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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 황제의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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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 황제의 해
Annus Quinque Imperatorum
<colbgcolor=#9F0807><colcolor=#FCE774,#FCE774> 시기 193년
주요 황제 페르티낙스
디디우스 율리아누스
페스켄니우스 니게르
클로디우스 알비누스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1. 개요2. 배경3. 전개
3.1. 페르티낙스 시해와 황제 경매3.2. 세 명의 제위 경쟁자들3.3. 세베루스 vs 니게르3.4. 세베루스 vs 알비누스
4. 이후

[clearfix]

1. 개요



서기 193년, 페르티낙스, 디디우스 율리아누스, 페스켄니우스 니게르, 클로디우스 알비누스, 셉티미우스 세베루스로마 황제로 잇따라 등극한 사건이다.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에서 세베루스 왕조로 넘어가는 계기가 된 내전이었다.

2. 배경

192년 12월 31일, 폭군 콤모두스 황제가 암살되었다. 그의 재위 초기 2년은 평범하고 안정적이었다. 그런데 이는 권좌를 노린 맏누이 루킬라의 암살 시도(콜로세움 암살미수 사건) 이후 완전히 망가지게 되었다. 콤모두스는 그 후유증으로 과대망상, 불안장애, 조울증, 대인기피 증세에 시달렸고, 페렌니스클레안데르의 농간 속에서 태업하는 암군이 되었다. 그러다가 그를 노린 세 번째 암살미수 사건 이후, '로마의 헤라클레스'가 되어 검투사 행세를 하다가 암살되었다. 폭정을 일삼던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의 마지막 황제인 콤모두스가 근위대장 퀸투스 아이밀리우스 라이투스의 사주를 받은 레슬링 교관이자 스파링 파트너였던 나르키수스에게 암살된 것은 모두가 바랬던 일이면서도, 인간병기인 콤모두스의 전투력과 경호 등을 생각하면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사건이었다.

암살자들은 콤모두스의 시신을 집정관 예정자인 파비우스 킬로에게 넘겨, 확인을 시켜 줬고 한밤중에 콤모두스의 시신은 가매장되었다. 라이투스는 암살이 성공한 뒤 황실 직속의 해방노예였던 에클렉투스와 함께 전 아프리카 총독으로 콤모두스의 누이 코르니피키아의 오랜 애인이었던 페르티낙스를 찾아가 콤모두스의 죽음을 알리고 황제가 되어달라고 요청했다. 페르티낙스는 해방노예 부부의 아들로 태어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와 국서 폼페이아누스의 신임 속에 그 능력을 발휘해 재위 2년만에 정신적인 충격으로 나라를 내팽겨친 콤모두스조차 존중한 용장이자 충신이었다.

하지만 콤모두스는 정통성이 대단하고, 프라이토리아니(근위대)와 로마군을 잘 대우해 여전히 그들의 지지가 절대적이었다. 더욱이 태업하듯이 국정을 포기한 암군이고, 검투사가 되어 기행을 펼쳤어도 그가 이렇게 된 것이 누나 루킬라의 암살 시도와 연이은 암살 미수, 주변의 간신들에 의한 농간 때문이라는 점에서, 이를 동정한 원로원 인사, 관료, 민중들도 상당수 있었다. 따라서 라이투스, 에클렉투스, 마르키아는 제안을 받은 페르티낙스와 머리를 맞대고, 로마 근교의 근위대 군영으로 가서, 콤모두스가 불규칙한 생활과 폭음으로 인해 뇌졸중 증세를 호소하며 급사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이들은 페르티낙스를 지지해달라고 외쳤다. 이때 페르티낙스는 근위병 한 사람당 12,000세스테르티우스를 주고, 추가 보너스 인상을 제안해, 반신반의한 병사들을 포섭했다. 이와 동시에 그는 근위대장 라이투스를 아이깁투스(이집트) 장관에 임명하겠다고 약속했다. 이리하여 페르티낙스는 근위대 전체의 지지를 얻어낸 뒤, 그들을 이끌고 원로원에 들어갔다.

