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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하일 3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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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제국 제88대 황제
미하일 3세
Μιχαήλ
파일:Michael_iii.jpg
<colbgcolor=#9F0807><colcolor=#FCE774,#FCE774> 이름 미하일 메시소스
(Μιχαήλ Μέθυσος[1])
출생 840년 1월 9/10일
동로마 제국
사망 867년 9월 27일 (향년 27세)
동로마 제국 콘스탄티노폴리스
재위 기간 로마 황제
842년 1월 20일 ~ 867년 9월 24일 (25년)
전임자 테오필로스
후임자 바실리오스 1세
부모 아버지 : 테오필로스
어머니 : 테오도라
배우자 에우도키아 데카폴리티사
자녀 레온 6세?[2]
종교 기독교
파일:미하일 3세 -2.png
황제 미하일 3세의 묘사

1. 개요2. 치세
2.1. 어린 황제와 테오도라의 통치2.2. 권신 바르다스2.3. 바실리오스의 등장2.4. 황제의 최후
3. 평가4. 기타5. 참고문헌 및 출처

[clearfix]

1. 개요

파일:Byzantine_Empire_842_AD-3.png
842년의 동로마 제국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ByzantineEmpire867AD4lightpurple.png
867년의 동로마 제국[3]

아모리아 왕조의 마지막 황제.[4] 2살의 어린 나이에 즉위하여 모친 테오도라, 삼촌 바르다스, 환관 테옥티스도스가 대신 통치했으며 843년 3월에 제2차 니케아 공의회가 재확인되며 성상옹호론이 확립되었다. 이후 테오도라는 테옥티스도스와 함께 12년 간 나라를 다스렸지만 어머니의 간섭에 불만을 품은 미하일이 바르다스 등과 음모를 꾸며 855년 11월 테옥티스도스를 제거하자 권력을 잃고 856년 3월 수도원에 유폐되었다. 하지만 미하일은 권신 바르다스에게 밀려나 권력을 제대로 누리지 못했다. 이에 불만을 품은 그는 866년 4월 2차 크레타 원정을 준비하던 바르다스를 시종장 바실리오스를 시켜 죽였다. 한달 후, 바실리오스는 부제가 되었는데 얼마 안가 그는 미하일을 암살하고 황제(바실레우스)로 즉위, 마케도니아 왕조를 개창하였다.

2. 치세

2.1. 어린 황제와 테오도라의 통치

파일:미하일 3세 -3.jpg
미하일 3세와 그의 모친 테오도라[5]

미하일 3세는 840년 1월 19일에 태어났다. 그는 테오필로스 황제와 테오도라 황후의 막내 아들이었다. 840년 아직 걸음마도 제대로 못 땔 때 아버지에 의해 공동 황제로 지명된 미하일은 842년 1월 20일 아버지가 사망하면서 2살에 황제로 등극했다. 하지만 나이가 너무 어렸기 때문에, 어머니 테오도라와 테오도라의 삼촌 세르기오스 니케티아테스, 테오도라의 오빠 바르다스, 그리고 로고테테스인 테옥티스도스가 대신 통치했다. 테오도라는 성상 옹호론자였으며 성상 파괴주의를 자신의 대에 종식시키기로 결심했다. 843년 3월 초, 공의회를 소집해 성상 파괴론자인 요안니스 총대주교를 해임하고 성상 옹호론자 메토디우스를 선출했다. 그리고 제2차 니케아 공의회에서 결정한 성상 파괴주의 단죄를 재차 추인했다. 이후 성상 파괴론은 두 번 다시 거론되지 않았다.

