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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영어 : sophist그리스어 : σοφιστής(소피스테스)[1]
현대 한국어로 문자적으로 번역하자면, "지혜로운 사람." 요컨대 "소피스트"라 불리던 이들은 당대 아테네 사회에서 "나는 지혜로운 사람이다"라고 자칭하거나,[2] 남들이 "저 사람은 지혜로운 사람이다"[3]라고 부르던 이들이 함께 묶여 불린 것이다.
토론문화가 발달한 고대 그리스 로마사회, 특히 기원전 5세기에서 4세기경의 그리스 아테네를 배경으로 활동했던 일련의 지식인 집단이다. 단, 이들을 소피스트라 묶어 부르지만 특정한 사상적인 연관성 때문에 묶어놓은 분류는 아니다. 이들이 활동한 분야만 보아도 정치철학, 수사학은 물론이고 수학이나 음악, 체육, 심지어 의학까지 광범위한 분야를 포함하며, 같은 분야에서도 서로 다른 주장을 하는 경우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다만 당시 분위기에 맞춰진 큰 흐름 자체는 존재했다. 그것이 바로 각자의 주장을 언변으로 상대에게 반박하지 못하도록 만드는 것.[4]
현대에 들어서는 궤변론자라는 뜻으로 쓰인다. 논쟁에서 이기는 38가지 방법은 소피스트의 모습을 잘 묘사한 책이다. 그리고 이 책은 소피스트가 되는 방법을 적은 책이 아닌, 궤변을 늘어놓는 소피스트들을 논파하기 위한 일종의 전술 교본 같은 것이다.
요컨대 '승리' 와 그에 따른 '실리 추구' 그 자체가 목적인 사람들이었다. 설령 자신의 주장이 얼토당토 않은 주장이더라도, 그 주장이 받아들여졌을 때 실질적으로 많은 폐해가 우려된다 할 지라도, 그 주장으로 인해 자신이 언쟁에서 '승리'할 수 있다면, 아니면 적어도 상대를 논리적 수렁에 빠뜨릴 수 있다면 과감하게 주장하는 사람들이 '소피스트'일 것이다. 물론 소피스트들은 어원으로부터 수천 년이 지난 현재에도 TV나 컴퓨터 너머로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2. 등장배경
솔론의 개혁 이후 아테네의 민주정, 특히 민회는 점점 더 강력한 권한을 휘두르기 시작했다.[5] 페르시아 전쟁시기의 테미스토클레스나 펠레폰네소스 전쟁시기의 페리클레스 등은 민회에서의 활약으로 상당한 정치적 영향력을 휘둘렀다. 이들은 뛰어난 정치적 식견을 가지고 있었으며, 우월한 말솜씨로 그를 100프로 활용해서 민회에서 경쟁자들을 꺾고 자신의 의견을 관철시켰다. 당시의 그리스인들에게는 이들처럼 민회에서 활약을 하는 것이 성공적인 삶의 표본으로 여겨졌다. 일단 자신에게 유리하거나 불리한 법안이 상정되지 않는다고 해도[6] 웬만한 법안은 민회를 거쳐 최종결정되었다. 따라서 아테네 민회는 사실상의 최종법정으로 기능했으며, 아테네 시민이라면 누구든지 다른 사람을 민회에서 고발하거나 다른 사람에게 고발당할 수도 있었다.[7]따라서 대부분의 아테네 시민(즉 성인 남자)들 중 성공하고 싶은 사람은 당연히 변론술과 수사학을 공부하길 원했다. 그리고 사회적 성공이나 정치적 방어수단을 원해야 할 정도인 사람들은 대체로 지켜야 할 것, 즉 재산이 어느 정도 있는 유산계층인 경우가 많았으며, 변론술이나 수사학을 익히기 위해서라면 어느 정도의 경제적 대가를 지불할 용의가 얼마든지 있었다. 그러자 이 돈 냄새를 맡은 그리스 주변 각국의 학자들이 한몫 잡기 위해 아테네에 모여들게 된다. 돈뿐만이 아니라 가장 학문적 문화적으로 잘 나가는 도시국가인 아테네에서 활약해서 명성을 떨치고 싶다거나 하는 것도 있긴 했다.
또한 아테네에는 정계 유력자 내지는 정계진출을 희망하는 유망주가 해외 지식인들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는 경향이 있었다. 예를 들어 솔론은 본인부터가 7현인의 일원이면서도 해외 지식인들과 유대관계를 갖고 있었고,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페리클레스 역시 아낙사고라스나 제논 등의 해외 철학자들과의 친밀한 교류를 갖고 있었다. 특히, 정황상 페리클레스와 아낙사고라스의 교류는 소피스트들이 그리스 사회에서 환영받은 가장 큰 이유인 것으로 보인다. 소피스트들이 활동하던 당시 가장 가까운 세대의 롤모델은 바로 페리클레스였기 때문이다.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페리클레스는 아낙사고라스와의 교류로 인해 지적 훈련과 품위있는 생활습관을 갖출 수 있었고, 이 점이 페리클레스가 아테네 사회에서 정치적 유력자[8]가 되는 데 큰 기여를 한 것으로 보인다.
