 이탈리아로 들어와서 센티넘을 공략하고 뒤이어 누르시아를 평정했다. 루키우스는 로마에서 군대를 이끌고 북상해 옥타비아누스와 일전을 벌이려 했고, 가이우스 아시니우스 폴리오푸블리우스 벤티디우스 바수스, 루키우스 무나티우스 플란쿠스는 살비디에누스가 옥타비아누스와 합류하는 걸 저지하고자 북이탈리아에서 살비디에누스의 뒤를 천천히 쫓아갔다.

루키우스는 바수스, 플란쿠스, 폴리오와 함께 옥타비아누스를 협공해 섬멸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세 장수는 마르쿠스 안토니우스가 동생 루키우스의 내전 유발에 동의했는지 확신하지 못했고, 안토니우스의 명시적인 지시 없이 옥타비아누스를 제거한 것에 대한 책임을 지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적극적인 군사 활동을 하지 않고 천천히 이동하기만 했다. 그러는 사이, 옥타비아누스의 절친한 친구이자 부관인 마르쿠스 빕사니우스 아그리파가 에트루리아 남부 수트리움 시를 점령한 뒤 루키우스 안토니우스의 군대 보급로를 위협했다. 루키우스는 이에 위협을 느끼고 전면 철수했다. 성벽이 없는 로마[3]에서 농성할 수 없었기에, 그는 로마를 버리고 페루시아로 퇴각했다. 옥타비아누스와 아그리파, 살비디에누스는 로마에서 군대를 사열시키고 원로원을 압박해 국가의 적 선포를 취소하게 만든 뒤, 전군을 이끌고 페루시아로 진격했다.

기원전 41년 11월, 페루시아에 도착한 루키우스는 6개 군단과 함께 그곳에서 농성했고, 옥타비아누스와 아그리파, 살비디에누스는 도시를 포위 공격했다. 페루시아 인근 호수에서 당시 양측이 서로에게 쏜 새총 더미가 발견되었는데, 여기에는 루키우스가 대머리인 걸 조롱하는 낙서, 풀비아를 성적으로 모욕하는 낙서, 옥타비아누스에게 "내 좆이나 먹어라" 등 성적인 조롱을 퍼붓는 낙서가 적혀 있었다. 옥타비아누스는 페루시아 주변에 10km 길이의 방벽과 참호를 건설하고, 여러 개의 탑을 세웠다. 루키우스는 이에 대항하여 내벽을 구축했고, 이후 양측이 세운 벽 사이에서 격렬한 전투가 벌어졌다. 루키우스는 조금만 더 버티면 바수스, 플란쿠스, 폴리오가 도와주러 올 것이며 형 마르쿠스도 동방에서 구원하러 오리라 기대했다.

그러나 세 장수는 페루시아에 포위된 루키우스를 도와주길 주저했다. 그들은 마르쿠스로부터 어떠한 지시도 받지 못했기에 그가 이번 내전을 원했는지 확신하지 못했다. 게다가 세 장수 중 누가 최고 지휘권을 맡는지도 문제였다. 폴리오는 군사 경력이 일천한 서생 취급을 받았고, 플란쿠스는 천박한 인성을 갖췄다는 비난을 받았으며, 벤티디우스는 과거에 노새를 닦던 노예라는 비방을 받았다. 마르쿠스의 절친한 친구 마니우스가 세 장수에게 "마르쿠스는 분명 동생을 구하고 싶어할 테니 어서 도와달라"라고 호소했지만 별다른 호응을 얻지 못했다.

그러다 보다못한 풀비아가 벤티디우스와 폴리오에게 보다 단호한 조치를 취하라고 강하게 요구하자, 두 장수는 무거운 엉덩이를 일으켜 페루시아로 진군했다. 이에 아그리파는 살비디에누스에게 페루시아 요새를 계속 포위하게 하고, 자신은 폴리오와 벤티디우스를 물리치려 했다. 이에 폴리오는 라벤나로 이동했고, 벤티디우스는 리미니로 후퇴했다. 이후 풀리오와 벤티디우스는 플란쿠스 휘하 병력과 합세한 뒤, 페루시아로 진군했다. 그러나 페루시아에서 20마일도 채 되지 않은 풀기니움에서 아그리파에게 저지되었다. 아피아노스에 따르면, 벤티디우스와 폴리오는 즉시 결전을 벌이자고 주장했지만, 플란쿠스는 상황을 지켜봐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는 사이, 갈리아에서 11개 군단에 달하는 병력을 거느리고 있던 퀸투스 푸피우스 칼레누스가 이탈리아로 남하하려고 군대를 소집했다가 돌연 병사했다. 그의 아들 퀸투스 푸피우스 칼레누스는 옥타비아누스에게 휘하 병력을 고스란히 넘겼다. 이리하여 병력을 급속도로 불린 옥타비아누스가 페루시아에 원군을 대거 파견하자, 플란쿠스, 벤티디우스, 폴리오는 페루시아를 운명에 맡기고 마르쿠스가 올 때까지 버티고자 아드리아 해로 후퇴해 식량 창고를 건설하고 마르쿠스가 상륙할 지점을 확보했다. 이후 루키우스를 돕고자 식량 운송 부대를 한 차례 보내봤지만, 아그리파와 살비디에누스가 분견대로 가로막자 도로 후퇴했다.