이후 테오도라는 테옥티스도스와 더불어 제국을 평탄하게 이끌었다. 파트리키우스이자 환관인 테옥티스도스는 학식이 풍부하고 문화에 해박한 인물로, 수도의 교육 수준을 개선하는 데 많은노력을 기울였고 경제 정책에서도 탁월한 성과를 거두어 막대한 금을 확보해 국고를 가득 채웠다. 테옥티스도스는 군사 방면에서도 뛰어났다. 그는 크레타 원정에 직접 참여해 사라센군과 맞서 싸웠다. 그 결과 사라센군을 축출하는 데는 실패했지만 그들이 크레타 섬을 정복하는 시기를 상당 기간 늦추는 데 공헌했다. 이듬해 말라티야의 태수와 격돌한 마우로포타모스 전투에서 패배해 평화조약을 맺어야 했고, 848년에는 이슬람 왕조인 아글라브 왕조시칠리아에서 몰아내기 위해 벌인 원정도 실패했지만, 855년 5월 22일에는 비잔티움 함대를 환관 다미아노스의 지휘하에 나일강 삼각주의 동쪽 끝자락에 있는 다미에타로 파견해 사라센 함선들을 모조리 불태우고 무기고를 파괴하며, 많은 포로들을 잡아오게 했다. 그리고 이듬해의 킬리키아 아나자르부스 원정도 성공적이었다. 아랍 문헌에 따르면, 약 300척의 함대로 이뤄진 제국 함대가 에게 해와 시리아 해안 일대를 3차례 이상 공격했다고 한다.

한편, 테오도라와 테옥티스도스는 이단으로 낙인 찍힌 파울리키아파를 대대적으로 탄압했다. 파울리키아파는 서기 600년대에 아르메니아에서 탄생한 이래 제국 동방에 자리잡은 소수 종교 집단이었다. 그들은 성상 파괴를 옹호하는 동시에 세례성사, 견진성사, 결혼성사, 성체성혈성사, 십자가의 의미, 구약성서 전체와 신약성서의 일부, 교계제도 자체를 모조리 거부했다. 그들은 선과 악의 대립적인 두 원리를 내세우는 마니교의 신앙을 지지했으며, 물질세계가 악마의 창조물이라고 믿었다. 또한 그들은 그리스도의 단일한 본성은 물질세계와 무관한 것이며, 성모는 "물이 관을 통해 흐르는 것처럼" 신성한 본질이 담겨진 물리적 그릇에 불과할 뿐이라고 생각했다. 테오도라는 파울리키아파의 모든 교도들에게 잘못을 시정하지 않으면 사형에 처한다는 포고령을 발표했다. 그러나 그들이 자신들의 종교관을 바꾸지 않자, 테오도라가 파견한 제국군이 대대적으로 학살을 자행해 10만에 달하는 이들이 살해되었다. 이때 많은 이들이 제국의 경계를 넘어 멜리테네의 아미르인 우마르 이븐 아브둘라에게 피신했다.

855년, 15살이 된 미하일 3세는 어머니의 간섭에서 벗어나려 애썼다. 그는 이 시기에 스웨덴 혈통인 에우도키아 잉게리나를 정부로 뒀지만, 테오도라는 그녀를 인정하지 않고 아들이 에우도키아 데카폴리티사와 결혼하게 했다. 그러나 미하일 3세는 아내에게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고 에우도키아 잉게리나와 관계를 계속 맺으면서 어머니를 실각시키기 위한 음모에 가담했다. 음모의 주동자는 테오도라의 오빠 바르다스였다. 그는 842년 테오도라의 측근으로서 나라를 통치했지만 테옥티스도스에게 실각당한 후 오랫동안 복수의 칼날을 갈아오고 있었다. 여기에 함대를 이끌고 큰 전공을 세웠지만 별다른 보상을 받지 못해 불만을 품었던 다미아노스도 음모에 가담했다. 황제는 이들의 설득에 따라 먼저 테옥티스도스부터 제거하기로 했다.

855년 11월 20일, 테오도라의 거처에 가기 위해 황궁 안을 걷던 테옥티스도스의 앞을 미하일과 다미아노스가 가로막았다. 미하일은 분노가 담긴 목소리로 자신은 이제 어린아이가 아니며 처리해야 할 국정이 있으면 어머니가 아니라 자신에게 가져와야 한다고 주장했다. 테옥티스도스는 황제와 말다툼을 벌이다 몸을 돌이켜 왔던 길로 돌아갔다. 그때 바르다스가 돌연 장교들과 함께 들이닥쳐 그를 땅바닥에 쓰러뜨렸다. 테옥티스도스는 간신히 칼을 뽑아들었지만 순식간에 제압당했다. 황제는 경비병들에게 직접 그를 죽이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 소식을 접한 테오도라는 즉각 달려와서 아들에게 항의했다. 그러나 미하일은 어머니를 뿌리쳤고, 경비병들은 의자 밑으로 기어들어간 테옥티스도스를 끌어내 그의 가슴에 칼을 박았다. 이렇게 해서 테옥티스도스를 제거한 미하일은 856년 3월 15일 원로원 특별 회의에서 단독 황제로 공인되었고 어머니를 수녀원에 유배보냈다.

