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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이반 스테판 (영어: Ivan Stefan, 불가리아어: Иван Стефан) |
출생 | 1300년 또는 1301년 |
사망 | 1373년? |
직위 | 불가리아 제2제국 차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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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불가리아 제2제국 21대 차르.2. 생애
미하일 아센 3세와 세르비아 왕 스테판 우로시 3세 데찬스키의 여동생인 안나 네다의 장남이다. 1323년 부친이 불가리아 차르로 추대된 뒤, 그는 공동 통치자로 선포되었다. 당시 주조된 구리 주화에는 그의 모습이 부친과 함께 묘사되었다. 그러나 1324년 여름, 미하일은 동로마 제국의 안드로니코스 2세와 평화 협약을 체결하고, 안드로니코스 2세의 손녀이자 안드로니코스 3세의 누이이며, 전 차르 토도르 스베토슬라프의 미망인인 테오도라 팔레올로기나와 결혼했다. 미하일은 안나 네다를 수도원으로 추방하였고, 그의 후계자 지위를 박탈한 뒤 멀리 유배보냈다.1330년 7월 28일 벨버즈드 전투에서 미하일이 세르비아군에게 참패한 직후 전사하자, 8월 2일 타르노보의 보야르들은 세르비아 왕 스테판 우로시 3세 데찬스키에게 사절을 보내 그를 왕위에 세울 테니 철수해달라고 요청했다. 당시 세르비아군은 대승의 기세를 이어가 불가리아 잔여 병력이 모인 코냐브스카 산을 향해 진격했지만, 미하일 아센 3세의 동생인 베나르가 병사들을 성공적으로 수습하여 진입로를 차단했기에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게다가 동로마군이 남쪽 국경지대에서 쳐들어올 기미를 보였기에, 불가리아에 계속 있어서는 곤란했다. 그래서 스테판 우로시 3세는 불가리아에게서 더 뜯어내기보다는 자신의 친족이 차르가 되는 것에 만족하고 물러갔다. 이후 보야르들은 약속대로 그를 새 차르로 옹립했다.
그는 당시 30세였던 것으로 추정되나, 어머니 안나 네다와 공동으로 통치하였는데, 그 이유는 불분명하다. 동로마 제국의 전 황제이자 수도자이며 역사가인 요안니스 칸타쿠지노스는 당시 불가리아의 권력은 안나와 아이들에게 넘어갔다고 기술하였다. 한편 미하일 아센 3세의 두번째 황후였던 테오도라 팔레올로기나는 타르노보에서 추방되어 동로마 제국으로 돌아갔다. 안드로니코스 3세는 누이의 추방을 빌미삼아 불가리아와의 동맹을 파기하기로 결심하고, 군대를 이끌고 트라키아를 침공해 별다른 저항을 받지 않고 안키알루스, 메셈브리아, 아에토스, 크테니아, 루소카스트로, 디암폴리스 등을 공략했다. 이에 가뜩이나 새 차르를 세르비아의 꼭두각시로 여겼던 보야르들은 불만을 품었다.
당시 불가리아 정국은 2개의 세력으로 나뉘었다. 하나는 그를 옹립한 친 세르비아 계열의 보야르들이고, 다른 하나는 반 세르비아 계열의 보야르들이었다. 전자는 비딘의 데스포티스 베나르를 중심으로 뭉쳤고, 후자는 로베치의 데스포티스 이반 알렉산더르를 중심으로 뭉쳤다. 동로마 제국의 침략에 별다른 저항도 안하고 영토를 고스란히 잃으면서 차르의 위신이 땅바닥으로 떨어지자, 이반 알렉산더르는 1331년 3월 정변을 일으켜 그과 어머니 안나 네다를 타르노보에서 추방하고 새 차르로 즉위했다. 이후비딘으로 달아난 뒤 세르비아의 원조를 받아 황위를 되찾고자 했지만, 1331년 스테판 우로시 3세가 아들 스테판 두샨의 정변으로 폐위되었던 터라 별다른 도움을 받지 못 했다. 게다가 1332년 스테판 두샨이 이반 알렉산더르의 누이와 결혼하면서, 세르비아의 원조를 받을 가망은 영영 없어졌다.
결국 그들은 두브로브니크로 피신한 뒤 1338년 12월 나폴리로 이주하였다. 이후의 행적에 대해서는 논란이 많다. 데틀레프 슈베니케에 따르면, 그는 나폴리에서 루도비쿠스로 개명하였고, 타란토의 공작 필리포 1세의 사생녀 마리아와 결혼했지만 아이를 갖지는 못 했으며, 1342년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탈출한 요안니스 6세와 함께 있었다고 한다. 20년 후인 1363년 교황의 세력을 회복하기 위한 내전에 참가했다가 과르데발레에서 체포된 뒤 시에나의 감옥에 갇혀 옥고를 치렀고, 1373년 나폴리에서 사망했다고 한다. 하지만 알렉산더 부르모프는 루도비쿠스와 동일인일 가능성이 낮다고 주장한다. 그는 루도비쿠스가 안나-네다 가문의 일원인 건 분명하며, 아마도 그의 아들일 수는 있지만, 자료가 불충분해서 더 이상 연관지을 수는 없다고 밝혔다. 이반 페체프는 루도비쿠스가 그의 조카라고 추정했다. 한편 이반 보질로프는 루도비쿠스와 그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며, 그의 아들도 아니라고 주장했다. 이렇듯 많은 설이 제기되었지만, 이중에서 어느 게 진실에 근접한지는 현재까지 불확실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