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나스타시우스 1세 관련 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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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제국 제59대 황제 아나스타시우스 1세 ANASTASIVS I | Ἀναστάσιος Α΄ | |
<colbgcolor=#9F0807><colcolor=#FCE774,#FCE774> 이름 | 아나스타시우스 디코루스(Anastasius Dicorus) |
출생 | 431년 |
로마 제국 두러스 | |
사망 | 518년 7월 9일 (향년 87세) |
동로마 제국 콘스탄티노폴리스 | |
재위 기간 | 로마 황제 |
491년 4월 11일 ~ 518년 7월 9일 (27년 96일) | |
전임자 | 제노 |
후임자 | 유스티누스 1세 |
배우자 | 아일리아 아리아드네 |
종교 | 그리스도교 |
그리스어: Ἀναστάσιος Α´ Δίκορο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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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제국의 59대 황제이자 레오 왕조의 마지막 황제. (재위 491년 4월 11일 ~ 518년 7월 9일)동로마 제국 최고의 명군 중 하나로서, 아나스타시우스 개혁이라 일컬어지는 체제 개편으로 정부 조직을 확립하고 풍족한 국고를 남겼으며, 이는 이후 유스티니아누스 1세 대에 로마 제국의 중흥과 고토 재정복 사업에 쓰이는 예산의 원천이 된다. 다만 우리나라에서는 중세 로마사에 대한 관심 부재, 특히 뚜렷한 군사적 업적이 없었기에[1] 잘 알려지지 않았다.
2. 생애
2.1. 황제 즉위 이전
플라비우스 아나스타시우스는 430년경 디라키움[2]의 일리리아인 혈통의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다. 부모는 거의 동나이대로 410년경 출생으로 알려져 있다.아버지 이름은 디라키움의 폼페이우스이며, 어머니는 아나스타시아 콘스탄티나이다. 모친은 이름에서 드러나듯, 콘스탄티누스 왕조의 방계 황족이다. 그녀는 아리우스파 기독교도였고,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후손이며 콘스탄티우스 1세의 피를 이었다. 그녀는 콘스탄티우스 2세에게 숙청당한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조카 콘스탄티우스 갈루스가 대제의 딸이자 콘스탄티우스 2세의 여동생인 플라비아 발레리아 콘스탄티나 사이에서 얻은 딸, 아나스타시아가 낳은 아들인 갈루스의 손녀였다. 즉 콘스탄티우스 1세의 6대손인 것이고, 그 아들인 아나스타시우스는 7대손인 것이다. 더욱이 아나스타시우스의 어머니는 비극의 부제로 유명한 콘스탄티누스 갈루스의 후손답게, 갈루스 친모 갈라를 통해 이탈리아 혈통의 오래된 푸닉 로마 귀족 풀비우스 가문의 피도 이어받았다. 따라서 직계가 일찌감치 끝난 세베루스 왕조의 후손 중 유일하게 혈연적으로 연관된 로마 귀족 가문의 후예였고, 서로마와 동로마 일대의 귀족 가문들과도 혈연적으로 연관이 있었다.[3] 이는 족보조작이 아니다. 콘스탄티우스가 250년생이고 아나스타시우스가 430년 안팎으로 태어났다하니 180년의 차이인데 7대손이라 하면 대강 말이 된다.
바로 아래에는 서기 495년 집정관을 지낸, 콘스탄티노폴리스 원로원 의원 플라비우스 파울루스가 있었다. 파울루스는 동료 집정관이 없는 단독집정관을 역임한 사람으로, 동로마 귀족 가문 출신의 마그나라는 여성과 결혼해 딸 이레네를 비롯한 여러 자녀를 뒀다. 따라서 파울루스의 딸 이레네와 결혼한, 서기 491년 집정관이자 콘스탄티노폴리스 원로원 의원 플라비우스 올리브리우스(소(小) 올리브리우스)는 아나스타시우스 1세의 조카사위가 된다.
청년시절 그는 고향인 에피루스 노바 속주의 재무관을 지내며 재정 관리 능력으로 호평을 받았다고 한다.