이때 원로원은 콤모두스의 매형이자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의 사위들인 폼페이아누스마르쿠스 페두카이우스 플라우티우스 퀸틸루스에게 공동황제 자리를 제안했다. 동시에 이들의 아들들로, 루킬라의 아들 루키우스 아우렐리우스 콤모두스 폼페이아누스파딜라의 아들 플라우티우스 퀸틸루스에게 차기 황제 직을 요청했다. 그렇지만 페르티낙스가 근위대에게 충성 보너스를 준다고 약속하고, 제위를 사실상 차지한 상황에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두 사위와 이들의 두 아들이 제위를 맡는다고 선언하는 것은 내전을 뜻했다. 하여 페르티낙스와 권좌를 놓고 벌일 다툼을 피하고, 내전을 막아야 된다는 명분과 현실적인 판단 아래 안토니누스 황족들은 이를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 결과, 페르티낙스는 마치 힘든 임무를 어쩔 수 없다는 양 떠맡겠다고 선포 후, 평화로운 형태로 추대돼 원로원의 승인하에 황제로 선포되는 방법으로 황제가 됐다.[1] 이렇게 되자 각지의 총독들 역시 새 황제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이로써 로마 제정 이래 가장 안정적으로, 로마 제국의 최전성기를 구가했던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는 역사속으로 사라지게 되었다.

새로 제위에 오른 페르티낙스는 우선적으로 원로원과 함께 콤모두스를 기록말살형에 처하게 했다. 동시에 아들에게 특별한 지위를 내리지 않겠으며, 원로원을 존중함을 밝히고 안토니누스 가문 사람들을 숙청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이와 함께, 그는 콤모두스 아래에서 사치가 심해지면서 국고의 적자가 있다는 이유를 들어 여러가지 조치를 취했다. 이때 그는 황무지 개간시 세금을 감면해주겠다고 했는데, 실상은 본인의 측근들과 처가가 독차지한 모습이었다.

그렇지만 이보다 심각했고 여러 원로원 동료에게 페르티낙스가 실망감을 준 것은, 그가 콤모두스 시대의 간신들이었던 페렌니스, 클레안데르처럼 매관매직을 똑같이 벌이면서, 부정부패를 하고, 이를 콤모두스가 했다고 덮어 씌운 행동들이었다. 이때 그는 이를 콤모두스 시대의 관료들에게 덮어 씌우면서, 그들이 과거처럼 악습에 빠졌다고 하고, 이를 빌미로 자신을 옹립시킨 에클렉투스와 마르키아 숙청을 시작으로 콤모두스 시대에 몸을 담은 관료들을 징계하고 추방했다. 이렇게 되자 원로원과 관료층 사이에서는 페르티낙스 황제에 대한 불신이 싹트게 되었고, 근위대에서도 위기감이 고조되었다.

이런 가운데 페르티낙스는 원로원에게 약속한 것을 계속 뒤집어 엎었다. 그 결과, 페르티낙스 발표를 곧이 곧대로 믿은 서민들은 그를 정의의 사도이자 애국자로 칭송하고, 원로원과 관료들은 페르티낙스의 진의는 옳더라도 이중적이라며 조금씩 지지를 거두기 시작했다. 이에 페르티낙스는 원로원, 관료들에게 조금씩 신망이 떨어지는 상황을 타개하고, 서민들에게 받고 있는 인기를 굳건히 하고자, 이들 모두에게 불만을 사고 있는 근위대를 개혁 대상으로 콕 집은 다음, 인사 조치를 단행하고 그들의 폐습과 악행을 강조했다. 이는 페르티낙스의 의도 그대로 근위대의 악행에 불만이 컸던 로마 민중들, 원로원, 관료 모두의 절대적인 지지를 이끌어냈다.

그러나 페르티낙스는 이 조치에 앞서, 황제에 즉위한 뒤 근위대에게 약속했던 보너스의 절반만 주면서, 그들의 불만을 샀다. 이에 근위대 장병들이 약속 이행을 요구했다. 이렇게 되자, 페르티낙스는 항의하는 이들을 처벌하고, 혹독하고 강압적인 훈련을 근위대 장병들에게 시키면서, 내부 징계까지 때리는 강경한 방식으로 대응했다. 이와 함께 그는 반정공신이었던 라이투스를 이집트 총독에 앉히겠다는 약속 역시 이 일을 빌미삼아 없었던 일로 해버렸다. 동시에 페르티낙스는 모두의 주목을 끈 다음, 공개적으로 궁정 관리중 행정의 많은 부분을 맡아서 보던 해방노예들을 모두 횡령으로 고소하고, 이들을 공개석상에서 범죄자로 몰아붙이며 비난했다.

