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 마르쿠스 페두카이우스 플라우티우스 퀸틸루스 (Marcus Peducaeus Plautius Quintillus) |
출생 | 미상[1] |
사망 | 205년 |
직위 | 원로원 의원, 전직 집정관, 황제 고문, 로마 사제단 |
가족 | 부친 플라우티우스 퀸틸루스 모친 케이오니아 파비아 배우자 파딜라 외삼촌 루키우스 베루스 장인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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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제국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의 황족, 집정관이자 행정가. 루키우스 베루스의 조카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가 약혼했던 루키우스 베루스의 친누나 케이오니아 파비아가 플라우티우스 퀸틸루스와 결혼해 낳은 아이 중 장남이다. 따라서 법적으로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외손자가 되며, 혈연상으로는 하드리아누스의 후계자였던 아일리우스 카이사르의 외손자, 루키우스 베루스의 조카가 된다.어머니와 약혼했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차녀 파딜라와 결혼해, 마르쿠스 황제와 소 파우스티나의 둘째 사위가 됐으며 일찌감치 콤모두스를 보필할 황제 고문 중 한명에 임명됐다. 192년 1월 1일, 처남 콤모두스가 암살되고 다음날 원로원에게 황제 자리를 제안받았으나 이를 정중히 거절한 뒤 다섯 황제의 해 동안의 혼란기 동안 국가 존립과 치안 유지에 힘을 썼다. 따라서 로마민중과 원로원 동료들에게 더 큰 존경을 받았다.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에게 누명을 뒤집어 쓰고 205년 스스로 자살하는 방법의 처형 형태로 죽임을 당했다.
2. 생애
플라우티우스 퀸틸루스는 제위에 오르기 전 요절한 하드리아누스의 첫 번째 양자 루키우스 아일리우스 카이사르의 외손자다. 그는 아일리우스 카이사르의 세 자녀 중 첫째인 케이오니아 파비아의 아들로, 친부는 159년 집정관을 지낸 플라우티우스 퀸틸루스다. 따라서 할아버지는 125년 집정관 루키우스 티티우스 에피디우스 아퀼리누스(Lucius Titius Epidius Aquilinus ), 할머니는 공화정 시대부터 감찰관, 원로원 의원, 총독 등을 배출하면서 평민귀족으로 이름을 날린 페두카에우스 가문 출신인 아비디아 플라우티아가 되며, 친동생은 162년 집정관 루키우스 티티우스 플라우티우스 아퀼리누스(Lucius Titius Plautius Aquilinus)가 된다.출생년도는 미상이나, 외삼촌과 결혼한 루킬라와 동갑이거나 살짝 나이가 많은 동년배로 추정된다. 아주 어린 나이에 할머니의 친조카인 141년 집정관 마르쿠스 페두카에우스 스틀로가 프리스키누스의 양자로 입적됐다. 이는 할머니 친정인 페두카에우스 가문에서 가문의 대를 맡길 아들이 없었던 까닭으로 보인다. 따라서 플라우티우스 퀸틸루스는 아주 어린 나이부터, 본인의 소속 가문과 출신 가문, 외가 모두 '로마 제국과 로마, 이탈리아 전역에서 부, 권력을 가진 가장 훌륭한 원로원 귀족 후손'이라고 주장할 수 있게 됐다고 한다.
혈통상 본가, 입양가, 외가 모두 오래된 이탈리아 귀족 가문이며, 외삼촌이 루키우스 베루스인 까닭에 일찍부터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의 황족으로 대우를 받았다. 이는 안토니누스 피우스 황제가 자신의 딸 소 파우스티나와 본인의 처조카이며 후계자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를 결혼시키기 위해, 즉 케이오니아 파비아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약혼을 파기한 대가로 추정된다.
플라우티우스 퀸틸루스 친부의 비문이나 동생의 비문 등에 따르면, 플라우티우스 퀸틸루스 형제는 아주 어릴 적부터 안토니누스 피우스 황제에게 로마 남성 황족이 받는 각종 영예, 명예, 특권을 하사받았다는 것이 확인되며, 플라우티우스 퀸틸루스가 루키우스 베루스의 조카라는 것도 여러 비문에 실려 있다. 이런 배경 때문에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소 파우스티나 부부의 차녀 안니아 아우렐리아 파딜라와 일찌감치 약혼 후 결혼했다. 결혼 후, 황제 부부의 뜻과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의 적극적인 추천을 받아 177년 콤모두스와 함께 집정관에 취임했다.
루키우스 베루스의 친조카이고, 아내는 파딜라, 입양가와 본가 모두 원로원 안에서 명문가로 인정받은 노빌레스 가문인데다 성품과 인성이 모두 올바르고 훌륭해 장인, 장모에게 총애를 받았다. 따라서 꽤 젊은 나이임에도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부부에게 일찌감치 어린 콤모두스를 보필할 사람으로 선정됐다. 장모 소 파우스티나, 장인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모두에게 유순한 콤모두스를 잘 지켜달라고 유지를 남겼는데, 그는 손윗 동서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폼페이아누스, 바로 아랫동서 마르쿠스 페트로니우스 수라 마메르티누스, 클라우디우스 세베루스와 함께 제국 안에서 어느 정도 자리잡은 이들이라서 고명대신 비슷한 지위까지 받게 됐다. 그래서 플라우티우스 퀸틸루스는 일찍부터, 황제 측근과 제국 요직 인사들만 담당한 로마 사제단에 선발되는 영광도 누렸다.
