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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배경3. 전개
3.1. 이그나티오스의 몰락과 포티오스의 대두3.2. 교황 니콜라오 1세의 개입3.3. 불가리아 문제3.4. 봉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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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Photian schism.

서기 863년~867년 콘스탄티노폴리스 세계 총대주교 이그나티오스의 해임과 포티오스의 선임을 놓고 서방 가톨릭과 동방 정교회가 대립한 사건. 교황동로마 제국의 종교 정책에 본격적으로 간섭한 첫번째 사건이다.

2. 배경

파일:2331.jpg
테오도라 황후.

842년 1월 20일, 성상 파괴주의를 고수하던 동로마 제국 황제 테오필로스이질에 걸려 38세의 나이에 사망했다. 아들 미하일 3세가 뒤이어 황위에 올랐지만, 고작 2살밖에 안 됐기 때문에 어머니 테오도라 황후가 국정을 대신 돌봤다. 그녀는 843년 3월 초에 공의회를 소집한 뒤 성상 파괴주의를 고수하던 총대주교 요안니스를 해임하고 성상 옹호론자 메토디오스를 새 총대주교로 선출했으며, 제2차 니케아 공의회에서 결정한 성상 파괴주의 단죄를 재차 추인했다.

총대주교 메토디오스는 성상 파괴주의자와 성상 옹호론자간의 극한 대립이 반복되는 걸 막고 싶어했다. 그는 이전 총대주교 요안니스가 여생을 편히 보낼 수 있도록 배려했고, 성상 파괴주의자들이 이전의 잘못을 뉘우치고 새사람으로 거듭나겠다고 다짐한다면 교회에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러나 성상 파괴주의자들에게 보복해야 한다고 여겼던 강경파는 이러한 총대주교의 온건 정책에 반발했다. 특히 스타우디오스 수도원의 수도자들이 이러한 입장을 취했는데, 메토디오스는 그들 중 많은 이를 파문했다.

파일:이그나티오스.jpg
이그나티오스.

그러던 847년 총대주교 메토디오스가 사망한 뒤, 테오도라 황후는 신임 총대주교에 미르마라 해의 테레빈토스(현재 타브산 섬)의 수도원장 이그나티오스를 선임했다. 그는 성상 파괴주의자들에게 매우 적대적이었고, 그들에게 온건한 태도를 보이는 자들 역시 처벌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총대주교에 취임하자마자 당시 시라쿠사 대주교였고 온건파의 지도자였던 그레고리오스 아스베스타스를 해임하면서 자신의 뜻을 만천하에 드러냈다. 그는 이후에도 그레고리오스에 대한 규탄을 이어가다가 853년 종교회의에서 파문에 처했다.

그레고리오스는 로마의 교황들에게 억울함을 호소하며 자신이 복직할 수 있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또한 이그나티오스의 적들은 그가 공의회에서 정식으로 선출되지 않았고 단순히 테오도라에 의해 임명되었으니 진정한 총대주교가 아니라고 주장했다. 이그나티오스가 파견한 사절 라자로스는 로마에서 이그나티오스의 정당성을 입증하기 위해 고군분투했고, 교황청은 확고한 성상 옹호론자로서 자신들과 입장을 같이하는 이그나티오스를 적으로 만들지 않기로 했다. 이에 온건파는 포티오스를 대표로 내세워 총대주교에 대항하기로 결의했다.

3. 전개

3.1. 이그나티오스의 몰락과 포티오스의 대두

파일:포티오스.jpg
포티오스.

855년 11월 20일, 궁정 쿠데타가 일어나면서 테오도라 황후가 수도원으로 강제 이송되고 테오도라의 오빠 바르다스가 실권을 장악했다. 포티오스는 바르다스의 조언자가 되었고, 이그나티오스를 실각시킬 기회를 엿봤다. 그러던 어느 날, 바르다스는 자신의 며느리와 사랑에 빠져 조강치저를 버렸다. 그는 이를 공개적으로 규탄하고, 858년 예수공헌축일에 아야 소피아 성당의 성찬예배를 공개적으로 거부하고 바르다스를 파문에 처했다. 바르다스는 이에 분개하여 그를 축출할 음모를 꾸몄다.

몇달 후, 미하일 3세는 어머니 테오도라와 두 여동생을 블라케르나이 근처의 카리아노스 수녀원으로 보내 삭발식을 거행하게 했다. 그러나 그는 삭발식을 맡아달라는 황제의 요구를 거부했다. 바르다스는 기회를 포착하고 황제에게 총대주교와 테오도라가 동맹을 맺었다고 모함했다. 여기에 게베온이라는 자가 느닷없이 나타나 자신이 테오도라가 전 남편과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이라고 주장했다. 바르다스는 이 자의 배후에 총대주교가 있다고 모함했다. 미하일 3세는 바르다스의 설득에 넘어갔고, 858년 11월 23일 그를 체포해 테레빈토스 섬의 수도원으로 유폐했다.