이에 불만이 쌓일대로 쌓인 근위대, 관료 모두 분개했다. 관료들은 페르티낙스의 명을 소극적으로 따르기 시작했다. 근위대는 193년 3월 초 현직 집정관이며, 선제 콤모두스의 친척으로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의 방계 황족이었던 퀸투스 소시우스 팔코(Quintus Sosius Falco)를 새 황제로 세우려고 했다. 하지만 지지 기반 없이 황제가 될 생각이 없었던 팔코는 페르티낙스에게 근위대의 음모를 고변하고는, 시골로 도망쳤다. 페르티낙스는 팔코에게 감사함을 표시하고 즉시 근위대 병사 몇몇을 색출하여 처형하고, 이를 명분으로 근위대에 대한 추가 징계를 예고했다.

이렇게 되자 근위대 전체는 격분했다. 하지만 페르티낙스는 과거 군단장, 총독 시절처럼 본인이 말로 직접 해결해보이겠다며, 주변의 충고에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이런 태도는 근위대가 라이투스의 지휘하에 황궁으로 진격해 봉기한 당일에도 변하지 않았다. 페르티낙스는 주변에서 로마 교외로 피신해 봉기를 진압해야 된다는 상식적인 충고에도 황궁에 남았다. 그러면서 그는 자신을 죽이려고 칼을 빼든 근위대 병사들 앞에서 호통을 쳤다. 이에 근위대 병사들은 페르티낙스를 폭행하고, 들고 있는 무기로 마구 찌르고 베어 난도질해 죽였다. 이로써 혼란스러운 다섯 황제의 해의 막이 오르게 되었다.

3. 전개

3.1. 페르티낙스 시해와 황제 경매

서기 193년 3월 28일, 페르티낙스 황제는 몸이 좋지 않아 공식 일정을 취소하고 황궁에서 쉬고 있었다. 이때 300명의 근위대 장병들이 팔라티노 황궁으로 쳐들어왔다. 이때 보초를 서던 호위병들도 가담했고, 자신들을 모욕한 황제에게 반감을 품고 있었던 황실 직속 해방노예들도 황제가 있는 곳으로 안내하며 어서 죽이라고 부추겼다. 주위 사람들은 페르티낙스에게 어서 몸을 피하라고 권유했지만, 페르티낙스는 거부 후 자신에게 불만을 품은 근위대와 대면해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나섰다.

역사가 디오 카시우스에 따르면, 페르티낙스는 방안에 들이닥친 병사들에게 자신이 지금까지 쌓아온 경력과 업적, 그리고 프라이토리아니가 황제를 시해하려 드는 것의 부당성 등을 설파했다. 그러나 병사 한 명이
"병사들이 보낸 칼이나 받아라"
라고 소리친 다음 칼로 내리쳤고, 다른 근위병도 가세했다. 결국 그는 여러 병사가 내지른 칼에 찔려 피살당했다.

이는 동시대 역사가로 황궁 서기관 출신 관료 헤로디아누스의 기록도 비슷한데, 페르티낙스는 본래부터 늘 모든 문제는 직접 본인이 나서야 해결된다고 믿는 신념이 강해 측근, 황궁 관료들이 경내 혹은 황궁 비밀 통로로 일단 피신할 것을 간곡히 청함에도 이렇게 발언하면서 거부했다고 한다.
"품위 없고, 굴욕적이며, 황제에게 어울리지 않고, 이전의 나 자신 삶의 방식과 업적에 걸맞지 않다!"

이 발언 후, 페르티낙스는 본인을 에워싼 병사들에게 용감하고 떳떳하게 나아간 다음, 성난 근위대 병사들에게 자신을 죽여도 두렵지 않다고 발언 후 이성을 되찾고 복귀하면 모두 없던 일로 해주겠다고 선언했다. 또 그는 당시 근위대 내에서 돌고 있는 소문인 "콤모두스가 페르티낙스 사주로 시해됐다"는 것이 사실이 아니며, 콤모두스 죽음은 자신과 전혀 관련이 없다고 떳떳하게 확인해줬다고 한다. 또 병사들에게 과거 장군으로 존경받았던 때처럼 자신은 부하들인 장병들이 이번 일로 불명예스럽게 반역자로 처벌되는 것을 막고 싶다고 당당하게 말했다. 그러자 대부분 병사들은 페르티낙스에게서 무기를 거두고 서서히 물러났는데, 여기에서 일부 병사들이 갑자기 뛰어 들어 페르티낙스를 공격해 죽였다고 한다. 이렇게 되자 대다수 근위대 병사들은 경악했는데, 라이투스와 황제 시해를 벌인 병사들은 이미 벌어진 일이라고 하면서 담담하게 거사가 성공함을 선언했다.