이들은 대체로 다른 그리스 도시국가 출신이었다. 아테네에서만 활동하지 않았고, 다른 여러 도시에서도 활약했던 것으로 보인다.
3. 특징
어쨌든 해외에서 초빙하는 경우가 많았던 만큼, 그리고 사람들이 몰려가서 배웠을 만큼 당연히 이들은 당시 꽤나 명망있는 식자층이었다. 그리고 명망이 있는 만큼 수업료도 장난아니게 비쌌다. 예를 들어 프로타고라스의 경우 1년에 2탈렌트를 요구했다고 하는데, 1탈렌트가 군함 한척 값이었다.[9] 하지만 소피스트라고 다 부자는 아니었던 것으로 추정되며, 제법 이름 있고 열심히 일하기로 유명했던 소피스트도 죽고 나서 보니 별 재산이 없었다는 이야기도 있다.이들도 나름의 연구활동을 벌이기는 했지만, 그 목적은 지식의 탐구가 아니라 민회에서 자신의 주장이 받아들여지게 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이들은 말도 안 되는 논리를 전개하면서 그 논리를 전개하는 과정에서 상대로 하여금 찍소리 못하게 만드는 언어의 마법[10]사들이라 평가되는 경우가 많았다. 덕분에 현대에 와서는 궤변의 대명사로 찍혔다.
그들의 궤변이 어느 정도까지 당시 아테네를 개판으로 만들었는가를 보여주는 이야기들이 많이 전해져온다.
아리스토파네스의 희극 《구름》에는 채무 때문에 고생 중인 아버지가 있는 돈 없는 돈을 다 털어서 아들을 어떤 소피스트[11]의 학교에 보낸다. 그런데 아들은 소피스트의 학교에서 헛소리나 배워온 뒤, 아버지를 채무에서 해방시켜주기는 커녕 아무 일도 안하고 농담이나 따먹고 빈둥빈둥거리기만 한다. 보다 못한 아버지가 열받아서 아들을 때리자, 아들이 "왜 때려요!"라며 반항한다. 아버지가 "너 정신차리고 잘 되라고 그러는 거다. 아버지는 널 사랑하니까!"라고 답변하자, 아들이 "저도 아버지를 사랑해요!"라고 하며...
또한 이런 이야기도 전해져내려온다. 수업료가 비싸기로 지중해 최강이었던 프로타고라스에게 한 청년이 수사학을 배우러 왔는데, 그에게는 돈이 없었다. 그래서 그는 "선생님 수업 들음 재판에서 이길 정도로 대단해지나요?"하고 물었고, 프로타고라스는 "그건 너한테 달렸다."라고 답했다. 그러자 그 청년은 "확실하지 않은데 돈 내기 좀 그렇다"는 식으로 나왔고, 그래서 프로타고라스는 그 청년과 "수업코스가 끝난 이후 그 청년이 치른 첫 번째 재판에서 받은 배상금"으로 수업료를 치르기로 계약했다. 그런데 수업을 다 들었는데도 그 제자가 하라는 재판은 안 하고 놀고먹는 것이었다. 그 꼴을 본 프로타고라스가 그 제자를 고소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내가 이기면 재판에서 졌으니까 벌금 물어야 되고, 니가 이겨도 그건 나 덕분이니까 넌 내게 수업료를 내야한다"고 하니 그 제자는 "제가 이기면 제가 이겼으니까 안 내도 되고, 선생님이 이기면 선생님이 사기친 게 되니까 안 내도 되죠"라고 되받아쳤다고 한다.[12]
4. 사상
소피스트로 가장 유명한 사람은 프로타고라스이고, 회의론에서는 고르기아스를 가장 대표적 인물로 꼽는다.[13]프로타고라스는 "인간은 만물의 척도이다"라는 주장으로 유명하다. 플라톤의 대화편 《테아이테토스》에 따르면, 만물에 대한 인식은 감각에서 비롯되는데, 사람마다 동일한 대상에 대한 감각이 상대적이니 진리 또한 사람마다 상대적일 수밖에 없다는 주장으로 풀이된다. 따라서 그는 아테네 민주정을 정당화하는 최고의 이론가로 대접받곤 하였다.
