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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6-28 14:23:07

플레브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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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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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기원3. 위상의 변화4. 플레브스의 구성원5. 포에니 전쟁 이후의 혼란6. 이후

1. 개요

plebs, Plebeians.

고대 로마평민 계급. 파트리키노예에 속하지 않은 로마의 모든 시민을 일컫는 용어이다.

2. 기원

'플레브스(plebs)'라는 용어의 정확한 기원은 알려진 바 없지만, 대중을 의미하는 그리스어 plēthos와 관련이 있을 수 있다. 라틴어에서 plebs는 단수 집합 명사이며, 속격은 plebis이다. 로마 시내에 정착한 4개의 부족에 속한 이들은 때때로 "plebs urbana(도시 사람들)"이라 일컬어졌고, 로마 시 주변의 시골에 정착한 31개의 부족에 속한 이들은 "plebs rustica(농촌 사람들)"로 일컬어졌다. 플레브스는 종종 로마 지식인들에게 경멸적인 의미로 사용되었다.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는 이들을 "단순하고 저속하며 교육받지 못한 무리"로 격하하면서, "존경받고 올바른 생각을 가진 옵티마테스가 이들을 국가에 이로운 방향으로 이끌어 나아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3. 위상의 변화

티투스 리비우스 파타비누스에 따르면, 로마 왕국의 건국자 로물루스원로원 의원으로 삼은 100명의 인사들이 "아버지(patres)"로 불렸고, 이들의 후손이 파트리키가 되었다고 한다.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는 로물루스가 지혜로운 원로 100인에게 고귀한 신분을 부여함으로써 플레브스와 분리된 파트리키가 탄생했다고 주장했다. 할리카르나소스의 디오니시오스는 로물루스가 부를 기준으로 삼아 파트리키를 선택했다고 밝혔다.

하지만 현대 학계에서는 로물루스가 파트리키를 창설했다기보다는 부족 국가로 출발한 로마가 주변의 세력을 흡수하고 발전하는 과정에서 이같은 개념이 도래했다고 본다. 즉, 로마가 흡수한 부족의 옛 부족장은 파트리키, 부족민은 플레브스로 편입되었다는 것이다. 이때 자칫 소원해질 수 있는 부족장과 부족민들의 관계를 기존처럼 유지하기 위해 클리엔텔라 관계가 등장했다. 파트리키는 자신 휘하의 평민들을 "클리엔테스"로 삼아서 보호해줬고, 클리엔테스는 그런 그들을 "파트로누스"로 받들며 그들이 정치적으로 성공할 수 있도록 지원했다.

로마의 마지막 국왕 루키우스 타르퀴니우스 수페르부스를 타도하고 권력을 잡은 파트리키들은 자신들만이 통치권을 독점적으로 행사할 권리가 있다고 여기고 평민들이 권력에 접근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그들은 대다수 요직을 독차지하고 원로원에서 국정을 이끌었다. 특히 신들과 소통하고 신성한 의식을 수행해야 할 의무가 있는 폰티펙스 막시무스 등 모든 사제직은 오직 파트리키만 맡을 수 있었다. 플레브스가 관직을 맡는 게 금지된 것은 아니었지만 출세 과정에서 많은 제약이 따랐고, 최고 행정관인 집정관은 귀족들이 독점했다.

게다가 파트리키들은 플레브스들에게 돈을 빌려주고, 그들이 갚지 못하면 노예로 팔거나 죽이는 짓을 거리낌없이 저질렀다. 로마군의 주력인 군단병을 맡아서 잦은 전쟁에 참여하느라 농사에 전념하기 힘들었던 플레브스들은 막대한 빚에 허덕여야 했던 반면, 전쟁을 통해 얻은 토지는 고스란히 귀족들의 수중에 들어갔다. 자연히 플레브스들은 강한 불만을 품었고, 사회 갈등이 심화되었다. 급기야 기원전 494년 평민들이 더이상 전쟁에 동원되는 것을 거부하고 아니오 강 뒤편에 있는 성산(聖山)[1]에 집결해 새로운 도시를 세우려 하는 성산 사건이 벌어졌다. 귀족들은 처음에는 이들을 힘으로 억누르려 했지만, 평민들의 협조 없이는 외적의 침략에 맞서고 국가를 운영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어쩔 수 없이 타협하기로 했다.