그 후 디오 카시우스와 헤로디아누스의 당대 기록 모두의 것은 똑같다. 근위대는 라이투스와 황제를 시해한 병사 무리 주도 아래에서 페르티낙스의 수급을 장대에 높이 매단 채 진지로 돌아갔다. 이후 근위대 병영 문을 걸어잠근 뒤, 전시 상황처럼 요새 방어하듯이 병영을 지켰다.

며칠 후, 라이투스는 초유의 행위를 저질렀다. 그는 새 황제를 뽑기 위한 경매를 공개적으로 벌였다.

이 경매에 입찰한 이는 페르티낙스 황제의 장인이었던 티투스 플라비우스 술피키아누스와 페르티낙스 황제의 오랜 선의의 라이벌이었던 저명한 원로원 의원 디디우스 율리아누스였다. 술피키아누스는 갓 사춘기를 넘긴 어린 딸을 본인의 아버지뻘 나이인 페르티낙스에게 보내 결혼시킨 뒤 더 큰 권력을 얻었던 위인이었다. 그는 외손자를 앞세워 페르티낙스의 즉위 이후 권세를 휘둘렀고, 경매를 통해 제위를 사겠다는 열망이 큰 그리스인 귀족으로 야심가였다. 이탈리아 북부 메디올라눔(밀라노) 출신이었던 디디우스 율리아누스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와 루키우스 베루스 형제 황제들 아래에서 장군 및 행정가로 엄청난 능력을 선보인 총신이자 충신으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붕어하기 직전 고문단 일원에 지명하고, 게르마니아 인페리오르 총독직을 맡긴 거물이었다. 그는 콤모두스에게 쓴소리를 아끼지 않았는데, 간신 페렌니스는 율리아누스의 말을 경청하고 존중한 콤모두스를 완전히 장악하고자 디디우스 율리아누스를 세 번이나 모함했다. 따라서 그는 게르마니아 인페리오르 총독직에서 해임된 뒤, 여러 번에 걸처 죽을 뻔했다. 그러나 그는 고문으로서 목숨을 걸고 콤모두스에게 직언을 아끼지 않았다. 따라서 당시, 원로원 의원으로 제위 입찰 이전까지는 동료들에게 큰 존경을 받고 있었다.

두 경쟁자 중 가장 먼저 입찰하고 이를 주도한 이는 술피키아누스였다. 그는 제위를 놓고 계속 돈을 올려 입찰했다. 그렇지만 라이투스와 근위대는 다른 경쟁자가 입찰할 때까지 이를 받지 않아, 결과가 빨리 나오지 않았다. 이때 디디우스 율리아누스는 술피키아누스보다 더 높은 보너스를 약속하면서, 만약 술피키아누스를 뽑는다면 그가 사위였던 페르티낙스에 대한 보복을 단행할 것이라고 말하며, 자신이 황제가 못 된다면 페르티낙스 시해에 대한 복수를 본인 손으로 하겠다고 경고했다. 라이투스와 근위대는 논의 끝에, 자신들에게 보복을 가하지 않을 디디우스 율리아누스를 새 황제로 세우기로 결의했다. 그렇게 황제가 되었지만 앞날이 걱정되었는지, 디오 카시우스에 따르면 디디우스는 첫날 밤 밤잠을 이루지 못하고 뜬 눈으로 지샜다고 한다. 그리고 그의 걱정은 적중했다. 페르티낙스가 살해되고 디디우스 율리아누스가 프라이토리아니의 경매에 응찰해 황제로 지명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로마 제국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3.2. 세 명의 제위 경쟁자들

193년 4월 중순, 동방의 시리아 속주 총독이었던 페스켄니우스 니게르가 병사들의 추대를 받아들여 황제를 자칭했다. 그는 황제로 추대된 뒤 자신을 유스투스(Justus: 정의로운 자)라고 칭하며 페르티낙스 황제를 참살하고 부당하게 제위에 오른 디디우스 율리아누스와 프라이토리아니를 심판하겠다고 선포했다. 니게르가 황제를 칭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로마 시민들은 니게르에게 제위를 넘기거나 아니면 공동황제로 선임하라는 시위를 벌였다. 이에 디디우스 율리아누스 황제는 백인대장을 동방으로 파견해 니게르를 암살하게 했으나 실패했다.

