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블리우스 셉티미우스 게타 라틴어: Publius Septimius Geta | |
전체이름 | 푸블리우스 셉티미우스 게타 Publius Septimius Geta |
생몰년도 | 서기 143년 ~ 서기 203년(또는 서기 204년) |
지위 | 원로원 의원, 집정관, 로마 황족 |
왕조 | 세베루스 왕조 |
종교 | 로마 다신교 |
부모 | 푸블리우스 셉티미우스 게타(父) 풀비아 피아(母) |
형제자매 | 셉티미우스 세베루스(남동생) 셉티미아 옥타빌라(여동생) |
[clearfix]
1. 개요
로마 제국 세베루스 왕조의 황족, 원로원 의원, 집정관. 세베루스 왕조를 창건한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의 형으로, 카라칼라, 게타 형제의 백부, 악명 높은 프라이토리아니 근위대장 가이우스 풀비우스 플라우티아누스의 외사촌 형이다. 아버지 게타, 조카 게타와는 이름이 비슷해, 이 사람은 셉티미우스 게타, 조카 게타의 경우 안토니누스 게타로 부르는 경우가 많다.동생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의 로마 진군 당시, 모이시아 속주 총독으로 재임 중 군을 이끌고 합세. 마리우스 막시무스를 비롯한 장군들과 함께 세베루스 왕조 창건에 힘을 보탰다.
세베루스 왕조의 다른 황족들과 달리, 전횡을 일삼지 않고 묵묵히 방계황족, 황제의 형으로서 책임감만 짊어진 사람으로 유명하다. 이런 품성처럼 그는 외사촌 동생 플라우티아누스의 사악하고 영악한 성격, 비열한 행태를 일찍부터 경멸했다. 따라서 동생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황제, 조카 카라칼라에게 여러 번에 걸쳐 이 문제를 인식시켰고, 병석에서 남긴 유언을 통해 플라우티아누스를 경계하라고 조언을 건넸다. 이런 이유로 셉티미우스 게타 사후, 그 조카 카라칼라는 플라우티아누스를 숙청한 뒤 큰아버지의 업적과 인품을 찬양했다.
2. 생애
2.1. 출신 가문
고향은 서기 2세기의 하드리아누스 시대부터 로마 원로원의 부와 권력을 차지한 아프리카 속주 중 동쪽 일대인 트리폴리타니아 속주. 혈통은 부모 모두 포에니 전쟁 이후 이탈리아에서 푸닉(옛 페니키아-카르타고 영향 하의 북아프리카 해안) 지방으로 이주한 이탈리아계이다. 다만, 부계의 경우 조상 중 푸닉 혈통도 일부 섞인 이탈리아 이주민의 후손이다. 부모 모두 상당히 부유한 기사계급 출신으로, 그 집안은 조부 대부터 렙티스 일대에서도 부와 명예를 가진 최상류층으로 유명했다.출신 가문은 흔히 세베루스 왕조의 성씨인 '세베루스' 때문에 세베루스로 아는 경우가 많으나, 우리나라에서 성씨라고 하는 노멘(씨족 성씨)은 셉티미우스이며, 세베루스는 그의 성씨 뒤에 붙은 코그노멘(지파 성씨)이다. 이 성씨는 이탈리아의 오래된 평민(플레브스) 가문으로, 로마와 이탈리아 안에서도 매우 희귀한 희성이자 생소한 성씨였다. 그 어원은 로마인들이 많이 애용하지 않은 개인이름(프라이노멘) 셉티무스에서 파생됐다.
이 가문이 로마 역사에서 처음 등장한 것은 공화정 말 형사재판에서 판사를 맡은 푸블리우스 셉티미우스 스카이볼라가 처음이며, 그 다음으로 등장한 인물은 폼페이우스를 이집트에서 배신하고 죽인 백인대장 셉티미우스이다. 그리고 그 다음으로 등장하는 유명인물은 아우구스투스 사후 게르마니아에서 벌어진 반(反) 티베리우스 항명사건 당시, 폭도로 변한 부하들 앞에서 목숨을 걸고 드루수스 율리우스 카이사르와 게르마니쿠스 모욕을 막으려다가 암살된 수석 백인대장 셉티미우스를 들 수 있다. 이 밖에도 네로의 악랄한 근위대장 가이우스 님피디우스 사비누스가 네로가 자살한 후 갈바가 아직 로마에 입성하지 않았을 때 "나는 사실 가이우스(통칭: 칼리굴라) 황제의 사생아다"며 반란을 유도할 당시 그 주장이 거짓말인 것을 밝혀내 내란 위기를 막아낸 근위대 백인대장 셉티미우스도 이 가문 내에서 유명했다.