반면에 고르기아스는 그의 《비존재에 관하여》라는 저술의 세 가지 논변으로 악명이 높다. 그는 먼저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14] 그 다음 비록 존재한다고 쳐도 우리는 그것을 알 수 없다[15] 마지막으로 비록 그 무엇이 존재하고 있고, 우리가 알 수 있다고 쳐도 우리는 그걸 다른 사람에게 전할 수 없다[16]라는 회의론을 펼쳤다. 진행되는 논증이 앞 논증을 뒷받침하는 게 아니라 부분 부정하며 나아가는 기묘한 논법을 펼치고 있는데, 소크라테스는 이러한 주장을 논할 것도 없다며 깠다. 그도 그럴 것이 고르기아스의 저 논증은 어떤 의미에서 모순이기 때문이다. 만일 저 논증을 사실이라고 가정할 경우 그는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실재)이 있다고 주장하고 있으며,[17] 존재해도 그것을 알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았고, 알 수 있어도 전할 수 없다는 사실을 언어를 통해 우리에게 전하고 있다.[18]
이 둘의 주장을 조금 거칠게 표현하자면, 프로타고라스는 "모든 것이 진리이다"라고 주장한 반면, 고르기아스는 "참된 로고스(논리)와 거짓된 로고스(논리)는 구별된다"라고 요약할 수 있다.[19]
철학사 내에서 전통적 관점에 따르면 소피스트는 무가치한 사이비이거나 끽해야 정반합 과정에서 소크라테스라는 합을 등장시키기 위한 반에 불과했다. 하지만 현대에 이르러 많은 연구 끝에 소피스트들 역시 철학자들이라고 보는 견해가 널리 퍼지게 되었다. 소피스트들의 견해 중 많은 부분이 현대철학과 상통하는 부분이 있거나, 그런 면모를 보이지 않는 소피스트들도 깊게 연구해 보니 상당히 철학적인 견해나 논거를 제시하였기 때문이다.
물론, 이들은 자신들을 철학자가 아니라고 주장했다. 왜냐하면 당시에 철학자라는 명칭은 "(지혜를 갖지 못해) 지혜를 추구하는 사람"을 가리키는 표현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스스로를 이미 지혜를 가진 사람이라고 보았던 그들은 결코 자신들이 철학자라고 말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이 자신들을 철학자로 보는 것을 불쾌하게 여겼다고 한들, 그들의 주장이 갖는 철학적 의미마저 없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그들은 기본적으로 지식의 본질은 실천적 활용에 있다고 보았다. 앎은 써먹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지, 그 자체로 탐구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는 실천적인 지식과는 별도로 그 자체를 위한 지식을 상정하여 거기에 더 높은 우위를 부여하는 전통 형이상학보다도 근대 이후의 사상에 더 근접한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인식론에 있어서 소피스트들은 지식은 감각이며, 그것은 그 순간만큼은 그 자체로 참이라고 주장한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시간과 공간, 그리고 감각하는 사람이 누구이냐에 따라 감각된 내용, 즉 지식은 상이할 수 있다고 보았다. 즉, 진리와 지식, 도덕이 상대적인 것으로 본 것이다. 그들은 시대나 문화권에 따라 진리에 대한 지식은 바뀔 수 있으며, 도덕률에도 어떠한 절대적 기준은 없다고 주장하였다. 다만 그렇다고 지식이나 도덕이 실재하지 않는다고 본 것은 아니며, 사회가 유지되기 위하여 사람들이 정한 규약으로서의 지식과 도덕은 긍정하였다. 절대적인 도덕이 있다기보다, 어떤 한 사회 A에서 어떤 행위 a가 도덕적이라고 여겨진다면 도덕적이고 부끄럽지 않은 것이고, 어떤 한 사회 B에서 어떤 행위 a가 비도덕적이면 비도덕적이고 부끄러운 것이고 이는 준수될 필요가 있다는 이야기다.
따라서 정치철학적으로 대다수의 소피스트들은 민주정을 최선의 정치적 대안으로 옹호하였다.[20] 반면 플라톤은 민주주의에 대해서 각각의 저작에서 여러 가지 견해를 표출하였다.[21]
정치철학, 법철학적으로는 노모스(Nomos)와 피시스(Physis)의 대립도 소피스트들의 주요한 이슈 중의 하나였다. 대충 말하자면 노모스는 사람 손을 탄 것들이다. 법률, 규범, 관습, 규칙 등등. 피시스는 자연스러운 것이다. 영어의 physics 같은 것을 생각해도 좋다. 소피스트들은 많은 경우 노모스처럼 사람 손 때 탄 규범들이 좋지 않다고 생각했다. 왜냐면 그것은 자연스러운 것인 피시스를 억제하기 때문에 인간의 본성과 반대되고, 자유롭지 못하며, 또 그렇게 사람들의 이익을 제한하는 까닭이다.[22] 허약한 소시민들이 자기들의 비루한 이익을 지키기 위해 다수의 힘으로, 강하고 비범하기에 더 많은 이득을 자연스럽게 누려야 할 인물에게 소시민적인 노모스를 강제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는 것이다. 자연은 강한 자들에게 많은 것을 허락한다는 것을 관찰할 수 있고, 자연의 명령은 많은 욕구를 충족시키는 것에 있으니. 그러므로 노모스에 의해서 강제된 부정의를 당하는 것은 훨씬 더 수치스러운 일이고, 차라리 자기가 부정의를 저질러버리는 것이 덜 수치스러운 일이다. 이는 더 나아가, 부정의를 저지르는 것이 인간에게 바람직하고 행복과 연결되어 있다는 주장으로도 이어진다. 정의는 남을 돕는 것이고 부정의는 자신을 돕는 것인데 행복은 자신을 돕는 것에 있으니 말이다.
