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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9-30 10:18:40

술라의 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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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라의 내전
영어: Sulla's civil war
시기 기원전 83년 ~ 기원전 81년
장소 이탈리아
교전 세력 파일:Senate_loyalists.png 옵티마테스파일:rome_octavian_mon_256.png 포풀라레스
지휘관 파일:Senate_loyalists.png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
파일:Senate_loyalists.png 메텔루스 피우스
파일:Senate_loyalists.png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마그누스
파일:Senate_loyalists.png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
파일:Senate_loyalists.png 마르쿠스 테렌티우스 바로 루쿨루스
파일:Senate_loyalists.png 그나이우스 코르넬리우스 돌라벨라
파일:Senate_loyalists.png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1]
파일:rome_octavian_mon_256.png 그나이우스 파피리우스 카르보
파일:rome_octavian_mon_256.png 가이우스 노르바누스
파일:rome_octavian_mon_256.png 소 가이우스 마리우스[2]
파일:rome_octavian_mon_256.png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아시아티쿠스
파일:rome_octavian_mon_256.png 가이우스 카리나스†
파일:rome_octavian_mon_256.png 가이우스 마르키우스 켄소리누스†
파일:rome_octavian_mon_256.png 루키우스 유니우스 브루투스 다마시푸스†
파일:rome_octavian_mon_256.png 퀸투스 세르토리우스
파일:rome_octavian_mon_256.png 폰티우스 텔레시누스†
파일:rome_octavian_mon_256.png 마르쿠스 람포니우스
병력 3만 명 이상[3] 10만 명 이상
결과옵티마테스파의 승리.

1. 개요2. 배경3. 경과4.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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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기원전 83년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제1차 미트리다테스 전쟁을 마치고 이탈리아로 상륙한 뒤 자신을 국가의 적으로 선포한 포풀라레스파를 상대로 벌인 전쟁.

2. 배경

기원전 89년, 폰토스 왕국미트리다테스 6세비티니아 왕국로마 공화국을 상대로 전쟁을 선포했다. 그는 순식간에 소아시아 전역을 석권하고 발칸 반도로 진출해 고대 아테네 등 여러 도시 국가의 호응을 얻었으며, 소아시아에 거주하는 로마인과 이탈리아인 8만 명을 학살했다. 이에 원로원은 그를 응징할 원정군을 파견하기로 하고, 기원전 88년 집정관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에게 놀라 시에 주둔한 6개 군단을 이끌고 동방 원정을 떠나게 했다.

그런데 로마에서 분쟁이 발생했다. 기원전 88년 호민관 푸블리우스 술피키우스 루푸스동맹시 전쟁으로 선거권을 얻은 이탈리아 유권자들이 기존의 35개의 투표 부족들에 공평하게 분배되도록 해 그들의 투표가 정치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법안을 제출했다. 그들을 8개의 새로운 부족에 배치하려 했던 원로원은 결사 반대했고, 기존의 로마 시민들 역시 정치적 특권을 새로운 시민들에게 양보할 생각이 없었기에 격렬하게 반발했다. 이에 술피키우스는 6번이나 집정관을 역임하면서 유구르타 전쟁킴브리 전쟁에서 맹활약한 명장이며 수많은 지지자를 이끌고 있는 가이우스 마리우스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당시 동방 원정을 맡아서 다시 한 번 군사적 위업을 쌓고 싶었던 마리우스는 지휘권을 자신에게 넘긴다면 돕겠다고 했고, 술피키우스는 동의했다.

한편 놀라에서 병사들을 훈련시키고 있던 술라는 로마에서 분란이 생겼다는 소식을 듣고 포룸으로 이동한 뒤 동료 집정관 퀸투스 폼페이우스 루푸스와 함께 카스토르, 폴룩스 신전의 로스트라 연단에 서서 종교적 권한을 이용해 페리아이(feriae: 모든 공무가 중단되는 휴일)을 선언했다. 그러자 술피키우스의 선동을 받은 군중이 폭동을 일으켰고, 술라는 팔라티누스 언덕 기슭에 있던 마리우스의 집으로 도주했다. 마리우스는 술라에게 이 상황을 타개하려면 휴일 선언을 철회하고 술피키우스의 법안에 대한 표결 진행을 허락하라고 권고했고, 술라는 어쩔 수 없이 받아들였다. 술피키우스는 민회를 소집해 이탈리아인의 선거권에 관한 그의 법안을 통과시킨 뒤, 며칠 후에 술라의 동방 총사령관 지명을 철회하고 그 지휘권을 마리우스에게 넘긴다고 선포했다.