2.2. 순탄치 않았던 황제 즉위
황제 제노가 491년에 죽자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는 정통 로마인 황제를 원하는 여론이 일었다.[4] 이에 원로원과 제노의 황후 아일리아 아리아드네는 전 황제의 동생 롱기누스 대신에 에피루스 지방에서 명망이 높았던 환갑의 노인 아나스타시우스를 황제로 택하고 그의 황후가 되었다. 이렇게 황녀가 정통성을 갖고서 군주로서의 남편을 택군(擇君)하는 제위계승 메카니즘은 전대 테오도시우스 왕조의 아일리아 풀케리아와 후대 마케도니아 왕조의 조이에게서도 똑같이 나타났다. 하지만 여제까지 오른 것은 조이뿐인데, 이는 마케도니아 왕조의 통치기간이 테오도시우스 왕조나 레오 왕조와는 달리 당시 기준으로 150년이 넘었을 정도로 오래되어서 정통성 내지는 통치정당성을 더욱 높게 인정받았기 때문이다.갑작스레 황제가 된 아나스타시우스는 정통 교회의 빈축을 샀는데, 콘스탄티노폴리스 세계 총대주교의 입장에서는 독실한 단성론 신자였던 그는 이단이었기 때문이다. 이에 아나스타시우스는 교회와의 협상을 통해 총대주교가 제시한, 황제로서는 칼케돈 공의회를 따른다는 조건을 받아들여 종교 문제를 일단락 시켰다.
하지만 넘어야 할 산이 있었으니, 바로 청색당이었다. 정통 교리를 지지하던 청색당은 듣보잡 출신에 단성론 신자인 자를 황제로 앉힐 수 없다고 반발하였다. 그들은 아나스타시우스가 교회와의 협약을 맺은 후에도 종종 불온적 기세를 보였고, 이는 512년의 대규모 반란으로 이어졌다.
신임 황제에 대한 마지막 걸림돌은 바로 제국의 신흥 세력의 본거지이자 전임 황제를 배출한 지역인 이사우리아[5]였다. 아나스타시우스 즉위 이듬해인 492년, 전임 황제 제노의 동생 플라비우스 롱기누스는 고향으로 돌아가 반란을 일으켰다. 새 황제에게는 다행히 스키타이 출신 장군 요한네스가쿼타히아에서 반란군을 격파하였고 요한네스 깁부스가 이끈 제국군은 493년에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이후 이사우리아인들은 494년부터 산간의 요새에 틀어박혀 해상으로 안티오키아에서 보급을 받으며 제국군의 공세를 버텼으나, 497년에 스키티아 속주의 요한네스 군에게 함락되어 주동자들이 타르수스의 성문에 효수되었다. 제노의 동생 롱기누스는 498년에 요한네스 깁부스에게 사로잡혀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압송되었고, 아나스타시우스 황제는 히포드롬에서 포로들에게 절을 받으며 개선식을 치렀고 승리의 기념으로 황궁에 칼케 문 건설을 명하였다. 승장인 스카타이의 요한네스와 깁부스는 각각 498년과 499년에 황제와 함께 집정관이 되는 영예를 누렸다.
2.3. 아나스타시우스 개혁
납세의 기준을 현물이 아닌 화폐로 통일하여 제국에게 재정적 여유를 안겨주었다. 또한, 기존의 불안정한 구리 합금 경화는 순수한 동전인 폴리스로 교체되었다. 화폐 사용 확대와 부패에 대한 강력한 처벌로 중간 관리들의 착복이 줄어들었고 그로 인하여 농민의 부담을 줄여주면서도 동시에 국가의 세수도 증가하는 일석이조의 효과가 나타났다.정부의 재정적 여유가 생기자 황제는 군인들의 급여를 올릴 수 있었고 그러자 많은 제국민들이 자원 입대하여 아나스타시우스 1세는 이전의 황제들과 달리 충성심이 불투명한 외래 종족 출신 용병들에 의존하지 않게 되었다. 천년도 더 후대의 작품을 예시로 드는 것이기는 하지만,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에 계속 나오는, 믿을 수 없고 배신하기 쉬운 용병 대신 상비군(국민군)을 위주로 하라는 메세지가 제대로 실천된 것이다. 아나스타시우스부터 티베리우스 2세까지 100년 가까이 황제는 일단 즉위하고 나서는 친정(親征)하는 일이 전혀 없이 문민 황제로서 통치했으며, 황제 본인이 총사령관으로서 전장에 직접 다시 나서기 시작한 것은 마우리키우스였다. 따라서 이 때를 군부에 대한 문민통제의 회복으로 보는 학자도 있는데, Anthony Kaldellis의 'Byzantine Republic'은 아나스타시우스 1세의 재위기에 높은 비중을 두어 책의 시간순서상 시작점을 그 때로 잡았다.