어떤 소피스트들은 노모스를 옹호하기도 했다. 왜냐면 사람은 혼자서 살아갈 수 없기 때문이다. 여럿이 모여서 살아가기 위해서는 사회가 있어야 되고 사회가 제대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규칙이나 정의가 필요하기 마련이다. 사람이 자기 이익을 추구하더라도, 혼자서는 살아갈 수 없으며, 사람이 사람 구실을 하는 것은 하회의 교육 덕택이니까 사회의 규칙도 함께 존중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법은 신에게서 받은 신성한 것이요, 지혜롭고 경험 많은 이들의 산물이요, 선을 추구하고 악을 몰아내는 사회의 약속인 까닭이다. 이런 노모스와 피시스의 논쟁은 그리스 사회가 격변기를 맞아 낡은 관습과 법률이 새로운 사회와 새로운 사상에 걸맞지 않은 듯이 보여 더 좋은 것으로 개변하려는 움직임인 것으로 보인다. 이들은 인간의 적절한 삶을 물었고, 그 적절한 삶이란 이른바 훌륭함들, 능숙함들, 덕스러움들로 표현해 볼 만한 여러 멋지고 아름다운 가치들의 실현 속에 있고, 그 여러 멋지고 아름다운 가치들의 총합을 소위 덕으로 번역되는 arete라는, 단수형의 실현으로 생각했다.[23]
이처럼 소피스트들은 단순한 궤변론자라기 보다는 전반적으로 회의론적 성향이 강한 인간중심적 철학자들이었으며, 심지어 현대의 해체주의적 성향과도 유사한 흐름을 볼 수 있다. 물론 그들이 그들 스스로의 주장에 철학적 의미를 부여한 것은 아니고, 후대의 철학사가들이 그들의 주장을 분석하는 과정에서 그러한 의미를 부여한 것이다. 그들은 철학적 탐구를 하기 싫어했거나 하지 않았다고는 못하지만, 철학이나 연구보다는 변호사 노릇을 하거나 강연에 나가서 돈을 버는 것에 더 관심을 두었다.
그러나 현대의 평가들 중 어떤 부분은 그들에 대해 전통적으로 지나친 저평가가 이루어졌기 때문에 역으로 고평가되는 부분이 있다. 이들이 궤변론가인 것은 사실로 보인다. 소피스트들은 뭐 학파로 묶인 것도 아니고 공통적인 스승을 사사한 것도 아니기 때문에 제각각이지만, 그들에게 있어 가장 대표적인 특징은 바로 이중 논변이다. 이것은 소피스트들의 특기인, 이른바 같은 사안을 다룸에 있어서 어느 때는 찬성의 입장에서 승리를 거두고, 어느 때는 반대의 입장에서 승리를 거두는 수사학 훈련이다. 이들은 법정에서의 승리를 위해 이와 같은 말솜씨를 전문적으로 훈련하고 사람들에게 가르쳤다.
소피스트들은 신에 대해 회의적인 입장을 취했다. 대표적 소피스트인 프로타고라스는 신들이 있는지 없는지는 알 수 없다고 주장하였고, 심지어 크리티아스는 신은 똑똑한 인간이 발명한 것으로, 인간을 규제하기 위한 하나의 장치라고 주장하였다. 물론 이들도 필요에 따라서 신화를 차용하기도 하고 당시 아테네에서 숭배받던 그리스 신의 이름을 들먹이기도 했었다. 그러나 그런다고 한들 그들이 신이라는 개념이 인간의 편의를 위한 발명품이라고 생각한다는 점을 사람들이 모르지는 않았으며, 이는 그들이 불경죄로 고소당하여 추방당하는 근거가 되었다.[24]
5. 평가
여하튼 그들의 궤변에 자신이 사랑했던 아테네가 혼란스러워지는 모습을 보고 등장한 한 사람의 철학자가 당시 아테네를 그야말로 대놓고 비판하다가 사형당했는데, 그가 바로 소크라테스가 되겠다.[25] 그러나 당시에는 소크라테스도 그냥 소피스트들 중 한 명정도로 여겨졌다. 예를 들어 아리스토파네스의 극 《구름》에서는 바구니를 타고 하늘을 탐구하며 상대방을 논변으로 격파하는 법을 가르치는 우스꽝스러운 사람으로 등장한다. 또한 종종 소피스트들이 고소받고 추방당하는 경우가 있었는데,[26] 소크라테스에게 적용된 죄목 역시 이와 유사한 불경죄[27]였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자신이 소피스트로 불리는 사실을 극구 부인했고, 타인을 논파하는걸 즐긴다는 소문 역시 극구 부정했다. 예를 들어 소피스트들이 자신들을 "지혜로운 자"라고 부른 반면, 소크라테스는 자신을 "지혜를 사랑하는 자"[28]라고 불렀다.플라톤의 대화편 《변론》에서는 소크라테스가 이러한 태도를 취하게 된 계기에 대한 일화가 소개되고 있는데, 그것이 그 유명한 델포이 신탁의 일화이다. 소크라테스에 따르면 소크라테스의 친구 칼리아스가 델포이에 갔다가 '가장 현명한 이는 소크라테스'라는 신탁을 받았고, 그는 이를 소크라테스에게 전했다고 한다. 신탁의 내용을 의심한 소크라테스는 당시에 장인, 시인, 정치인, 소피스트 등 소위 좀 안다 하는 사람들을 찾아가 계속해서 물었고, 이들을 논파하며 결국 자신은 물론 그들마저 쥐뿔 아는 것도 없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결국 소크라테스는 최소한 자신이 무지하다는 사실을 알고있는 자신이, 무지하면서 마치 스스로 아는 것처럼 행동하는 자들보다는 현명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것이 그 유명한 무지(無知)에 대한 자각이다.