비슷한 시기, 상 판노니아 총독이자 도나우(다뉴브, 다누비우스) 강 방면군 사령관이었던 셉티미우스 세베루스가 병사들의 추대를 받고 봉기했다. 사실 그는 시리아의 니게르보다 한 발 앞선 4월 14일에 황제로 옹립되었지만, 니게르가 황제를 칭한 것이 확인된 뒤에야 비로소 자신이 황제가 되었음을 전국에 알렸다. 니게르는 수도 로마로 사절을 보내 자신이 황제로 즉위할 것을 알렸지만, 그의 사절들은 세베루스에 의해 저지되었다. 얼마 후, 브리타니아 속주 총독이었던 클로디우스 알비누스도 황제를 칭하고 브리타니아 섬에서 해협을 건너 갈리아로 진군해 라인(레누스) 강 방면 로마군을 포섭하려고 했다.

하지만 세베루스가 한발 앞서서 빈도보나() 인근의 카르눈툼에서 라인 강 방면 로마군까지 포섭하는 데 성공했다. 그는 형 셉티미우스 게타와 삼촌 셉티미우스 아페르의 도움으로 마리우스 막시무스 및 세네키오 알비누스 등과 손을 잡고, 600명의 선봉대를 마리우스 막시무스, 세네키오 알비누스 등과 함께 이끌며 이탈리아 반도에 들어간 뒤 로마 진군을 단행했다. 이때 셉티미우스 세베루스는 클로디우스 알비누스에게 사절을 보내 카이사르(부황제)로 선임하고, 적당한 때에 공동황제 직을 주겠다고 회유하면서, 법적 책임까지 적은 각서까지 보내 브리타니아 섬으로 돌아가라고 권유했다.

알비누스는 세베루스가 이런 거짓말을 밥먹듯이 하고, 지키지 않음을 몰랐다. 그는 세베루스를 믿었고 그 말에 따르기로 했다. 따라서 세베루스는 남은 군대 전체를 이탈리아로 진군시켜 로마를 포위했다.

디디우스 율리아누스 황제는 라이투스가 자신을 배신하고 세베루스 편에 들 것을 두려워했다. 그래서 이를 경계했는데, 예상한대로 라이투스는 세베루스와 접촉하려고 시도하며 배신을 계획했다. 이에 율리아누스는 라이투스를 반역죄로 처단한 뒤, 툴리우스 크리스피누스와 플라비우스 게니알리스를 새 근위대장으로 임명했다. 디디우스 율리아누스 황제는 신뢰할 수 없는 무력집단인 프라이토리아니를 확고하게 장악하려고 했다. 그러나 근위대가 통제에 제대로 응하지 않고 참호를 파라는 지시도 성의없이 하자, 근위대장 크리스피누스를 세베루스에게 보내 공동황제를 제안했다.

세베루스는 공동황제 따위 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는 크리스피누스를 그 자리에서 죽여버리고, 로마로 계속 진격했다. 이에 율리아누스는 자객을 보내 세베루스를 죽이려고 했으나, 세베루스의 휘하 부하들의 밀착 경호를 뚫지 못했다. 결국 193년 6월 1일, 대세를 파악한 원로원이 디디우스 율리아누스를 폐위한다는 결의안을 통과시켰고, 율리아누스는 긴급 체포된 후 사형장으로 끌려가 참수되었다. 디오 카시우스에 따르면, 율리아누스는 죽기 직전에 다음과 같이 울부짖었다고 한다.
"그런데 내가 무슨 나쁜 짓을 했단 말인가? 내가 누굴 죽였단 말인가?"

3.3. 세베루스 vs 니게르

디디우스 율리아누스 황제가 비참하게 죽은 후 로마에 무혈 입성한 셉티미우스 세베루스는 전임자인 페르티낙스 황제의 이름을 칭호의 일부로 취해 제위 계승권을 주장했다. 이후 오만방자해진 근위대를 소환해 기념식 관례대로 로마 밖으로 행군하게 한 후, 무장을 해제시키고 군단병들을 동원해 페르티낙스 암살에 관여한 근위대 장병들을 관용없이 모조리 처형했다. 살아남은 근위대 병사들은 목숨을 살려주는 대신 해산시킨 후, 로마 외곽 160km 반경 내에 접근하면 죽게 될 것이라고 강력하게 경고했다. 이로써 근위대 병사들의 자리는 세베루스에게 충실한 병사들로 채워지게 되었다. 이는 그동안 본국 이탈리아 출신들로 구성되어 왔던 근위대가 해산되고, 대신 ‘촌놈’ 취급을 받았던 판노니아, 일리리아, 트라키아 속주 출신의 군단병들로 근위대의 구성이 바뀐 첫 번째 사례가 되었다. 이후 세베루스는 외가 쪽 먼 친척인 디디우스 율리아누스 황제의 시신을 정중히 수습해 정식 장례를 진행하고, 이를 빌미로 원로원을 압박했다.

