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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3-12-22 14:39:23

로마노스 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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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제국 제93대 황제
로마노스 2세
Ρωμανός Β΄
파일:Romanos_et_Eudoxie_(cropped2).jpg
<colbgcolor=#9F0807><colcolor=#FCE774,#FCE774> 이름 로마노스 2세
(Ρωμανός Β΄)
출생 938년
동로마 제국
사망 963년 3월 15일 (향년 24-25세)
동로마 제국
재위 기간 로마 황제
959년 11월 9일 ~ 963년 3월 15일 (4년)
전임자 콘스탄티노스 7세
후임자 니키포로스 2세
부모 아버지 : 콘스탄티노스 7세
어머니 : 엘레니 레카피니
배우자 테오파노
자녀 바실리오스 2세, 콘스탄티노스 8세, 안나 포르피로게니타
종교 기독교
1. 개요2. 생애
2.1. 황제 즉위 이전2.2. 치세
2.2.1. 크레타 탈환2.2.2. 함단 전쟁
2.3. 갑작스러운 사망
3. 참고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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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제국의 93대 황제이자 마케도니아 왕조의 제 6대 황제로 4년간 유능한 장군들의 활약으로 제국의 판도를 넓혔으나 963년 3월 15일에 25세의 젊은 나이로 갑작스럽게 사망했다.

2. 생애

2.1. 황제 즉위 이전

로마노스는 938년경 콘스탄티노플 황궁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콘스탄티노스 7세이고 어머니는 로마노스 1세의 딸이었던 엘레니 레카피니였다. 로마노스는 그의 아버지처럼 태어나면서부터 포르피로옌니토스였고 백성들의 추앙을 받은 황제의 적법한 아들이었다. 또한 그는 아버지의 장대한 기골과 세련된 몸가짐, 어머니의 아름다운 용모를 물려받았다. 경박하고 사냥이나 주연, 폴로 경기 등을 지나치게 즐겼다는 비난도 있었지만, 한창 나이의 젊은이에겐 그럴 수도 있는 일이라서 딱히 문제 삼는 사람은 드물었다.

로마노스는 어린 나이에 이탈리아 왕 우고가 낳은 딸 베르타와 결혼했다. 베르타는 에우도키아로 개명하고 아우구스타 칭호를 받았지만 불행히도 949년에 요절했다. 이후 콘스탄티노스 7세는 오토 1세의 조카 딸인 바이에른의 헤트비히를 며느리로 삼으려 했지만, 로마노스는 이를 마다하고 펠레폰네소스의 여관집 딸인 테오파노와 결혼했다. 만약 로마노스가 아버지의 뜻에 따랐다면, 훗날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가 되는 오토 1세와 동로마 제국은 인척 관계가 성립되므로 두 제국의 사이는 각별해졌을지도 모른다. 물론 나중에 요안니스 1세의 조카딸인 테오파노가 오토 1세의 아들인 오토 2세와 국혼을 맺었지만, 아무래도 출신 가문이 867년 이래 여러 대 세습되었던 마케도니아 왕조였던 것과, 가문 구성원인 요안니스가 황제가 되었지만 결국 마케도니아 왕조를 대체하지 못하여 결국 여러 귀족 가문들 중 하나로 그친 쿠르쿠아스 가문이었던 것과는 차이가 있었다.

2.2. 치세

959년 11월 6일 콘스탄티노스가 사망했다. 이후 새 황제로 즉위한 로마노스는 아내 테오파노의 설득에 따라 어머니 엘레니 레카피니를 별궁에 보냈고 다섯명의 누이들을 수녀원에 보냈다. 또한 정부와 궁정의 원로 대신들도 무더기로 교체되었고, 시종장 바실리오스는 원로원 의장(Proedros)직을 얻어 황제의 오른팔이 되었으며 그의 후임으로는 환관인 요시포스 브링가스가 임명되었다. 브링가스는 시종장을 맡는 동시에 총리 대신과 해군 총사령관을 겸임했는데, 대단히 지적이고 명민했지만 한편으로는 탐욕스럽고 이기적이고 잔인했다고 한다. 그는 로마노스의 신임을 받아 절대 권력을 획득한 후 크레타 원정에 착수했다.