놀라로 돌아간 술라는 전령으로부터 이 소식을 듣고 분노했다. 그는 병사들을 선동하여 자기 편으로 삼은 뒤, 마리우스가 인수인계를 하려고 보낸 장교를 현장에서 살해하고 6개 군단을 이끌고 로마로 진격했다. 로마 법은 누구도 로마 시에 군대를 진군시키는 걸 허락하지 않았고, 공화정 수립 이래 이 원칙이 지켜지고 있었기 때문에, 마리우스와 술피키우스 등은 술라가 이리 나올 줄 상상도 하지 못했다. 두 사람은 급히 검투사와 해방노예를 동원해 에스퀼린 포룸에서 맞섰으나 끝내 패배를 면치 못했다. 술피키우스는 해안가로 달아나다가 노예에게 배반당해 살해되었고, 마리우스는 추격을 피해 온갖 고생을 한 끝에 아프리카의 안전지대로 달아났다.

술라는 도시에 입성한 뒤 도시 주변에 군대를 배치한 후 민회를 소집해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하면서, 어떠한 법률도 원로원에서 논의되지 않는다면 민회에서 통과될 수 없으며, 가장 부유한 사람들이 더 많은 투표권을 가져야 한다고 규정했다. 또한 300명의 새로운 의원을 원로원에 추가해 원로원의 힘을 늘렸고, 술피키우스의 법은 폭력에 의해 강요되었다는 이유로 무효화했다. 술라는 얼마 지나지 않아 군대를 카푸아로 돌려보냈고, 자신의 행위가 권력을 탐해서가 아니라 공화국의 회복을 위해서였음을 사람들에게 인정받기 위해 차기 집정관 선거에 아무런 간섭도 하지 않았다. 한편 그는 동료 집정관 퀸투스 폼페이우스 루푸스를 이탈리아의 또다른 군대를 이끌고 있던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스트라보에게 보내 지휘권을 인계받게 했다. 스트라보는 지휘권을 포기하는 척했으나, 다음날 병사들이 루푸스를 살해했다. 스트라보는 화가 난 척 했지만, 군대의 통제를 재개했다.

기원전 87년 선거에서, 술라를 따른 후보들은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킨나그나이우스 옥타비우스에게 낙선했다. 술라는 선거 결과에 태연한 체하면서, 이것이 자신을 폭군이라 칭한 정적들의 말이 거짓임을 보여주는 궁극적인 증거라고 주장했다. 그러면서도 집정관들이 자기가 동방으로 떠난 사이에 배신하는 걸 방지하고자 신임 집정관들의 취임 선서를 집행할 책임자로서 그들이 자신의 정치 개혁을 방해하지 않겠다고 서약하도록 강요했다. 두 집정관은 많은 군중 앞에서 그렇게 서약했고, 약속을 어길 시 추방형을 받아들이겠다는 뜻으로 바닥에 돌을 던졌다. 술라는 이 정도면 안심할 만하다고 여기고 카푸아에 주둔한 군대를 이끌고 동방으로 떠났다.

그러나 기원전 87년 1월 취임한 킨나는 술라를 탄핵하려 시도했다. 그는 호민관 비르기니우스를 보내 로마 시민들을 불법 살해한 죄로 술라를 기소했다. 하지만 호민관의 직권 범위는 로마 시내에만 한정되었기 때문에, 술라는 기소를 무시하고 동방으로 떠날 군단들을 집결시키는 일을 계속했다. 1개 군단은 뒤에 남겨 놀라 포위를 유지하게 하고, 나머지 5개 군단을 이끌고 그리스로 떠났다. 술라가 사라지자, 킨나는 이탈리아 시민들의 지지를 받아 술피키우스의 법안을 부활시키려 했다. 이에 옥타비우스는 기존의 로마 시민들의 지지를 받으며 반대파를 이끌었다. 투표 당일 호민관이 거부권을 행사하자 킨나의 지지자들이 폭동을 일으켰다. 옥타비우스는 지지자들을 포럼으로 이끌어 킨나의 부하들을 물리쳤다. 킨나는 로마 시에서 탈출했고, 옥타비우스는 민회를 움직여 킨나를 집정관 직에서 박탈하고 추방형을 내린 뒤 신관단의 일원이었던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메룰라로 대체했다.

킨나는 로마를 떠난 뒤 티부르, 프라이네스테, 놀라 등 남부 지역을 돌며 시민들을 설득해 순식간에 10개 군단 이상을 모집했다. 여기에 술라에 반감을 품은 그나이우스 파피리우스 카르보, 퀸투스 세르토리우스 등 귀족들을 대거 끌어모아 자신의 편으로 삼았다. 여기에 마리우스가 아프리카에서 사병을 이끌고 가담했다. 옥타비우스는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스트라보의 지원을 받고 항전했지만, 기원전 87년 말 전염병이 창궐하면서 스트라보가 사망하면서 큰 타격을 받았다. 마리우스 등은 로마에 대한 식량 공급을 차단했고, 결국 원로원은 킨나, 마리우스와 협상하여 그들의 신원을 복구시키기로 했다. 마리우스군은 로마 시로 돌아온 뒤 닷새 동안 대숙청을 자행했다. 옥타비우스는 도망치기를 거부하고 참수되었으며, 그의 머리는 포룸에 전시되었다. 킨나를 대신하여 집정관에 선출되었던 메룰라는 재판에 회부되자 자살을 택했다. 그 외에도 루키우스 카이사르, 가이우스 카이사르 등 전직 집정관 6명을 포함한 수많은 고위 관료들이 처형되었다.