2.4. 아나스타시우스 전쟁[6]
사산 제국의 샤한샤 카바드 1세는 498/9년에 동쪽의 유목 세력인 백훈족 (에프탈) 용병의 도움을 받아 즉위하였기에 그 빚을 갚을 재원 마련의 방편으로 과세에 예민해져 있었는데, 마침 곡창지대인 메소포타미아의 티그리스 강이 진로를 바꾸며 남부 수메르 지방에 홍수나 나며 기근이 들었다. 이에 페르시아 궁정은 사신을 파견하여 콘스탄티노폴리스에게 도움을 요청하였으나 아나스타시우스 1세는 내전이 끝난지 얼마 되지 않은 점을 들며 거절하였다. 이에 카바드 1세는 60여 년간 동안 이어진 동로마 제국과의 평화를 깨기로 하였다.502년 가을, 이란 군대는 유프라테스 강을 넘어 침략에 전혀 준비되어 있지 않았던 테오도시오폴리스[7]를 함락시켰고 겨울에 아미다[8]를 포위하였다. 정규군이 부재한 상태에서 백성들은 필사적으로 저항, 세 달을 버텼으나 결국 503년 초에 항복하였다. 이후 카바드 1세의 주력군은 오스로네[9]로 진출하여 에데사를 포위하였지만 아미다가 벌어준 시간 동안 준비를 마친 수비대에게 격퇴되었다. 한편, 동로마군도 주력군의 부재를 틈타 이란으로부터 아미다를 탈환하려 도시를 포위하였지만 역시 격퇴되었다.
그해에 캅카스의 훈족이 아르메니아로 쳐들어오자, 양국은 휴전에 합의하였다. 그러나 상호 간의 불신의 늪이 깊어 휴전 협상은 지지부진하게 진행되었고, 506년 초엽에는 동로마 측이 이란 사신들을 의심하여 억류한 후 이란 측이 전쟁을 불사하겠다고 하자 풀어주는 일까지 있었다. 그러다 결국 그해 11월, 니시비스에서 양측이 7년간의 휴전에 합의하였다. 후대의 역사가 프로코피우스에 의하면 동로마 측이 배상금을 지불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한다. 하지만 동로마는 전쟁 이전에 이란이 요구하던 정기적인 금전 요구로부터 벗어났고 계속 탈환하지 못하고 있던 아미다를 돌려받을 수 있었다.
2.5. 국방력 강화
아나스타시우스 1세는 제국의 각각 동과 서의 관문이라 할 수 있는 디라키움과 다라에 대규모 요새를 건설하여 서방 세력과 사산 왕조의 위협에 맞섰다. 이에 사산 왕조는 상호 간 국경 요새 신축을 금한다는 422년의 협정에 대한 위반이라고 항의했지만 이에 아랑곳하지 않은 황제는 507-508년에 사산 왕조 측 니시비스에 견줄 만한 다라 요새의 완공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507년부터 512년까지 트라키아 반도[10]에 56km에 달하는 장벽을 쌓고, 아나스타시우스 성벽(Anastasian Wall)이라고 명명하였다.[11] 이 장벽을 담당하는 비카리우스(관구장급)을 별도로 두었었다고도 하는데, 문제는 기존 트라키아 관구의 비카리우스와의 업무분장이 꼬였었고, 그러 머지 않아 유스티니아누스 1세 때 로마 전국의 관구 및 관구장을 모두 폐지할 때 같이 폐지되었다. [12]
2.6. 비탈리아누스의 반란
이사우리아 반란 진압, 이란과의 전쟁 종결, 그리고 재정 개혁에 의한 민중의 지지를 얻게된 80대의 아나스타시우스 1세는 자신감을 가지게 되었다. 그는 즉위 시에 교회와 맺은 약속 (정통파 존중)에 도전해 보기로 하여 512년 말에 평소에 자신에 대한 비판적 태도를 보이던 칼케돈 주교를 파면하고 측근인 단성론자를 주교로 임명하였다.이에 녹색당이 격하게 반발하였고, 사산 왕조와의 전쟁에서 맹활약했던 아레오빈두스 장군을 황제로 추대하려 했다. 하지만 아레오빈두스가 잠적해버려서 무위에 그쳤다. 이듬해인 513년, 칼케돈 정통파였던 트라키아의 군사령관(Magister Miletum per Thraciam) 플라비우스 비탈리아누스가 반란을 일으켰다. 순식간에 현재의 불가리아 일대가 정통파 반군의 손에 떨어졌고, 황제군은 연전연패 하였다. 이에 아나스타시우스 1세는 그를 발칸 반도 방면 사령관으로 임명하며 협상을 시도하였으나 실패하였고, 515년 여름에 단성론 도입을 포기한다고 선언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탈리아누스는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진격하였는데, 해군 제독 마리누스에게 격퇴되었고, 민중들도 황제에 대한 신뢰를 회복하여 단합하였다.