그러나 여러 셉티미우스 가문 사람 중 원로원 의원을 지낸 이는 기원전 74년 치안판사를 지낸 셉티미우스 스카이볼라 정도라고 하며, 그 다음으로 유명한 이는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의 친척어른인 전직집정관 셉티미우스 아페르 형제와, 포에니 전쟁 이전까지 조상을 거슬러 올라가야 하는 먼 친척 디디우스 율리아누스라고 한다. 다만 디디우스 율리아누스는 세베루스 가문이나 노멘(성씨)이 페트로니우스 내지 디디우스인 까닭에, 율리아누스의 모계와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일가끼리 친척이라는 말도 있고, 아예 남남이나 지연도 있는데다 서로 존중해온 사이라는 설도 있다.
어쨌든 셉티미우스 게타,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형제의 본가인 셉티미우스 가문은 공화정 말이 돼서야 역사에 처음 등장한 평민 가문인데, 백인대장, 대대장을 배출해왔고 그 숫자도 많지 않았던 평민들이었다. 따라서 본국 이탈리아 내에서는 예전의 플라비우스 왕조처럼 수도 로마와 본국 이탈리아 내 로마인들에게 무척 생소한 성씨인데다 유명한 인물도 많이 없었다. 하지만 로마 제국 전체로 놓고 보면, 이야기는 살짝 달라지게 된다. 왜냐하면 셉티미우스 세베루스를 배출한 셉티미우스 씨족 내 세베루스 가문은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 때부터 부유한 기사계급 최상류층으로 이름을 날렸기 때문이다.
포에니 전쟁 후 풍요로운 푸닉 지방으로 건너간 셉티미우스 가문은 옛 카르타고에 정착해, 렙티스 마그나에 자리잡고 가세를 넓혔다. 그들이 바로 "엄격한 사람"을 뜻하는 세베루스와 "야생 멧돼지"라는 뜻을 가진 아페르, "트라키아의 게티족"을 애칭으로 부른 게타를 번갈아 코그노멘으로 사용한 세베루스 가문이다. 이 집안은 일찍부터 세베루스 가문으로 더 많이 불렸는데, 본국에 남은 종가집이 여전히 무명의 쌩평민 가문인 것과 달리 부유하기로 이름난 푸닉 지방에서도 한 손에 꼽히는 최상류 기사계급으로 잘 나갔다. 즉, 이주 가문이 본국 내 셉티미우스 가문 사람들보다 더 잘나가게 된 셈인데, 이는 당시 로마 사회를 생각해보면 매우 이례적인 케이스였다. 이런 이유 때문인지, 셉티미우스를 성씨로 쓰는 로마인은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의 마지막 후계자 세베루스 알렉산데르 암살 이후 로마사에서 보이지 않는다.
아버지 푸블리우스 셉티미우스 게타는 세베루스의 고향 렙티스 마그나 일대에서 매우 부유하고 유력한 기사계급으로, 아들 세베루스가 제위에 오르기 전부터 상당한 교양인이었던 것이 최근 렙티스 마그나와 로마의 옛 아프리카 속주 일대 비문들에서 확인되고 있다. 이는 세베루스의 조부 루키우스 셉티미우스 세베루스도 마찬가지였는데, 세베루스의 조부의 경우 트라야누스 시대동안 푸닉 지방의 로마 정부 행정관과 치안판사로 근무했고, 그의 경력은 무려 플라비우스 왕조 아래에서 이미 승승장구한 것이 확인된다고 한다. 따라서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의 집안은 일찍부터 부유하기로 이름난 푸닉 일대에서도, 손꼽히는 부유한 기사계급이었는데, 조부 루키우스의 형 가이우스 클라우디우스 셉티미우스 아페르 일가의 경우에는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와 그의 형 게타가 원로원에 입성하기 전부터 집정관을 연임하고 로마 귀족 반열에 오른 상당히 이름난 푸닉 지방 출신의 원로원 귀족집안을 이뤘다. 더군다나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의 조상 중 이탈리아에 남은 조상들까지 계속 올라가면 세베루스의 제위경쟁자 디디우스 율리아누스와도 연결됐다. 왜냐하면 증조부 대부터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가문은 푸닉 일대의 웬만한 이탈리아계 이주 가문들과 혼맥을 통해 거대한 네트워크를 연결했기 때문이다.
