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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2-08-28 20:35:55

미하일 아센 3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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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미하일 아센 3세.jpg
이름 미하일 아센 3세
(영어: Michael Asen III, 불가리아어: Михаил Асен III)
출생 미상
사망 1330년 7월 31일
직위 불가리아 제2제국 차르

1. 개요2. 생애3. 여담

[clearfix]

1. 개요

불가리아 제2제국 20대 차르.

2. 생애

비딘의 데스포티스인 시슈만 1세와 이반 아센 2세의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손녀 사이의 아들로, 형제로 베나르와 케라타사 페트리샤가 있었다. 1292년 시슈만과 세르비아 왕 스테판 우로시 2세 밀루틴 사이에 평화 조약이 체결된 후, 그는 차기 세르비아 왕 스테판 우로슈 3세 데찬스키의 누이인 안나 네다와 결혼했다. 비딘에서 부친과 함께 공동 통치하다가, 1308년에서 1311년 사이에 부친이 사망한 뒤 단독 통치자가 되었다. 1317년 세르비아 왕 스테판 우로시 2세 밀루틴을 지원하여 헝가리를 상대로 전쟁을 벌였다. 그해 10월 세베린의 미할드(오늘날의 메하디자) 요새에 전투에서 연합군이 패배한 뒤, 용병 사령관 이반 루시나가 비딘으로 피신했다. 그는 시슈만의 군대에서 신뢰받는 군 지휘관이 되었다. 1321년 스테만 우로시 2세 밀루틴이 사망한 뒤 스테판 우로시 3세 데찬스키와 스테판 블라디슬라프 2세간의 내전이 벌어지자, 그는 스테판 블라디슬라프 2세를 지원했다.

1323년 봄 게오르기 테르테르 2세동로마 제국 황제 안드로니코스 3세와의 전쟁 중 돌연 사망하자, 그는 황위 경쟁에 뛰어들어 몇달간 지지자들을 끌어모은 끝에 새 차르로 선임되었다. 그는 위대한 차르 이반 아센 2세의 유지를 받들겠다며, 본래 이름인 시슈만을 아센으로 개명하였다. 하지만 그 사이에 전 불가리아 차르 스밀레츠의 형제이자 스레드나 고라 산맥의 데스포티스 보이실은 크란을 공략하여 코프시스와 4개의 다른 요새를 정복했다. 또한 안드로니코스 3세는 얌볼, 라르데아, 크테니아, 루소카스토르, 안키알루스, 소조폴, 아가토폴 등지를 공략했다. 이리하여 불가리아는 안드로니코스 3세가 공략하지 못한 플로브디프를 제외한 트라키아의 모든 영토를 빼앗겼다.

그는 황위에 오르자마자 즉시 군대를 이끌고 남하하였다. 플로브디프가 동로마군의 공세를 견디는 사이, 상실한 불가리아 북동부를 탈환하였다. 이후 불가리아군이 플로브디프로 접근하자, 안드로니코스 3세는 포위를 풀고 철수하기로 했다. 하지만 플로브디프 수비대 사령관 이반 루시나가 전투가 끝났다고 여기고 주군에게 달려간 사이, 동로마군 별동대가 재차 쳐들어가서 별다른 전투 없이 플로브디프를 점령했다. 그 후 미하일 아센 3세는 보이실과 1년간 전쟁을 벌였고, 1324년 크란에서 축출했다. 같은 해 트라키아를 약탈하고 있던 킵차크 칸국의 통치자 우즈베크 칸의 도움을 받아 동로마 제국으로 쳐들어가 비라와 트라노폴에 당도했다. 안드로니코스 3세는 병력이 부족해 감히 전투에 나서지 못하고, 대신 미하일 아센 3세에게 전령을 보내 두 사람이 결투를 벌여 승부를 가르자고 제안했다. 그러자 차르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펜치로 뜨겁게 달궈진 쇠를 그의 손 대신 사용하는 대장장이는 멍청이다."

