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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8-09 17:59:23

미하일로 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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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슬라블예비치 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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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A0522D><colcolor=#fff> 두클랴 국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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Михаило I}}}
출생 미상
사망 1081년
재위 두클랴 크냐지
1046년 ~ 1077년
두클랴 국왕
1077년 ~ 1081년
아버지 스테판 보이슬라프
어머니 네다
형제 고지슬라프, 사가네크, 라도슬라프, 프레디미르
자녀 콘스탄틴 보딘, 블라디미르, 프리야슬라프, 세리기예, 데리자, 가브릴로, 미로슬라프, 도브로슬라프, 페트리슬라프, 니시포르, 테오도르
가문 보이슬라블예비치 왕조


1. 개요2. 생애3. 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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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두클랴 제5대 크냐지, 초대 국왕. 1046년부터 1077년까지 크냐지를 역임했고, 1077년부터 1081년까지 국왕을 칭했다.

2. 생애

두클랴 제3대 크냐지 스테판 보이슬라프불가리아 제1제국 차르 사무일의 조카로 알려진 네다의 아들이다. 형제로 고지슬라프, 사가네크, 라도슬라프, 프레디미르가 있었다. <두클랴 사제 연대기>에 따르면, 1043년 아버지 보이슬라프가 사망한 뒤, 고지슬라프와 프레디미르는 트라부니야와 그르발지 교구를 상속받았고, 미하일로 1세는 오블리크, 프라프라트나, 크름니카 교구를 상속받았으며, 사가네크는 고르스카, 쿠펠니크, 발레크를 받았고, 라도슬라프는 루카, 포들루지예, 쿠체포 등지를 상속받았다. 또한 네다가 여성 크냐지가 되었고, 그녀의 아들들은 가신이 되었다고 한다. 네다는 1043년부터 1046년까지 통치한 뒤 사망했고, 미하일로 1세가 뒤이어 두클랴 크냐지가 되었다.

두클랴 사제 연대기에 따르면, 형제 고지슬라프는 프레디미르의 침대에서 자던 중 스크로비메지지(Skrobimezi)라는 사람들에게 피살되었다. 그 후 그들은 도마네크(Domanek)라는 인물을 트라부니야의 통치자로 옹립했다. 미하일로 1세와 형제들은 이 사실을 알고 즉시 트라부니야로 쳐들어가 도마네크를 몰아냈지만, 그들이 돌아가자 도마네크가 다시 트라부니야로 돌아와 통치했다. 이에 미하일로 1세는 형제 라도슬라프에게 권고했다.
"네가 트라부니야로 단독으로 가서 도메네크를 끝장낸다면, 너의 상속인이 제타 지역을 상속하게 해주겠다."

이에 라도슬라프는 도마네크를 공격해 처단하고 자후믈례 일대를 정복했다. 그러나 미하일로 1세는 라도슬라프와 했던 맹세를 이행하지 않고 제타를 아들 블라디미르에게 넘겼다. 1051년 또는 1052년, 미하일로 1세는 동로마 제국의 지원을 토대로 형제들을 복종시키고 두클랴 전역의 통치자가 되었다. 그는 1052년에 동로마 제국으로부터 프로토스파타리우스(Protospatarius: 테마 제도에 종속된 테마의 총사령관) 칭호를 받았다. 이후 1060년에서 1065년 사이, 블라디미르와 그의 형제들은 라쉬카를 정복했고, 페트리슬라프가 라쉬카를 통치했다. 동로마 제국 측 기록에 따르면, 미하일로 1세는 코토르 역시 아내로 삼은 동로마 귀족 여성의 지참금으로 받았다고 한다.