술라는 국가의 적으로 선포되었고, 그의 집은 불태워졌으며, 재산 역시 몰수되었다. 그가 세운 법은 폐지되었고, 킨나와 마리우스는 기원전 86년 집정관에 선출되었다. 마리우스는 7번째 집정관을 맡아 술라를 토벌하고 미트리다테스 6세와의 전쟁을 이끌 준비를 하다가 1월 중순에 갑작스럽게 사망했다. 그 후 킨나는 몇년간 집정관을 지내며 로마를 어느정도 안정적으로 운영했다. 한편, 술라는 로마에서 벌어진 난리를 전해들었지만, 미트리다테스 6세와의 전쟁을 먼저 해결하기로 했다. 그는 카이로네이아 전투와 오르코메노스 전투에서 폰토스군을 연이어 참패시켰다.

얼마 후 킨나가 자신을 잡기 위해 루키우스 발레리우스 플라쿠스가 이끄는 로마군을 파견하자, 술라는 이들과 싸우는 대신 자신의 병사들로 하여금 플라쿠스의 병사들을 자신의 군대에 합류하도록 유혹했다. 플라쿠스군은 술라보다 적은 병력인 데다 술라가 군인으로서의 명성이 높은 것도 있어 많은 이들이 탈주하여 술라 휘하로 들어갔다. 결국 플라쿠스는 술라와 싸우길 포기하고 미트리다테스 6세와 싸우고자 이동했다. 그러나 그는 곧 가이우스 플라비우스 핌브리아에게 피살되었고, 핌브리아 역시 미트리다테스 6세와 평화협약을 맺은 술라와 맞서려다 부하들이 대거 술라에게 귀순하자 자살했다.

그 후 술라는 소아시아 일대의 여러 신전과 도시들로부터 많은 벌금을 물려 로마를 공격하기 위한 군자금을 모았다. 킨나는 술라와 맞서기 위한 군대를 모아 기원전 84년 초의 겨울에 아드리아 해 너머 일리리아로 파견했다. 그러나 수송대는 도중에 겨울 폭풍을 만나 침몰하여 병사 절반이 수장되었고, 가까스로 생존한 병사들은 곧바로 반란을 일으켰다. 이에 앙코나시에 있던 파견대도 도항을 거부했다. 이에 킨나는 강경하게 처벌하고, 일리리아로 가서 눈이 덮힌 산을 강행군으로 돌파하는 것을 강요했다. 병사들이 그런 그에게 집단 항의하자, 킨나는 직접 병사들을 설득하기 위해 총회를 소집했다. 그러나 그가 집합한 병사들의 무리 속으로 들어가려 했을 때, 한 병사가 길을 터주기를 거부하다가 킨나의 경호원 한 명에게 가격당했다. 그러자 병사들은 반란을 일으켜 킨나와 그의 일행을 모두 살해했다.

킨나가 허망하게 죽자, 카르보가 포풀라레스파의 리더를 맡았다. 그는 발칸 반도에서 술라와 싸우려던 계획을 취소하고 이탈리아에서 술라를 대적하기로 했다. 그는 기원전 84년 내내 군대를 모집했다. 징병 담당자들은 술라가 돌아오면 이탈리아인의 시민권과 평등한 투표권이 모두 무산될 거라고 주장했고, 이탈리아인들은 술라에 대적하고자 징병소로 찾아갔다. 그 결과, 카르보는 대략 15만에 달하는 대군을 확보했고, 술라의 5개 군단 3만 명을 충분히 압도할 수 있으리라 확신했다. 여기에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아시아티쿠스는 2개 군단과 함께 마케도니아 변방에 주둔했고, 열렬한 킨나파 인사였던 하드리아누스는 아프리카에서 병사와 물자를 모았다. 퀸투스 세르토리우스는 갈리아 키살피나에서 확고한 기반을 다져놓았고, 시칠리아는 거물급 민중파 인사인 가이우스 노르바누스의 영향력 아래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술라가 기원전 83년 브룬디시움에 상륙하면서, 내전이 본격적으로 발발했다.