2.2. 권신 바르다스

비록 어머니를 유폐하고 단독 황제로 등극하긴 했지만, 미하일 3세는 아직 15살의 소년이었고, 책임감이 결여되어 통치는 뒷전이고 향락을 추구했기 때문에 실권은 바르다스에게 주어졌다. 바르다스는 쿠데타를 통해 권력을 손에 쥐었지만 정치적 식견과 탁월한 행정 능력을 갖췄으며 군사적 재능도 뛰어났다. 856년, 당시 멜리테네의 아미르인 우마르 이븐 아브둘라는 파울리키아파 난민들을 받아들여 전력을 크게 증강시킨 후, 카르베아스를 파울리키아파 리더로 삼아 원정에 대동시켰다. 그 후 흑해 남부의 아르메니아콘 테마를 거쳐 아미수스를 약탈했다. 이에 바르다스는 동생 페트로나스가 이끄는 5만여 제국군을 파견해 이들을 치게 했다. 페트로나스는 병력을 셋으로 나눠 북쪽, 남쪽, 서쪽에서 동시에 진격해 포손-할리스 강과 그 지류인 랄라카온 강 사이의 어느 지점에서 우마르 이븐 아브둘라의 군대를 포위했다. 곧이어 벌어진 처절한 전투에서, 우마르와 그의 병사들은 거의 다 전사했다. 페트로나스는 뒤이어 유프라테스 강을 건너 아미다(지금의 디야르바키르)까지 진군하게 해 많은 포로를 확보해 트라키아로 이주시켰다. 3년 후에는 미하일 3세가 직접 원정군을 이끌고 유프라테스 강을 건너 사라센을 공격했다. 859년엔 제국군이 다미에타를 다시 습격하여 많은 포로를 확보했다. 863년, 루스인과 아랍인이 침공했지만 제국군은 이를 격퇴하고 아랍군 사령관들은 모두 전사했다. 또한 제국군은 불가리아를 상대로 몰아붙여 필리포폴리스, 메셈브리아 등을 수복했다.

한편, 바르다스는 미하일 3세의 동의를 받아 친교황파인 총대주교 이그나티오스를 해임하고, 중립적인 포티오스를 총대주교로 선출했다. 이 일은 서방 교회와의 분열로 이어졌다. 이그나티오스는 교황 니콜라오 1세에게 도움을 호소했고, 교황은 이를 받아들여 863년에 포티오스를 파문했다. 미하일 3세는 이에 맞서 867년 포티오스와 다른 세 명의 동방 주교들을 소집해 교황 니콜라오 1세를 파문했다. 이러한 분열의 와중에 두 교회는 발칸 반도의 슬라브인들에 대한 사목권을 놓고 다투었는데, 모라비아에 파견된 키릴로스와 메토디오스 형제가 키릴 문자를 만들어 주기도 하였다. 하지만 모라비아는 서방 교회를 택하였고, 이에 위기감을 느낀 미하일은 가뭄으로 혼란에 빠져 있던 불가리아를 공격하여 보리스를 항복시키고 동방 교회로 개종시켰다. (864년)[6]

이렇듯 로마 제국은 내적으로나 외적으로나 큰 문제 없이 잘 나가고 있었지만, 미하일 3세와 바르다스 간의 대립은 갈수록 격화되었다. 바르다스는 책임감 없이 향략만 추구하려 드는 황제를 여러 차례 제지했고, 미하일 3세는 황제의 권위마저 훼손시킬 정도로 강력한 권력을 가진 바르다스를 못마땅하게 봤다. 결국 미하일 3세는 바르다스를 제거하기로 결심한다.

