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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스탄틴 보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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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A0522D><colcolor=#fff> 두클랴 국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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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스탄틴 보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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Константин Бодин}}}
파일:콘스탄틴 보딘.jpg
출생 미상
사망 1099년
재위 불가리아 차르
1072년 9월/10월 ~ 1073년 1월
두클랴 국왕
1081년 ~ 1099년
아버지 미하일로 1세
형제 블라디미르, 프리야슬라프, 세리기예, 데리자, 가브릴로, 미로슬라프, 도브로슬라프, 페트리슬라프, 니시포르, 테오도르
배우자 자퀸타 바리스카
자녀 미하일로 2세, 도르제 보디노비치
가문 보이슬라블예비치 왕조


1. 개요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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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두클랴 제2대 국왕. 두클랴 공자 시절인 1072년 9/10월부터 1073년 1월까지 불가리아 반란군에게 차르 '페타르 3세'로 추대되었지만 반란이 진압된 후 동로마군에 체포되어 안티오키아로 끌려가 고초를 겪다가 겨우 풀려나 본국에 귀환했다. 1081년 두클랴 왕에 등극한 뒤 동로마 제국이 로베르 기스카르 전쟁을 치르느라 고단한 틈을 타 세르비아를 통합했다. 그러나 로베르 기스카르 전쟁을 마무리한 동로마 제국의 침공으로 패배한 뒤 세력권이 아드리아 해 연안 지역으로 축소되었다.

2. 생애

두클랴 제5대 크냐지이자 초대 국왕 미하일로 1세의 아들이다. <두클랴 사제 연대기>에 따르면, 미하일로 1세는 첫번째 아내에게서 콘스탄틴 보딘을 비롯해 블라디미르, 프리야슬라프, 세리기예, 데리자, 가브릴로, 미로슬라프 등 7명을 낳았고, 동로마 귀족 가문 출신인 두 번째 아내로부터 도브로슬라프, 페트리슬라프, 니시포르, 테오도르를 낳았다고 한다.

1072년, 포모라블제와 포바르다르제에서 불가리아 총독 니키포로스 카란테노스의 심한 수탈을 견디다 못한 불가리아인들이 게오르기 보이테흐를 지도자로 세우며 반란을 일으켰다. 반란군은 미하일로에게 자신들을 지지해달라고 요청했다. 미하일로는 아들 콘스탄틴 보딘을 불가리아의 차르로 추대하라고 요구했고, 보이테흐는 흔쾌히 수락했다.

1072년 가을, 미하일로는 보딘에게 300명의 군대를 맡기고 프리즈렌으로 보냈다. 이후 그곳에서 게오르기 보이테흐를 비롯한 반란 주동자들을 만났다. 보이테흐 등은 보딘을 불가리아차르로 선포하고 '페터르'로 개명시켰다. 보딘은 자기 할머니 네다가 불가리아 제1제국의 차르 사무일의 조카인 걸 근거로 삼아, 황실의 피를 이어받은 몸으로서 불가리아인을 압제로부터 해방시키겠다고 선전했다. 니키포로스 카란테노스는 군대를 이끌고 프리즈렌을 향해 진격했지만 전투를 벌이기 전에 교체되었다.

이후 반란군은 두 부대로 나뉘었다. 한 부대는 페터르 3세 보딘이 직접 통솔하여 니시로 진격했고, 두 번째 부대는 보이보다 페트릴로의 지휘하에 오흐리드를 거쳐 카스토리아로 진격했다. 페트릴로는 오흐리드와 데볼을 전투 없이 점령했지만, 카스토리아에서 슬라브 출신의 동로마 장군 보리스 다비트에게 패퇴했다. 한편 페터르 3세 보딘은 니시로 진군하면서 진군로 주변의 모든 것을 약탈했고, 니시에 도착하자마자 복종하지 않은 자들을 죽이거나 고문했다. 또한 로마에 사절을 보내 정교회가 아닌 가톨릭을 따르겠다고 선언하여 교황의 지지를 받아내려 했다.