3. 경과

기원전 83년 봄, 술라는 5개 군단을 이끌고 브룬디시움에 상륙했다. 그는 이탈리아인들이 정치에 참여할 권리를 잃어버릴까 봐 자신을 적대한다는 걸 간파하고, 상륙하자마자 이탈리아인들이 선거권을 갖는 걸 용인하겠다는 뜻을 공표했다. 브룬디시움 주민들은 이에 열광하여 술라를 환대했다. 그는 아피아 가도를 따라 진군하면서 자신의 선의를 과시했다. 병사들에게 시골 지역을 약탈하는 걸 엄금했고, 이탈리아인들에게 그들의 참정권과 투표권을 용인하겠다는 뜻을 거듭 밝혔다. 그러자 이탈리아인들은 술라에 굳이 대적할 필요가 없다고 보고, 포풀라레스파를 맹목적으로 지지하던 태도에서 상황을 방관하는 쪽으로 선회했다. 여기에 마리우스의 대숙청 때 아프리카에 피해 있었던 메텔루스 피우스가 사병대를 이끌고 가세했고, 스트라보의 아들로 막대한 피호민들을 동원할 수 있었던 20대 초반의 청년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마그누스도 합류했다. 또한 히스파니아에 피신했다가 소규모 사병을 이끌고 이탈리아에 도착한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도 술라의 편에 섰다.

로마를 향해 천천히 진군하고 있던 술라는 티파타 산에서 가이우스 노르바누스의 군대와 처음으로 맞붙었다. 술라군은 이 전투에서 사상자 70명을 내면서 적병 6,000명을 전사시키는 대승을 거두었다. 노르바누스는 잔여 병력을 수습하여 카푸아로 후퇴했다. 그 후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아시아티쿠스가 북쪽에서 술라에게 접근해오자, 술라는 그를 맞이하러 출진했다. 양군이 대치했을 때, 술라의 병사들이 확고부동한 충성심을 보인데 반해 아시아티쿠스의 병사들은 술라와 싸우길 기피했다. 아시아티쿠스는 병사들이 동요하는 걸 보고 술라의 군대로부터 조금 떨어진 곳에 진을 친 뒤 협상을 제안했다. 술라는 즉각 동의했고, 두 사령관은 휴전을 선언하고 인질을 교환한 뒤 평화 협상을 벌였다. 그러나 술라는 은밀히 휘하 병사들을 아시아티쿠스의 진영으로 보내 회유했다.

아시아티쿠스의 부관을 맡고 있던 세르토리우스는 이 상황을 눈치채고 양쪽 병사들이 가까이 있지 못하게 했고, 아시아티쿠스가 노르바누스에게 회담 진행 상황을 알리기 위해 자신을 파견하자 방향을 틀어 술라에게 충성을 맹세한 소도시 수에사를 기습 공략했다. 이로 인해 협상이 결렬되자, 아시아티쿠스는 병사들에게 전쟁 준비를 명했다. 그러나 양측이 평원에 집결하고 술라가 신호를 보내자, 아시아티쿠스의 병사들은 술라 편으로 대거 이탈했다. 술라는 아시아티쿠스를 체포했다가 자유롭게 풀어줬다. 술라는 곧이어 카푸아에 있는 노르바누스에게 주의를 돌렸다. 술라는 그에게 대표단을 보내 회담을 요청했지만, 노르바누스는 아무런 회신 없이 대표단을 돌려보낸 뒤 술라군이 도착하기 전에 카푸아를 벗어났다.

술라는 시간이 자기편이라고 믿고 결정적인 전투를 강행하려 들지 않았다. 그 대신 남부 이탈리아 일대의 지역 공동체들을 상대로 모병과 정치 공작을 펼치며 모두를 자신 편으로 끌여들이려 했다. 이에 카르보는 기원전 83년 7월 원로원에서 술라와 합류한 모든 사람을 국가의 적으로 선포하도록 하고, 역시 이탈리아 전역에 사람을 보내 술라를 비난하는 공세를 펼쳤다. 이탈리아인들은 술라가 동맹시 전쟁 중에 히르피니족과 삼니움족을 상대로 잔인한 짓을 한 걸 잘 알았고, 그가 지난날 이탈리아인들에게 평등한 투표권을 주는 걸 반대했고 로마에 무단으로 군대를 진군시키기까지 했던 걸 기억했다. 하지만 이제는 평등한 투표권을 인정해주겠다고 하고, 희대의 명장인 그를 상대로 이길 수 있을지도 자신이 없었기에, 중립을 택하거나 눈앞에 있는 편의 요구를 들어주는 쪽을 택했다.

한편, 세르토리우스는 마리우스파의 근거지인 에트루리아에서 4개 군단을 모집해 술라에게 풀려난 아시아티쿠스에게 넘겨줬다. 아시아티쿠스는 이들을 이끌고 피케눔으로 진군하여 폼페이우스와 대결했으나, 병사들이 서로 어울리기 시작하더니 이번에도 아시아티쿠스가 이끌던 병사들이 상대편 진영으로 모두 넘어가버렸다. 그는 갈리아로 달아나 종적을 감췄다. 세르토리우스는 무능하기 짝이 없는 이탈리아의 반술라파 지도부에 진절머리가 났고, 기원전 83년 법무관에 선출되어 히스파니아를 속주로 받은 바 있었기에 육로를 통해 히스파니아로 가면서 새로운 군대를 모았다. 이렇듯 상황은 술라에게 유리하게 흘러가고 있었지만, 이탈리아 북부와 중부 대부분 지역은 술라의 의도를 의심하며 끝까지 항전하기로 했다.

