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8B0000><colcolor=#FECD21> 이름 | 가이우스 풀비우스 플라우티아누스 (Gaius Fulvius Plautianus) |
출생 | 미상 |
사망 | 205년 |
직위 | 근위대장, 집정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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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제국 세베루스 왕조의 근위대장.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의 외사촌이자 동향친구로, 세베루스가 황위에 오른 뒤 근위대장에 발탁되어 막강한 권세를 누렸다. 그러나 지나친 전횡을 일삼아 증오를 한몸에 받았고, 카라칼라와 심한 갈등을 벌이다가 반역 혐의로 긴급 체포되어 처형된 뒤 기록말살형에 처해졌다.2. 생애
초기 생애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지만,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의 고향인 아프리카 속주의 렙티스 마그나에서 풀비우스 가문의 일원으로 출생했을 가능성이 높다. 당대 역사가 헤로디아누스는 세베루스와 플라우티아누스가 친구이자 혈연 관계였다고 기록했다. 세베루스의 어머니가 풀비아였다는 점을 볼 때, 플라우티아누스는 세베루스의 외사촌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는 십대 때 호르텐시아와 결혼하여 아들 가이우스 풀비우스 플라우티아누스 호르텐시아누스와 딸 풀비아 플라우틸라를 낳았다.20세기 초 렙티스 마그나 시디 바르쿠 요새 유적지에서 발견된 비문 'IRT 572'에서 그의 초기 경력을 확인할 수 있다. 풀비아 네포틸라라는 인물이 그를 위해 세운 것으로 추정되는 이 비문에서는 그가 5%의 상속세를 징수하는 직책을 맡았고, 뒤이어 도로와 운송을 담당하는 직책을 역임했다고 적혀 있다. 이 직책은 에퀴테스가 주로 맡는 것이므로, 그가 렙티스 마그나의 에퀴테스였다는 걸 알 수 있다. 헤로디아누스에 따르면, 플라우티아누스가 페르티낙스에 의해 "반역과 다른 많은 범죄로 유죄 판결을 받은 후 추방되었다"고 기록했다. 만약 그 일이 실제로 벌어졌다면, 페르티낙스가 아프리카 총독이었던 188년에 일어났을 것이다. 이후 프라에펙투스 비길룸(praefectus vigilum)[1]을 역임했다고 전해지나, 콤모두스, 페르티낙스, 디디우스 율리아누스,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중 어느 시대에 임명된 것인지는 기록이 미비해 알 수 없다.
193년 후반 세베루스가 동방의 황제 참칭자 페스켄니우스 니게르와 전쟁을 벌일 때 함께 했고, 니게르의 자녀를 붙잡아 세베루스에게 넘겼다. 194년 세베루스가 니게르를 주살한 뒤 파르티아 원정을 착수했을 때도 함께 했다. 196년 로마로 돌아와서 세베루스의 클로디우스 알비누스 정벌전에도 참여했다. 197년 1월 1일 이전, 그는 프라이토리아니 지휘관이자 새롭게 창설된 파르티카 제2군단의 지휘관이 되었다. 197년 2월 19일 리옹 근처에서 알비누스와의 결정적인 전투에 참여했다. IRT 572에 따르면, 그는 이 시기에 "vir clarissimus(가장 뛰어난 통치자)"라는 칭호를 받았다고 한다. 세베루스는 근위대장을 맡은 친구 플라우티아누스에게 곡물 행정을 감독하는 권한을 부여했고, 제국 최고 법원이자 정책 입안 기구인 황제 자문회의의 부의장으로 승격했다. 이리하여 그의 권력은 황제에 맞먹을 정도로 강력해졌다.
198년 겨울, 세베루스와 플라우티아누스는 제2차 파르티아 원정에 착수하여 메소포타미아 일대를 파괴하고 크테시폰을 공략했다. 그는 이 원정 때 근위대와 파르티카 제2군단을 지휘했으며, 니게르의 지지자들을 잡아들여 처형한 뒤 재산을 몰수했다. 히스토리아 아우구스타에 따르면, 세베루스는 플라우티아누스에 의해 자신의 가장 가까운 친구들까지 처형하라는 압력을 받았다고 한다. 이렇듯 막강한 권세를 누렸으나, 당대 기록은 그에 대해 매우 부정적이었다. 디오 카시우스는 그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그는 귀족 출신의 로마 시민 100명을 거세했다. 단지 소년이나 청년만이 아니라, 아내가 있는 남자도 포함되었다. 그의 목적은 카라칼라와 결혼한 딸 플라우티아의 수행원으로서, 특히 음악과 다른 예술 분야에서의 선생님으로 삼되, 내시만을 두려는 것이었다.
플라우티아누스가 정말로 이런 짓을 했는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당시에 그의 평이 매우 좋지 않았던 건 분명한 사실이다. 헤로디아누스는 “플라우티아누스가 자신의 권력을 남용해 모든 일에 온갖 잔인한 행동과 폭력을 써서 역사상 가장 두려운 프라이펙투스[2] 중의 하나가 되었다.”고 평가했다. 플라우티아누스는 세베루스의 적으로 간주된 사람들을 끊임없이 박해하고 그들의 재산을 몰수했기에, 증오를 한몸에 받았다. 또한 'P. Columbia 123'라는 명칭이 붙은 파피루스 기록에 따르면, 플라우티아누스는 비리 혐의로 고발된 일반 관리들의 재판을 직접 담당했다고 한다. 이때 역시 관료들에게 유죄 판결을 내리고 재산을 몰수해 자신의 수중에 삼았을 것이며, 이로 인해 그를 증오하는 자들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을 것이다.