2.2. 부모와 초기 경력
조카 안토니누스 게타와 이름이 같아서, 흔히 셉티미우스 게타라고 부르는 203년 집정관 푸블리우스 셉티미우스 게타는 서기 143년 푸닉 지방에서 세 손가락 안에 드는 부촌인 렙티스 마그나(오늘날의 리비아 북부)에서 태어났다. 이 도시는 이탈리아 이주민들의 이주 식민도시로 푸닉 지방의 수출품들인 농산물, 가축, 맹수, 아프리카 내륙 노예들이 이탈리아, 히스파니아, 그리스, 아나톨리아, 시리아 등지로 나가는 항구 도시였다. 그는 이곳에서 수대에 걸쳐 치안판사, 행정관을 배출한 가문 출신인 푸블리우스 셉티미우스 게타와 그 아내 풀비아 피아 사이에서 태어났다. 밑으로는 남동생 루키우스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여동생 셉티미아 옥타빌라가 있었다.로마 제국 전체에서 그리스, 아나톨리아 지방과 함께 가장 부유한 푸닉 지방의 최상류층 집안 출신답게 어릴 적부터 로마 사회에서 엘리트로 필수적인 교육을 모두 배웠다. 이런 이유로 셉티미우스 게타는 성년식을 마칠 무렵부터 법정에서 소송을 재판하는 관직인 민사재판소 치안판사 10자리 중 한 자리를 얻었고, 이를 배경 삼아 로마 원로원에 입성하기 위한 예비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이후 그는 남동생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와 함께, 삼촌과 사촌형 세베루스의 도움으로 본국 이탈리아로 이주. 옛 조상들의 터에 자리를 잡고 본격적인 정치 경력을 쌓기 시작했다.
2.3. 출세와 로마 진군
민사재판소 치안판사 경력을 쌓은 뒤, 삼촌과 사촌형의 도움 아래 브리타니아 속주에 주둔 중인 제2군단 아우구스타 대대장 자리를 얻고 군 경력을 쌓았다. 이는 당시 황제인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예비 원로원 의원 후보 중 군 경력이 있는 이들을 높게 평가해 우선권을 부여한 조치를 의식해 내린 결정으로 추정된다. 하여 셉티미우스 게타는 이를 시작으로 본격적인 명예로운 경력을 밞아나가게 된다. 그는 군경력과 민사재판소 치안판사 경력을 발판삼아, 재무관, 안찰관에 연달아 올랐고 원로원 의원이 됐다.185년에는 제1군단 이탈리카에 배속돼 야전 사령관 역할을 수행했다. 이후 187년과 188년에는 시칠리아 파견 총독이 되어 원로원 의원 중 행정, 군사 부문에서 두각을 나타낸 것을 인정받아 오늘날의 포르투갈 대부분과 스페인 일부인 히스파니아 루시타니아 총독으로 파견됐다. 그리고 191년에는 집정관 경력을 쌓게 돼 제국 안에서 능력 있고 성실한 인재로 평가받게 됐다. 이때가 콤모두스 황제 시절인데, 콤모두스는 나라를 내팽겨치듯이 방치했음에도 셉티미우스 게타에게 제국 핵심 병력이 주둔 중인 모이시아 총독 자리를 내렸다.
193년, 동생 셉티미우스 세베루스가 부임지 판노니아에서 황제를 자처하고 부하들에게 선포받은 형식으로 '다섯 황제의 해'의 내란에 뛰어든다. 이에 셉티미우스 게타는 동생 세베루스에 대한 절대적 지지와 후원을 선포하면서, 모이시아 주둔 로마군의 주력을 데리고 동생이 있는 카르눈툼으로 직접 모이시아 주둔 병력을 이끌고 합세. 외사촌 가이우스 풀비우스 플라우티아누스, 형제와 친분 있는 동향 출신 마리우스 막시무스 등과 의기투합해 로마 진군을 감행한다.
로마 진군 후, 셉티미우스 세베루스가 원로원을 무력을 억압하고 황제로 인정받은 뒤 게타는 한발 뒤로 물러나 195년 다키아 총독으로 파견된다. 이는 정황상 페스켄니우스 니게르를 공격할 동생의 후방을 지켜주면서 후방 지원을 해줄 의도로 내린 결정으로 추정된다.
2.4. 플라우티아누스와의 대립과 사망
모든 내전이 동생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의 승리로 끝난 뒤, 게타는 크레타, 키프로스 재무관, 법무관 자리에 임명되고 203년 집정관에 오르며 황제의 형에 걸맞은 지위, 권력을 얻게 된다. 그런데 이 시기, 그는 외사촌 동생이며 당시 세베루스 정부의 2인자인 근위대장 플라우티아누스와 대립하게 된다. 그 이유는 어머니의 조카, 외삼촌의 아들인 플라우티아누스의 비열하고 사악한 성격과 행보, 과도한 셉티미우스 게타 견제 때문이었다. 더욱이 셉티미우스 게타는 로마 진군 이전부터 외사촌 동생 플라우티아누스를 크게 믿고 연인 사이라고 할 정도로 우애가 깊은 동생 세베루스에게 그를 경계하라고 여러 번 진언해, 플라우티아누스 역시 게타를 증오했다.이런 상황에서 202년 여름, 제국 동방인 시리아에 머물던 셉티미우스 세베루스가 로마로 돌아왔다. 이때 세베루스 황제는 심각한 통풍으로 고생 중인데다 56세라는 로마 기준으로 꽤 고령인 까닭에, 공동황제이며 후계자인 장남 카라칼라를 아우구스투스 직위로 올리면서 맏며느리로 플라우티아누스의 딸 푸블리아 풀비아 플라우틸라를 선택했다. 이 선택에 조카 카라칼라는 강하게 반발했고, 셉티미우스 게타 역시 조카의 의견이 맞다는 듯 동생에게 진지하게 의견을 밝혔다. 허나 세베루스 황제는 플라우티아누스와 한때 연인 관계였다는 소문까지 돌 정도로 사이가 깊어, 이를 무시하고 202년 이 결혼을 강행시켰다.