기원전 82년 집정관에 선출된 카르보는 동료 집정관으로 마리우스의 아들인 소 가이우스 마리우스를 선출했다. 일명 '젊은 마리우스'로 불리는 이 20대 후반의 청년은 특별히 군사 통솔력이나 정치 수완이 있는 건 아니었지만, 마리우스라는 이름이 가진 무게 때문에 집정관으로 선출되었다. 이후 양측은 유난히 추웠던 기원전 83/82년 겨울에 전쟁 행위를 중단했다. 기원전 82년 봄이 도래할 무렵, 카르보는 북부로 돌아가서 에트루리아, 움브리아, 갈리아 키살피나를 폼페이우스의 침략으로부터 지키는 임무를 맡았고, 젊은 마리우스는 술라와 대결하기 위해 8개 군단을 이끌고 캄파니아로 내려갔다. 술라가 다가오자, 젊은 마리우스는 '사크리포르투스'라고만 알려진 미지의 장소로 철수했다.

술라는 휘하 병사들에게 마리우스를 쫓으라고 명령했으나, 온종일 지속된 추적 끝에 보좌관들이 수색 중단 명령을 내리고 그날 밤을 보낼 진지를 구축하도록 설득하자 어쩔 수 없이 받아들였다. 술라의 병사들이 숙영지 건설에 한창일 때, 젊은 마리우스는 병사들에게 천막을 치고 있는 적을 공격하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술라의 장병들은 이 기습을 성공적으로 격퇴하고 적군을 프라이네스테(오늘날 이탈리아의 팔레스트리나) 방향으로 몰아붙였다. 프라이네스테 주민들은 술라를 싫어했지만, 술라군이 다가오는 상황에서 위험을 감수할 수 없다고 보고 성문을 열어주지 않았다. 마리우스와 소수의 군관들은 밧줄과 투석기를 써서 도시 안으로 들여보내졌지만, 나머지 병사들은 성벽 밑의 평원에 남겨졌다. 술라군은 이들을 공격해 젊은 마리우스가 누벽에서 지켜보는 가운데 적병들을 모조리 살육하다가 생존자들의 항복을 허락했다.

이후 도착한 술라는 계산된 잔혹성을 드러냈다. 그는 생존자들을 모두 모은 뒤, 삼니움족만 한쪽으로 몰아놓도록 했다. 무기를 뺏기고 사방으로 포위된 삼니움족은 술라의 명에 따라 그 자리에서 학살되었다. 그 후 술라는 일부 병력을 남겨 프라이네스테를 공격하도록 한 뒤, 나머지 병력을 이끌고 로마로 진격했다. 젊은 마리우스는 카르보와 폰티우스 텔레시누스의 구원군이 도착하기를 기다리는 동안 지지자인 법무관 루키우스 유니우스 브루투스 다마시푸스에게 전령을 보내 로마에 남아있는 인사들에게 로마를 떠나 카르보와 합류하라는 지령을 보냈다. 하지만 그는 대피하기 전에 처리해야 할 사람들의 명단도 함께 보냈다. 브루투스는 숙청 명단을 확인한 뒤 원로원을 소집한 후, 자객들을 풀어 명단에 든 자들을 모조리 죽였다. 그 중에는 폰티펙스 막시무스였던 퀸투스 무키우스 스카이볼라도 포함되었다. 스카이볼라는 베스타 신전 안으로 피신했지만, 암살자들은 성역인 그곳에 침입해 그를 죽였다. 그렇게 살해된 이들의 유해는 티베리스강으로 던져졌다.

반술라파 인사들은 로마를 떠나 북쪽으로 달아났고, 술라는 도시에 입성한 뒤 남은 시민들을 소집하여 "나는 도살자가 아닌 외과의사가 될 계획이다. 몇 명의 적을 골라서 벌하긴 하겠지만, 나머지 주민은 전혀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고 밝혔다. 이후 믿을 만한 군관 몇 명과 소규모 수비대만 로마에 남긴 뒤, 북쪽으로 즉각 진군했다. 한편, 카르보는 폼페이우스와 메텔루스 피우스를 상대로 고전했다. 두 장군은 갈리아 키살피나로 군대를 보내는 한편 에트루리아에도 별동대를 보내 카르보가 한 쪽에 전력을 쏟지 못하게 했다. 카르보는 아드리아해안을 기지로 삼고 피우스의 라벤나 공략 시도를 봉쇄하려고 애썼지만, 제대로 된 해군을 가지지 못했기에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이에 내륙으로 진군하다가 곧 북쪽으로 진군하고 있던 술라와 마주쳤다. 양군은 곧바로 교전했는데, 이번에는 해가 질 때까지 승부가 나지 않았다.