이후 수백년간 파트리키와 평민이 충돌하고 타협하는 과정을 반복하면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행사하던 파트리키들은 평민에게 많은 것을 양보해야 했다. 기원전 494년 평민회가 창설되어, 원로원이 정책을 결정해도 민회의 동의를 거쳐야만 집행할 수 있게 하였다. 또한 평민의 대표자로서 호민관이 신설되었고, 평민이 빚을 갚지 못한다는 이유로 노예로 전락하는 것도 금지되었다. 기원전 450년엔 로마 최초의 성문법12표법이 도입되었다. 이때 귀족과 평민의 결혼을 금지하는 법안이 기재되었지만, 기원전 445년 평민들이 또다시 성산 사건을 단행하며 강력하게 항의하면서 폐기되고 귀족과 평민의 결혼을 허용하는 카눌리아 법(Lex Canuleia)이 도입되었다.

기원전 367년 리키니우스-섹스티우스 법(Licinio -Sextian rogations)이 도입되면서 파트리키의 공공 토지 소유가 제한되고 호민관 직무를 수행한 인사가 원로원 의원에 우선적으로 편입되는 것이 인정되었으며, 2명의 집정관 중 한 명은 무조건 플레브스가 선출되어야 했다. 파트리키는 이에 대응해 귀족만이 재임할 수 있는 법무관을 설립하여 자신들의 권리를 보장받게 했으나, 나중에는 플레브스 출신 인사가 법무관에 선임되는 것이 허용되었다. 기원전 300년 오굴니우스 법(lex Ogulnia)이 도입되면서 그동안 파트리키만 도맡았던 사제를 플레브스가 맡을 수 있게 되었다. 마지막으로 기원전 287년 호르텐시우스 법이 제정되면서, 민회가 결정한 정책은 원로원의 승인을 거치지 않더라도 효력을 갖게 되었다.

이렇듯 플레브스들이 오랜 투쟁과 타협을 병행한 끝에 정치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를 획득하고 법적으로는 파트리키와 동등한 대우를 받게 되었지만, 파트리키가 무기력하게 권력을 내어준 것은 아니었다. 집정관에 당선된 평민들은 대부분 강력한 입지를 갖춘 파트리키와 클리엔텔라 관계를 맺은 이들이었고, 이후에는 파트리키로 가득한 원로원에서 '신참' 취급받았기 때문에 그들의 눈치를 볼 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파트리키들은 집정관 한 자리를 평민에게 양보한 뒤에도 특권을 향유할 수 있었다. 또한 최고 사제직인 폰티펙스 막시무스는 극히 일부 사례를 제외하면 파트리키들의 전유물이었기에, 종교가 지대한 비중을 차지하는 로마 사회에서 파트리키의 영향력은 여전히 강력했다.

4. 플레브스의 구성원

로마 공화국의 계급 투쟁이 종식되고 안정을 찾은 시기의 로마법에 따르면, 로마 시민권을 보유한 이들은 동등한 대우를 받아야 했다. 이들은 선거권피선거권이 있었으며, 다른 로마 시민과 합법적으로 결혼할 수 있는 권리가 있었고, 로마에서 재판을 받을 권리, 고문을 당하지 않을 권리, 십자가형 등 끔찍한 형벌을 면제받을 권리 등 각종 혜택을 누릴 수 있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보유하는 재산에 따라 사회적인 대우가 천차만별이었다.