세베루스는 화폐 주조권을 곧바로 장악해 의도적으로 귀금속의 함량을 줄이고, 구리 등을 섞어 돈을 대량으로 찍었다. 그리고 이를 자신을 지지한 군대 모두에게 뿌렸다. 이어서 각종 기금의 창고들을 신속히 장악한 뒤, 콤모두스 황제의 실정과 그가 암살된 뒤 벌어진 혼란으로 로마의 곡물창고가 비었다면서 부자와 원로원 의원들에게 이를 강제 헌납하라고 협박했다. 이렇게 해서 세베루스는 곡물 창고를 채웠고, 모은 곡물 중 일부를 싸게 시중에 풀어 민중의 지지를 모았다. 이후 세베루스는 자신을 지지해 달라고 원로원 의원들에게 호소하면서, 각종 자리를 내세워 그들을 회유해 자기 편으로 삼으려고 노력했다. 그렇게 조치를 취한 후, 세베루스는 동방으로 출진해 니게르와 격돌했다. 그는 외가 친척이자 절친한 친구이며 근위대장을 맡은 가이우스 풀비우스 플라우티아누스에게 니게르의 아이들을 인질로 붙잡아 두라고 명령했다. 하지만 니게르는 아이들이 인질로 잡힌 상황에 아랑곳하지 않고 비잔티움을 점령한 아시아 총독 아이밀리아누스를 비롯한 동방 일대의 총독들을 자기편으로 만들었다. 이후 로마의 곡창 역할을 하고 있었던 이집트를 점령해 세베루스를 압박하려고 했다.

세베루스는 아주 중요한 밀 공급의 방어를 위해 이집트 일대의 군사력을 강화했으며, 자신이 직접 움직일 수 있는 로마 제국 최강의 16개 군단으로 니게르를 압박했다. 니게르는 이에 대응해 시리아의 북부 측면을 막아주는 타우루스 산맥의 고개들과 시리아의 주도인 대도시 안티오키아를 요새화했다. 또한 서쪽으로 군대를 보내 보스포루스 해협의 좁은 교차로를 통제하는 비잔티움에 기지를 세우고 트라키아로 이동했다. 세베루스의 군대는 즉시 동방으로 진군해 트라키아에서 니게르군을 물리치고 뒤이어 요충지인 비잔티움을 포위 공격했다.(비잔티움 공방전) 그러나 비잔티움이 좀처럼 공략되지 않자 일부 병력만 남겨 계속 포위하게 한 뒤 소아시아로 진격했다.

193년 말, 세베루스는 마르마라 해안의 키지쿠스(Cyzicus) 인근(키지쿠스 전투)과 니케아에서 니게르군을 연이어 격파했다.(니케아 전투) 이후 타우루스 산맥의 고개를 돌파하여 시리아로 진군했고, 194년 3월 또는 4월 이수스 인근에서 최후의 결전을 벌였다.(이수스 전투) 니게르의 군사들은 북부 군단들과는 상대가 되지 않아 참패했다. 니게르는 말을 타고 남쪽으로 달아났지만 안티오키아 근처에서 붙잡혀 참수되었으며 그의 가족들은 연좌제가 적용되어 모두 처형되었다. 니게르의 지지자들은 무자비한 보복을 가하는 세베루스를 피해 아르사케스 왕조 파르티아 제국으로 망명했다. 당시 파르티아의 샤한샤였던 볼로가세스 4세는 세베루스의 경쟁자인 니게르를 지원하면서, 메소포타미아에 위치한 로마의 속국이었던 오스로에네 왕국에 간섭해 왕과 로마 제국 사이를 이간질시켰다. 세베루스는 195년 여름 동안 니게르와 도망간 그의 군사들을 지원한 파르티아를 응징하기 위해 원정대를 이끌고 메소포타미아 북부로 진군했지만, 무력 시위만 벌이고 귀환했다.(세베루스의 제1차 파르티아 원정)

