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 제국 황제 참칭자 에우게니우스 EVGENIVS | |
<colbgcolor=#9F0807><colcolor=#FCE774,#FCE774> 이름 | 플라비우스 에우게니우스 Flavius Eugenius |
출생 | 미상 |
로마 제국 | |
사망 | 394년 9월 6일 |
로마 제국 프리기두스 강 | |
재위 기간 | 로마 황제 |
392년 8월 22일 ~ 394년 9월 6일 (2년) | |
전임자 | 발렌티니아누스 2세 |
후임자 | 테오도시우스 1세 |
종교 | 로마 이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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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제국의 비정통[1] 황제. 서기 392년 5월 15일 발렌티니아누스 2세가 사망하자, 서로마의 실권자 플라비우스 아르보가스트에 의해 황제로 옹립되었다. 이후 그라티아누스에 의해 철거되었던 승리의 제단을 재건하는 등 로마 다신교의 부활을 꾀했으나, 394년 9월 프리기두스 전투에서 테오도시우스 1세에게 참패한 뒤 사로잡혀 처형되었다.2. 생애
에우게니우스는 그리스어 문법 및 수사학 교사였으며, 서기총관(magister scrinorvm)을 역임했다. 그는 서로마 제국의 실권자 아르보가스트의 삼촌 플라비우스 리코메르의 소개를 받고 아르보가스트와 친분을 맺었다.그러던 392년 5월 15일, 아르보가스트와 심한 갈등을 벌이던 발렌티니아누스 2세가 사망했다. 아르보가스트는 그가 비엔나 별장에서 목을 매어 자살했다고 공표했지만, 당대 기록 대부분은 아르보가스트가 직접 황제를 죽였거나 근위대를 매수해 시해했다고 추정한다.
암브로시오는 장례식에서 발렌티니아누스 2세를 추모하는 주례를 맡아 발렌티니아누스를 신앙심 깊은 기독교인의 전형으로 묘사하면서 천국으로 똑바로 올라갔다는 말을 남겼다. 기독교 교리상 자살이라는 죄악을 저지른 자는 천국으로 똑바로 올라가는 것이 불가능한 만큼, 이는 황제가 살해당했다는 공식적인 교회의 입장이었고, 서로마의 실권자였던 아르보가스트에 반대한다는 의사표명을 한 것이었다. 이로 인해 암브로시오와 아르보가스트의 갈등은 심화되었다.
아르보가스트는 동방의 황제이자 일전에 자기를 발렌티니아누스 2세의 보호자로 삼았던 테오도시우스 1세에게 인정받기 원했는지, 발렌티니아누스 2세가 사망한 후 3개월이 지나도록 새 황제를 세우지 않았다. 그러나 테오도시우스 1세에게 그럴 의사가 없다는 게 분명해지자, 아르보가스트는 반기를 들기로 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직접 황위에 오르지 않고 친구 에우게니우스를 황제로 추대했다.
그 이유가 무엇인지는 기록이 미비해서 확실하지 않으나, 아마도 두 가지 원인이 있었기 때문인 것으로 짐작된다. 첫째, 아르보가스트는 프랑크족 출신이라서 로마인들에게 황제로 받아들여지기 힘들었던 반면, 에우게니우스는 로마인이어서 받아들여지기 쉬웠다. 둘째, 에우게니우스는 그리스어에 능통하고 교양이 있으며, 로마에서 영향력이 상당한 귀족이어서, 원로원의 지지를 받기 쉬웠다.
에우게니우스는 서기 392년 8월 22일 황위에 오른 뒤 테오도시우스가 임명했던 제국 내의 행정관들을 모조리 숙청하고, 그 자리에 자신의 측근을 선임했다. 다른 행정관직도 원로원 계급 출신 인사가 임명되었다. 비리우스 니코마쿠스 플라비아누스는 이탈리아 근위구장을 맡았고, 아들 니코마쿠스 플라비아누스는 로마 관구장을 맡았다.
