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티쿠스 브라두아 라틴어: Atticus Bradua | |
출생 당시 이름 |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쿠스 아피우스 아틸리우스 브라두아 레길루스 아티쿠스 Tiberius Claudius Marcus Appius Atilius Bradua Regillus Atticus |
개명 후 정식이름 | 마르쿠스 아틸리우스 메틸리우스 브라두아 카우키디우스 테르툴루스 클라우디우스 아티쿠스 비불리우스 폴리오 가우이디우스 라티아리스 아트리우스 바수스 Marcus Atilius Metilius Bradua Caucidius Tertullus Claudius Atticus Vibullius Pollio Gauidius Latiaris Atrius Bassus |
생몰년도 | 서기 145년경 ~ 서기 209년 |
계급 | 로마 귀족, |
국가 | 로마 제국 |
출생 | 145년경, 미상 |
사망 | 209년, 미상 |
직위 | 원로원 의원, 총독, 자선사업가 |
가족 | 헤로데스 아티쿠스(아버지) 안니아 레길리아(어머니)[2] 아피우스 안니우스 아틸리우스 브라두아(외삼촌, 후원자)[3] 엘피니케(큰누이) 아테나이스(작은누이)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헤로데스 레길루스(남동생) 이름 미상의 아이(동생)[4] 루키우스 비불리우스 클라우디우스 헤로데스(친척, 입양형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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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제국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의 원로원 의원, 총독, 자선사업가. 개명 전후 이름이 매우 길어 통상적으로 아티쿠스 브라두아라고 한다. 그리스인 정체성이 강한 아버지, 출신 가문과 달리, 아버지의 결정과 계속된 학대 때문에, 어머니와 둘째 누이 사망 후 이탈리아로 건너간 뒤에 개명했고, 그때부터 아버지와 절연 후 본인 스스로를 이탈리아인으로 여겨 평생을 살았다.[5]185년 집정관을 지낸 인물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루키우스 베루스 형제의 스승 헤로데스 아티쿠스가 대 파우스티나의 사촌동생이며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소 파우스티나의 오촌고모 안니아 레길리아와 결혼해 낳은 아들이다.
2. 생애
2.1. 출신 가문과 가계
145년경, 고대 그리스 아테네의 유서 깊은 아테네 귀족 가문 출신으로 키몬의 직계손인 원로원 의원, 소피스트 헤로데스 아티쿠스와 당시 로마 제국 안에서 최고의 파트리키로 불린 안니우스 베루스 가문 출신의 귀부인 안니아 레길리아 사이에서 태어났다.아티쿠스 브라두아의 친가는 그리스 혈통으로 아테네 귀족의 직계후손이며, 오늘날 아나톨리아 중부의 프리기아 귀족 직위까지 가진 로마 제국 당시 최고의 그리스 귀족, 로마 귀족 가문 출신이다. 친조부모는 원로원 의원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아티쿠스 헤로데스, 로마 최고 재벌 출신의 상속녀 비불리아 알키아 아그리피나였다. 이들은 외삼촌과 조카로 근친혼이었고, 이들의 아들이 아티쿠스 브라두아의 아버지 헤로데스 아티쿠스였다. 가문과 혈통을 중요하게 여긴 그리스 귀족, 로마 귀족 사회에서 그는 당대 최고의 부유하고 권세 있는 조상들을 직계로 두고 있었다. 아버지의 외증조부모는 루키우스 비불리우스 루푸스, 클라우디아 알키아이며, 아버지의 외할아버지는 이들 부부의 아들 히파르쿠스였다. 이들은 모두 엄청난 재력을 자랑했고, 플라비우스 왕조 시절부터 황제들의 비호 아래 권력을 누렸다.
외가는 히스파니아 일대에 대규모 올리브 농장과 기름 정제시절을 갖추고, 벽돌 공장 등을 소유한, 이탈리아 혈통의 히스파니아 이주 노빌레스 명문가 안니우스 베루스 가문이었다. 이 가문은 공화정 말부터 원로원 의원을 세습 형태로 배출했고,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와 플라비우스 왕조 아래에서 두 번에 걸쳐 파트리키로 지위를 공인받았다. 아티쿠스 브라두아의 외할아버지는 안토니누스 피우스 황제의 황후 대 파우스티나의 사촌동생이자,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당숙이었고, 브라두아의 외삼촌은 160년 정규 집정관을 지낸 아피우스 안니우스 아틸리우스 브라두아였다.