소 파우스티나가 죽고,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의 건강이 악화된 마르쿠스 재위 후반에 다시 한번 공동황제 콤모두스의 파트너 집정관에 취임했다. 180년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죽고, 콤모두스가 그의 뒤를 이었을 때, 선황의 유지에 따라 플라우티우스는 황제 고문 중 한 사람이 됐다. 이때부터 그는 원로원 안팎에서 콤모두스를 열심히 도왔는데, 아내 파딜라와 함께 쓴 소리도 아끼지 않아 콤모두스에게는 부모와 같은 보호자였다고 한다. 하지만 2년 뒤, 콜로세움에서 루킬라가 콤모두스를 암살하려다가 실패한 변란이 벌어졌다. 이때 콤모두스의 바로 위 누이 코르니피키아의 남편으로 콤모두스 단독황제 등극 직후 함께 집정관에 취임한 마르쿠스 페트로니우스 수라 마메르티누스[2]까지 음모에 가담해, 상황은 급박하게 흘러갔다. 허나 플라우티우스 퀸틸루스, 파딜라 부부는 이 음모에 일절 관여하지 않았고, 충격을 받아 끙끙 앓는 콤모두스가 제 정신을 차릴 수 있게 노력해 루킬라 사건 이후 콤모두스에게 더 큰 신임을 받았다.
콤모두스의 정신 불안 증세가 심화되자, 아내 파딜라의 뜻에 따라 팔라티노 황궁 별관으로 거처를 옮겨 정상생활조차 힘들어 한 콤모두스가 제 정신을 되찾도록 노력했다. 하지만 또 다른 암살 미수 사건으로 콤모두스의 증세는 악화됐고, 폭정은 심각한 수준이 됐다. 콤모두스가 191년 12월 31일 저녁 암살되고, 다음 날인 192년 1월 1일 원로원과 근위대에게서 황제 자리에 오를 것을 제안받았다. 이때 손윗동서 폼페이아누스 역시 후임황제 자리를 제안받았는데, 두 사람 모두 본인과 자녀 모두 황제 자리에 뜻이 없다고 밝히면서 혼란해질 나라를 안정시키는 것에 최선을 다하겠다고 밝혔다.
판노니아 사령관 셉티미우스 세베루스가 황제를 자처하고 로마로 진격했을 때, 디디우스 율리아누스는 그에게 평화교섭을 요청하며 도움을 청했다. 이때 그는 다섯 황제의 해 동안, 나라에서 벌어진 온갖 막장 행각을 보면서 큰 충격을 받은 터라, 이 제안을 단호히 거절했다. 허나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의 로마 진군 역시 명백한 불법 행위이며, 이 과정에서 무수한 목숨이 희생돼 이 문제에 대해 회의감을 드러내며 반대 의사를 드러냈다. 이후 그는 완전히 신물이 난 나머지, 본인 소유의 시골 별장으로 은퇴해 가족들과 은거했다.
205년, 근위대장 가이우스 풀비우스 플라우티아누스와 카라칼라 사이의 갈등이 증폭되고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와 카라칼라 사이의 미묘한 감정대립이 심화되는 상황에서 플라우티우스 퀸틸루스를 노린 제보자들의 공격을 받아 느닷없이 반역죄로 기소됐다. 이때 죄명은 과거 내전 당시, 그가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의 로마 진군을 반대했다는 혐의였는데 셉티미우스 세베루스는 도리어 쌍수를 들고 플라우티우스 퀸틸루스에게 자결을 명령했다.
세베루스의 지시로 근위대 장교들이 방문해 자결을 명령하자, 담담하게 장례식때 입을 수 있는 수의를 요청했다고 한다. 이에 근위대 장교들이 의아해하며, "어떤 이유 때문이십니까?"라고 묻자, 스스로 목숨을 끊을 준비를 마친 그는 "나는 세르비아누스께서 하드리아누스를 위해 하셨던 것과 똑같이 기도를 드리네."라고 유언을 마치고 받아든 단검으로 자결했다. 이 유언의 의미는 디오 카시우스, 후대 로마사 학자들에 따르면, 셉티미우스 세베루스가 언젠가 자신을 죽이고 싶어할 것을 알았다는 의미였다고 한다. 그가 자결 당시, 아내 파딜라가 생존해 있었는지는 확실치 않다. 다만, 이 사람의 자녀들은 세베루스에게 보복을 당하지 않았다.
안니아 아우렐리아 파딜라와의 사이에 아들 플라우티우스 퀸틸루스, 딸 플라우티아 세빌리아를 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