플라톤이 소피스트들에게 내린 평가는 부정적이라는 것이 전통적인 견해였지만, 최근 들어서는 그렇지만도 않으며, 소피스트들에 대한 플라톤의 평가가 개인마다 다르다는 주장도 지지를 얻고 있다. 특히 프로타고라스나 고르기아스,[29] 프로디코스는 상당히 긍정적으로 묘사를 했는데, 특히 프로디코스는 다른 소피스트들 보다 더 높은 평가를 하기도 했다.[30] 그러나 플라톤의 대화편 대부분은 그 내용 자체가 소크라테스가 지인이나 지인의 자녀들이 소피스트에게 가려고 하자 이를 일단 저지하고 보는 내용이며, 아예 《소피스트》라는 대화편에서는 대놓고 소피스트들을 깐다.[31]
아리스토텔레스 역시 상당히 비판적인 자세를 취하고 있다. 일단 제목부터가 소피스트를 까겠다는 의지가 담긴 《소피스트적 논박》이라는 저술이 있다.[32] 또한 그는 아예 《수사학》이라는 저술로 소피스트들의 궤변적인 방식이 아닌 올바른 방식의 수사학을 정립하려는 시도를 하기도 한다.
이들뿐 아니라 투키디데스나 크세노폰 등도 소피스트들을 부정적으로 바라보고 있다. 이들이 공통적으로 제시하는 소피스트들에 대한 비판은 옳고 그름을 혼란스럽게 해서 사회에 혼란을 초래한다는 것, 또 그렇기 때문에 소피스트들과 얽히고 나면 사회고 개인이고 간에 더 좋아지는 일을 보기 힘든지 알 수 없다고 비판했다. 확실히 어느 정도는 이기적으로 사익을 추구했기 때문에 이런 비판이 나오는 것 같기도 하다.
이처럼 전통적으로 소피스트들은 궤변론자 등으로 치부되어오는 경향이 있었다. 그러나 요새는 소피스트들에 대한 이러한 부정적인 평가는 정당하지 않다는 의견도 일부 나와 부분적으로 재평가가 이루어지고 있다. 그 시발점이 된 것은 조지 커퍼드의 <소피스트 운동>인데 한국어판은 출판사가 망해서 절판된 상태다. 그리고 번역의 질도 썩 좋지가 않다.