그 후 학자였던 포티오스가 머리를 깎고 주교가 되었고, 그레고리오스 아스베스타스는 시라쿠사 대주교로 복직했다. 게베온은 재판에 회부된 뒤 처형되었다. 이후 이그나티오스의 후임자를 결정하기 위한 공의회가 열렸고, 포티오스는 주교가 된지 얼마 되지 않아 부보제, 보제, 사제로 잇달아 선임되었으며, 858년 12월 25일 성탄절에 총대주교로 선임되었다. 그러나 이그나티오스가 끝까지 사임을 거부하면서, 상황은 점점 복잡해졌다. 스튜디온 수도원 등 많은 수도원들이 포티오스를 인정할 수 없다고 주장하자, 포티오스는 859년 다시 공의회를 소집해 이그나티오스는 더 이상 총대주교가 아니며, 누구도 황제에 반대할 수 없다고 선언했다. 그러자 이그나티오스의 지지자들은 교황의 도움을 받기로 결의했다.

3.2. 교황 니콜라오 1세의 개입

파일:414px-Pope_Nicholas_I.jpg
니콜라오 1세.

이그타니오스의 지지자들로부터 개입해달라는 요청을 받은 교황 니콜라오 1세는 한동안 결정을 미뤘다. 포티오스는 교황에 서신을 보내 자신을 총대주교로 인정하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니콜라오 1세는 포티오스의 취임 과정을 자세히 조사하지 않고서는 승인하지 않겠다는 뜻을 분명히 밝혔다. 이후 답신을 통해 이듬해에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진상조사위원회를 열자고 제안하면서, 자신도 두 명의 위원을 보내 그들로부터 보고를 직접 듣겠다고 했다. 만약 사절단이 이그나티오스의 고발을 뒷받침한다면, 포티오스를 총대주교로 받아들이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면서 레온 3세가 732년에 로마의 관할권에서 빼내 콘스탄티노폴리스의 관할로 옮긴 시칠리아와 칼라브리아의 주교구, 테살로니키 교구, 기타 발칸 반도의 여러 관구를 다시 교황청에 반환하는 게 어떻겠냐고 제안했다.

교황은 아나니의 자카리아와 포르투의 로도알드를 사절 대표로 선임하였고, 두 사람은 861년 4월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도착했다. 이후 사도 성당에서 진상조사위원회가 열렸고, 이그나티오스는 초라한 수도복을 입고 그 자리에 참석했다. 그러나 회의는 처음부터 그에게 불리하게 돌아갔다. 그를 반대하는 증인이 72명에 달했고, 교황의 두 사절은 포티오스에게 극진한 대접을 받은데다 미하일 3세로부터 "그대들의 귀환은 전적으로 짐의 자비에 달려있다"라는 은근한 협박을 받은 터라 포티오스가 원하는 대로 해줬다. 결국 위원회는 이그나티오스가 교회법이 아니라 테오도라의 지시에 의해 총대주교에 임명되었으므로 무효라고 결의하고, 포티오스를 공식적으로 총대주교에 선임했다. 그 후 이그나이토스는 다시 체포되어 2주일간 심한 압박을 받은 끝에 자신의 해임에 동의한다는 문서에 서명하고 테레빈토스 섬의 수도원으로 보내졌다.

그러나 니콜라오 1세는 이를 수용하지 않았다. 그는 두 사절이 포티오스에게 매수되었다고 비난했고, 포티오스가 위원회의 결정을 통보하는 태도를 못마땅하게 여겼다. 포티오스는 은근히 자신이 교황과 동격이라는 입장을 드러냈고, 시칠리아와 칼라브리아, 테살로니키, 발칸 반도의 여러 관구를 로마의 관할에 속하는 게 최선이라고 생각하지만, 황제께서 아직은 그럴 시기가 아니라고 여기니 어쩔 수 없다고 했다. 교황은 그가 말장난을 하고 있다고 여기고 반감을 품었다. 여기에 콘스탄티노폴리스 수도원의 총주교 대리를 맡던 테오그노스토스가 로마로 망명한 뒤 로마 교황을 존경하는 이그나티오스가 부당한 탄압을 받고 있다고 호소하자, 교황은 포티오스를 인정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교황은 알렉산드리아, 안티오키아, 예루살렘의 총대주교들에게 서신을 돌려 이그나티오스가 부당하게 해임되고 그 자리를 비열한 자가 가로챘으니 이그나티오스를 원래의 지위에 복귀시키기 위해 노력하자는 취지를 알렸다. 또한 미하일 3세와 포티오스에게 서신을 보내 자신의 견해를 밝히며, 교마 교황의 권한이 가장 우월하며 교황의 승인이 없이는 총대주교가 임명되거나 해임될 수 없음을 재차 강조했다. 미하일 3세와 포티오스가 답신을 보내지 않자, 교황은 863년 4월 라테란에서 종교 회의를 소집해 포티오스의 모든 성직을 박탈하고, 총대주교의 모든 권한을 즉각 포기하지 않을 경우 파문한다고 선언했다. 또한 포티오스가 임명한 다른 성직자들에게도 비슷한 선고가 내려졌고, 이그나티오스를 비롯하여 포티오스에게 해임된 모든 성직자들을 원직에 복귀시킨다는 결정을 내렸다. 그리고 포티오스에게 회유되어 그릇된 처사를 한 아나니의 자카리아와 포르투의 로도알드를 소환했다. 자카리아는 종교 회의에 출석해 자신의 죄를 자백하고 해임되었다. 포르투의 로도알드는 교황 앞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고, 결국 864년 해임되었다.