이후 술라와 대치하던 카르보는 크라수스와 폼페이우스가 움브리아를 침공했다는 소식을 듣고 급히 그쪽으로 파견대를 보냈다. 그러나 이 부대는 술라의 파견대에게 기습당했고, 5천 명이 전사했다. 카르보는 프라이네스테에 포위된 젊은 마리우스를 구원하여 술라를 북쪽과 남쪽에서 압박해야겠다고 판단하고, 아드리아 해안으로 철군한 뒤 그 도시를 구하러 갈 핵심 병력을 떼어냈다. 그러나 첫번째 구원군은 프라이네스테로 진군하던 도중에 폼페이우스의 기습으로 전멸했다. 얼마 후, 삼니움족과 루카니족이 힘을 합쳐 수만 병력을 일으켜 프라이네스테 포위를 풀려 했으나, 프라이네스테를 포위하고 있던 술라군이 이를 격퇴했다. 이렇듯 상황이 나빠지자, 카르보의 부관 한 명이 술라와 내통했다. 그는 중요한 일을 완수해낼 경우 관대한 처분을 받는다는 약속을 받고, 카르보의 군관 한 무리를 저녁식사에 초대했다. 이중에는 노르바누스도 있었다. 노르바누스는 배반 가능성을 의심하고 참가하지 않았지만, 나머지 군관은 초대에 응했다. 그들은 도착하자마자 모두 붙잡혀 처형되었고, 부관은 곧바로 술라 진영으로 달아났다. 노르바누스는 이제 가망이 없다고 판단하고 로도스로 망명했다.

카르보는 갈수록 악화되는 전황에도 프라이네스테로 계속 파견대를 보냈지만, 부대가 그곳까지 가지도 못하고 궤멸되는 일이 되풀이되었다. 그러는 사이 메텔루스 피우스와 폼페이우스, 크라수스가 갈리아 키살피나 전체를 에워쌌다. 이제 카르보는 이탈리아에서의 전쟁은 가망이 없다고 여기고, 시칠리아를 거쳐 아프리카로 피신하기로 하고, 여러 군관에게 북부 이탈리아를 맡긴 뒤 변장한 채 달아났다. 카르보가 나긴 합동 사령부는 북부를 완전히 버리고 삼니움으로 피신하기로 했다. 그들은 남쪽으로 내려가 삼니움 장군 폰티우스 텔레시누스와 합세했다. 기원전 82년 11월 초, 삼니움족과 루카니족, 그리고 카르보의 잔여 부대는 프라이네스테 해방을 시도했지만 적의 강력한 방비로 인해 또다시 무산되었다.

이에 텔레시누스는 발상의 전환을 시도했다. 그는 로마와 자신들을 가로막은 군대가 없다는 점을 간파하고, 한밤중에 진지를 떠나 로마로 질주하여 술라가 미처 저지할 새도 없이 도시를 탈환하기로 했다. 이튿날 아침 동이 뜰 무렵, 로마 시민들은 4만 남짓한 병력이 콜리나 성문 밖에 진을 치고 있는 걸 발견했다. 술라파 지지자들은 그저 겁을 주기 위한 허세라고 보고, 병력을 모아 돌격했으나 곧바로 전멸했다. 로마 시는 공황에 휩싸였고, 텔레시누스는 콜리나 성문 앞에 서 있는 병사들에게 "이탈리아인의 자유를 유린한 저 늑대들은 그들을 품어주는 숲을 베어버리지 않는 한 절대로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고 연설했다. 하지만 그의 예상과는 달리, 술라는 크게 뒤쳐져 있지 않았다. 그는 적군이 전날 밤에 진지를 비우고 로마로 진군한다는 걸 알게 되자 그들을 따라잡으러 쏜살같이 달렸다. 이윽고 정오쯤에 술라군이 등장하자, 텔레시누스는 곧바로 요격에 나섰다.

이리하여 벌어진 콜리나 성문 전투는 술라가 내전을 단행한 이래 가장 격렬한 전투였다. 술라가 직접 지휘했던 좌익 부대는 삼니움족의 압박을 이기지 못하고 붕괴되었다. 이에 술라는 프라이네스테로 전령을 보내 그곳 병사들에게 포위를 중단하고 아군을 구원하라고 전하게 했다. 그러나 그가 모르는 사이, 우익 부대를 이끌던 크라수스가 적군을 격파하고 진영을 함락시켰다. 술라는 수 시간이 지나서야 크라수스가 보낸 전령을 통해 자기가 이겼다는 걸 알게 되었다. 텔레시누스는 부상을 입은 채 전장에 쓰러져 있다가 목이 베어졌고, 수급이 창에 꽂혀 전시되었다.

