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스티누스 1세 관련 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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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제국 제60대 황제 유스티누스 1세 IVSTINVS I | Ἰουστῖνος Α΄ | |
<colbgcolor=#9F0807><colcolor=#FCE774,#FCE774> 이름 | 플라비우스 유스티누스 (Flavius Iustinus) |
출생 | 450년 |
로마 제국 바데리아나 | |
사망 | 527년 8월 1일 (향년 77세) |
동로마 제국 안티오크 | |
재위 기간 | 로마 황제 |
518년 7월 9일 ~ 527년 8월 1일 (9년 22일) | |
전임자 | 아나스타시우스 1세 |
후임자 | 유스티니아누스 1세 |
배우자 | 에우페미아 |
자녀 | 유스티니아누스 1세 (양자) |
종교 | 그리스도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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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동로마 제국의 황제. 트라키아 지방 출신의 병사로 시작하여 근위대장, 더 나아가 황제의 자리까지 오른 대표적인 자수성가형 인물이다. 다만 문맹이었고 정치력이 부족하여 조카 유스티니아누스 1세에 의존하여 통치하였다.2. 생애
2.1. 황제 즉위 이전
450년 2월 2일, 일리리쿰의 다르다니아 지방 내 바데리아나에서 태어났다. 현재 북마케도니아의 수도 스코페 근교의 작은 마을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고, 트라키아식 이름인 '이스토크'로 불렸다. 이름에서 드러나듯 일리리아 혹은 다키아 속주민 중 로마인이 된 하층민의 후손이다.밑으로 5살 아래의 여동생 비길라티나가 있었다. 비길라티나는 사바티우스와 결혼해, 482년 태어난 페트루스 사바티우스, 490년생인 비길란티아를 뒀는데, 이중 비길라티나와 사바티우스의 아들 페트루스 사바티우스가 후일 외숙부 유스티누스 1세의 후계자가 되는 유스티니아누스 1세다.[1]
어릴 적부터 돼지를 키우는 돼지치기를 하다가, 10대 시절 고트족의 침공을 피해 콘스탄티노폴리스로 피난을 떠났다. 전란의 와중에 누더기 옷과 빵 한 덩이 외의 재산을 챙겨오지 못한 그는 입대를 선택했고, 이것이 청년 유스티누스의 운명을 바꾸게 되었다. 그가 입대한 부대는 460년 황제 레오 1세가 창설한 경비대였다.
군대에 쉽게 적응한 유스티누스는 이후 고향에 머물고 있던 아내 에우페미아를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부르고, 본격적인 직업군인의 길을 걸었다. 직업군인으로 있으면서, 이사우리아인, 사산조 페르시아인들과 로마가 벌인 다양한 전투에서 활약했다. 이때 그는 다양한 보직을 맡아 용감함과 성실함을 증명했는데, 용기가 대단해 로마 수뇌부들 눈에 들었다. 그 결과, 아나스타시우스 1세 시절이 되면 장군을 거쳐 콘스탄티노폴리스 원로원 의원까지 올랐다. 아나스티시우스 1세는 이후 그를 코메스 엑스쿠비토룸, 즉 근위대장까지 내려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도록 제국 내 권위와 가치를 끌어올렸다. 그래서 유스티누스는 늙은 황제가 사망할 무렵이 되면 제국과 황궁 안에서 그 영향력이 대단했다.
2.2. 즉위와 교회 통합
칠칠맞은 조카들 중에서 후계자를 정하지 못한 아나스타시우스 1세는 근위대장 유스티누스를 지목했고[2] 얼마 후 자연사하였다. 유스티누스는 백성들에게 돈을 뿌리며 환심을 샀고, 518년에 백성의 환호 속에 즉위하였다.[3]평생을 병영에서 생활한 그는 학식이 부족하였고, 고향이 모국어로 라틴어와 현지어를 섞어 사용한 일리리쿰 지방이라서 동로마 제국에서 많이 사용한 그리스어는 거의 문맹에 가까웠다. 그러나 본인과 아내의 양자가 일찍부터 로마식 고등교육[4]을 배우고, 기독교 신학을 교육받아 문맹도 아니고, 상류층 예법에 익숙해 그에게 국정 일부를 전담케 할 수 있었다는 것은 다행이었다.
