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 제국 제122대 황제 미하일 9세 Μιχαήλ Θ' | |
<colbgcolor=#9F0807><colcolor=#FCE774,#FCE774> 이름 | 미하일 두카스 앙겔로스 콤니노스 팔레올로고스 Μιχαήλ Δούκας Ἄγγελος Κομνηνός Παλαιολόγος |
출생 | 1277년 4월 17일 |
동로마 제국 콘스탄티노폴리스 | |
사망 | 1320년 10월 12일 (향년 43세) |
동로마 제국 테살로니키 | |
재위 기간 | 로마 황제 |
1294년 5월 21일 ~ 1320년 10월 12일 (38년) | |
전임자 | 안드로니코스 2세 |
후임자 | 안드로니코스 2세 안드로니코스 3세 |
부모 | 아버지 : 안드로니코스 2세 어머니 : 헝가리의 언너 |
배우자 | 아르메니아의 마리아 |
자녀 | 안드로니코스 3세 |
종교 | 그리스도교(정교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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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제국 제122대 황제, 동로마 제국 팔레올로고스 왕조 제3대 황제.2. 생애
1277년 4월 17일 안드로니코스 2세와 헝가리의 언너 사이에서 출생했다. 부활절 정오에 태어났기에 사람들이 기적이라고 여겼다고 한다. 그는 어렸을 때 왕실의 고급교육을 받았고 일찍부터 부제로 세워졌다. 1294년(또는 1295년) 5월 21일 성 소피아 대성당에서 세계 총대주교 요안니스 12세의 주최하에 공동 황제로 즉위했다. 그 후 안드로니코스 2세는 외부의 적에 대한 전쟁 수행을 아들에게 위임했다.1302년 최대 16,000명의 병력을 모아 제국의 소아시아 영토를 갉아먹는 카라시 왕조를 상대로 원정을 떠났다. 원정군에는 10,000명의 알란 용병대가 배속되었다. 그는 마그네시아 요새에 진을 쳤으나, 적군이 주변 산의 정상과 숲 등 방어에 유리한 지점을 선점했고, 병사들의 사기가 떨어졌기 때문에 함부로 전투를 벌이지 못했다. 그러던 중 투르크군이 산에서 내려와서 돌격해오자, 그는 전투 준비를 명령했지만, 알란 용병대가 제대로 싸워보지도 않고 달아나는 바람에 무력하게 패했다.
그 후 페르가몬으로 후퇴한 뒤 다드라미티움으로 가서 그곳에서 1303년 새해를 맞이한 뒤, 여름에 키지쿠스 시에 가서 새로운 군대를 조직하려 했다. 그러나 그 사이에 투르크군은 상가라 하류 지역을 점령하고 니코메디아 인근의 바페오스에서 또다른 동로마군을 격파했다.(바페오스 전투) 이로 인해 소아시아 현지민들의 민심이 동로마 제국을 떠나고 병력 모집이 제대로 되지 않자, 그는 실의에 빠진 나머지 중병에 걸려 피기 요새에서 그해 내내 요양 생활을 해야 했다. 투르크군은 그 사이에 에페수스 시와 로도스 섬을 공략했다. 1304년 1월에서야 병세가 회복된 그는 요새를 떠나 아내 아르메니아의 마리아와 함께 콘스탄티노폴리스로 향했다.
1304년, 불가리아 제2제국의 차르 토도르 스베토슬라프가 동로마 제국을 본격적으로 침략했다. 그는 메셈브리아, 안키알루스, 소조폴, 아흐토폴 등을 공략하는 등 트라키아 북부 일대를 석권했다. 이후 이들에 맞서 알란 용병대 대신에 새롭게 고용한 카탈루냐 용병을 동원하려 했지만, 용병대 지도자인 루지에로 데 플로르는 황제가 합의된 급료를 지불하지 않으면 불가리아군과 싸울 수 없다며 거부했다. 어쩔 수 없이 다른 부대를 이끌고 진군하다가 카피다 강 인근에서 불가리아군과 마주쳤다. 초기의 전투 후 불가리아군이 후퇴하자, 동로마군은 추격에 나섰지만 강 위의 다리가 돌연 허물어졌다. 그 순간 불가리아군은 반격하였고, 동로마군은 속절 없이 붕괴되었다. 이후 가까스로 빠져나왔고, 토도르는 흑해 연안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다.