2.3. 바실리오스의 등장

황제는 무도회 의상을 입고 친구들과 함께 시끌벅적하게 거리를 활보하곤 했다. 그 친구들 중엔 바실리오스라는 인물도 있었다. 바실리오스는 아르메니아 사람으로, 본래 트라키아에 정착해 살고 있다가 불가리아군에게 포로로 잡혀 다뉴브 강 너머 '마케도니아'에 끌려갔다. 바실리오스는 그곳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다가 로마 제국이 불가리아를 몰아치는 틈을 타 제국에 귀순했다. 그는 문맹이었으며 학식은 형편없었지만 엄청난 힘과 말을 잘 다루는 솜씨가 있었다. 황제는 그를 마음에 들어해 궁정에 데려와 친구로 삼았고, 몇년 후에 시종장에 임명했다. 게다가 황제는 자신의 정부인 에우도키아 잉게리나를 바실리오스와 결혼시켰다.[7] 이는 자신의 정부를 황궁으로 데려올 때의 반발을 피하기 위해 일부러 바실리오스와 결혼시켰던 것으로 짐작되며 잉게리나는 레온과 스테파노스를 낳았다. 그리고 미하일은 자신의 누나인 테클라를 바실리오스의 정부로 삼게 했다.[8]

866년 봄, 바르다스는 크레타를 회복시키기 위한 대규모 원정을 준비했다. 그런데 그 전해 겨울에 황제와 시종장 바실리오스가 자신의 목숨을 빼앗을 음모를 꾸미고 있다는 첩보를 들었다. 그는 원정을 잠정적으로 중단하고 조카를 찾아가 당당하게 따졌다. 이에 미하일 3세와 바실리오스는 866년 3월 25일 성모 희보 축일[9]에 성모 마리아 칼로프라테이아 성당에서 바르다스에게 적대적 의도를 가지고 있지 않다는 내용의 공식 서명서에 서명했다. 이 맹세는 소피아 성당의 성해 가운데서도 가장 귀중한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서명할 만큼 엄숙했기에 바르다스는 의심을 풀었다.

바르다스는 황제와 함께 함대를 타서 소아시아의 고대 도시 밀레투스 부근 마이안데르 강 어귀의 어느 지점까지 가서 닻을 내렸다. 그때 황제가 바르다스를 죽일 음모를 꾸미고 있다는 첩보를 접했지만, 그는 웃어넘겼다. 그러나 내심 걱정됐는지 그날 밤 거의 잠을 이루지 못하고 이튿날 아침 친구인 필로테오스 로고테테스 장관에게 두려움을 털어놨다. 그러자 필로테오스는 애써 그를 달래며 "복숭아 색깔의 황금 외투를 입고서 적을 상대하게. 그들은 자네 앞에서 뿔뿔이 흩어질 걸세."라고 말했다. 바르다스는 그 말에 따라 화려한 의복을 차려 입은 채 말을 타고 황제의 막사로 갔다. 그러고는 황제 곁에 앉아 로고테테스 한 명이 읽는 아침 보고서를 주의깊게 읽었다. 보고가 끝난 뒤, 바르다스는 황제를 돌아보며 별다른 일이 없다면 지금 크레타 공격을 개시하는 게 어떠냐고 제안했다.

바로 그 순간, 바실리오스가 신호를 보냈다. 이걸 목격한 바르다스는 재빨리 허리에 차고 있던 칼을 빼들려 했지만, 바실리오스가 무지막지한 힘으로 그를 쳐서 쓰러뜨리자 다른 음모자들이 급히 달려들여 그를 죽여버렸다. 미하일 3세는 즉시 콘스탄티노플의 포티오스 총대주교에게 서한을 보내 바르다스가 반역죄로 즉결 처분되었다는 소식을 통보했다. 포티오스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은 답장을 보냈다.
"폐하의 덕과 자비로 말미암아, 저는 그 서한이 날조되었다거나 바르다스가 다른 이유로 죽었다고 의심하지 않습니다."

이후 미하일 3세는 원정을 취소하고, 수도로 돌아온 뒤 바르다스의 반역을 공표하고 시종장 바실리오스를 부황제(카이사르)로 임명한다고 선포했다. 이리하여 바실리오스는 한낱 농부에서 불과 9년 만에 부황제로 등극했다.