6. 이야깃거리
사실 소피스트들의 사상을 정확히 평가하는 건 매우 어려운 일이다. 소위 철학자로 불려지는 사람들의 저서는 비교적 거대한 스케일의 이야기를 담았기에 널리 베껴지고 길이 남겨질 수 있었다고 추측된다. 그러나 소피스트들의 저서는 현대로 따지자면 자기계발서나 문제집, 교과서, 강의록 등에 가까웠기 때문에 그리 널리 전해지지 않는 것이 아닌가, 하는 견해도 있다. 이런 견해는 소피스트들을 재평가하고 추종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고대인들조차 그들의 수사학과 같은 실용적인 부분을 연구했지 그들의 사상은 별 관심이 없어했다는 사실에 의해 강화된다. 이런 이유로 그들의 사상을 담은 저서는 남아있지 않다. 이들의 사상은 대부분이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와 같은 당대의 다른 철학자들이 인용한 구절을 통해서만 유추할 수 있는데 어떠한 상황에서 그러한 말을 했는지 정확히 알 수 없기 때문에 더욱 명확한 그림을 그리기 어렵다. 아리스토텔레스의 큰 업적 중 하나는 그리스 학자들을 총망라하며 그들의 사상을 설명하며 평가했다는 것에도 있는데, 이는 아리스토텔레스 본인의 철학적 업적일뿐 아니라 후세에 그리스 학자들의 철학을 전하는 데에도 큰 역할을 했다.[33] 헌데 아리스토텔레스는 소피스트들을 사이비라 생각했기 때문에 이들의 의견이나 학설에 대해서는 별다른 평을 남기지 않았다. 직접 쓴 저서가 남아서 전해지는 고르기아스는 운이 좋은 사례.제자백가들 중에서 소피스트들과 유사한 특징을 보이는 이들이 있는데, 바로 명가이다. 대표적인 사상가는 혜시 (惠施)와 공손룡 (公孫龍)을 뽑는다. 혜시도 본인이 남겼던 저서는 모두 소실되고, 장자에 기록된 역물십사 (歷物十事) 등을 통해서만 파악할 수 있다. 역물십사에서 혜시는 인식의 상대성을 주장하고, 공손룡은 백마비마(白馬非馬)론 등을 통해 인식의 상대성과 한계를 주장한 것으로 평가된다. 이들과 소피스트들의 공통점은 크게 다섯 가지로, 직접적인 저술이 안 남아 있어서 이들을 비판한 사람들을 통해서만 간접적으로 파악할 수 있다는 점, 당대에 궤변론자로 통했다는 점, 정치활동에 주력하였다는 점, 언어의 활용에 주목하였다는 점, 언어를 정교하게 따지고 들어 재판에서 맹활약을 하며 그로 인해 돈벌이를 했다는 점이다.[34]
고전기 아테네의 몰락 이후 먹고 살 길이 없어진 소피스트들은 몰락했지만 이후 로마 제국이 그리스를 합병하고 그리스의 지식인들을 대우하기 시작하면서 2세기에 그리스 수사학과 철학이 또다시 번성하게 된다. 이를 2세기의 그리스 학자인 필로스트라토스의 표현을 따라 제2차 소피스트 운동(Second Sophistic)이라고 칭한다. 이들은 과거의 소피스트들처럼 수사학을 활용하여 정치적 성공을 노렸으며, 로마 제국의 행정과 외교를 담당하면서 로마 제국 내의 지배계층으로 자리잡았다. 이들 또한 학문(특히 수사학)의 달인이라는 의미로 소피스트라고 불렸으나, 로마 제국이 쇠락함에 따라 소피스트들의 부흥기도 끝나게 되었다.
7. 인물
[1] 플라톤의 대화편 중 동명의 대화편이 있다. 복수형은 σοφισταί.[2] 소피스트라는 용어 자체는 "지혜"에 해당하는 그리스어 Sophia에서 비롯된 말로, 원래는 "지혜로운 사람" 즉, "현자"나 "현인"을 가리키는 일반명사이다. 즉, 이들은 자신이야말로 지혜롭고 현명한 사람이라고 주장한 것이다.[3] 소피스트라는 직업이나 단어는 별로 좋게 받아들여지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소피스트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분위기도 있었던 것 같다.[4] 그러나 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정치적 성공이 이들의 가장 큰 공통목적이었다고 볼 수 있다. 일례로 가장 유명한 소피스트인 프로타고라스는 플라톤의 대화편에서 자신이 가르치는 내용을 politike techne라고 부르는데, 이는 "시민적 기술"이나 "정치적 기술"로 번역될 수 있다.[5] 이는 솔론의 개혁 때문이다. 그리스인들은 다양한 상황에 대처하기 위해 법을 성문화하지 않거나 성문화하더라도 애매하게 성문화하는 경향이 있었는데, 아테네의 경우 일부러 후자를 선택해서 논란의 여지가 있는 법안이나 판결은 무조건 민회로 직행했기 때문이다. 물론 이것은 민중파에게 힘을 실어주기 위한 솔론의 정치적 안배였다.[6]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아테네 민회에 상정되는 법안은 400인 위원회나 아레오 파고스 회의 등의 심의를 거쳐 상정되었다.[7] 사실상 이게 가장 결정적인 이유였던 것으로 보인다. 플라톤의 대화편 《고르기아스》를 보면 폴로스라는 인물이 이 문제를 갖고 소크라테스를 협박하다시피 하는 대목이 나온다. 물론 단순하게 법정다툼이 이들의 유일한 활동은 아니나, 가장 중시했던 영역인 것은 확실해보인다.[8] 아테네인들은 그런 사람들을 조언자라고 불렀다.