상업이나 광업 등의 사업을 대규모로 운영해 말을 사서 무장할 수 있을 정도로 막대한 재산을 보유한 이들은 에퀴테스로 분류되어 일반 평민에 비해 정치, 사회적으로 많은 우대를 받았다. 그들은 투표 시 일반 평민보다 훨씬 많은 투표권을 행사할 수 있었고, 기병대를 포함한 고급 병과의 장교에 우선적으로 뽑혔다. 그 외에도 부유한 평민들은 집안의 지원을 바탕으로 쿠르수스 호노룸(Cursus Honorum, 명예로운 경력)을 거쳐 최고 행정관인 집정관까지 이르며 명예를 얻었다. 처음 집정관에 올라 명예를 얻은 이들은 노부스 호모(novus homo, 신참자)로 일컬어졌고, 이들의 후계자로서 명예와 부를 이어받아 성공가도를 달리는 자들은 노빌레스(Nobiles, 잘 알려진 자들)로 일컬어졌다. 이들은 본래 평민 출신이었기에 평민만으로 구성된 민회에 참여하여 의결권을 행사하고 호민관으로 뽑히는 등 평민들의 대표자로 행세하면서도 잔존한 파트리키 가문과 거리낌없이 통혼하고 그들과 같은 특권을 누렸다.

막강한 재산을 보유하지는 못했지만 자기만의 토지를 보유하거나 먹고 살만한 밑천이 있는 평민들은 "plebs media(중간 사람들)"로 일컬어졌다. 이들은 대부분의 시간을 생업에 종사하면서 병역과 세금 납부의 의무를 수행했다. 정치판에 직접 뛰어드는 일은 별로 없었지만 가급적 유력한 귀족 또는 '평민의 대표자'와 클리엔텔라 관계를 맺음으로써 그들의 보호를 받는 대가로 그들이 정치적으로 성공할 수 있도록 지원했다. 로마군의 중추인 군단병은 바로 이들이 맡았기에, 사회적으로 큰 비중을 차지했다.

마지막으로 재산을 거의 또는 전혀 소유하지 않은 평민들도 있었다. 로마법에서 11,000 에사리우스(assarius) 이하의 재산을 소유한 이들은 병역의 의무를 수행할 수 없는 '프롤레타리(proletarii, 무산자)'로 분류되었으며, 그들의 자녀인 프롤레스(prōlēs)는 인구 조사를 할 때 재산을 대신해 등재되었다. 그들은 플레브스의 최하위 계급으로 분류되어 열악한 대우를 받았다. 명목상 투표권을 행사할 수는 있었지만, 다른 계급이 투표를 마친 뒤에야 마지막으로 행사할 수 있었으며, 투표는 대개 그 전에 판가름되기 때문에 사실상 투표권이 없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5. 포에니 전쟁 이후의 혼란

테오도르 몸젠 등 19세기 독일 역사가들이 제기하고 오랫동안 정설로 받아들여진 이야기에 따르면, 로마는 포에니 전쟁에서 승리하고 지중해 세계를 석권한 뒤 막대한 영토와 부를 획득했다. 그러나 그 헤택은 온전히 원로원을 중심으로 한 부유층에게 돌아갔고, 자영농인 군단병들은 머나먼 해외로의 원정에 자주 동원되느라 농사를 망쳐 자주 파산하곤 했다. 또한 전쟁으로 획득한 넓은 영토는 부유층의 손에 넘어가 수많은 노예가 농지 경영에 투입되었다. 그 결과 빈부격차가 갈수록 극심해졌고, 로마 군단에 지원할 수 있는 자격 요건을 가진 재산을 가진 자들의 수는 갈수록 줄어들고 로마 군단은 갈수록 약화되었다. 그라쿠스 형제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농지 개혁을 시도했지만, 원로원 강경파의 강력한 반발로 실패했다.