2.4. 황제의 최후

삼촌을 제거하고 바실리오스를 부황제에 임명한 뒤, 미하일 3세는 향락에 몰두했다. 그는 매일 술에 흠뻑 취했고 술에 취하지 않은 때는 오로지 전차 경주만 생각했다. 그는 벽이 온통 대리석으로 뒤덮인 마구간을 지었고 성 마마스 궁전에 경주로를 설치하여 원형 경기장에서의 경주를 위한 개인 연습장으로 삼았다. 또한 경주자들과 어울리면서 그들에게 금은보화를 선물하고 그들의 자식들의 대부 노릇을 했다. 심지어 경기 도중에 자기가 경주에 참여하게 되자 황제석에 성모 마리아 이콘을 세워놓고 성모 마리아에게 자신이 이기도록 해달라고 빌었다고 한다. 이렇듯 향락에 취해 기행을 벌이는 미하일을 지켜본 바실리오스는 그를 제거하고 단독 황제에 오르기로 결심한다.

867년 9월 24일, 두 황제와 에우도키아 잉게리나는 성 마마스 궁전에서 저녁 식사를 했다. 식사가 끝날 무렵, 바실리오스는 핑계를 대고 방을 나와서 미하일의 침실로 갔다. 그는 방문의 걸쇠를 구부려놓아 문이 잠기지 않도록 해놓고는 다시 식탁으로 돌아왔다. 미하일은 여느 때처럼 만취한 상태에서 비틀거리며 잠자리에 들어 곧 깊은 잠에 빠졌다. 그때 음모자들은 황궁의 외딴 구석에 집결했고 바실리오스가 곧 그들과 합세해 미하일의 침실로 향했다. 당시 황제의 술친구인 파트리키오스 바실리스카우오스는 황제의 옆에서 잠을 자고 있다가 발걸음 소리가 들리자 다급하게 문을 닫으려 했지만 걸쇠가 망가져 있어서 그럴 수 없었다. 바실리오스는 파트리키오스를 걷어차 바닥에 내동댕이치고 칼로 찔러 중상을 입혔다.

이후 음모자들은 한 사람씩 황제를 찔렀고 바실리오스의 사촌 아실라이온이 최후의 일격을 날렸다. 암살자들은 죽어가는 미하일을 내버려두고 황금뿔로 내려가서 대기하고 있던 배를 타고 황궁으로 건너갔다. 이튿날 아침, 바실리오스는 에우도키아 잉게리나를 황제의 숙소로 부르고 비로소 미하일의 사망을 공표한 후 황제로 등극했다. 미하일의 시신은 아시아 쪽 해안의 크리소폴리스에서 약식으로 장례식을 치른 뒤 매장되었다.

바실리오스 1세 사후 레온 6세는 약식으로 매장된 미하일을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다시 장례지냈다.

3. 평가

개인적으로 볼 때는 황제보다는 하는짓이 망나니인 인간으로 매일 술마시면서 다니는 주정뱅이인지라 아들과는 다르게 암군이었으나 그의 통치는 성공적인 통치기였고 잔잔한 실책들은 있으나 그리 큰 건 아니었다.

일단 최초로 그를 대신해 통치한 태후 테오도라와 섭정 테옥티스도스는 제국을 안정적으로 이끌었는데 우선 레온 3세가 시작한 성상파괴주의를 끝냄으로서 오랫동안 가져온 제국내부의 혼란을 종식시켰고 수도의 교육수준도 개선하는데 노력했고 경제정책에서도 탁월한 성과로 많은 금을 확보해서 국고를 채우기도 했다 또 대외적으로는 이슬람을 공세적으로 압박을 가했다.[10][11] 한번은 나일강 삼각주 쪽으로 가서 사라센 함대를 불지르고 무기고를 부수고 많은 포로를 데려오며 털어버린 적도 있었다.