그는 세베루스 황제의 여정에 언제나 함께 했다. 세베루스가 이집트로 갔을 때도 동행했고, 테베로 향하는 황실 소유의 나일 강 유람선에도 동승했다. 이에 세간에서는 세베루스와 플라우티아누스가 연인 관계라는 소문이 나돌았다. 203년 1월 1일 세베루스의 차남 게타와 함께 집정관에 선임되었고, 자신의 딸 풀비아 플라우틸라와 카라칼라의 결혼을 성사시켰다. 디오 카시우스에 따르면, 플라우티아누스는 이 시기 아프리카에서 가라만테스 족을 격파한 뒤 랩티스 출신 전쟁 영웅들과 자신을 위해 여러 개의 동상과 흉상을 세웠다고 한다. 그러나 세베루스는 플라우티아누스가 신하로서 도를 넘어섰다고 여기고 이 조각상들을 파괴하라고 명령했다고 한다. 이 사건에도 불구하고, 그는 계속 세베루스의 총애를 받았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그의 입지는 점점 위태로워졌다. 사위 카라칼라는 사람들에게 죄를 뒤집어씌워서 재산을 몰수해 부귀영화를 누리는 장인의 행태를 못마땅하게 여겼고, 아내가 아버지를 닮아 몹시 거만하고 이기적이며 방탕하다고 생각해 매우 싫어했다. 그는 아내와 식사도 하지 않고 잠도 자지 않으려고 했으며, 자신이 정권을 잡으면 둘 다 죽이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또한 디오 카시우스에 따르면, 푸블리우스 셉티미우스 게타가 임종을 맞이할 때 세베루스에게 플라우티아누스의 권력을 축소해야 한다고 설득했다고 한다. 세베루스는 이에 동의하여 플라우티아누스의 권력을 축소했고, 플라우티아누스는 이에 매우 분개했다고 한다. 그는 이런 상황에서 세베루스의 아내 율리아 돔나까지 적으로 돌렸다. 그녀의 명예를 실추시키고 권력을 박탈하기 위해, 그녀의 하인과 친구들을 체포해 고문을 가하여 그녀에게 불리한 증언을 하게 만들려 한 것이다. 이에 율리아 돔나는 분노하였고, 카라칼라와 함께 플라우티아누스를 제거할 기회를 엿보았다.
결국 205년 1월 22일, 일은 터졌다. 한 기록에 따르면, 카라칼라가 세 명의 백인대장을 설득하여 플라우티아누스를 음해하는 거짓 정보를 부친에게 알리게 했다고 한다. 또다른 기록에 따르면, 플라우티아누스는 정말로 카라칼라를 제거하고 세베루스를 폐위시킨 뒤 자기가 황제가 되려는 음모를 꾸몄지만, 황제와 황태자를 살해하기 위해 고용한 사람이 곧바로 세베루스에게 가서 알렸다고 한다. 결국 플라우티아누스는 아들과 함께 황제의 부름을 받고 황궁에 입궐했다가 교살되었고, 율리아 돔나는 플라우티아누스의 재산을 몰수하였다.
세베루스는 침울한 표정을 지으며, 쿠리아 의회를 소집한 뒤 원로원 의원들 앞에서 자신이 그를 너무 사랑했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라고 자책했다. 또한 그는 플라우티아누스가 자신과 황실에게 반역할 생각이 없었고 그저 인간적으로 냐약했기 때문이라고 그 죽음과 넋을 위로했으며, 장례식을 치르게 해줬다. 하지만 원로원이 플라우티아누스를 기록말살형에 처하는 걸 막지는 않았다. 카라칼라는 여세를 몰아 플라우틸라까지 죽이려 했지만, 세베루스와 율리아 돔나는 그녀를 리파리 섬으로 유배보내는 선에서 종결시켰다. 그리고 플라우티아누스의 아들 호르텐시아누스 및 유족 역시 시칠리아로 강제 이주시켰다.
그러나 카라칼라는 아내를 계속 증오했고, 제위에 오른 뒤 동생 게타를 죽이자마자 섬으로 추방된 아내를 목졸라 죽이게 하고 그 머리를 가져오게 하였다. 그렇지만 호르텐시아누스 일가는 해를 입지 않았고, 그들의 후손은 원로원에 복귀할 수 있었다.
3. 여담
현재 바티칸 박물관에 전시되고 있는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치세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흉상. 과거엔 페르티낙스 황제의 흉상으로 추정되었지만, 현대 일부 학자들은 플라우티아누스의 흉상일 가능성이 높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 흉상은 50~60세의 원숙한 남성을 묘사하였는데, 연구자들은 이것이 플라우티아누스의 것이 맞을 경우 그가 140~150년에 태어났으며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와 비슷한 나이였을 것으로 추정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