원로원은 플레브스의 몰락으로 로마 군단병의 조달이 쉽지 않게 된 상황을 만회하기 위해 재산 하한선을 낮춰 징집 대상의 폭을 넓혔지만, 군단병들의 무장 수준이 악화되고 사기가 급락하는 것을 막지 못했다. 이로 인해 로마군의 전투력은 포에니 전쟁 시기에 비해 크게 떨어졌고, 킴브리 전쟁에서 게르만족에게 심각하게 고전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이에 가이우스 마리우스는 무산자들을 군대에 입대시키는 대신 국가가 봉급과 경비를 줘서 병역을 수행하게 하고, 기존의 병역 대상자들은 군대에 가지 않을 경우 이에 따른 세금을 내는 것으로 책임을 지게 하고, 전쟁이 끝난 뒤 병사들이 토지를 비롯한 보상을 받게 하는 등 일련의 군제개혁을 단행했다.

마리우스의 개혁은 큰 성공을 거뒀다. 무산자들은 새로운 활로를 찾기 위해 군대에 앞다퉈 입대했고, 국가의 지원을 토대로 충분한 무장을 갖추고 전의를 끌어올린 로마군은 킴브리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로마 병사들은 자신들에게 돈을 지급하고 전역 후 정착할 토지를 지급할 책임이 있는 지휘관에게 전적으로 의존했고, 이로 인해 로마군의 사병화 현상이 벌어졌다. 이후 로마 정치인들은 사병화된 군단병들을 거느린 채 권력을 쟁취하기 위해 정적들을 상대로 투쟁을 벌이기 시작했고, 자연히 로마 내전이 빈번하게 벌어졌다.

이상이 20세기까지 이어진 통설이었지만, 최근 학계에서는 플레브스가 대거 파산한 것과 마리우스가 대대적인 군제 개혁을 단행했다는 이야기는 사실이 아니라는 쪽으로 의견이 모이고 있다. 고고학자들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기원전 2세기 당시 남부 이탈리아의 많은 도시들이 한니발 바르카에 동조했다가 막대한 토지를 몰수당하여 대지주들의 농장에 들어간 것은 사실이지만, 이탈리아 중부와 북부는 여전히 군단병을 구성하는 평민들이 소규모 농장을 대거 운영하고 있었다. 당시 실시된 인구 조사 역시 군역 대상자가 줄어든 것과는 거리가 멀다. 기원전 136~135년에 실시된 인구 조사에 따르면, 로마군에 복무할 수 있는 장정은 317,993명이었다. 제2차 포에니 전쟁 당시 로마에는 성인 남성이 30만 명도 되지 않았던 점을 고려한다면 충분히 많은 숫자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마군은 인력난에 시달렸다. 본래 로마군에 입대하려면 적어도 11,000아스의 재산을 갖춰야 했지만 제2차 포에니 전쟁이 한창이던 기원전 213년에 4,000아스로 삭감되었고, 기원전 123년에는 1,500아스로 재차 삭감되었다. 그럼에도 인력난이 심해서 전장으로 출진해야 하는 집정관들이 병력을 모집하길 힘들어 했으며, 그나마 모집한 이들 중에는 이전에는 징집 대상이 아니었던 자들이 다수였기 때문에 무장 상태와 전투력이 예전만 하지 못했다. 그러다 보니 마니풀라 체제에서 재산 정도에 따라 벨리테스, 하스타티, 프린키페스, 트리아리를 구분하는 것도 갈수록 모호해져서 나중에는 구분하는 것이 의미가 없어졌고 부대원들간의 단합력도 떨어졌다.