기원전 40년 1월 초, 루키우스는 포위망을 뚫고자 대규모 공세를 벌였으나 격파당하고 도로 요새 안으로 들어갔다. 그 후 페루시아 요새 내에서 기근이 발생해 많은 병사가 아사하거나 탈영하면서 상황은 매우 악화되었다. 이런 상황인데도 형이 좀처럼 도와주지 않자, 결국 기원전 40년 2월 말 또는 3월 초에 항복했다. 부하들은 내전의 원흉인 그를 처형하라고 요구했지만, 옥타비아누스는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의 반발을 고려해 그를 살려주고 히스파니아 속주 총독으로 선임했다. 이후의 행적은 기록이 미비해 알 수 없으나, 아마도 오래 살지 못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를 따랐던 6개 군단 역시 옥타비아누스의 용서를 받고 레피두스에게 맡겨져 북아프리카에 파견되었다. 이는 충성심을 담보할 수 없는 안토니우스의 군단 관리를 떠넘기는 한편, 레피두스가 안토니우스의 힘을 빼앗은 모양새를 만들어 둘의 제휴를 막고 최종적으로는 자신이 삼두와의 합의로 분배받은 영역임에도 섹스투스 폼페이우스가 장악하고 있던 시칠리아 정벌에 이용하려는 포석이었다.

반면 루키우스의 편에 선 민간인들은 무자비하게 처형되었으며, 페루시아의 모든 의정관도 처형되었다. 그들 중 한 명인 루키우스 아이밀리우스만이 과거 로마에서 카이사르를 살해한 자들을 강력하게 비난했던 적이 있었기에 용서받았다. 수에토니우스에 따르면, 여기에 루키우스를 지지했던 300명 이상의 원로원 의원과 에퀴테스들이 기원전 40년 3월 15일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제단 앞에서 옥타비아누스의 명령으로 처형되었다고 한다. 이후 페루시아의 모든 토지는 옥타비아누스를 따랐던 병사들에게 분배되었다. 한편 풀비아는 발칸 반도로 달아나 남편과 합세했으나 시콘으로 보내진 뒤 얼마 안가 사망했다.[4]

4. 결과

옥타비아누스는 이 전쟁에서 하마터면 모든 걸 잃을 뻔했지만, 마르쿠스 안토니우스가 동생과 아내를 전혀 도와주지 않고 이탈리아 내 안토니우스파 장수들 역시 소극적으로 일관한 덕분에 승리했다. 그리하여 이탈리아에서 입지를 굳힐 수 있었고, 본래 안토니우스의 관할이었던 갈리아 역시 그의 수중에 들어갔다. 기원전 40년 5월 마르쿠스 안토니우스가 대규모 함대를 이끌고 브룬디시움에 도착했을 때, 많은 이가 동생의 원수를 갚으려 할 것을 우려했다. 하지만 옥타비아누스와 안토니우스 양측의 부하들이 싸우는 걸 거부하자,[5] 두 사람은 화해를 모색했고 그해 10월 브룬디시움 협약을 체결해 공식적으로 화해했다. 옥타비아누스의 갈리아 지배는 공인되었고, 옥타비아누스의 누나 소 옥타비아가 안토니우스의 새 아내가 되었다. 여기에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네로 등 옥타비아누스에 맞섰다가 망명한 인사들을 사면하기로 했다.

하지만 섹스투스 폼페이우스가 시칠리아에서 강력한 해군을 거느리고 이탈리아를 봉쇄한 건 여전했기에, 옥타비아누스의 입지는 아직 위태로웠다. 섹스투스의 세력이 워낙 강력했기에, 옥타비아누스는 무력을 동원하는 대신 타협하기로 하고, 폼페이우스의 처제인 스크리보니아[6]와 결혼해 유일한 혈육인 딸 대 율리아를 낳았다. 그러나 이것은 섹스투스를 무찌를 함대를 건조할 때까지 시간을 벌기 위한 정략 결혼일 뿐이었다. 기원전 38년 옥타비아누스가 스크리보니아와 이혼한 뒤 폼페이우스를 상대로 전쟁을 선포하면서, 시칠리아 내전이 본격적으로 벌어졌다.

5. 여담

당시의 투석병들이 던진 투석용 납탄에서 여러 문구가 새겨진 것이 발견되었는데, 상호간 주요 인사인 옥타비아누스, 풀비아, 루키우스 안토니우스에게 퍼붓는 욕설들이 새겨져 있어 화제가 되었다. "Peto Octaviani culum(옥타비아누스 엉덩이에 조준)" "Laxe Octavi, sede(옥타비아누스, 조심해라!)" "Luci Antoni calve, Fulvia, culum pandite(루키우스 안토니우스 대머리 새끼[7] 풀비아 엉덩이 딱 벌려라)" "#


[1] 실제로는 6개 군단만 전투 참여[2] 옥타비아누스가 토지 분배를 통해 이탈리아 군대 전체의 지지를 받을 것을 우려해서 우격다짐으로 참여했다.[3] 본래 세르비우스 성벽이 있었지만, 기원전 45년 독재관 율리우스 카이사르문다 전투 후 로마에 돌아온 뒤 "로마는 이제 세계의 주인이 되었으니 성벽 뒤에 숨을 필요없다"라며 허물었다.[4] 일설에 따르면, 남편으로부터 자신의 허락없이 전쟁을 일으켰다는 질책과 함께 폭행당하자 울분을 이기지 못하고 자살했다고 한다.[5] 양쪽 다 카이사르 파였으니 결국은 내부총질에 불과했다. 이들은 카이사르 파가 분열을 일으키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고 특히 안토니우스는 카이사르의 영향을 크게 받고 있어서 이런 상황에서는 전쟁을 치르기는 곤란했다. 카이사르의 아들에게 직접 칼을 들이댈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6] 루키우스 스크리보니우스 리보의 딸 또는 이부누이이자 코르넬리아 술라의 딸이다. 코르넬리아 술라는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마그누스의 딸인 폼페이아 마그나와 독재관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의 유일한 아들인 파우스투스 코르넬리우스 술라의 딸이다.[7] 실제로 그의 얼굴이 들어간 기념주화를 보면 훤하게 앞머리가 까진 것을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