1304년 8월, 그는 전 재산을 털어서 군대를 재조직한 뒤 슬리벤 주변의 일대를 공격하여 황폐화시켰다. 이리하여 흑해 연안을 재확보했고, 아타나시오스 총대주교는 그에게 찬사를 보내는 설교를 했다. 그러나 그해 가을에 토도르가 다시 반격하여 흑해 연안을 공략하고, 소조폴을 확실히 정복하고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요안니스 12세 코스마스를 체포했다. 또한 크란의 데스포티스 알디미르는 토도르의 지시에 따라 트라키아 일대를 침공해 약탈을 자행했다. 그는 불가리아로 잡혀간 포로를 구하고 새로운 군대를 모집하기 위해 아버지와 함께 보석을 팔 수밖에 없었다.
1305년 봄, 그는 아버지를 대신해 아드리아노폴리스에서 반항을 일삼는 카탈루냐 용병대장 루지에로 데 플로르와 협상을 벌였다. 루지에로는 병사들에게 10만 골드의 봉급을 급료로 지불하고 30만 골드를 추가로 지급할 것을 요구했다. 만약 그게 어렵다면, 아나톨리아 일대를 영지로 나눠달라고 덧붙였다. 이 사실을 아버지에게 알렸고, 카탈루냐 용병대가 난동을 부릴 것을 염려한 황제는 이를 받아들였다. 그런데 1305년 4월 30일, 루지에로는 그가 초대한 연회에 참석했다가 피살당했다. 미하일이 루지에로를 함정에 빠뜨렸다는 기록과 술에 취한 로마인과 카탈루냐인 사이에 다툼이 벌어진 와중에 죽어버렸다는 기록이 동시에 전해지는데, 어느쪽이 맞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카탈루냐 용병대는 자신들의 지도자가 살해당하자 분노하여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사절을 보냈다. 안드로니코스 2세는 전쟁을 원치 않았기에, 루지에로가 자신의 명령에 의해 죽임을 당한 게 아니라고 호소하며 배상금을 지불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카탈루냐 용병대는 이를 무시하고 500명의 투르크 분견대와 연합하여 갈리폴리에서 요새를 세우고 트라키아를 습격해 밤낮으로 약탈하고 민간인들을 죽이거나 노예로 팔았다. 미하일은 이에 분노하여 토벌에 나섰다.
1305년 7월, 그는 1만 4천 가량의 병력을 이끌고 아프로스에서 2,500명의 카탈루냐 용병대 및 그들과 연합한 1,000명의 투르크 기병대와 맞붙었다. 그러나 전투가 시작되었을 때 동로마 제국군에 소속되어 있던 투르코폴레스와 알란 용병대는 갑자기 전장을 이탈했다. 미하일은 눈물을 흘리며 그들에게 도망치지 말아달라고 호소했지만, 다들 그의 말을 전혀 듣지 않고 도주했다. 카탈루냐 용병대는 그들을 맹렬히 추격해 마구잡이로 살육했다. 결국 미하일은 이번에도 참패하여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달아났다. 카탈루냐 용병대는 콘스탄티노폴리스를 공격하기에는 병력이 적었기에 그곳을 건드리지 않았다. 그 대신 서쪽으로 군대를 돌려 트라키아 일대에서 2년간 약탈과 학살을 자행했다. 그 후 진로를 남쪽으로 돌려 아테네로 진군해 아테네 공국을 탈취하고 자신들의 근거지로 삼았다.
이런 상황에서 불가리아와의 전쟁을 이어가는 건 불가능했기에, 동로마 제국은 1307년 불가리아와 평화협약을 체결했다. 이때 그의 딸 테오도라 팔레올로기나와 토도르의 결혼이 성사되었으며, 불가리아는 동로마 제국을 상대로 얻어낸 영역을 그대로 인정받았다. 1314년, 카탈루냐 용병대와 함께 트라키아를 거쳐 그리스까지 약탈을 이어가던 투르크인들이 전리품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가려 했다. 그들은 로마 영토를 통과하게 해달라고 요청했지만, 안드로니코스 2세는 투르크 병력이 기병 1,300명, 보병 800명밖에 없는 것을 보고 그들을 습격해 쓸어버리려 했다. 하지만 이 계획은 누설되었고, 투르크인들은 가장 가까운 요새를 점거한 뒤 주변 일대를 약탈했다.