이런 상황에서 셉티미우스 게타는 203년 또는 204년 병으로 사망한다. 이때 그는 병석에서 자신의 임종을 지켜보는 동생 세베루스 황제, 조카 카라칼라에게 다시 한 번 플라우티아누스의 야망과 그로 인한 반란 징후를 경계할 것을 진언하고, 자신이 근위대장인 외사촌에 대해 느낀 두려움을 밝혔다. 이는 플라우티아와의 결혼을 반기지 않고, 자신을 사랑한 백부에 대한 애뜻함으로 똘똘 뭉친 조카 카라칼라가 장인, 아내 모두에게 극도의 증오심을 느낀 원인 중 하나가 됐다.
동시대 사람으로 원로원 의원인 디오 카시우스는 이에 관해, 자신의 일기 형식으로 기술한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의 형 게타 죽음 이후 상황을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플라우티아누스의 이러한 행동 대부분은 세베루스 자신이 알아차리지 못했으나, (사실은) 알고도 모르는 척 했다. 그렇기에 그(세베루스)의 형 게타(카라칼라, 게타 형제의 큰아버지)가 임종 직전에 플라우티아누스에 대한 모든 사실을 그에게 밝혔을 때, 게타는 근위대장을 미워하고 더 이상 그(플라우티아누스)를 두려워 하지 않았기 때문에, 황제는 형의 동상을 포룸에 세웠고 그는 영예를 지킬 수 있었다. 헌데 이것 때문에 (플라우티아누스는) 그 대부분 권한이 박탈됐다. 따라서 플라우티아누스는 매우 분개했다. 그는 이전에도 자신의 딸을 무시하는 안토니누스(카라칼라)를 미워했지만, 지금은 그에게까지 무시가 계속되자 책임의 원인을 제공한 안토니누스를 그 어느 때보다 싫어했고, 그에게 다소 가혹하게 행동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이유로 안토니누스는 가장 뻔뻔한 존재인 자신의 아내에게 혐오감을 느꼈을 뿐만 아니라 플라우티아누스가 자신의 모든 일에 계속 간섭하고 모든 일에 대해 책망함에 대해 원한을 느꼈다."
디오 카시우스, 《로마사》, <베수비오 화산 폭발과 플라우티아누스 몰락 중 일부>
디오 카시우스, 《로마사》, <베수비오 화산 폭발과 플라우티아누스 몰락 중 일부>
3. 사후 이야기
카라칼라는 큰아버지 셉티미우스 게타가 자신과 아버지에게 플라우티아누스에 관하여 밝힌 두려움, 경계심과 황실을 위해 진언한 것을 깊이 마음에 새겼다. 이는 플라우티아누스를 연인처럼 여긴 세베루스 황제도 비슷해, 그는 형 게타의 말을 흘러 듣지 않고 형의 업적과 공로를 치하하면서 형의 동상을 포룸에 세웠다.반면 플라우티아누스는 외사촌형 게타가 이런 말을 남기며 자신을 위험 인물로 지목함을 혐오했다. 그래서 그는 셉티미우스 게타에 대한 증오심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면서, 게타와 사이가 각별했던 사위 카라칼라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고, 율리아 돔나의 시종들까지 협박하고 때론 납치 후 고문해 황실 내분은 심화된다. 그 결과, 카라칼라는 자신이 정권을 잡으면 자신과 어머니, 백부를 위협한 장인과 아내를 가만히 두지 않겠다고 으름장까지 놓았고 플라우티아누스 역시 사위 카라칼라가 배은망덕하다면서 혼줄을 내주겠다고 맞불을 놓았다.
결국 205년, 셉티미우스 게타의 우려대로 황실에선 피바람이 분다. 플라우티아누스는 카라칼라의 궁중 쿠데타로 비무장 상태로 체포돼 그 자리에서 교살됐다. 플라우티아누스를 제거한 카라칼라는 후일 이 사태를 예견해준 백부의 업적을 다시 한 번 찬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