물론 그들도 실책이 있었고 파울라기파를 대대적으로 탄압하며, 제국군을 보내 10만에 달하는 이들을 학살한 적도 있다. 존 줄리어스 노리치에 따르면 이들은 아르메니아에 있었는데 제국을 이슬람으로부터 막아주고 있었다고 한다. 만일 이게 맞다먼 이들은 제국을 막아주던 이들을 등돌리게 한 것이다. 비록 실책이 있지만 안정적으로 제국을 이끌던 둘은 곧 몰락하고 만다.

15살이 된 뒤 어머니인 테오도라의 간섭에서 벗어나기 위해[12] 미하일 3세는 테오도라와 테옥티스도스에게 불만을 가지고 있는 테오도라의 오빠인 삼촌 바르다스와 손잡고 이 둘을 숙청했다. 보통 이러면 주정뱅이 군주가 직접통치하며 몰락하는게 레파토리인데 미하일은 아직 어리고 미숙했기에 그의 두번째 섭정으로 외삼촌 바르다스가 정사를 맡았고 상당히 유능한 섭정이 되었다.

권신 바르다스 역시 이 둘과 마찬가지로 사라센을 향해 팽창정책을 펼치며 공세적으로 이슬람을 밀어붙였고 여러 번 원정을 하기도 했는데 한번은 미하일 3세가 직접 군을 이끌고 유프라테스 강을 넘어 성공적으로 원정을 하기도 했다.또 제국군은 여러번을 사라센을 습격했고 루스인과 아랍인의 침공을 격퇴시킨적도 있었다. 또 서방 전선으로 방향을 바꿔서 그동안 여러 번 제국을 위협한 불가리아를 몰아붙이면서 필리포폴리스, 메셈브리아 등의 영토들을 수복하면서 남부 그리스 지역들을 확고하게 했다. 그리고 발칸 서부 쪽에 모라비아가 서방 교회를 택하자 위기를 느끼고 불가리아를 공격해서 차르 보리스를 항복시키며 정교회로 개종시켰다.

이렇게 바르다스는 앞서 말한 테오도라, 테옥티스도스 때와 마찬가지로 제국을 잘 통치했으나 황제 미하일 3세와 대립이 점점 심해졌다. 결국 미하일은 친구 바실리오스와 함께 866년에 크레타 원정을 계획하던 권신 바르다스를 막사에서 살해한다.

이렇게 미하일은 두 번째 섭정도 숙청시키고 미하일은 바르다스를 죽이는데 동참한 친구이자 시종장인 바실리오스를 부제로 임명시켰고 바실리오스와 자신의 정부 에우도키아 잉게리나를 혼인시켜 그의 사생아 레온의 제위 계승을 매끄럽게 하기 위한 계획을 세우는데 이것은 그의 비극을 앞당기는 계기 중의 하나가 된다.

이후 향락을 몰두하며 술이나 마시면서 다니게 되고 바실리오스가 그를 죽이고 단독 황제가 되도록 계기를 마련해주게 되었다. 867년 9월 24일 바실리오스와 그의 음모자들이 미하일 3세를 살해하게 되고 이윽고 바실리오스는 867년에 로마제국 89대 황제로 즉위하며 마케도니아 왕조를 창건하게 된다.

참으로 특이한 인생을 살았고 본인이 스스로 명줄을 앞당기게 만들었다. 테오도라, 테옥티스도스, 바르다스 등의 유능한 모친 및 섭정들을 순서대로 숙청했는데 이럼 본인이 결국 통치하게 돼있는데 이 인간 하는 짓을 보면 죽을 때도 결국 향략이나 몰두해서 죽은 건데, 단독 통치했으면 그동안 모친 및 섭정들이 한걸 날려먹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 와중에 어떻게 유프라테스 강을 넘어 사라센을 공격하는 원정을 성공적으로 했는지 매우 특이한 황제이다.