그 후 미하일 아센 3세는 동로마 제국의 황제이며 안드로니코스 3세와 갈등을 벌이고 있던 안드로니코스 2세와 손을 잡고, 안나 네다를 수도원으로 추방한 뒤 안드로니코스 3세의 누이이자 토도르 스베토슬라프의 미망인인 테오도라 팔레올로기나와 결혼했다. 또한 팔레올로고스 왕조의 문장인 날개를 펼친 쌍두 독수리를 채택하였으며, 베나르를 비딘의 데스포티스로 임명하였다. 이리하여 불가리아는 동로마 제국과 우호 관계를 맺었지만, 세르비아와의 관계는 악화되었다. 한편 안드로니코스 3세는 할아버지의 결정에 불복하여 전쟁을 벌이려 했지만, 1324년 8월 불가리아의 사절이 찾아와 자신의 누이와 차르가 결혼했다는 소식을 전해듣자 평화 협약을 받아들였다. 이리하여 양국의 전쟁은 종식되었고, 양국의 국경선은 플로브디프-체르노멘-소조폴로 정해졌다.

1326년 안드로니코스 2세와 안드로니코스 3세간의 불화가 깊어졌다. 할아버지 안드로니코스 2세는 세르비아의 스테판 우로시 3세 데찬스키에게 구원을 요청했고, 안드로니코스 3세는 미하일 아센 3세에게 지원을 요청했다. 1327년 5월 13일, 체르노멘 요새 근처에서 미하일과 안드로니코스 3세가 만나 안드로니코스 2세와 세르비아에 대한 공동 군사 행동을 규정하는 비밀 협정을 체결했다. 이리하여 재개된 내전에서, 안드로니코스 2세의 위세는 크게 꺾였고, 1328년경 콘스탄티노폴리스와 주변 일대만 통치했다. 스테판 우로슈 3세 데찬스키에게 버림받자, 안드로니코스 2세는 미하일에게 도움을 청했다. 미하일은 동로마 제국의 내전이 지속되길 바랬기에 이에 동의했다. 그는 이반 루시나가 이끄는 기병 3천 명을 콘스탄티노폴리스로 파견하여 안드로니코스 2세를 돕게 하였다.

안드로니코스 3세는 즉각 선발대를 이끌고 불가리아 기병대에게 다가갔다. 그는 불가리아 기병대 지휘관에게 철군 명령을 내리라면서, 불과 1년 전에 차르와 맺은 동맹을 정면으로 위반할 셈이냐고 따졌다. 그러면서 안드로니코스 2세에게 서신을 보내 저 불가리아 기병대를 콘스탄티노폴리스 내부로 들인다면 불가리아가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접수할 거라고 경고했다. 안드로니코스 2세는 두려움에 떨며 기병대의 입성을 거부하였고, 결국 이반 루시나는 기병대를 이끌고 본국으로 돌아갔다. 얼마 후 안드로니코스 2세는 수도에 입성한 손자에게 폐위되었고, 제1차 팔레올로고스 내전이 종결되었다. 안드로니코스 3세는 이전에 맺었던 협의대로 동부 트라키아를 불가리아에 넘기기를 거부하였고, 미하일은 안드로니코스 3세와 전쟁을 벌이기로 했다.

킵차크 칸국의 타타르 용병대를 고용한 미하일은 에디르네와 디모티카를 약탈했다. 이에 안드로니코스 3세는 친히 군대를 이끌고 불가리아의 디암볼 요새를 공략하고 파괴했다. 1328년 11월, 미하일은 다시 침략을 개시해 불케론을 정복하였다. 안드로니코스 3세는 디모티카 인근에 진을 쳤다. 이후 양군은 한달간 서로 공격하지 않고 서로를 지켜봤다. 두 군주는 체르노멘 협약을 위반했다는 비난을 주고받다가, 미하일이 불케론을 돌려주는 대가로 금전적 보상을 받는 데 합의한 뒤 양측 모두 철군하였다. 1329년 5월 평화 협약이 공식적으로 체결된 뒤, 미하일은 세르비아 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당시 세르비아 왕국은 불가리아와 동로마 제국간의 갈등을 이용하여 불가리아 영역 일부를 점령했다.

미하일은 갈수록 강성해지는 세르비아를 지금 손봐주지 않으면 언젠가 불가리아에 화가 되리라 여기고, 안드로니코스 3세와 손을 잡기로 했다. 안드로니코스 3세는 세르비아가 빼앗아간 마케도니아 북부를 탈환하길 원했고, 미하일은 불가리아의 북서부와 남서부를 탈환하길 원했다. 이리하여 1330년 초여름, 동로마 제국군이 마케도니아 북부를 침공했다. 그러나 안드로니코스 3세는 세르비아의 영토 깊숙이 진군하지 않았고, 국경 지대의 몇몇 요새를 장악하는 데 만족했다. 그는 불가리아가 행동에 나서기 전에는 위험을 무릅쓸 생각이 없었다. 한편 미하일은 1330년 7월 19일 수도 터르노보에서 출진하여 비딘으로 진격해 타타르와 왈라키아 용병들과 합세한 뒤, 남쪽으로 진군하여 세르비아의 국경 지대에 위치한 젬린 마을에 이르렀다.

