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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프레시안 2세 (영어: Presian II, 불가리아어: Пресиян II҃) |
출생 | 997년 |
사망 | 1061년 |
직위 | 불가리아 제1제국 차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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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불가리아 제1제국 27대이자 마지막 차르.2. 생애
이반 블라디슬라프와 마리아의 장남이다. 1018년 2월 부친이 디라키움 요새를 포위 공격하던 중 전사한 뒤, 부친의 뒤를 이어 차르가 되었다. 그러나 대다수 귀족들은 더 이상 희망이 없다고 판단하고 동로마 제국 황제 바실리오스 2세에게 귀순했다. 프레시안은 두 남동생인 알루시안과 아론과 함께 소규모 군대를 이끌고 토모르 요새로 후퇴하였다. 하지만 어머니 마리아 황후 마저 불가리아 총대주교 다비트 등과 함께 바실리오스 2세에게 귀순하면서, 그의 입지는 매우 좁아졌다. 바실리오스 2세의 동로마군은 토모르 요새를 4개월간 포위하였고, 결국 프레시안은 1018년 8월 형제들과 함께 항복했다.바실리오스는 마리아 황후와 프레시안, 알루시안, 아론 등을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데려간 뒤 상당히 우대했다. 마리아 황후는 제국에서 여성이 받을 수 있는 가장 높은 작위인 조스테 파트리키아에 봉해졌고, 프레시안 등 아들들은 주요 테마의 스트라테고스로 임명되었다. 또한 불가리아 귀족들의 자제들은 동로마 여인들과 결혼하였고, 딸들은 동로마 남편감을 찾아주어 제국 귀족층에 편입시켰다. 또한 전쟁으로 폐허가 된 불가리아 속주 주민들이 세금으로 고통받지 않도록 세금을 인하하고 곡물로 현물 납부할 수 있도록 하였고, 불가리아 정교회 역시 대주교를 황제가 서임하게 된 것 외에는 건드리지 않아서 독립성을 유지하도록 했다. 또한 불가리아의 남은 군대를 그대로 제국 불가리아 테마병들로 편입하였는데, 이 병력은 제국이 불가리아를 제압하는데 소모한 것으로 추정되는 병력을 거뜬히 초과하는 수치로 추산된다.
1025년 콘스탄티노스 8세가 즉위한 뒤, 그는 부켈라리오스 테마의 총독을 지냈다. 그런데 그곳에서 바실리오스 스클리로스와 말다툼을 벌이다 결투까지 벌였다. 콘스탄티노스 8세는 두 사람을 프린스 제도로 유배했는데, 스클리로스는 도중에 도망치려 했다가 체포되어 실명형에 처해졌다. 몇년 후 유배에서 풀려난 그는 1029년 테오도라와 결혼하여 로마노스 3세를 축출하고 황위를 찬탈할 음모를 꾸몄다. 그러나 음모는 발각되었고, 마누일 수도원으로 끌려간 뒤 실명형에 처해졌다. 그리고 그때까지 조스테 파트리키아로서 귀한 대우를 받던 어머니 마리아 역시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추방되었다. 이후 수도원에서 조용히 지내다 1061년경 사망했다고 전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