마찬가지로 재정관리를 빡세게 해서 각계각층의 불만을 샀으며, 여러 반란을 겪었다는 공통점이 있었던 마우리키우스와 비교할 경우 분명히 아나스타시우스가 훨씬 불리했지만 이미 노년의 나이에 즉위하고도 27년이나 재위하면서 천수를 누렸다. 먼저 즉위 시점에서 나이가 43세로 적절했던(539년생, 582년 즉위) 마우리키우스와 달리 즉위 시점에서 이미 나이가 60세로 당시 기준으로는 이미 세상을 떠났거나 떠날 날을 기다릴 정도로 매우 많았고(431년생, 491년 즉위) 비탈리아누스에게 쿠데타를 당했던 510년대 당시에는 무려 80대였다.
또한 장군 출신이라 본인이 군 지휘능력을 보유하고 있어서 발칸 전선 방위라는 군사적 업적을 세울 수 있었으며 여차하면 반란을 친히 진압할 수 있었던 마우리키우스와 달리 아나스타시우스는 군무와 연이 없는 순수 문관 출신이었다. 한편, 정통 칼케돈파여서 종교계와의 마찰요소가 훨씬 적었던 마우리키우스와 달리 단성론을 믿어서 총대주교를 위시한 종교계 및 수도 시민들과의 갈등 소지가 컸고 실제로 갈등도 여럿 있었다.
마지막으로, 전임자 티베리우스 2세에게 확실하게 후임자로 지명을 받았던 마우리키우스와 달리, 아나스타시우스는 전임자에 의한 계승이 아니라 선대 황후 아리아드네의 일종의 택군(擇君)에 의한 추대로 즉위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년에 권좌를 30년 가까이 유지해 내면서 자리보전만 하지 않고 나름의 업적을 세웠던 점은 높이 평가할 만하다. 이 연장선상에서, 군무와 별 연이 없는 스스로를 550년 전쯤의 그 폼페이우스와 동일시하는 프로파간다를 본인 직속 Panegyrists를 통해 전파했다. 이 점은 Brian Croke의 2008년작 'Poetry and Propaganda: Anastasius I as Pompey'라는 논문에서 제시되어 있는 한편, 당시 5세기 말 6세기 초만 해도 (서로마가 이미 멸망하고 나서임에도 불구하고) 흔히 그리스적 성향이 종래의 라틴적인 성향을 대부분 대체한 것으로 여겨지는 동로마가 라틴적인 고대 로마에서 그리 떨어져 있지 않고 꽤나 밀접했음을 알 수 있다.
2.7. 사망
노령의 황제는 자식이 없었고 3명의 조카가 있었다. 루머에 따르면 임박한 죽음을 예감한 황제는 궁정에 의자 3개를 비치하고 그중 하나에 황제의 인감을 숨겨 놓은 후 조카들을 궁정으로 불러 자리에 앉게 하였다. 그러나 한 의자에 조카 둘이 함께 앉았고 인감이 있던 곳에는 아무도 앉지 않았다. [13]실망한 아나스타시우스 1세는 후계 문제를 신의 뜻에 맡기기로 하였고 다음 날 아침에 처음으로 자신의 침실에 들어온 사람에게 황제위를 물려주기로 하였다. 다음 날 아침, 근위대장 유스티누스가 방에 들어온 것을 본 황제는 그를 제위 계승자로 선포하였다. 노쇠한 황제는 518년 7월 9일경에 사망하였고, 유스티누스 1세가 황제로 즉위하였다. 국고에는 제국의 3년치 예산에 해당하는 2300만 노미스마[14]가 들어있었다.