한편, 에우게니우스는 명목상으로는 기독교도였으나, 실제로는 로마 다신교를 신봉했다고 한다. 그래서 로마 다신교를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원로원의 요청에 따라 지난날 그라티아누스에 의해 파괴되었던 승리의 제단을 복원했다. 또한 그가 임명한 이교도 행정관들의 설득을 받아들여 오스티아의 헤라클레스 신전을 재건했으며, 이교도들의 축제를 후원했고, 로마의 베누스 신전의 재헌정을 이끌었다.
이러한 종교정책은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테오도시우스 1세와의 갈등을 야기하였으며, 밀라노 주교 암브로시오는 에우게니우스가 원로원의 부당한 요구를 묵인했다고 비난하다가 압력이 가해지자 주교직을 사임했다. 급기야 이탈리아 근위구장 비리우스 니코마쿠스 플라비아누스는 성당에서 군마를 머물게 할 것이며, 에우게니우스가 최종적으로 승리를 거두면 성직자들을 군대에 입대시키겠다고 위협하기도 했다.
술피키우스 알렉산드로스의 유실된 연대기 구절을 인용한 투르의 그레고리오에 따르면, 에우게니우스는 아르보가스트와 함께 라인 방어선으로 이동하여 알레만니족과 프랑크족 앞에서 로마군을 사열시켜 이들을 압도한 뒤, 두 종족과 예전에 맺었던 동맹을 갱신하였다. 에우게니우스의 군대에는 프랑크 족과 알레만니 족도 포함되었다.
에우게니우스는 즉위 직후 테오도시우스 1세의 궁정에 사절을 보내 자신의 즉위를 수락하는지 물었다. 테오도시우스 1세는 사절에게 선물과 거짓 약속을 퍼부으며 안심시킨 뒤, 사절을 보낸 후 전쟁 준비를 시작했다. 이윽고 393년 1월, 그는 아들 호노리우스를 서방의 아우구스투스로 임명함으로써, 에우게니우스를 절대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뜻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서기 394년 5월 중순, 테오도시우스 1세는 군대를 규합하여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출발하였다. 이 소식을 접한 에우게니우스와 아르보가스트는 군대를 동원하여 이에 맞섰다. 양군은 394년 9월 5일 이탈리아와 슬로베니아 국경 지대에 위치한 프리기두스 강에서 조우하였다. 이후에 전개된 프리기두스 전투에서, 양측은 이틀간 치열한 접전을 벌였다.
전투 초기, 테오도시우스 1세 휘하의 고트족 1만명과 바쿠리우스 장군이 전사했다. 이에 사기가 오른 아르보가스트의 군대는 적의 퇴로를 끊기 위해 분견대를 파견했다. 테오도시우스 1세는 적이 병력을 분산시키자, 호기로 여기고 아르보가스트의 분견대를 기습했다.
이때 강풍이 불면서 분견대의 시야가 먼지바람에 가려졌고, 결국 분견대는 제대로 대응도 못하고 궤멸되었다. 테오도시우스 1세는 여세를 몰아 적 본대까지 공세를 퍼부었고, 결국 서로마군은 무너졌다. 에우게니우스는 394년 9월 6일 숙영지에서 미처 피하지 못하고 체포된 뒤 공개 처형되었고, 그의 머리는 숙영지 인근에 효수되었다. 한편 아르보가스트는 산으로 도망친 뒤 자살했다.
[1] 결과적으로 역사의 패배자가 되었기에 비정통이 맞긴 한데, 사실 집권 정통성은 원로원의 추대로 즉위한 것이기에 대립 황제였던 호노리우스에 비하면 넘사벽이었다. 호노리우스의 원로원 추대는 그냥 사후승낙에다가 그마저도 협박에 의한 것이었고, 화룡점정으로 그 협박마저도 스스로의 힘으로 한 게 아니라 아버지 테오도시우스가 대신 해준거다(...). 뭐 로마란 나라 자체가 힘 빼곤 쥐뿔도 없는 듣보잡들이 힘으로 명분을 뜯어내는 일이 밥먹듯 일어나던 나라라서 호노리우스가 더 로마다운 황제라고는 볼 수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