그러나 미하일 사란테스 휘하의 동로마군이 스코페를 포위했고, 보이테흐는 항전을 포기하고 도시를 내주었다. 하지만 그는 곧 자신의 행위를 후회하고 페터르 3세 보딘에게 속히 스코페로 와달라고 청했다. 보딘은 곧장 그곳에 가다가 타오니오스에서 동로마군의 기습으로 붙잡혔다. 그 후 페터르 3세 보딘은 쇠사슬에 묶인 채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압송되었고, 성 세르지오 수도원에 감금되었다가 안티오키아로 추방되었다. 보이테흐 역시 모든 게 발각되면서 체포 후 가혹한 고문을 받은 뒤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이송되던 중 사망했다. 미하일로는 아들을 구하기 위해 동로마 장군이며 자신의 딸과 결혼한 랑고바르도풀로스에게 사람을 보내 아들을 중도에서 납치하여 자신에게 데려와달라고 요청했다. 랑고바르도풀로스는 그 요청에 따랐지만, 동로마군에게 패퇴했다.

1078년, 미하일로에게 포섭된 베네치아 선원들이 안티오키아로 추방되었던 콘스탄틴 보딘을 구출해 미하일로에게 보냈다. 1081년경 아버지가 사망한 뒤 두클랴의 2번째 국왕이 되었다. 그 해 봄, 보딘은 아풀리아 일대 노르만족 지도자 중 한 명인 바리의 아르카리스의 딸 자퀸타 바리스카와 결혼했다. 1081년 10월, 로베르 기스카르가 아드리아 해를 건너와 디라히온을 포위했다. 보딘은 동로마 제국과의 합의에 따라 동로마 제국에 지원을 제공할 의무가 있었기에 군대를 이끌고 디라히온 인근으로 이동했다. 하지만 그는 그저 전투를 관망하기만 하다가 동로마군이 패배하자 즉시 자국으로 돌아갔다. 안나 콤니니는 그를 "달마티아군주"라고 칭하면서, 알렉시오스 1세와 동맹을 맺고 로베르 기스카르의 노르만군을 저지했지만 이후 노르만인들이 동로마 영토 깊숙이 진군하는 걸 방치하는 등 불안정한 동맹자였다고 서술했다.

1082년, 트라부니야와 자후믈례를 통치하던 그의 숙부인 라도슬라프와 갈등을 벌였지만 바르 주교 페타르의 중재로 화해했다. 1083년 또는 1084년에 동로마 제국이 노르만족과 전쟁을 벌이느라 정신 없는 틈을 타 라쉬카를 정복했고, 뒤이어 보스니아를 공략했다. 이후 이복형제 페트리슬라프의 두 아들이자 자기 조카인 부칸 1세와 마르코를 라쉬카의 주판(župan)으로 선임했고, 친척인 스테판을 보스니아의 크냐지로 선임했다. 여기에 더해 알바니아 남부를 지속적으로 공략했고, 1085년 로베르 기스카르가 사망한 뒤 남부 이탈리아로 철수하는 노르만인들로부터 디라히온을 넘겨받았다.

1089년 1월 8일, 보딘은 대립교황 클레멘스 3세로부터 두클랴 국왕으로 인정하겠다는 서신을 받았으며, 두클랴의 주요 성직자인 바르 주교 페타르가 대주교로 승격되는 교서 역시 수령했다. 그러나 얼마 후, 동로마 제국이 두클랴를 응징하기 위해 군대를 일으켰다. 동로마 황제 알렉시오스 1세의 처남인 요안니스 두카스가 이끄는 동로마군은 디라히온으로 진군해 그곳을 탈환한 뒤 디라히온의 스트라테고스로 선임되었다. 1090년, 요안니스 두카스는 보딘과 맞붙어 대승을 거두었고, 보딘은 일시적으로 체포된 뒤 디라히온 테마의 모든 영토를 동로마 제국으로 반환하는 조건으로 석방되었다. 그 후 그의 입지는 급격히 위축되어 두클랴 및 아드리아 해 연안만 직접 통제할 수 있었다. 반면, 그에 의해 라쉬카 주판에 선임되었던 조카 부칸 1세는 그로부터 독립한 뒤 동로마 제국과 여러 차례 전쟁을 벌여 승리를 거두면서 입지를 다진 끝에 세르비아 내륙 지역의 지배자로 군림했다.