조카 셋 중 한 명인 히파티우스는 니카 반란에서 유스티니아누스를 대신할 새 황제로 추대되었다가 죽었다. 적극적으로 반란을 도모한 것은 전혀 아니고 오히려 반란군에 의해서 끌려나온 것인데다가(영어 위키백과 등에서는 'reluctant'라고 나온다), 유스티누스-유스티니아누스 시대 내내 황제들과 관계가 좋았어서 유스티니아누스는 목숨은 살려주려고 했지만 테오도라가 일단 추대되었으면 이유여하를 불문하고 처단해야 한다는 점을 관철시켜서 결국 처형되었다.
3. 여담
아나스타시우스는 두 눈동자의 색이 한쪽은 검정, 다른 하나는 푸른색인 다른 오드아이였고, 이 때문에 후에 디코루스(Dicorus, 그리스어: Δίκορος)라 불리게 되었다.또한 이때에도 여전히 종래 다신교 시절의 황제숭배가 잔존했던 것을, 'The Roman Imperial cult Emperor Anastasius I'이라는 외국 책의 존재를 통해 알 수 있다. 공교롭게도 아나스타시우스가 사후 (기독교 이전의 소위 전통적인 로마 다신교 차원에서) 신(divus)으로 모셔진 마지막 황제이다.[15]
사후 동고트 왕국에서 공교롭게도 이미 세상을 떠난 이 아나스타시우스의 명의를 담아서 주화를 발행했었다고 한다. 아직 6세기의 게르만 왕국들은 로마의 영향권에서 완전 독립하지 못한 상황이라 주화, 직함 등을 완전히 독자적으로 사용하지 못한 채 제국의 권위를 일정 부분 빌렸는데[16], 그런 상황에서 동로마군이 침략해 들어왔으니 차마 그 적군의 수괴인 유스티니아누스의 명의로 주화를 발행할 수는 없고, 명목상으로 제국의 산하 종족 혹은 세력으로서 조약/동맹(foedus)을 제국과 최초로 맺었던, 즉 동고트 왕국이 세워지던 493년 당시의 황제인 아나스타시우스 1세의 명의로 주화를 발행했던 것이라고 한다.[17]
4. 참고자료
- 워렌 트레드골드: <비잔틴 제국의 역사>
- 게오르크 오스트로고르스키: <비잔티움 제국사>
- 존 줄리어스 노리치: <비잔티움 연대기>
[1] 내부 반란을 진압한 일은 여럿 있었지만 그걸 다른 황제들의 군사적 치적과 비교하기는 어렵고, 이란과의 분쟁도 국소적으로 그쳤기에 현상유지로 끝났다.[2] 현 알바니아의 두러스[3] 율리아누스의 이복형 갈루스의 어머니는 세베루스 왕조의 창건자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외가 후손으로,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외삼촌의 직계손이다. 즉, 악명높은 근위대장 가이우스 풀비우스 플라우티아누스의 직계손이 되며, 카라칼라의 아내 풀비아 플라우틸라의 조카의 직계후손이자 카라칼라 손에 피살된 카라칼라의 처남 가이우스 풀비우스 플라우티우스 오르텐시아누스의 후손이 된다.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일가는 그 손이 적고, 창건자의 외가인 풀비우스 가문은 세베루스 왕조의 몇 안 되는 황실 식구였다. 따라서 카라칼라에게 플라우티아누스, 플라우틸라 모녀가 살해됐음에도 멀게나마 세베루스 왕조와도 연관된 후손으로 평가받았다.[4] 이 정통 로마인이라는 것은 라틴인이나 그리스인 같은 종족 개념이 아니다. 제노 문서에 나오듯 그는 소아시아 중남부 이사우리아 지방의 산악 부족 출신의, 로마인 입장에서는 야만인 출신의 황제였다. 475년에 제노가 시민 봉기에 의하여 폐위당한 것도 그의 출신이 한몫했다.[5] 아나톨리아 반도 중남부에 위치한 이 지역은 제국 내에서 상당히 낙후된 곳이었는데, 5세기 들어 테오도시우스 2세와 레오 1세가 일종의 이이제이로 군부의 게르만 출신 장군들을 견제하기 위해 이 지역 출신을 우대하여 신흥 세력으로 성장하였고, 결국 그 지역 출신의 황제인 제노까지 탄생하게 된 것이다. 다만 콘스탄티노폴리스 백성들은 이에 대해 매우 부정적이었다.[6] 영어 위키백과: Anastasian War - 페르시아와의 오랜만의 전쟁이었던 데다가, 전에는 대부분 1~2년으로 단기간으로 끝났는데, 이것은 4년간 지속되었다. 