그는 아버지의 명을 받들어 가능한 모든 병력을 총동원해 요새를 포위했다. 그러나 할릴이라는 족장이 이끄는 투르크 기병대가 요새에서 출격하자, 대다수가 제대로 훈련받지 않은 농민이었던 병사들은 갑자기 달아났다. 미하일은 군대를 재정비하려 했지만, 아무도 그의 말을 듣지 않았다. 그는 결국 도주했고, 투르크군은 적군의 숙영지를 점령한 뒤 바실레오스의 왕관을 할릴의 머리에 씌웠다. 얼마 후, 젊은 장군 필리스 팔레올로고스가 미하일에게 독자적으로 투르군과 싸울 군대를 모집하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미하일의 허락을 받아낸 그는 애국심이 투철하고 전투력이 뛰어난 소규모 병력을 모집한 뒤, 시로집스 강 근처에서 투르크군을 습격해 일전의 패배를 설욕하고 그리스 포로들과 전리품을 전부 되찾았다. 그 후 동로마군은 제노바군의 협력에 힘입어 요새를 탈환하는 데 성공했다.
이렇듯 군사 지휘권을 맡은 이래 연전연패했기에 동로마 제국의 쇠락을 가지고 온 무능한 지휘관으로 여겨지지만, 사실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당시 그가 이끄는 병사들은 제대로 된 훈련을 받지 못하고 사기도 밑바닥인 농민 민병대와 약탈과 배신을 일삼는 알란, 카탈루냐, 투르크, 세르비아 용병대 뿐이었다. 안드로니코스 2세는 선제 미하일 8세가 재위 내내 다중 전선을 치르느라 국고가 바닥을 드러내게 만든 상황에서 정규군의 유지는 부적절하다고 판단해 정규군을 해산시키고, 용병대에게 제국의 국경 방비를 맡겼다. 그러나 동로마 지휘관들은 용병대의 비겁함, 탐욕, 반항심을 억제할 수 없었고, 이로 인해 제국은 외세의 침략으로부터 무력해졌다.
아무튼 공동 황제가 된 이래 연이은 패배로 입지가 위태로워진 상황에서, 아버지가 새 황후로 들인 몬페라토의 이리니와의 정쟁을 치러야 했다. 그녀는 안드로니코스 2세와의 사이에서 5남 2녀를 낳았는데, 딸 시모니스 팔레올로기나, 아들 테오도로스, 데메트리오스 팔레올로고스만 장성했다. 그녀는 아들들을 제위에 올리려는 야심을 품고, 미하일을 향한 정치적 공세를 퍼부었다. 그러나 안드로니코스 2세가 미하일을 폐위시킬 의사가 없고 제국의 영토를 나눠달라는 요구도 거절하자, 이리니는 분노하여 1303년 콘스탄티노폴리스를 떠나 테살로니키로 이동해, 그곳에 자신만의 궁정을 세우고 국가의 재정과 외교 정책을 주관했다. 안드로니코스는 이에 대해 별다른 제지를 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이며, 그녀는 1317년 사망할 때까지 이같은 독단적인 행위를 지속했다.
1319년 10월, 안드로니코스 2세의 명에 따라 테살로니키에서 통치를 맡아 테살로니키인과 펠라지아인 사이의 오랜 적대감을 종식시키려 노력했다. 그러던 1320년 10월, 딸 안나가 병사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깊은 슬픔에 빠졌다. 그런데 얼마 후 그보다 훨씬 비극적인 소식이 전해졌다. 그는 아내 아르메니아의 마리아 사이에서 장남 안드로니코스 3세와 차남 마누일 팔레올로고스를 낳았다. 그런데 안드로니코스가 동생 미하일이 자신의 정부와 불륜 관계라고 의심하다가 급기야 사람을 보내 죽여버린 것이다. 그는 이 소식에 견딜 수 없는 충격을 받고 중병에 걸렸고, 1320년 10월 12일에 사망하여 테살로니키에 안장되었다. 이에 분노한 안드로니코스 2세는 손자 안드로니코스 3세의 황위 계승권을 박탈하고, 막내아들 콘스탄티노스를 후계자로 삼았다. 안드로니코스 3세가 이에 반발해 1321년 반란을 일으키면서 동로마 제국의 패망을 이끈 팔레올로고스 내전의 서막이 올랐다.
3. 가족관계
부: 안드로니코스 2세모: 헝가리의 언너(헝가리-크로아티아 국왕 이슈트반 5세의 딸)
제: 콘스탄티노스 팔레올로고스(안드로니코스 2세의 막내아들)
아내: 아르메니아의 마리아
장남: 안드로니코스 3세
차남: 마누일 팔레올로고스
장녀:안나 팔레올로기나(이피로스 전제군주국의 니콜로 오르시니와 결혼)
차녀:테오도라 팔레올로기나(불가리아 제2제국의 토도르 스베토슬라프와 결혼, 불가리아 제2제국의 미하일 아센 3세와 재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