2.2.1. 크레타 탈환

959년, 니키포로스 포카스와 동생 레온 포카스는 황제의 명령을 받들어 각각 동부와 서부 군대에 배치되었다. 960년, 니키포로스는 크레타를 정벌하기 위해 2만 7천명의 해군 및 선원들을 징집하고 5만 명의 군대를 태우기 위한 308척의 함대를 소집했다. 장관 요세프 브링가스의 권고에 따라, 니키포로스는 이슬람교도인 크레타 섬의 에미레트가 이 원정을 감독하게 했다. 니키포로스는 7월 13일에 성공적으로 그의 함대를 크레타에 상륙시켰고 아랍군의 반격을 격파했다.

그는 곧 크레타 최대의 도시 한닥스 요새를 9개월 동안 포위 공격했다.(한닥스 공방전) 포위 공격하는 동안에는 섬 내 다른 이슬람군을 진압하고 그 시체에서 벤 머리를 공성병기에 담아 성내로 투하할 정도로 잔혹하게 싸웠다. 전해지는 말로는 살아있는 당나귀를 성 안에 투척했다고도 한다.[1] 이 끈질긴 포위 공격 끝에, 한닥스는 마침내 961년 3월 6일 함락되었고 요새에 피난 가 있던 여자들은 모두 윤간당하고 아이들은 모조리 살해당했다.[2] 그런데 아미르인 아브드 알 아지즈 이븐 슈아이브는 죽지 않았고 오히려 선물과 정착할 토지를 받았다고 한다. 개종 후 원로원 의원을 시켜주려고도 했었지만 개종을 완강히 거부해서 무산되었고, 대신 그 아들은 개종하고 군에 들어갔다. 이후에 등장하는 귀족 가문인 아네마스 가문이 그의 후손이라는 학설도 있다고 한다.[3] 여하튼 이로써 크레타 섬을 이슬람 세력으로부터 탈환하는 데 성공한 니키포로스는 콘스탄티노플로 당당하게 돌아왔다. 그러나 로마노스 황제와 환관 요세포스 브링가스는 그를 위협적인 존재로 여기고 개선식을 치러주지 않고 원형 경기장에서 시민들에게 갈채와 환영을 받는[4] 것만 허용했다.

2.2.2. 함단 전쟁

962년, 니키포로스 포카스는 동방 전선으로 파견되어 함단 왕조의 사이프 알 다울라(Sayf al-Dawla)와 대결했다. 이보다 앞서, 니키포로스의 동생 레온 포카스는 형이 크레타 원정을 나가 있는 동안 사이프와 대적했다. 960년 초여름, 사이프는 3만 명의 병력을 이끌고 제국의 국경을 넘어 타우로스 산맥 동쪽의 협곡들을 무사히 통과하고 멜리티니 부근의 하르시아누의 요새로 가서 수비대를 죽이고 많은 포로를 잡았다. 레온 포카스는 대응하려 했지만 수적으로 열세인데다 길고 험한 원정으로 지쳐서 함부로 맞서지 않고 산악 지대에 주둔하고 주요 길목에 병력을 세심하게 배치한 뒤 사이프가 본국으로 돌아가기를 기다렸다. 11월 초, 사이프는 본국으로 귀환하다가 쿨린드로스 고개에서 레온 포카스가 이끄는 제국군의 기습을 받고 300명의 기병대와 함께 전속력으로 도망쳤다. 그러나 그를 따르던 병사들은 절반 가까이 죽었고 붙잡힌 병사들은 노예로 전락했다.