[9] 참고로 이 탈렌트가 기독교 사람들은 다 아는 달란트이며, TV 출연자를 탈렌트라고 부르는 그 표현의 어원도 된다(정확히는 화폐 단위 탈렌트 → 주님이 주신 탈렌트 → 주님이 주신 재능 → 재능 → 재능이 있는 사람 → 유명한 사람 → TV 출연자의 단계).[10] 이를 수사학이라 한다. 그래서 어떤 문헌에서는 수사학을 악마의 학문이라면서 까기도. 문학에서 말하는 수사법과는 다르다.[11] 그런데 그 소피스트의 이름이 소크라테스이다. 이는 소크라테스가 정말로 그런 인물이었다기보다는, 소크라테스가 자신이 소피스트가 아니라고 말하는 바와는 상관 없이 그가 소피스트로 이해되었으며, 당대의 아테네인들은 "소피스트는 대강 이런 류의 사람들"이라고 인식하고 있었다는 점을 보여준다.[12] 그리고 이 일화는 2016년 수능 국어 비문학 제시문으로 출제되었다. 해당 제시문에서 내린 결론으론 법원 판결에 따라 처음 재판에선 제자가 이기나 재판 후 효력이 발생하기 때문에 두 번째 재판에선 최종적으로 스승이 이기게 된다.[13] 다만 고르기아스가 소피스트로 분류되었는지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그는 자신을 "수사가"라는 뜻의 레토르(Rhetor)라고 불렀으며, 소피스트들이 총출동한 플라톤의 대화편 《프로타고라스》에서는 등장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 짓거리는 거기서 거기이기 때문에 관례적으로 고르기아스 또한 소피스트의 일종으로 친다.[14] 어떤 것은 is던가 is not이던가 할 것이다. There is an apple이거나 There isn't an apple이거나 할 것이다. apple이 아니라 파르메니데스가 말하는 being을 집어넣어 본다. There is not being이 가능하다고 가정한다. 한국말로 거칠게 옮겨버리면 거기에는 being(존재)가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렇다면 그것은 There is not being이라는, being이(존재가) 가능하다는 얘기다. it is being의 경우, 고르기아스는 제논과 멜리소스의 주장을 예시로 들면서, it is being은 불가능하다고 주장한다. 멜리소스의 주장은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들 단편선이라는 책에 다 기재되어 있다. 혹은 이 위키의 멜리소스 링크로 들어갈 경우 그 문서에 링크된 영어 위키피디아에서 확인할 수 있다.[15] That is something. 이렇게 주장할 경우 That은 something이 되는 것이 자명하다. 그런데 something에 아무 거나 넣어도 가능하다. That is white라는 것은 가능해 보인다. That is a rose라는 것도 가능해 보인다. That is white rose도, 딱히 말로서는 이상해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white rose라는 것은 없다. He is flying with wings! 불가능하다. 소피스트들의 주의주장에 따르면 언어는 현실을 제대로 반영하거나, 현실과 연결되어야 의미가 있다. That is something에서, 우리가 is에 연결되는 그것을 안다, 생각한다는 것이 가능한 것일까? That is white rose는 언어의 기준으로 볼 때 틀리지 않았다. He is flying with wings! 역시 언어의 기준으로는 가능하다. 이렇게 is에 아무 거나 갖다붙여도 가능하다는 것은, 우리의 앎이라는 것이 도대체 무엇일까?[16] 어떤 것이 있고, 알 수 있다고 할 때, 우리는 말에 의해서 생각을 전달한다. 생각을 말로 완전히 재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김씨가 a라는 것을 알고 있고 이씨는 a를 모른다고 할 때, 김씨가 이씨에게 말로 a를 전달하는 것은 장님이 코끼리 더듬는 격이다. 이씨가 a라는 것을 희미하게라도 알고 있지 않다면.[17] is. 고르기아스의 주장은 아무것도 없다, 즉 is는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아무 것도 없다는 그 is가 있다는 얘기가 아니냐는 것이다. 즉 There is 아무 것도 없다는 그것.[18] 물론 고르기아스의 주장은 철학적으로 굉장히 무시무시한 주장이라는 점을 감안할 필요가 있다. 첫 번째 논변은 실재론 또는 존재론의 가능성을 부정하고 있으며, 두 번째 논변은 인식론의 가능성을, 마지막 논변은 해석학의 가능성을 부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철학사적으로는 파르메니데스를 비롯한 엘레아 학파의 주장을 대놓고 비판하는 것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파르메니데스는 "존재하는 것이 있다"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물론 파르메니데스의 명제, 특히 그의 존재자 개념이 무엇을 의미하는가에 대한 해석은 다른 방식으로도 해석이 가능하기 때문에, 그가 정말로 그런 주장을 했는가에 대해서는 아직 논의의 여지가 있다. 