많은 학자들은 이 현상의 원인은 로마가 지나치게 많은 전쟁을 연이어 치르고 로마에서 멀리 떨어진 지역에서 작전을 수행하는 일이 반복되면서 복무 대상자들의 피로가 극심해진 데 있다고 진단한다. 포에니 전쟁까지만 해도 로마와 자신들의 생존을 위해 반드시 이겨야 한다는 사명감을 품은 장정들을 충분히 모집할 수 있었지만, 이베리아 반도, 발칸 반도, 시리아, 북아프리카 등 로마에서 멀어진 지중해 세계에서 수많은 전쟁을 치러야 하고 복무 기간도 갈수록 늘어나자, 굳이 머나먼 곳에서 죽을 고비를 넘기며 싸워야 할 동기를 느끼지 못하고 복무를 기피하는 이들이 갈수록 늘어났다. 로마법에는 복무를 기피한 자들의 시민권을 박탈하고 노예로 삼고 심할 경우 사형에 처하는 규정이 있었지만, 재산과 인맥을 충분히 쌓아둔 이들이 로비를 통해 빠져나오기 일쑤였고, 로마 정치인들 역시 표심을 잃을 것을 우려해 법률을 엄격하게 적용하지 않았다. 결국 법망을 피할 만한 인맥이나 재산이 없는 자들만 억지로 끌려왔으니 전의가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마리우스가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로마 시민 계급 중 가장 낮은 계급까지 징병 대상으로 삼은 것은 발레리우스 막시무스 등 당대 역사가들이 증언하고 후대 역사가 플루타르코스도 뒷받침하기에 사실일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징병제에서 모병제로 바꾸면서 무산자들이 로마군의 주축이 되었다는 설은 아무런 근거가 없다. 스스로 무장할 수 있는 재산을 가진 시민들은 마리우스 이후에도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 루키우스 리키니우스 루쿨루스,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마그누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등이 이끄는 군대에 꾸준히 징집되었다. 마리우스가 한 일은 기존의 징집 시스템으로 충분한 병력이 모이지 않는 상황을 무산자들을 모집하는 것으로 만회한 것이지만, 이 역시 제2차 포에니 전쟁 이래로 흔히 있는 일이었다. 다수의 학자들은 로마 제국 건국 후에도 수백 년간 로마 군단병 상당수는 무산자가 아니라 재산을 어느정도 갖춘 평민이었다고 추정한다.

또한 복무 기한 설정 및 퇴역병에게 토지 지급이 의무화된 것이 마리우스에 의해 이뤄졌다는 것을 입증하는 문헌 기록은 존재하지 않는다. 전쟁이 끝난 뒤 확보한 영토에 식민도시를 세우고 퇴역 군인들을 거기에 이주시켜서 토지를 경작하게 하는 조치는 로마 공화국 초기부터 비일비재하게 벌어진 일이었으며, 마리우스도 킴브리 전쟁을 마무리한 뒤 이런 선례에 따랐을 뿐이다. 복무 기한 역시 아우구스투스 시대에야 정해졌지, 그 이전에는 확실히 정해지지 않고 단지 '전쟁이 끝날 때까지'라는 애매한 조건이 있었을 뿐이다. 퇴역병들에게 토지 분배를 주는 것이 일반화된 것은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가 내전에서 승리한 후 에트루리아 주민들의 토지를 강제로 빼앗아서 퇴역병들에게 나눠준 이후부터였다.

이렇듯 로마가 처한 상황은 19세기 독일 학자들의 주장과는 달리 그렇게 나쁘지 않았지만, 동맹시 전쟁술라의 내전 이후 로마 정계는 두 패로 나뉘었다. 옵티마테스 파벌은 현 체제의 변화를 극도로 꺼리고 현상유지를 추구했다. 반면, 포풀라레스 파벌은 평민의 지지를 등에 업어 기존의 정치 판도를 뒤엎어서 권력을 획득하려 했다. 일반적으로는 플레브스들이 항상 포풀라레스를 지지하고 옵티마테스를 미워했다고 알려졌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다. 수백년간 로마 정계에서 맹활약하며 수많은 클리엔테스를 거느린 옵티마테스는 대체로 민중의 존경을 받았다. 로마 평민들은 귀족들이 제 이권만 챙긴다며 불만을 토로하고 포풀라레스를 적극 지지하다가도, 정작 사회가 혼란해지면 귀족들의 영도하에 안정적인 삶을 누렸던 과거를 그리워하고 옵티마테스를 지지하곤 했다.

