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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3-29 08:43:33

로베르 기스카르

1. 개요2. 생애
2.1. 정복자의 길2.2. 동로마의 제위를 탐하다2.3. 죽음과 후계
3. 대중매체에서4. 관련 항목

1. 개요

파일:236px-Robert_Guiscard_(by_Merry-Joseph_Blondel).jpg
로베르 기스카르
(생몰년도 : 1015년경 ~ 1085년)
프랑스어 Robert Guiscard (로베르 기스카르)
시칠리아어 Rubbertu lu Guiscardu (루베르투 루 귀스카르두)
이탈리아어 Roberto il Guiscardo (로베르토 일 귀스카르도)
라틴어 Robertus Guiscardus (로베르투스 귀스카르두스)

11세기에 남부 이탈리아, 시칠리아, 발칸 반도에서 활약한 노르만족 출신 정복자.

19세기까지 이어지는 시칠리아 왕국의 창시자라고 볼 수 있는 인물이다. 또한 제1차 십자군 원정의 용맹한 지도자 중 하나인 타란토의 보에몽 1세의 아버지로도 잘 알려져 있다. 기스카르는 라틴어 Viscardus에서 유래한 별명으로 "영리한", "교활한", "여우 같은" 혹은 "족제비 같은"이란 의미를 지니는데, 그의 영악함을 잘 표현해주고 있다. 한자어 간웅과도 의미가 통한다.

2. 생애

2.1. 정복자의 길

로베르는 프랑스 노르망디 지방 오트빌 가문의 탕크레드의 아들로 태어났다. 탕크레드의 12명의 아들 중 한 명으로 그중 로베르를 포함한 5명의 아들은 뛰어난 용병으로 이름을 날렸다. 형제가 많은 그는 노르만족의 관습대로 고향을 떠나 외국에서 자신의 영지를 확보하는 데 주력했다.

11세기 중반 형제 8명과 함께 남이탈리아로 건너가 용병으로 활동했다. 당시 남이탈리아는 동로마 제국의 영역이었는데 동로마는 셀주크 제국의 대대적인 침략을 당하고 있었기에 그 힘의 공백을 틈타 로베르는 남이탈리아에서 자신의 세력을 구축할 수 있었고 초기에는 미약했지만 남이탈리아에서 유력한 세력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이렇게 성장한 그를 눈여겨본 교황 니콜라오 2세는 동로마 제국의 가톨릭에 대한 영향력 감소를 목적으로 로베르와 손을 잡게 되고 로베르는 교황에 의해 1057년 아풀리아 백작위에, 1059년 형 윙프레가 죽자 아풀리아, 시칠리아, 칼라브리아 공작에 봉해졌다.

이러한 작위 수여로 인해 그는 이들 지역을 정당하게 정복할 수 있는 명분을 가지게 되었다. 때마침 아풀리아와 칼라브리아는 동로마 제국의 영역이었고, 시칠리아는 이슬람을 믿는 아랍인들의 영역이었고 이들은 가톨릭을 믿는 세력이 아니었기에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이에 로베르는 1060년 아풀리아와 칼라브리아를 동로마 제국으로부터 빼앗아 정복했고 1061년에는 시칠리아의 관문 메시나를 정복했다. 1071년 동로마 제국의 이탈리아 내 마지막 거점인 바리를 정복하고 이듬해에는 팔레르모를 정복하고 시칠리아에서 아랍인들을 몰아냈으며(노르만의 시칠리아 정복 전쟁) 1076년에는 랑고바르드 인이 통치하고 있는 살레르노를 빼앗아 자신의 수도로 삼는다. 이로써 이탈리아 남부 전역이 로베르의 손아귀에 들어가게 됐다.

2.2. 동로마의 제위를 탐하다

로베르의 군사적 성공에 위협을 느낀 동로마 제국의 황제 미하일 7세는 1073년 로베르와 자신의 아들과 로베르의 딸을 혼인시켜 이를 기반으로 동맹을 제안했고 로베르는 이를 승낙하고 딸인 헬레네를 제국으로 보냈으나 이 혼인은 로베르에게 동로마 제위를 탐하게 하는 구실이 되어버렸다.

미하일 7세가 니키포로스 3세에 의해 축출되고 로베르의 딸인 헬레네가 수도원에 유폐되자 로베르는 복수를 명분으로 1080년 동로마 제국이 지배하는 아드리아 해 연안으로 진출하기 위해 함대를 편성하고 군사를 모으는 등 전쟁을 준비했다. 그동안 니키포로스 3세를 몰아내고 동로마의 새로운 황제로 등극한 알렉시오스 1세는 로베르의 딸인 헬레네를 극진히 대우하겠다고 약속하는 등 외교적으로 로베르를 막기 위해 애썼으나 실패했고 1081년 5월 로베르는 미하일 7세를 사칭한 수도자 라이토르를 내세우며 동로마의 속주 디라히온[1]을 침공했다. 로베르의 침략을 맞아 알렉시오스 1세는 당시까지만 해도 제국의 봉신이던 베네치아 공화국과 제국령 아나톨리아에 막 자리를 잡는 중이던 룸 술탄국, 로마 교황과 대립하던 신성 로마 제국하인리히 4세에게 도움을 요청하였다. 베네치아 공화국의 해군으로 하여금 로베르의 함대를 공격하게 했고 하인리히 4세를 부추겨 로베르를 후원하던 로마의 교황 그레고리오 7세를 공격하게 했다. 그리고 룸 술탄국으로부터는 튀르크인 병력을 지원받아 직접 로베르의 군대와 대결에 나섰다. 1081년 10월 디라히온에서 동로마군과 로베르군은 격전을 벌이게 되고 치열한 접전 끝에 동로마는 중앙군이 완전히 괴멸되며 패배했고 결국 디라히온은 로베르 군에게 함락되었다. 그러나 로베르는 본거지에서 반란이 일어나고 하인리히 4세가 로마를 포위하여 교황을 위협하는 사건이 발생했기 때문에 즉시 이탈리아로 회군해야 했다. 그는 곧장 로마로 진격해 교황 그레고리오 7세를 구출했는데 이 과정에서 거의 목숨을 잃을 뻔하다가 아들 루지에로 보르사에 의해 구출되었다.

2.3. 죽음과 후계

그 뒤 로베르는 전열을 가다듬어 1084년에 다시금 동로마 제국을 공격하였다. 궂은 날씨와 베네치아 해군의 방해를 뚫고 상륙하여 동로마 제국의 영토로 진군하였으나 전염병이 로베르군을 강타했다. 로베르는 전염병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진군하다가 이듬해인 1085년 7월 17일 케팔로니아 섬으로 가던 길에 전염병에 걸려 죽었다.

그의 사후 공국은 아들인 루지에로 보르사에게 상속되었으나 아들들과 조카들의 상속권 다툼이 벌어졌다. 이 과정에서 소외된 맏아들 타란토의 보에몽제1차 십자군 원정 이후 안티오키아 공국의 공작이 되어 새로이 동로마 제국에 맞서게 된다.

후에 동생의 아들, 즉 조카인 시칠리아 백작 루지에로 2세는 사촌들[2]을 몰아내고 남부 이탈리아를 장악한 후 교황의 후원을 받아 시칠리아 왕국을 창설한다.

3. 대중매체에서

4. 관련 항목


[1] 지금의 알바니아 두러스[2] 로베르의 후계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