프라이네스테 주민들은 콜리나 성문 전투 결과를 통보받자 저항을 포기하고 성문을 열었다. 젊은 마리우스는 지하 땅굴을 통해 탈출을 시도했지만 입구마다 보초병들이 지키고 있는 것을 보자 자살했다. 술라는 프라이네스테에 입성한 뒤 주민을 로마인, 삼니움인, 프라이네스테인 세 부류로 나누도록 했다. 그는 로마인 주민들은 죽어 마땅하지만 자비를 베풀어 사면해주겠다고 했다. 반면 삼니움인과 프라이네스테인은 모조리 학살당했고, 도시는 철저히 약탈당했다. 젊은 마리우스의 수급은 로마로 이송되어 포룸에 내걸렸다. 이리하여 술라는 이탈리아에서의 내전을 종식하고 로마의 절대 권력자가 되었다.

4. 이후

술라는 로마 성문 밖에 있는 벨로나 신전에서 원로원을 소집한 뒤, 의원들 앞에서 발언하기에 앞서 삼니움족 포로 6천 명을 신전과 가까운 플라미니우스 경기장으로 데려가라고 지시했다. 술라가 원로원 앞에서 미트리다테스 전쟁 관련 보고서를 읽기 시작할 때, 병사들은 플라미니우스 경기장에서 삼니움 포로 6천 명을 에워싼 뒤 학살을 자행했다. 포로들의 비명 소리는 신전 안에서 너무나 처절하게 들렸고, 의원들은 공포에 휩싸였다. 하지만 술라는 의원들에게 자기 말에 계속 귀를 기울여달라고 부탁했다.
"범죄자 몇 명을 따끔하게 혼내는 것뿐이오. 밖에서 일어나는 일에는 신경쓰지 마시오."

살육이 끝나고 의원들이 공포에 떨며 돌아간 뒤, 술라는 민회를 소집한 뒤 대가를 치러야 할 사람은 앞에서 이끈 자들이지 뒤에서 따라간 자들이 아니라고 밝혔다. 이 말을 들은 로마의 부유층 사이에 불안이 고조되는 가운데, 원로원 대표단이 술라를 찾아가 불안감을 덜어달라고 부탁했다.
"당신이 죽이기로 마음먹은 자들을 처벌하지 말아달라고 요청하는 게 아닙니다. 다만 살려주기로 마음먹은 자들이 마음 졸이지 않게 해달라는 겁니다."
"누구를 살려줄지 모르겠소."
"누구를 처벌할 생각인지 알려주십시오."

술라는 그날 밤 측근들과 함께 논의한 뒤 80명의 이름이 적힌 서판을 게시했다. 이름이 적힌 이들은 잡히는 대로 처형당하고 재산을 몰수당했다. 그러나 다음날 술라는 220명의 이름이 추가된 새로운 명단을 포룸에 게시했고, 그 다음날 아침에는 또다시 500개가 넘는 이름을 내건 서판을 게시했다. 이제는 모두가 언제든 시민권을 박탈당하고 비참하게 살해될지 모른다는 공포에 사로잡혔다. 술라는 가져오는 머리마다 포상금을 지급했고, 살인자가 희생자의 재산을 일부 챙기도록 허락했다. 그러자 술라의 측근들은 부자들을 숙청 대상으로 지정해 가차없이 죽이고 재산을 몰수했다. 그 중 가장 심한 인물이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였다. 그는 가이우스 베레스라는 군관을 대동하여 이탈리아 전역을 일주하며 현지 주민들로부터 반술라파 인물이 어디 숨어있는지를 전해듣고 가차없이 추격하여 살해하여 재산을 모조리 물수했다. 술라의 적에게 물질적인 도움을 제공한 집안까지 숙청 대상에 포함되었고, 지방의 상인, 은행가, 행정가들이 모조리 붙잡혀 처형되었다.

이러한 숙청은 비단 이탈리아에서만 그치지 않았다. 술라의 하수인들은 로도스에 노르바누스가 숨어있는 걸 알게 되자 로도스 시민들에게 그를 넘기지 않으면 엄중한 결과를 초래할 거라고 경고했다. 시민들이 이 문제를 놓고 고민에 빠지자, 노르바누스는 장터로 나가 자살했다. 또한 술라는 폼페이우스를 파견하여 카르보를 추적하게 했다. 폼페이우스는 카르보가 시칠리아 해안에서 떨어진 한 섬에 있다는 정보를 토대로 시칠리아로 향했고, 도착하자마자 즉결 재판소를 열어 반술라파로 알려진 이들을 모조리 처형했다. 카르보는 결국 폼페이우스에게 사로잡힌 뒤 그 자리에서 처형되었다. 메사나 주민들이 즉결 재판소가 불법이라고 항의하자, 폼페이우스는 이죽거리며 답했다.
"검을 든 우리에게 법 운운은 그만두시오."