또한 완충 지대인 아르메니아를 끼고 싸운 것도 아니었고, 전장도 아나톨리아 동부 ~ 북 메소포타미아 ~ 시리아로 상당히 넓었다.[7] 현 터키의 에르주름[8] 현 터키의 디야르바크르[9] 메소포타미아 북부, 동로마령[10] 현 터키의 유럽 영토의 동부. 흑해와 에게 해 사이의 남북 50여km의 반도. 에디르네와 이스탄불 사이, 즉 당시 (동)로마의 수도권이다! 즉 수도권 방위용.[11] 5세기 후반인 469년(레오 1세의 치세) 과 478년(제노의 치세)에 축조된 목축을 대대적으로 보강한 것이다[12] 영어 위키백과의 Roman diocese 문서 중 'In May 535, Justinian abolished the vicariates of Thrace and the Long Walls, in order to improve the defence of the Long Walls by ending the continuous conflicts between the two vicars'라는 대목이 있다.[13] 아들이 없어서 조카들을 물망에 두고 테스트한 것은 조선의 명종과 공통점이 있다. 명종의 경우 조카(하성군: 선조)가 계승하는 데 성공한 반면, 아나스타시우스의 경우 조카들 대신 엉뚱한(?) 근위대장 유스티누스가 계승했다는 차이점 또한 있지만.[14] 황금 320,000 파운드 혹은 황금 14만 5천 kg[15] Roman imperial cult 문서 중, 'In the Eastern Empire, sworn adherence to Christian orthodoxy became a prerequisite of Imperial accession – Anastasius I signed a document attesting his obedience to orthodox doctrine and practice. He is the last emperor known to be consecrated as divus on his death (AD 518).'[16] 이 정도가 가장 약했던, 즉 반대로 독립성이 가장 강했던 것은 반달 왕국이었는데, 동서로마와의 전투에서 여러 번 이겼으며(특히 본 곶 해전에서 1천 척도 넘는 동서로마 합동 해군을 꺾었던 승리가 결정적이었다.) 또한 바다 건너 아프리카에 있어서 콘스탄티노플과 가장 물리적으로 멀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반면 이탈리아 및 달마티아의 오도아케르 정권 및 동고트 왕국은 그 반대였는데, 구 서로마의 중심지라 현지의 구 서로마인들의 영향력이 다른 곳보다 더욱 강했고, 또한 게르만 국가들 중 가장 콘스탄티노플과 물리적으로 가까웠던 탓에 동로마 정부의 비위를 완전히 거스르기 힘들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동로마와의 결전이 임박했거나 혹은 이미 전쟁 중이었던 때 대하는 태도를 보면 차이가 확 드러난다. 반달의 겔리메르는 유스티니아누스로부터 폐위된 힐데릭을 복위시키거나 아니면 콘스탄티노플로 보내라는 요구를 받았을 때 둘 다 거절하며 유스티니아누스에게 보내는 서신에 '이것은 우리 내부의 문제다. 군주라면 누구나 자기 일에 신경 쓰는 것이 바람직하다.'라고 항변하여 당신이나 나나 같은 군주라는 독자 의식을 드러냈으나, 동고트의 토틸라와 테이아는 전쟁 중인 상황에서도 동로마 황제를 주화에 꼬박꼬박 넣어서 발행했다.[17] 움베르토 에코 편저 중세 I의 60p에는 ''왕국들'은 곧 자국의 화폐를 주조하기 시작하지만 황제의 이름으로 그렇게 했다. 제국과 갈등을 빚을 때에도 왕의 이름을 동전에 넣지 않았으며, 기껏해야 현재의 제국 통치자를 과거의 통치자로, 예를 들어 최초로 '포이두스'(foedus)를 맺었던 황제의 이름으로 대체했다. 동고트 왕국의 토틸라와 테이아가[18] 아나스타시우스의 이름으로 대체한 솔리두스 금화가 바로 그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