2.2. 아버지의 학대와 어머니의 죽음
이런 가문, 배경을 둔 아티쿠스 브라두아는 이탈리아 혹은 그리스에서 태어나, 로마에서 살다가, 아주 어릴 때 다시 그리스로 건너가 자랐다.명문귀족의 아들이자 키몬 직계 일가의 후계자라는 후광과 달리, 걸음마를 뗄 때부터 아버지 헤로데스 아티쿠스의 학대를 받았다. 이때 아버지 헤로데스 아티쿠스는 아들이 날 때부터 정신 장애가 있다고 주장했고, 자신의 학대는 교육의 일환이라고 했다. 그렇지만 그는 또래들보다 글을 늦게 배운 것을 제외하면 지극히 정상적인 아이였다. 하지만 헤로데스 아티쿠스는 이런 아들이 정신지체가 있다며, 읽는 법을 배울 수 없는 얼간이라고 규정해, 아이였던 그를 폭행했다. 그러면서 그는 제자들 앞에서 자신의 면이 살지 않는다며, 24명의 노예 소년을 구입해, 이 노예소년들에게 알파벳 글자로 시작한 이름을 주고, 본인 편지로 이들 노예를 언급하며, 그에게 이를 바탕으로 글을 떼게 했다. 하지만 계속된 학대에 브라두아는 불안해 했다. 이에 헤로데스 아티쿠스는 아버지의 명령으로 아들 브라두아를 악명 놓은 스파르타 공공 탁아소로 보내, 이곳에서 혹독한 훈육을 체험 하도록 지시했다. 하지만 이런 학대는 당시 아티쿠스 제자들과 그들 부모 사이에서 "스승이 아들만 편애하면서, '스승과 제자' 관계를 맺고, 유학보냈다."고 이야기가 잘못 나오면서, 다행히 중단된다. 헤로데스 아티쿠스에게 엄청난 돈을 내고 수업을 받은 제자들은 가문과 부모를 앞세워, 이 문제를 놓고 아우성치고 항의했다. 그래서 그는 이후 가족 품으로 돌아왔는데, 헤로데스 아티쿠스는 자신이 학습부진에 시달린 바보 아들 때문에 이런 치욕을 당했다며, 더 큰 학대를 하고, 아티쿠스 브라두아를 혐오했다. 이때 헤로데스 아티쿠스는 이후 자신의 이런 경험을 그리스, 이탈리아, 아나톨리아 일대에서 공개하면서, 자신의 아들이 정신지체 장애를 앓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런 가운데, 아티쿠스 브라두아의 부모는 그리스 전역을 여행하면서 그리스 올림피아에 그들 가문과 명예를 적은 기념비가 박힌 호화 님파움(기념비적인 분수대)를 지어 기부했다. 그러면서 그의 어머니 안니아 레길리아는 극진히 아낀 아들 아티쿠스 브라두아의 흉상을 본인 가족, 황제와 황후 흉상과 함께 나란히 세웠다.
아티쿠스 브라두아가 대략 15세였을 당시, 그의 어머니 안니아 레길리아가 다섯째 아이 임신 중 남편와 남편의 해방노예 비서가 함께 벌인 가정폭력, 폭행으로 맞아 죽었다. 헤로데스 아티쿠스의 일방적인 주장에 따르면 자신에게 말대꾸를 했다는 이유였는데, 진짜 이유는 자신의 기분이 좋지 않다는 이유였다. 브라두아의 어머니는 만삭 중 남편에게 맞고, 남편의 지시를 받은 해방노예 비서와 시종들에게 몽둥이로 두들겨 맞았다. 이 사건으로 안니아 레길리아는 조산으로 다섯째 아이를 낳고, 혼수상태가 됐다가 죽었다. 하지만 조산으로 태어난 브라두아의 동생은 출산 직후 죽었다. 이 사건은 방계 황족이 살해된 일이라서 곧 큰 문제가 됐다. 설상가상, 이때의 일 속에서 헤로데스 아티쿠스는 이 모든 일이 두 아들 때문이라며 아티쿠스 브라두아와 그의 남동생인 5살 아이 헤로데스 레길루스를 학대했다. 그래서 안니아 레길리아가 죽고 얼마 뒤, 어린 레길루스마저 학대, 폭언 등 속에서 요절했다. 이후, 헤로데스 아티쿠스는 1급 살인 혐의로 재판에 넘겨 진다. 그렇지만 브라두아의 아버지는 가문과 본인의 인맥과 재력 등을 총동원해, 마치 안니아 레길리아가 조산 증세로 죽었다는 식으로 둘러대고, 치안판사와 배심원을 매수해, 본인과 비서 모두 무죄로 방면됐다. 이후, 헤로데스 아티쿠스는 자신이 죽인 아내를 기념하고 사랑한다며 극장, 비문 등을 지어 무료로 개방하면서, 아내가 생전에 아낀 아티쿠스 브라두아가 이 사건의 원인이라는 식으로 학대했다.