이후 수십년간 별다른 행적이 전해지지 않는데, 현대 학자들은 그가 그 기간 동안 동로마 제국 지도층과 긴밀하게 교류하며 상당한 수준의 자치권을 부여받고, 내정을 다지고 각지를 통제하는 데 힘을 기울였을 거라고 추정한다. 그러던 1072년, 포모라블제와 포바르다르제에서 불가리아 총독 니키포로스 카란테노스의 심한 수탈을 견디다 못한 불가리아인들이 게오르기 보이테흐를 지도자로 세우며 반란을 일으켰다. 반란군은 미하일로에게 자신들을 지지해달라고 요청했다. 미하일로는 아들 콘스탄틴 보딘을 불가리아의 차르로 추대하라고 요구했고, 보이테흐는 흔쾌히 수락했다.

1072년 가을, 미하일로는 보딘에게 300명의 군대를 맡기고 프리즈렌으로 보냈다. 이후 그곳에서 게오르기 보이테흐를 비롯한 반란 주동자들을 만났다. 보이테흐 등은 보딘을 불가리아차르로 선포하고 '페터르'로 개명시켰다. 보딘은 자기 할머니 네다가 불가리아 제1제국의 차르 사무일의 조카인 걸 근거로 삼아, 황실의 피를 이어받은 몸으로서 불가리아인을 압제로부터 해방시키겠다고 선전했다. 니키포로스 카란테노스는 군대를 이끌고 프리즈렌을 향해 진격했지만 전투를 벌이기 전에 교체되었다.

이후 반란군은 두 부대로 나뉘었다. 한 부대는 페터르 3세 보딘이 직접 통솔하여 니시로 진격했고, 두 번째 부대는 보이보다 페트릴로의 지휘하에 오흐리드를 거쳐 카스토리아로 진격했다. 페트릴로는 오흐리드와 데볼을 전투 없이 점령했지만, 카스토리아에서 슬라브 출신의 동로마 장군 보리스 다비트에게 패퇴했다. 한편 페터르 3세 보딘은 니시로 진군하면서 진군로 주변의 모든 것을 약탈했고, 니시에 도착하자마자 복종하지 않은 자들을 죽이거나 고문했다. 또한 로마에 사절을 보내 정교회가 아닌 가톨릭을 따르겠다고 선언하여 교황의 지지를 받아내려 했다.

그러나 미하일 사란테스 휘하의 동로마군이 스코페를 포위했고, 보이테흐는 항전을 포기하고 도시를 내주었다. 하지만 그는 곧 자신의 행위를 후회하고 페터르 3세 보딘에게 속히 스코페로 와달라고 청했다. 보딘은 곧장 그곳에 가다가 타오니오스에서 동로마군의 기습으로 붙잡혔다. 그 후 페터르 3세 보딘은 쇠사슬에 묶인 채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압송되었고, 성 세르지오 수도원에 감금되었다가 안티오키아로 추방되었다. 보이테흐 역시 모든 게 발각되면서 체포 후 가혹한 고문을 받은 뒤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이송되던 중 사망했다. 미하일로는 아들을 구하기 위해 동로마 장군이며 자신의 딸과 결혼한 랑고바르도풀로스에게 사람을 보내 아들을 중도에서 납치하여 자신에게 데려와달라고 요청했다. 랑고바르도풀로스는 그 요청에 따랐지만, 동로마군에게 패퇴했다.

1077년, 미하일로는 두클랴 국왕을 칭했다. 이후 1078년 교황 그레고리오 7세로부터 "슬라브인의 왕(Michaeli Slavorum regi)"으로 인정하겠다는 서신을 받았다, 한편, 1078년 미하일로에게 포섭된 베네치아 선원들이 안티오키아로 추방되었던 콘스탄틴 보딘을 구출해 미하일로에게 보냈다. 1081년경에 사망했고, 콘스탄틴 보딘이 두클랴의 2대 국왕으로 등극했다.

3. 가족



[1] 크로아티아 스톤시의 성 미하일 교회에 그려진 벽화. 교회를 건립한 미하일로 1세의 초상화라는 것이 통설이지만, 일부 연구자들은 10세기 초에 자후믈례를 통치한 미하일로 비셰비치일 가능성이 있다고 주장한다.[2] 세르비아 대공국의 초대 대공 부칸 1세의 아버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