유스티누스 1세는 아내 에우페미아와 결혼기간이 상당함에도 자녀가 없어, 근위대 장교가 되고 콘스탄티노폴리스 원로원 의원 자리를 받아 귀족 반열이 된 이후 대개의 무자녀 로마귀족들처럼 가장 가까운 혈연을 양자로 데리고 왔다. 이때 그는 아내와 자신의 아들로 점찍고 사람을 보내 데리고 오게 한 소년이, 여동생의 아들, 즉 외조카 페트루스 사바티우스이다. 유스티누스는 여동생 부부에게 사정을 말하고, 어린 조카를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불러, 플라비우스 페트루스 사바티우스 유스티니아누스라는 이름을 주고 본인과 에우페미아의 양자로 정식 입적해 아들이자 가문 후계자로 키웠다.[5]
유스티누스 1세는 즉위 이후, 자신의 나이, 학식 등을 생각해, 양자이자 외조카 유스티니아누스에게 국정을 맡기고 자신을 보좌케 했다. 이 결정은 후일 동로마 제국에 얼마나 지대한 영향을 미칠지 당대 사람들은 인지하지 못했을 것이다.
519년, 유스티니아누스의 주도로 동로마 사절이 로마 교황청에 파견되었고, 교황이 교회의 수장이며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보다 우위에 있다는 것을 인정하여 레오 1세부터 끌어온 동서 교회의 대립인 아카키오스 분열이 종결되었다.
525년에는 조카이자 양자인 유스티니아누스가 서커스단 출신의 여자인 테오도라와의 결혼식을 합법화 하기 위해 고위 관리가 하층민 출신 여자와의 결혼을 금하는 법을 폐기하였다. 그리고 그 해에 킬리키아 지방의 도시인 아나자르부스[6]가 황제의 이름을 따서 유스티노폴리스라고 명명되었다.
2.3. 죽음
526년, 시리아에 지진이 발생하여 안티오크가 파괴되었다. 복구 사업을 지시하던 황제는 건강이 악화됨을 느꼈고 조카 유스티니아누스를 후계자로 결정한 후 527년 4월에 자연사하였다.3. 여담
무일푼의 피난민 출신에서 시작하여 근위대장을 역임한 후, 황제까지 오른 자수성가형 인물이지만, 조카의 후광에 의해 묻히는 인물이다. 심지어 그가 유스티니아누스 왕조의 창시자라는 사실도 웬만한 서양사 애호가가 아닌 이상 비전공자들은 알지 못한다.
4. 참고 자료
- 워렌 트레드골드 : <비잔틴 제국의 역사>
- 게오르크 오스트로고르스키 : <비잔티움 제국사>
- 존 줄리어스 노리치 : <비잔티움 연대기>
[1] 참고로 유스티니아누스 1세의 여동생이자 유스티누스 1세의 또 다른 조카 비길란티아가 둘키시무스(둘키디오)와 결혼해 낳은 세 아이 중 첫째가 유스티니아누스 1세의 뒤를 이어 즉위한 유스티누스 2세다.[2] 다음날 아침 자신의 침실에 처음으로 들어오는 사람에게 제위를 물려주기로 했는데, 유스티누스가 바로 그 사람이었다. (존 줄리어스 노리치, 비잔티움 연대기 1권)[3] 이 돈의 출처는 선황 아나스타시우스 1세의 금고.[4] 수사학, 로마 역사, 윤리, 웅변 등.[5] 이런 배경 때문에, 유스티니아누스 1세는 외삼촌 부부의 양자가 되자마자, 당시 콘스탄티노폴리스 원로원 의원이자 근위대 장교, 장군 자리까지 두루 거친 유스티누스의 법적 아들로 귀족 신분이 됐다.[6] 현재 터키의 도시인 아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