결국 보다 못한 브라두아의 누나 시댁 식구들과 이탈리아에 있던 외가에선 헤로데스 아티쿠스에게 그 학대를 그만하라고 했다. 특히, 이 당시 정규 집정관을 지낸 외삼촌 아피우스 안니우스 아틸리우스 브라두아는 이 문제를 대놓고 거론하면서, 아티쿠스 브라두아 학대를 그만하라고 경고했다. 이에 헤로데스 아티쿠스는 관계가 좋아야 할 죽은 아내의 남자형제 아피우스 안니우스 아틸리우스 브라두아가 본인과 적이 된 이유가 얼간이 아들 때문이라며, 더 크게 화를 냈다. 그러다가 160년 브라두아를 아낀 누이들 중 유일하게 살아 있던 아테나이스가 아들 출산 후 산후 후유증으로 요절했다. 이에 평소 딸을 정략혼 대상으로 철저히 이용해온 헤로데스 아티쿠스는 이 모든 일이 브라두아 때문이라며, 동생의 아들인 조카 루키우스 비불리우스 클라우디우스 헤로데스를 입양해 그를 가문의 후계자이자 본인의 유일한 아들로 선포하고, 친아들 아티쿠스 브라두아를 가문에서 사실상 추방해버린다. 동시에 그는 이를 정당화하고자, 자신이 죽은 아내를 잊지 못했고 재혼을 할 생각이 없으며, 요절한 두 아들이 생각난다는 식으로, 마치 어쩔 수 없었다는 식으로 떠들었다.
따라서 아테네 지식인, 주민들은 이때부터 헤로데스 아티쿠스를 비인간적인 것을 넘어 인간말종이라고 생각하고, 아버지의 중상모략 속에서 학대당한 아티쿠스 브라두아를 동정한 여론이 아테네 시민 사이에 당연시됐다.
2.3. 이탈리아 이주와 개명, 정치 활동
아버지와의 관계가 최악이 되고, 어머니 죽음 속에서 사실상 가문의 버려진 후계자된 이후, 아티쿠스 브라두아는 어머니가 생전에 남긴 유산 대부분을 상속받고, 외가 식구들이 있는 이탈리아로 건너갔다.아티쿠스 브라두아가 물려받아 소유하게 된 재산에는 어머니가 아버지에게 시집을 오면서, 외가에서 선물로 준 아피아 가도 인근의 호화 대저택이 있었다. 그는 이곳에서 평생을 살았고, 원로원 의원이 되어 정치활동을 시작했다. 그는 교양 넘치고 능력이 뛰어나지만, 비인간적이고 폭력적인 아버지와 달리, 곧 부친보다 더 유능하고, 인격적으로 온화하다는 평을 주변에게 들었다. 그리고 이때 그는 후일 리비아에서 발굴된 비문에서 드러나듯이, 기존의 이름을 개명했다.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쿠스 아피우스 아틸리우스 브라두아 레길루스 아티쿠스라는 이름을 버리고, 마르쿠스 아틸리우스 메틸리우스 브라두아 카우키디우스 테르툴루스 클라우디우스 아티쿠스 비불리우스 폴리오 가우이디우스 라티아리스 아트리우스 바수스로 바꿨다.