196년, 세베루스는 아직도 자신에게 복종하지 않는 비잔티움을 맹공격해 함락시키고, 그 지역 주민들을 학살한 후 도시를 철저히 약탈하고 파괴했으며, 간신히 살아남은 주민들에게 과중한 속주세와 벌금을 부과했다.(비잔티움 학살) 그 후 로마로 귀환한 그는 자신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의 양자로 입적되었다고 선포해 정통성을 강화하고, 본인과 그 일가를
"신과 신들의 가문"
이라고 선포했다. 그러면서 로마군에게 여전히 지지를 받고 있었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아들 콤모두스의 기록말살형을 일방적으로 취소했다. 이로써 그는 콤모두스의 죽음이 암살이라는 진실을 알고, 불만에 찬 서방 로마군 전체의 지지를 이끌어냈다. 이 조치와 함께, 세베루스는 훗날 '카라칼라'로 더 많이 알려져 있는 장남 셉티미우스 바시아누스(Septimius Bassianus)의 이름을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안토니누스'로 바꾸고, 그 역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의 정치적 아들이며 콤모두스의 정치적 형제라고 선언한 다음, 카이사르 칭호를 카라칼라에게 하사했다. 이 소식을 접한 클로디우스 알비누스는 그제야 세베루스가 자신을 배제하기로 마음먹었다는 걸 깨닫고, 이에 맞서기 위해 갈리아로 진군했다.

3.4. 세베루스 vs 알비누스

196년 40,000명의 군대를 동원하여 갈리아로 진군한 클로디우스 알비누스는 갈리아 총독 비리우스 루푸스를 격파하고 갈리아의 대부분을 장악한 뒤, 히스파니아에 주둔하고 있었던 제7 게미나 군단과 합세했다. 뒤이어 루그두눔(오늘날 프랑스 리옹)에 기지를 두고 추가 병력을 모았으며, 라인 강 방면 로마군에 전령을 보내 자신과 합류하라고 권했다. 그러나 라인 강 일대의 로마군은 세베루스와 함께 로마 진군을 단행했고, 세베루스를 적극적으로 지지한 마리우스 막시무스가 갈리아 벨기카 속주의 총독으로 버티고 있었다. 그는 이 일대의 로마군에게 세베루스 황제의 이름으로 추가 보너스를 약속하고, 클로디우스 알비누스를 지지하지 않아야 됨을 설파했다. 이렇게 되자, 전통적으로 선의의 라이벌 관계인 라인 강 방어선 쪽의 로마군과 도나우 강 방어선의 로마군 사이의 교전이라는 변수가 사라지게 되었다. 따라서 클로디우스 알비누스의 계획에 차질이 생기게 되었다.

이렇게 마리우스 막시무스가 세베루스와 알비누스 사이의 대결의 핵심이 될 부분을 깨끗이 정리하자, 세베루스는 재빨리 지지를 모으고 군대를 집결시켰다. 그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사람답게, 물가가 콤모두스 시대과 비교해 살인적으로 치솟고 있음을 고려하지 않고, 귀금속의 함유량을 추가로 낮춘 주화를 찍어낸 다음, 이를 자신을 지지한 로마군 전체에게 뿌렸다. 그 결과, 로마군은 세베루스를 지지했고, 이에 모든 준비를 끝낸 세베루스는 군대에게 충성의 대답으로 알비누스를 '국가의 적'으로 선전포고하라고 요구했다. 이와 함께 원로원을 강압적으로 압박해 알비누스를 '로마의 적'으로 선포하게 했다. 그리고 나서 세베루스는 197년 1월 갈리아로 쳐들어갔다.

197년 2월 19일, 양자는 루그두눔의 외곽에서 맞붙었다. 디오 카시우스에 따르면, 이 전투에 투입된 병력의 총규모는 150,000명에 달했다고 한다. 전투가 시작된 이래 결과를 예측하기 힘들 정도로 피튀기는 격전이 종일 벌어졌다. 그러던 중 세베루스가 낙마하는 일이 벌어졌다. 그는 급히 황제의 의복을 찢어서 정체를 숨겼고, 때맞춰 기병대가 도착하면서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다. 이후, 전투의 흐름은 세베루스 진영에서 활약한 마리우스 막시무스의 지휘하에 세베루스군으로 넘어갔고, 전투력에서 밀린 알비누스군은 뿔뿔이 흩어졌다. 참패한 알비누스는 루그두눔으로 달아났으나 더 이상 도망칠 수 없게 되자 자살했다.(루그두눔 전투)

세베루스는 루그두눔을 비잔티움처럼 철저히 약탈하고 파괴했다.(루그두눔 학살) 그는 알비누스의 시신을 평원으로 끌어낸 뒤 그 위로 말을 달려 시체를 훼손했으며, 알비누스의 시신을 수습해 목을 자르고 그 머리를 로마로 보냈다. 이때 그는 원로원을 조롱하고, 협박하는 서한을 보내면서 원로원 내 배신자들에게 명확하게 경고했다. 또한 알비누스의 유가족을 사면하겠다고 발표했다가 도로 마음을 바꿔 그들을 다 죽인 후, 알비누스의 몸통과 함께 론 강에 던졌다.

