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 레온 토르니키오스 (영어: Leo Tornikios, 그리스어: Λέων Τορνίκιος) |
출생 | 미상 |
사망 | 미상 |
직위 | 파트리키오스, 이베리아의 군사 총독 |
반란 대상 | 콘스탄티노스 9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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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동로마 제국 마케도니아 왕조의 반란자. 콘스탄티노스 9세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켜 한때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포위하였으나 결국 진압당했다.2. 생애
아드리아노폴리스 출신으로, 콘스탄티노스 9세의 조카이다. 미하일 프셀로스는 그를 "마케도니아인 특유의 오만함을 지닌 인물"이라고 묘사했다. 콘스탄티노스의 막내 여동생인 유프레피아와 친밀한 사이였다. 유프레피아는 오빠보다 그를 더 좋아했으며, 오빠 앞에서 그를 호평하기도 했다. 황제는 그를 제국의 동쪽 변경에 있는 이베리아의 군사 총독으로 삼게 했는데, 아드리아노폴리스에서 반란이 일어나자 그의 인기가 동방군 내에서 높은 걸 두려워해 도로 수도로 소환한 뒤 강제로 삭발시켰다. 이에 반감을 품고 1047년 어느 날 밤 지지자들과 함께 수도를 몰래 빠져나와 아드리아노폴리스로 향했다. 그는 들르는 곳마다 역마들을 모조리 죽여버려서 추격을 어렵게 만들었다.아드리아노폴리스에 도착한 뒤 황제가 죽었으며, 테오도라가 자신을 공동 지배자로 발탁했다는 헛소문을 퍼트렸다. 이후 병사들의 추대를 받아 황제를 칭했고, 수천 명의 병력을 이끌고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진격했다. 그의 병력은 수도로 다가갈수록 끊임없이 늘어, 9월 25일 수도의 성벽 아래에 진을 칠 무렵엔 수만에 달했다. 이렇게 벌어진 제10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방전에서, 초반에 수도를 공략할 뻔했다. 9월 27일 수비대 공병들이 야음을 틈타 블라케르나이의 맞은편 성벽 바깥에 진지를 구축하자, 반란군은 즉각 돌격해 삽시간에 진지를 공략하고 그 안에 있던 병사들을 모조리 살육했다. 이 광경을 목격한 성벽 수비대는 공포에 사로잡혀 방어 위치를 버리고 시내로 도망쳤다. 이때 성문까지 활짝 열려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성안에 입성하지 않았다. 미하일 프셀로스에 따르면, 그는 주민들이 수많은 횃불을 들고 앞길을 밝혀주는 가운데 군주처럼 안내를 받아 황궁까지 행진할 줄 알았다고 한다. 그는 병사들에게 더는 유혈극을 저지르지 말고 그 자리에 가만히 있으라고 명하고 밤을 지낼 천막을 치게 했다. 그러나 기다리던 시민 대표단은 오지 않았고, 수비대는 전열을 재정비한 뒤 성문을 닫고 방어 위치에 다시 섰다. 그제야 자신의 실수를 깨달고 포로들을 블라케르나이 성벽 바로 아래로 이동시키고 압박을 가하게 했다.
포로들은 시민들에게 동족을 야멸차게 대하지 말고, 그들이 보는 앞에서 제물처럼 난도질당하도록 내버려두지도 말라고 애원했다. 그들은 우리에게 일찍이 세상에 존재한 적이 없었던 지배자를 자신들의 경험만으로 판단하여 과소평가하는 것은 감히 신의 섭리를 시험하는 것이라고 경고했다. (중략) 그리고 그들은 우리 황제의 잘못을 설명하고, 치세 초기에 황제가 시민들에게 큰 기대를 품게 했다가 결국은 구름 위에서 벼랑 가장자리로 내몰지 않았느냐고 말했다.
미하일 프셀로스
미하일 프셀로스
그러나 수비대는 화살과 돌멩이를 퍼붓는 것으로 답했고, 그중 하나는 그의 몸을 거의 맞힐 뻔했다. 게다가 콘스탄티노스 9세는 통풍에 시달리는 와중에도 성벽 위로 계속 올라가 장병들을 격려하고 반란군을 꾸짖었다. 한 기마 궁수가 쏜 화살이 그의 몸을 아슬아슬아게 비껴가 부관을 맞추었지만, 그는 개의치 않고 계속 성벽 위에서 활동했다. 결국 수도를 공략할 수 없다는 걸 깨달고 서쪽으로 퇴각하였고, 추종자들은 하나둘씩 이탈했다. 이베리아에서 소집된 군대가 수도에 도착한 뒤, 콘스탄티노스 9세는 반란군을 추격하라고 명령했다. 그는 요안니스 바타체스와 함께 체포되었고,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끌려가 함께 실명형에 처해졌다. 이후의 행적은 기록이 미비해 알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