안토니누스 피우스 황제는 통치 연간 중 어느 시점에 아티쿠스 브라두아를 파트리키 계급으로 승격시켜주고, 그를 아버지와 별개의 인물로 규정했다. 이는 헤로데스 아티쿠스의 거짓말 등에 속았다가 뒤늦게 알게 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도움 등이 결정적이었다. 그리고 이런 혜택 속에서 그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 시절 동안 원로원 의원으로 좋은 평판을 얻었고, 콤모두스 시절인 185년, 주변 동료들에게 정규 집정관에 추천받아 집정관으로 재임했다. 이후 187/188년에는 아테네의 집정관에 지명됐다.
브라두아는 아테네 시 집정관을 맡은 뒤에도, 아테네에서 공직 생활을 하지 않고, 절연한 친가와 거리를 뒀다. 그는 로마 제국의 속주 총독을 역임했고, 이탈리아의 로마 귀족이라는 것을 강조했다. 대신 본인의 이름으로 기부활동을 할 때, 부모의 발자취를 따르면서도, 어머니와 외가 식구, 죽은 두 누이를 강조하는 식으로, 아버지와 계속 거리를 뒀다. 하지만 기부액은 헤로데스 아티쿠스 생전보다 적었다. 이는 그가 가진 재산이 아버지와 아버지 양자인 입양형제보다 훨씬 적었던 것도 컸다. 하지만 아티쿠스 브라두아는 아테네 등 그리스 일대에 이런 기부를 계속 했고, 총독 재임 시절에도 선행을 계속 했다. 또 인품이 바르고 온화해, 아테네 사람들은 헤로데스 아티쿠스가 생전 주장한 것과 전혀 달랐던 브라두아를 더욱 동정했다.
그 결과, 트리폴리타니아 지방의 렙티스 마그나에선 185년 이후의 어느 시점에 회색 석회암으로 그를 헌정하고 인품을 찬양한 기념비가 세워졌다. 아마도 그가 아프리카 속주 총독이나 트리폴리타니아 지방관을 지낼 때였던 것으로 보이는데, 그 비문엔 이렇게 적혀 있다.
마르쿠스 아틸리우스 메틸리우스 브라두아 카우키디우스 테르툴루스 클라우디우스 아티쿠스 비불리우스 폴리오 가우이디우스 라티아리스 아트리우스 바수스 총독께 ; 데키무스 유니우스 크레스켄스, 데키무스 유니우스 갈바, 퀸투스 칼푸르니우스 카피토, 루키우스 플라우티우스 옥타비아누스가 이를 후원해 보내드립니다.
이를 통해, 아티쿠스 브라두아가 자신의 가족 중 어머니, 누이, 외가 조상들에 대한 기억만 기리고, 아버지와 친가는 철저히 언급하지 않고, 아버지에 대한 불만을 억누른 것 등이 사실이라는 것이 확인됐다. 또 그가 개명해, 헤로데스 아티쿠스에게 물려받은 이름을 철저히 삼간 것도 확인된다.
[1] 아버지 헤로데스 아티쿠스에게 사실상 가문 추방을 당하면서 상속받지 못했다. 하지만 본인 역시 아버지와 절연하면서 포기했고, 안토니누스 피우스 황제에게 개명 후 따로 파트리키로 공인받는 식으로 상속받지 못한 지위를 대수롭지 않게 여겨 대했다.[2] 임신 8개월일 당시, 가정폭력으로 남편 헤로데스 아티쿠스와 남편 하인에게 맞아 죽었다.[3] 아티쿠스 브라두아가 어머니 사망 후 아버지 헤로데스 아티쿠스에게 가정폭력, 학대를 넘어 거의 살해 직전까지 위험에 처해진 직후부터 후원하고 그가 이탈리아로 넘어온 뒤부터는 실질적인 아버지 역할을 했다.[4] 어머니가 가정폭력을 당하고 죽기 전에 출산 후 함께 사망.[5] 외가, 어머니 모두 이탈리아인 정체성이 강한 로마 귀족들이었고, 실제 이탈리아 혈통 로마인이라서, 아티쿠스 브라두아는 그리스인과 이탈리아인 혼혈이라는 인식이 어릴 적부터 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