동생의 활약으로 기세가 꺾이긴 했지만, 사이프가 언제라도 세력을 회복해 제국을 위협할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니키포로스의 가세는 매우 적절한 것이었다. 니키포로스는 962년 초 동생과 함께 킬리키아로 진군해 불과 3주 만에 킬리키아의 도시 55개를 되찾고 부활절에 잠시 휴식을 취한 다음 진군을 개시해 알렉산드레타 근처의 시리아 성문을 통과했다. 이후 그의 군대는 남쪽으로 서서히 이동하면서 도상의 촌락들을 불태우고 알레포를 포위, 39만 디나르의 은, 낙타 2천 마리, 노새 1400마리,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아랍산 종마들을 약탈하고 궁궐을 불태웠다. 사이프는 알레포 성벽 바깥에서 사로잡혔다가 가까스로 빠져나왔고, 현지 방어군은 저항하다가 결국 12월 23일 무너졌다. 병사들은 알레포 시내로 물밀듯이 쏟아져 들어와 지칠 때까지 학살을 계속했다.

2.3. 갑작스러운 사망

963년 3월 15일, 로마노스는 불과 25살에 나이에 급사했다. 황후 테오파노가 남편을 독살했다는 소문이 당대부터 파다했지만, 그녀가 실제로 그랬다는 증거는 없으며 그럴만한 동기도 부족하다. 역사학계에서는 로마노스는 황음을 일삼다가 몸에 무리가 와 사망한 것으로 추정한다. 당시 테오파노는 로마노스 사이에서 네 명의 자식을 낳았고 남편이 살아있는 동안 막강한 권력을 휘둘렸다. 그러나 남편이 급사하는 바람에 그녀의 권력이 위태로워졌고 어린 자식들은 제위를 노리는 야심가들에게 위협받았다. 이에 그녀는 비밀리에 니키포로스 포카스에게 전갈을 보내 황궁으로 돌아와달라고 요청했다. 이에 니키포로스는 콘스탄티노플로 달려와 그녀와 그녀의 자식들을 지켜주겠다고 맹세했다. 당대 실권자 브링가스는 그를 어떻게든 제거하려 했지만, 민심은 니키포로스에게 쏠렸고, 결국 니키포로스는 테오파노 황후와 결혼하고 황제 니키포로스 2세가 된다.

3. 참고자료


[1] 유튜브 채널 'Kings and Generals'의 영상 Byzantine Reconquista Siege of Chandax 960-961에 나온다.[2] 사실 크레타가 애초에 이슬람 세력에게 함락당할 때도 같은 일이 있었긴 했지만. 게다가 포위가 이렇게 오래 지속되는데도 항복하지 않아 점령군도 고생을 많이 해서 (960년에서 961년으로 넘어가는 겨울에는 둘러싼 공격자 측인 로마군도 보급품이 떨어져서 콘스탄티노플에서 보급품이 도착해서야 비로소 한 숨 돌렸다고 할 정도다.)[5] 바짝 약이 올라 있었고 때문에 살해를 말리려던 니키포로스의 명령은 전혀 먹혀들지 않았다.[3] 영어 위키백과 Abd al-Aziz ibn Shu'ayb 중 'After the capture of Chandax, Abd al-Aziz was taken captive with his family to Constantinople, where they were paraded at Nikephoros Phokas' triumphal procession. They were then given rich presents and an estate to settle by Romanos II. The Byzantine sources report that the emperor considered making Abd al-Aziz a senator, but the latter refused to convert to Christianity. One of his sons, however, al-Nu'man, or Anemas in Greek, converted and entered Byzantine service, until he was killed at the Siege of Dorostolon in 971. Some modern researchers consider it possible that the later Byzantine aristocratic family of the same name descended from him.', Anemas 중 'An-Nu'mān ibn ʿAbd al-ʿAzīz ibn Shuʿayb ibn ʿUmar al-Qurṭubī, known by the Byzantines as Anemas (Greek: Ἀνεμᾶς), was the son of the last Emir of Crete, Abd al-Aziz ibn Shu'ayb.' 및, 'Upon settling in Constantinople, Anemas converted to Christianity and joined the Byzantine army as a member of the imperial bodyguard.' 및, 'It is possible that the Anemas family that appears in the Byzantine aristocracy in the 11th–12th centuries were his descendants.'[4] 정식 개선식보다 한 급 낮은 이것을 Ovation이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