실제로 호민관 푸블리우스 클로디우스 풀케르의 정치 공세로 키케로가 축출될 때 민중들은 적극적으로 지지했지만, 이후 클로디우스 패거리들의 정치 테러가 꾸준히 벌어지자 키케로를 그리워한 끝에 1년만에 복귀시켰다. 또한 그들은 포풀라레스 파 호민관 소 마르쿠스 리비우스 드루수스가 시민권을 로마 시에서 이탈리아 전체로 확대하자는 법안을 제시했을 때 귀족들보다 더욱 심하게 반발했다. 로마 평민 역시 자신들의 특권이 위협받으면 강경한 반응을 보이는 건 귀족과 다를 바 없었던 것이다.

또한, 포풀라레스가 추진한 정책이 오히려 민중에게 해를 끼친 일도 종종 벌어졌다. 푸블리우스 클로디우스 풀케르는 민중의 호응을 얻기 위해 무료로 곡물을 받을 대상을 대폭 늘리는 법안을 통과시켰다가, 로마 시의 식량이 고갈되는 바람에 기근이 발생해 원로원이 폼페이우스에게 기근을 해결하기 위해 어떤 수단이든 쓸 수 있는 권한을 맡겨야 했다. 그리고 옥타비아누스필리피 전투 후 고참병들이 정착할 토지를 마련하고자 캄파니아, 삼니움, 움브리아, 피케눔, 에트루리아, 북부 이탈리아 등지의 최소 40개 도시의 토지를 강제 몰수했다. 이때 그는 강력한 영향력을 갖춘 원로원 계급 및 기사계급 인사들의 눈치를 봐서 그들의 토지를 건드리지 않거나 약간만 몰수한 데 비해, 평민들의 토지를 가차없이 몰수했다. 평민의 권익을 위해 싸운다는 자가 이런 행보를 보이니 당연히 민심은 격앙되었고, 이는 페루시아 내전이 발생하는 원인이 되었다.

이렇듯 포풀라레스 측에서도 여러 문제가 있었지만, 로마 공화국에 심각한 폐단이 존재한다는 건 누가 봐도 명백했고, 현상유지만 고집하는 옵티마테스 측이 이를 해결할 가망이 없는 것 역시 분명했다. 결국 민중의 편을 자처한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옵티마테스와의 대결에서 승리했고, 뒤이은 옥타비아누스가 정적들을 대거 처단하고 아우구스투스를 자처하면서, 로마는 공화국에서 제국으로 전환되었다.

6. 이후

로마 제국 최초의 황제에 등극한 아우구스투스와 그의 후계자들은 자신들을 민중파로 내세우며 집권의 정당성을 널리 홍보했다. 그러나 평민들은 공화국 시절과는 달리 정치에 참여할 기회를 사실상 박탈당했다. 황제가 호민관의 권한을 독식하면서 평민들이 호민관을 선출하는 것은 옛날 얘기가 되어버렸고, 민회는 아우구스투스 집권 이래 권력을 차츰 상실하다가 나중에는 아예 열리지 않았고, 집정관은 황제의 선택을 받은 신참자가 거쳐가는 명예직 수준으로 전락했다. 그 외의 요직들은 전부 황제의 총애를 받은 인사들이 독식했다. 황제는 빵과 서커스로 대표되는 복지 정책을 적극적으로 실시해 평민들의 정치 참여 욕구를 잠재웠다.

이후 플레브스의 정치적 의의는 희박해졌고, 단지 원로원 의원과 에퀴테스, 노예, 속주민에 해당하지 않는 로마 시민권자를 가리키는 용어로 사용되었다. 그러다 212년 카라칼라 황제가 안토니누스 칙령을 공표해 속주민 모두에게 로마 시민권을 부여하면서, 기존의 속주민과 플레브스를 시민권 소유 여부로 구분하던 관례도 사라졌다. 5세기에 서로마 제국이 멸망하면서 로마 시민권의 의미가 퇴색된 후, 평민들은 난세에서 살아남기 위해 영주, 기사 등 가까운 권력자의 보호를 받는 대가로 신체적, 재산적 자유를 일정부분 상실한 농노가 되었다.


[1] 현재 이탈리아 로마 몬테 사크로(Monte Sacr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