이렇듯 대숙청을 자행한 술라는 기원전 82년 6월 1일 이후로는 숙청대상자 명단에 이름이 추가되지 않을 거라고 선언했다. 그 사이에 이미 명단에 오른 사람들은 술라에게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친구들을 이용해 자기 이름을 명단에서 빼기도 했다. 그 중 가장 유명한 인물이 바로 율리우스 카이사르였다. 당시 19살이었던 카이사르는 가이우스 마리우스의 처조카였으며, 킨나의 딸과 결혼했다. 술라는 카이사르에게 아내와 이혼하라고 명령했지만 따르지 않자 그의 이름을 숙청대상 명단에 올렸고, 카이사르는 한동안 숨어지냈다. 하지만 카이사르를 위해 수많은 이들이 변호해주자, 술라는 몇 주후 사면해줬다. 일설에 따르면, 그는 투덜거리며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고 한다.
"당신들 좋을 대로 그 친구를 데려가시오. 다만 당신들이 그리도 살리고 싶어하는 사람이 언젠가는 당신들이 나와 함께 지켜온 귀족층의 대의에 치명타를 날릴 거라는 점만 알아두시오. 이 카이사르라는 친구 안에는 마리우스가 여럿 들어 있으니까."

술라의 대숙청으로 죽은 사람이 몇이나 되는지는 불확실하다. 일설에는 최소한 원로원 의원 100여 명과 에퀴테스 천여 명 이상이 죽었다고 한다. 이후 술라는 과두정 체제를 복구하기 위한 일련의 개혁을 단행했다. 그는 원로원을 강화하기 위해 정원을 300명에서 600명으로 늘렸으며, 평민 집회에서 선출되는 호민관들이 정계에 진출하는 것을 막았다. 그리고 에퀴테스와 로마의 배심원 전원을 원로원 의원으로 채움으로써 귀족들이 사실상 면책 특권을 갖게 했다. 그리고 곡물법을 폐지해 민중이 곡물을 싸고 일정한 매입가로 구매할 수 없게 했으며, 민회에서 재판을 다룬 관행을 폐지하고 모든 재판을 상설 법정체제에 위탁하고, 호르텐시우스법[4]을 폐지하여 민회의 권한을 크게 약화시켰다. 내전 당시에 마리우스의 편을 든 이탈리아의 도시들은 로마 시민권을 박탈당했고 토지는 로마의 공유지로 몰수되었다.

또한 집정관은 한 사람만 출정할 수 있었고, 이탈리아 내에서는 집정관 권한으로 4개 군단만 편성할 수 있게 했다. 또 전직 집정관이 다시 집정관이 되려면 집정관을 지낸 해로부터 10년을 거치도록 정했다. 그리고 한 개인이 지나치게 빨리 출세하는 걸 막기 위해 로마의 명예로운 경력에 나이 제한을 두었다. 한편 자신을 위해 성심껏 활약해준 병사들을 보답하기 위해 이탈리아 각지에 신도시를 건설하고 휘하의 퇴역 병사들을 정착시켰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로마와 오랜 세월 함께 동고동락했던 에트루리아 시민들의 토지를 대거 몰수하는 짓을 벌이는 바람에 사후에 에르투리아인들이 반란을 일으키는 빌미를 제공하고 말았고, 술라의 퇴역 장병들이 현지에 적응하지 못하여 이탈리아에 혼란을 야기하기도 했다.

이렇듯 이탈리아에서 독재관으로서 강대한 권력을 행사하며 개혁을 이끌던 술라는 2년만인 기원전 80년 독재관에서 물러났다. 로마 정계는 술라 사후에도 크라수스, 폼페이우스 등 술라를 따랐던 자들이 오래동안 지배했다. 그러나 술라에 맞섰던 포풀라레스파 인사 중 한 사람이었던 퀸투스 세르토리우스는 히스파니아 속주를 성공적으로 장악하고 로마 정부에 반기를 들었다. 술라는 세르토리우스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메텔루스 피우스를 파견해 알아서 반란을 진압하게 했다. 그러나 이것은 오판이었다. 세르토리우스는 장장 10년간 세르토리우스 전쟁을 이끌며 옵티마테스파가 지배하는 로마 정부의 강력한 적수로 거듭난다.


[1]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의 아버지[2] 가이우스 마리우스의 아들[3] 술라의 5개 군단 병력 수이다. 그 외에 폼페이우스, 크라수스, 메텔루스 피우스 등이 각각 수천~만여 명의 사병을 이끌고 지원했다.[4] 민회에서 의결된 법안은 원로원의 승인이 필요하지 않도록 정한 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