두클랴 사제 연대기에 따르면, 보딘이 동로마 제국과 평화 협약을 맺은 직후, 아내 자퀸타는 아들 미하일로 2세의 계승을 방해할 수 있는 모든 친척을 죽이기로 했다. 삼촌 라도슬라프의 아들인 브라니슬라프, 고지슬라프, 프레디흐나가 슈코더르에 있던 그를 알현했을 때, 보딘은 자퀸타의 선동에 따라 그들을 체포해 감옥에 가뒀다. 라도슬라프의 다른 아들들은 이 소식을 전해듣고 400명의 무장병과 함께 라구사 공화국으로 망명했다. 이에 보딘은 라구사를 공격하기로 했다.

보딘의 군대는 라구사를 포위했지만 쉽사리 공략하지 못했다. 그러던 중 자기가 총애하는 신하가 전사한 것에 격분한 자퀸타는 남편을 설득해 브라니슬라프, 고지슬라프, 프레디흐나를 성벽 앞에서 참수하도록 했다. 그러자 라구사 성벽 내부에서 동요가 일어났고, 일부 수비대는 항복하는 걸 진지하게 고려했다. 라구사에 망명했던 보딘의 친척들은 신변의 위협을 느끼고 스플리트로 망명했다가 다시 아퀼레리아로 이동했고, 그곳에서 배를 갈아타서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이동했다.

보딘은 곧 라구사에 입성하고 도시 근처에 요새를 건설한 후 슈코더르로 귀환했다. 12세기 라구사 시를 묘사한 한 그림에는 도시 성벽 바로 맞은편 해안에 위치한 보디노 요새(Rocca di Bodino)가 표시되어 있다. 이 요새는 라구사 사람들이 스르지 산기슭 방향으로 발칸 반도 본토로 향하는 통로를 폐쇄했으며, 요새와 도시 성벽 사이에는 다리가 있었다. 익명의 라구사 연대기 작가는 이 요새 건설은 보스니아 크냐지 스테판의 공이라고 기술했는데, 이로 볼 때 스테판도 보딘의 부름을 받고 라구사 공방전에 참여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1096년, 제1차 십자군 원정을 떠나던 십자군이 달마티아를 통과하던 중 두클랴를 지나갔다. 이때 십자군 지도자들은 보딘과 접견해, 십자군이 보딘의 병력에 의해 방해받지 않으며 식량과 기타 필수품을 제공받는다는 내용의 협약을 체결했다. 이때 툴루즈 백작인 생질의 레몽 4세는 그와 개인적으로 친분을 맺고 풍부한 선물을 제공했다고 전해진다.

두클랴 사제 연대기에 따르면, 보딘은 26년 5개월간 통치하다 슈코더르에서 사망했다고 한다. 한때는 이 기록이 그가 두클랴 국왕이 된 1081년부터의 햇수라고 여겨져 1107년에 사망했다는 설이 우세했지만, 현재는 그가 1072년 9월 또는 10월 불가리아 차르로 추대되었을 때부터 추산해 1099년 초에 사망했을 거라는 설이 우세하다. 사후 아들 미하일로 2세가 왕위를 물려받았지만, 그 직후 심각한 내란이 발발하면서 두클랴 왕국은 쇠락의 길을 걸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