4. 기타

교황 니콜라오 1세에게 보낸 서한 중에서, 라틴어를 야만적(barbarous)이고 스키타이적(Scythian)인[13] 언어라고 비난했다.[14] 물론 당시에는 불가리아가 어느 교회에 속해야 하는가 및 포티오스 분열[15] 문제로 동로마 및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와 로마 교황청 사이가 좋지 않았었던 문제가 있었지만, 그런 것을 감안하더라도 자국의 옛 언어인 라틴어를 대놓고 야만적이라고 까는 것은 그만큼 얼마나 당시의 현지화된 중세의 로마가 종래의 라틴적인 고대의 로마에서 멀어졌는지를 잘 보여준다고 여겨졌다. 하지만 현대의 많은 학자들은 미하일 3세의 의도는 "너희는 라틴어를 야만적이고 괴상하게 변형해서 구사한다"라고 비꼬려는 것이었지 라틴어 자체를 깎아내려는 게 아니었고, 당시 교황의 외교 서신 담당관이었던 아나스타시오가 의도적으로 황제가 라틴어를 무시했다고 왜곡해서 교황에게 전달했을 거라 추정한다.

5. 참고문헌 및 출처


[1] 메시소스는 술주정뱅이를 가리킨다. 미하일 3세의 별명[2] 확실하게 공인된 것은 아니나 레온 6세가 미하일 3세의 자식이라는 강력한 의혹이 있다.[3] 다만, 이 2개의 지도에는 표시되어있지 않지만, 이탈리아 북부에 베네치아 공화국을 봉신국으로 두고 있었다.[4] 레온 6세가 미하일 3세의 사생아라는 의혹이 있다. 만약 사실이라면 마케도니아 왕조의 시조이기도 한 셈이다.[5] 출처 Ancient History Encyclopedia[6] 이후 로마 측 선교사들이 와서 보리스를 설득시켰으나 867년에 두 교회 간의 갈등이 봉합되고 서방 측이 불가리아를 동방에 양도하며 불가리아는 현재까지도 정교회 국가로 남아있다.[7] 바실리오스는 이 결혼 때문에 아내 마리아와 이혼했지만, 마리아가 낳은 콘스탄티노스를 사랑했고 잉게리나와의 사이에서 낳은 레온은 미워했다.[8] 테클라는 훗날 궁정 귀족 요안니스 네아토코미테스와 연인이 되었으나 바실리오스가 이 사실을 알게 되면서 매질을 당하고 블라케르나이의 집 외의 모든 재산을 몰수당한 뒤 가난에 시달리며 몇 년 동안 몸져누워 지내다가 죽었다.[9] 대천사 가브리엘이 성모 마리아에게 예수의 잉태를 알린 날[10] 이미 선대황제인 테오필로스때부터 제국은 이슬람과 맞붙기 시작하며 공세적으로 나가기 시작했다. 물론 테오필루스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그가 이슬람과 싸울 때는 여러 번 승리를 거두기도 했지만 패배 역시 마찬가지인 비율로 하자면 1:1인 상황이었는데 미하일 3세 때부터는 비율이 3:1 정도로 이슬람을 더 안정적이고 수월하게 계속 밀어붙였고 패배보다 승리가 많은 때였다. 그리고 이런 이슬람 공세는 미하일 3세를 암살하고 즉위한 바실리오스 1세 역시 마찬가지였다[11] 아까 말한 테오필로스 이전에 로마 제국은 이슬람한테 수세적으로 방어를 하고 있었다 그도 그럴게 이미 발칸 방어선은 도나우 강 방어선이 무너졌고 새롭게 발칸에 등장한 불가리아 제1제국과 슬라브 부족들이 있는 양면전선이었고 불가리아와는 피터지게 싸웠으나 제국이 시원하게 밀어부치는 우위는 아니었고 한번은 대군을 이끌고 원정을 한 황제 니키포로스 1세가 불가리아군한테 기습당해 죽는 일도 생길정도로 서방전선이 버거운 상태였기에 이슬람 전선은 상대적으로 소홀해질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다.[12] 테오도라와 미하일 3세의 대립은 미하일 3세의 여자 문제 때문에 촉발되었다.[13] 스키타이인의 이미지를 생각하면 이것도 야만적이라는 동어반복이나 다름없다.[14] 'Michael III Latin barbarous' 정도의 키워드로 구글에 검색하면 여러 서적에 미리보기의 형태로 내용이 나온다.[15] Photian heresy/controversy/Schism. 이 문제는 후대 로마노스 1세 때 어느 정도 봉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