4. 이후

최후의 제위 경쟁자인 클로디우스 알비누스를 처단하고 수도 로마로 귀환한 셉티미우스 세베루스는 니게르 및 알비누스와 서신을 주고받으며 내통한 원로원 의원 29명을 사형에 처했다. 페르티낙스 황제의 장인으로 제위를 돈으로 살 뻔 했던 티투스 플라비우스 술피키아누스 역시 반역자 알비누스의 지지자로 지목되어 처형되었다. 뒤이어 세베루스는 추가로 살생부를 만들어, 자신에게 위협이 될 만한 인사들을 죽이거나 자살을 강요해 죽였다. 여기에는 세베루스의 로마 진군이 국법상 불법 요소가 있다는 것을 지적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의 사위이자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외증손자이며, 루키우스 베루스 황제의 친조카였던 마르쿠스 페두카이우스 플라우티우스 퀸틸루스도 있었다.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의 몇 안 남은 황족들을 죽이거나, 협박해 이들이 목소리를 못 내게 한 조치는 이중적이고 비열한 모습이 많았다. 그래서 세베루스는
"푸닉 술라"[2]
라는 그다지 좋지 않은 별명을 얻게 되었다.

하지만 세베루스는 이런 비난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에게 호의적인 인사들 및 처가인 시리아 에메사 왕가의 사람들과 그 측근들을 새로운 원로원 의원으로 임명해 빈 자리를 채웠다. 새로 편입된 의원들은 세베루스에게 호의적이었던 푸닉(북아프리카) 출신이거나 동방 속주 출신들이 많았다. 그렇지만 여기에는 아우구스투스 시대 이후 누명을 쓰고 몰락해 가난한 평민들과 다를 바 없었던 옛 공화정 시대의 파트리키노빌레스의 후예들도 포함되었다. 그 이유는 이탈리아와 로마의 옛 몰락귀족들을 명분 쌓기용으로 의원직에 복귀시켜 불만을 줄이고, 지역 차별을 하지 않는다는 선전 도구로 활용하기 위함이었다. 그 결과, 원로원은 황제의 거수기 노릇을 하는 처지로 추락했다. 따라서 본국 이탈리아와 서방 속주 중 상대적으로 우위를 가지고 있었던 갈리아 및 히스파니아 등 기존 세력의 부와 권력은 푸닉과 동방 출신들의 몫이 되었다.

이렇듯 정적들을 철저하게 숙청한 뒤, 세베루스는 원로원 계급을 권력에서 배제하겠다는 명분하에, 자신과 두 아들, 그리고 시리아 출신의 황후인 율리아 돔나를 신과 신들의 가족으로 강조했다. 그러면서 과거 플라비우스 왕조의 시절을 참고해, 정적들을 감시하고 이를 위한 관료층을 모았다. 이때 중용된 이들은 기사계급 출신의 법학자들이었는데, 이는 세베루스 왕조가 법학자들의 시대로 불리며 관료제가 고도화되는 원천이 되었다. 또한 세베루스는 광대한 제국의 유일무이한 단독황제로 집권하는 데 큰 힘이 되어준 군대의 복지를 대폭 개선하여 군단병들의 급여를 375데나리우스에서 500데나리우스로 인상했으며, 일반병들이 변경의 일반 군단에서 본국 이탈리아의 근위대와 최고직 중 하나인 근위대장직까지 승격하는 코스를 누구나 갈 수 있도록 인사 시스템을 바꾸었다. 이렇듯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황제가 권력 기반을 든든히 다지면서, 세베루스 왕조는 향후 40여년 동안 로마 제국을 다스리게 되었다.


[1] 이때의 일에 대해 헤로디아누스는 페르티낙스가 근위대를 라이투스, 에클렉투스와 함께 찾아가 충성 보너스를 주겠다고 했음에도, 원로원 앞에서는 본인 역량도 부족하고 책임이 막중하다는 겸손을 떨었다고 한다. 그래서 이를 지켜본 명망 높은 중진들이 더 이상 겸양 떨지 말고 솔직하게 제위에 올라 혼란부터 수습하라고 그를 황제 자리로 오르게 하고, 황제로 승인했다고 한다.[2] 북아프리카 해안의 술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