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모에 미러 (일반/밝은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4-11-06 14:07:32

플루타르코스


파일:관련 문서 아이콘.svg   관련 문서: 플루타르코스 영웅전
,
,
,
,
,
<colbgcolor=#000><colcolor=#fff> 플루타르코스
Plutarchus
파일:Portrait_of_a_philosopher,_maybe_Plutarch,_2nd_century_BC,_AM_Delphi,_0135.jpg
이명 루시우스 메스트리우스 플루타르코스[1]
Lucius Mestrius Plutarchus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언어별 명칭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colbgcolor=#000><colcolor=#fff> 영어 Plutarch
고전 그리스어 Πλούταρχος [plǔːtarkʰos]
그리스어 Πλούταρχος ['plutarxos] }}}}}}}}}
출생 46년
보이오티아, 케로네이아
사망 119년 이후 (향년 73~74세)
포키스, 델파이
국적 파일:로마 제국 깃발.svg 로마 제국
직업 전기 작가, 수필가, 철학자, 사제, 대사, 판사

1. 개요2. 생애3. 여담

[clearfix]

1. 개요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으로 알려진 그리스 출신의 역사가, 전기 작가. 또한 외교관이면서 치안 판사를 역임하는 동시에 중기 플라톤주의의 철학자로도 활동하였다. 플루타르코스 영웅전 외에 유명한 저서로는 '도덕론'으로 그리스어로 집필 활동을 했고 그의 저서는 주로 그리스인과 로마인에게 알려졌다.

2. 생애

그리스의 보이오티아에 위치한 카이로네이아의 작은 마을에 있는 부유한 집안의 자녀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의 이름은 기록되지 않았지만 가족의 이름을 물려받는 그리스의 풍습으로 볼 때 '니카르쿠스'로 추정되며 그의 조부의 이름은 플루타르코스가 그의 저서인 도덕론에 '람프리아스'라고 명시하고 있다. 형제인 티몬과 람프리아스와는 그가 쓴 에세이와 대화록에 이름이 기록되어 있는 것이 형제와도 우애가 깊었던 것으로 보인다.부인의 이름은 '티목세나'로서 "두 살배기 어린 딸을 잃어서 슬퍼할 때에 위로를 해주었다"라는 그가 남긴 글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플루타르코스는 자신의 고향인 카이로네이아에서 대부분의 인생을 보냈지만 서기 66년과 67년에는 아테네로 가서 암모니우스 아래에서 수학과 철학을 공부했다. 젊은 나이로 관직에 올라 코린토스 대사관에서 근무하고, 로마에서 그리스어와 윤리학을 가르친다.

정확히 어느 시점인지는 불명확하지만 플루타르코스가 오토 황제의 전기집필을 하기 위해 자료들을 제공해주었던 리키우스 메스트리우스 플로루스라는 원로원 의원의 도움으로 시민권을 얻을 수 있었다. 이때 로마 시민권을 얻으면서 로마 이름인 '루키우스 메스트리우스 플라타르쿠스'라는 이름을 얻게 된다.

그의 집에서 32킬로미터 떨어진 델포이아폴론 비의의 신관으로서 상당한 시간을 보내며, 이때에 수많은 저술과 강의를 하면서 일약 로마 제국의 유명인사가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계속 고향에서 머물면서 시장을 역임하는 등, 지역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고 그의 명성덕분에 수많은 유명인사들이 모이는 모임에서도 제일 먼저 특석인 대리석 의자에 배정되곤 하였다.플루타르코스는 이러한 인사들 모임에서 나누었던 대화들을 기록하고 출판을 했는데 그중 현재까지 남아있는 78개의 에세이 외 다른 저작물들을 묶은 것이 '도덕론'이다.

3. 여담

"인간의 위대함은 공포를 견뎌내는 당당한 모습에 있다."라는 말을 남긴 것으로 알려져 있다. 죠죠의 기묘한 모험에서 루돌 폰 슈트로하임이 이 명언을 인용했다. 또한 니체도 이 문구를 자신의 초인론에서 인용하였다.
[1] 로마 시민이 된 후 이 이름을 사용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Oxford Dictionary of Philosoph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