어쨌든 고르기아스가 파르메니데스의 순수사유 대상인 진정한 존재 그 자체가 없거나, 있어도 알 수 없거나, 알아도 전달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는 것은 확실해보인다. 그의 다른 저술인 《헬레네 찬사》에서처럼 그가 자기 자신의 주장에 대해 "아님 말고~"라는 식의 태도를 보이지만, 고르기아스를 비롯한 소피스트들의 태도를 생각해 보면, 실리가 걸리지 않은 이깟 논변이야 맞아도 그만 틀려도 그만이었을 수 있다. 물론 무용한 것에 목숨 걸고 달려드는 철학자들이야 그게 문제라고 지적하겠지만...[19] 어떤 사람은 대비를 뚜렷이 하기 위해 고르기아스가 모든 것이 거짓이다라고 주장했다. 확실히 일리가 있는 주장이다. 그러나 고르기아스의 저 유명한 비존재에 관하여에서 관측할 수 있는 고르기아스의 입장은, 언어는 실재와 정확히 대응되어야 한다는 관점이 아닐까 한다. 그와 같은 전제를 바탕으로 고르기아스가 논증을 전개하고 있는데, 만약 고르기아스가 모든 것이 거짓이라고만 주장했다고 단정해 버릴 경우, 그는 굳이 모든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거나, 존재해도 알 수가 없다거나, 알아도 전달할 수가 없다거나와 같은 주장을 할 필요가 없었을 수 있다. 이 모든 가정들은 참이 존재한다는 전제 하에서 성립되는 것처럼 보인다.[20] 물론 전부는 아니다. 프로타고라스를 필두로 다수의 소피스트들은 아테네가 민주정 사회였기 때문에 부상할 수 있었으며, 따라서 민주정을 옹호하였다. 그러나 고르기아스나 트라시마코스는 참주정을 주장했다. 아니, 애당초 그들의 학생들부터가 참주가 되고 싶어서 수업을 듣고 있었다.[21] 정치철학적인 면모가 보이는 3저작인 국가, 정치가, 법률 각 저작마다 플라톤의 입장은 핵심 이론은 동일해도 어떤 정치체제가 가장 좋고 나쁜가 하는 세부 사항 등은 조금씩 다르게 나타난다.[22] 이런 주장은 훗날 니체에 의해 발굴되는, 소시민의 도덕과 영웅의 도덕이 충돌하는 논설로도 표현된다.[23] 역으로 말하자면, arete라는, 우리 말로는 흔히 덕이라고 번역되는 단어가 뭐냐고 물으면 반대로 풀어나갈 수 있다. 여러 멋지고, 아름답고, 훌륭하다고 여겨지는 가치나 사상의 공통점 혹은 꿰뚫어낸 것이 arete가 되고, 이 arete의 실현은 곧 여러 멋지고 아름답고 훌륭한 것들의 실현이기에 좋은 삶, 좋은 사회가 만들어진다.[24] 물론 이는 소피스트들에게만 해당하는 점이 아니다. 앞서 언급된 바와 같이, 소피스트와는 별개의 인물로 취급되었던 아낙사고라스는 소피스트들 이상으로 노골적으로 유몰론적 세계관을 주장하였으며, 결국 불경죄로 고소당하여 추방당한 전례가 있었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도 알키비아데스를 멕여버린 필살기가 바로 불경죄였고 알키비아데스는 이를 두려워해 아테네에서 스파르타로 망명했다.[25] 고등학생이라면 몰라도 대학교 철학도들을 괴롭히는 것은 플라톤...이지만 플라톤 대화편이랍시고 주인공으로 나오는 사람은 소크라테스다.[26] 사실 이는 소피스트들에게만 한정된 것이 아니었다. 소피스트로 취급되지 않는 아낙사고라스 역시 불경죄로 벌금을 물고 추방당한 적이 있었다.[27] 당시에는 정치 공동체의 구속력은 종교에 의해 결정되는 경향이 있었다. 따라서 정치적으로 구체적인 혐의가 모호하면 불경죄로 고소하는 경우도 있었다. 물론 소크라테스의 경우 30인 과두정 시기를 거쳐 민주정이 복구되는 과정에 입안된 면죄법이 적용될 수 있기 때문에 일부러 혐의를 모호하게 잡은 것도 있었다.[28] 필로소포스{philosophos). 즉, 현대에는 철학자라고 번역되는 명칭이다.[29] 이 둘은 각자의 이름으로 된 대화편도 있으며, 해당 대화편에서 두 사람과 소크라테스는 신사적으로 토론한다.[30] 이는 아마도 프로디코스가 용어 정의를 엄밀하게 하는 경향을 가졌던 것으로 추측되는 것과 무관하지 않아보인다. 소크라테스의 대화편 대부분이 중요한 용어에 대한 애매한 사용을 문제삼는다.[31] 까면서 하는 얘기 중 하나가 재미있는데, 여기에서 플라톤은 소피스트들을 낚시꾼에 비유하고 있다.[32] 다만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술 제목은 본인들이 붙인 게 아니라 후대 사람들이 붙인 것이다. 따라서 해당 제목은 아리스토텔레스 본인의 의지가 담긴 것이라기보다는 후대(라고 해봐야 기원전후의 고대 학자들이다.)의 학자들이 해당 저술을 그렇게 파악한 것이다.[33] 원전을 전하기보다는 자기 식으로 이해하거나 멋대로 까내리면서 자기 철학을 돋보이게 하기 위해 이용하기도 했으므로 현대의 학자들에게는 어려움으로 남았다.[34] 명가가 동양의 논리학을 창시했다고 보기에는 무리가 많다. 명가가 논리학을 창시했다고 하면 플라톤도 논리학을 창시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