한편, 세르비아 국왕 스테판 우로시 3세 데찬스키는 도브리치코 폴제(현재 세르비아 야블라니차주의 레스코바츠시 인근)에 주둔하여 적군의 움직임을 관측했다. 그는 곧 동로마 제국군이 국경 지대에서 얼쩡거릴 뿐이고, 불가리아군이 남쪽 국경을 넘어 국내로 진입하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이에 그는 불가리아군부터 상대하기로 하고, 전군을 이끌고 카메네카 강 서안으로 이동했다. 그러나 불가리아군과 조우했을 때, 세르비아군의 선봉 만이 간신히 현장에 도착한 상태였다. 이에 스테판 우로시 3세는 시간을 끌기 위해 협상을 제의한 끝에 잠깐 동안 휴전을 맺기로 했다. 불가리아군은 적을 얕잡아보고 있었기에 스테판이 시간을 질질 끄는 걸 방치했다. 또한 장병들은 보급난에 시달렸기 때문에 농촌 약탈에 매진할 뿐 군법을 제대로 준수하지 않아서, 군대의 기강이 형편없어졌다. 이리하여 7월 28일 새벽까지 시간을 끄는 데 성공한 스테판은 전 병력이 집결하자 벨버즈드 마을 근방에 진을 치고 있는 불가리아군을 새벽에 기습하기로 했다.(벨버즈드 전투)

7월 28일 새벽, 스테판 우로시 3세는 휴전 약속만 믿고 방심하고 있던 불가리아군 진영으로 몰래 접근했다. 이윽고 적진이 눈앞에 이르자, 아들 스테판 우로시 4세 두샨이 이끄는 중기병 2,000명이 적진으로 뛰어들었다. 당시 불가리아군은 여러 곳에 흩어져서 기습에 대비하지 않았기 때문에, 세르비아군의 갑작스런 기습을 막아낼 도리가 없었다. 스테판 우로시 4세 두샨은 불가리아 제국군 깃발을 탈취하는 등 종횡무진하였고, 불가리아군은 이리저리 도망치다가 중기병대에게 살육당했다. 외지에 있던 불가리아군은 본진이 습격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급히 모였으나, 워낙 다급한 상황인 터라 전열이 제대로 갖춰지지 않았다. 이때 스테판 우로시 3세가 이끄는 본대가 그들을 덮쳤고, 불가리아군은 전의를 상실하고 사방으로 도주했다.

미하일 아센 3세는 잔여 병력을 수습하여 세르비아군에 맞서려 했지만, 병사들이 말을 듣지 않자 자기도 도주하다가 말이 쓰러지는 바람에 낙마하였고, 세르비아군에게 체포된 뒤 감옥에 수감되었다가 7월 31일 낙마로 인한 중상이 악화되면서 사망했다.[1]

세르비아군은 여세를 몰아 불가리아 잔여 병력이 모인 코냐브스카 산을 향해 진격했지만, 미하일 아센 3세의 동생인 베나르가 병사들을 성공적으로 수습하여 진입로를 차단했기에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이후 불가리아 보야르들이 라도미르 마을 근처에서 스테판 우로시 3세와 만나 평화를 요구했다. 그들은 스테판 우로슈 3세의 조카인 이반 스테판이 차기 불가리아 차르로 즉위하게 하겠다고 밝혔고, 니시를 세르비아에 할양하겠다고 약속했다. 스테판 우로시 3세는 이 조건을 받아들여 불가리아군이 본국으로 귀환하는 걸 막지 않았다. 이후 보야르들은 약속대로 이반 스테판을 새 차르로 옹립했다.

3. 여담

스타크래프트 명작 역사 유즈맵 비잔티움 쇠망사에서도 등장한다. 유닛은 디파일러로 콘스탄틴 아센과 함께 불가리아의 마법을 담당하는 쌍두마차이다.

[1] 또다른 기록에는 스테판 두샨이 포로로 잡힌 미하일 아센 3세를 끌어내 손수 쳐 죽였다고 하고, 또다른 기록에는 낙마한 직후 세르비아군의 창에 찔려 죽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