포티오스는 교황의 공세에 아무런 응답을 하지 않았지만, 황제 미하일 3세가 니콜라오 1세에게 서신을 보내 교황의 권위는 총대주교를 능가하지 않는데 마치 상위의 존재처럼 군다고 규탄하는 서신을 보냈다. 심지어 이 서신에서 '촌스러운' 라틴어를 쓴다고 조롱하기까지 했다. 이에 니콜라오 1세는 사도적 전통에 따라 로마 교황이 모든 대주교보다 상위의 존재라는 내용의 답장을 보냈다. 그는 이그나티오스와 포티오스를 로마로 초대해 사건의 진상을 파헤치길 희망한다고 덧붙였다.

3.3. 불가리아 문제

서방과 동방 교회의 대립이 갈수록 격화될 무렵, 불가리아의 차르 보리스 1세는 동로마 제국과의 전쟁이 갈수록 불리해지자 기독교로 개종하고 백성들에게 널리 포교하겠다고 약속했다. 하지만 포티오스가 볼가리아에 별도의 대주교를 선출하게 해달라는 요청을 거절하자, 그는 라틴 선교사들을 초대했다. 이 선교단 중에는 훗날 교황으로 선임되는 포르모소도 있었다. 그는 주민들을 가톨릭으로 개종시키려 하면서, 동로마 성직자들이 결혼하는 것, 성찬식에서 누룩을 넣은 빵을 사용하는 것, 니케아 신경필리오케를 삽입하지 않는 것 등을 비난했다.

많은 불가리아인이 그를 따라 가톨릭으로 개종하자, 보리스 1세는 교황청에 포르모소를 불가리아 대주교로 임명해달라고 요청했다. 하지만 포르모소는 당시 포르투의 주교였고, 교회법에는 누구도 동시에 두 교구의 주교가 될 수 없었기에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또한 니콜라오 1세는 포르모스를 잠재적 경쟁자로 여겼기에 포르모소가 승진하는 걸 꺼렸다. 그래서 그는 포르모소를 로마로 소환했다. 이 시기, 불가리아보다 더 북쪽인 모라비아가 서방 교회를 택했다. 이에 위기감을 느낀 미하일 3세는 가뭄으로 혼란에 빠져있던 불가리아를 공격하여 보리스 1세를 굴복시키고 865년 미하일이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게 하였다.

866년 미하일 3세는 측근 바실리오스와 함께 권신 바르다스를 살해하고 바실리오스를 공동 황제로 삼았다. 그는 가톨릭의 동진을 두려워한 포티오스의 청원을 받아들여 알렉산드리아, 안티오키아, 예루살렘의 총대주교들을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소집했다. 이리하여 867년에 열린 공의회는 교황 니콜라오 1세를 이단으로 정죄하고 파문에 처했으며, 그를 따르는 모든 이도 같이 파문하기로 했다. 이리하여 서방과 동방 교회는 일시적으로 분열되었다.

3.4. 봉합

하지만 공의회의 결정이 내려진지 얼마 지나지 않은 867년 9월 24일, 바실리오스가 정변을 일으켜 미하일 3세를 암살하고 단독 황제로 등극했다. 그는 서방 교회와 화해하기로 하고 포티오스를 총대주교에서 해임하고 이그나티오스를 총대주교로 복직시켰으며, 이전 공의회가 내린 결정을 무효화했다. 그 후 869년부터 870년까지 열린 제4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는 "포티오스는 처음부터 주교가 아니었다"고 선언하여 그의 모든 행위를 무효화하였다. 포티오스는 교황에 대한 모욕적인 글뿐만 아니라 867년 공의회에서의 불법적인 행동으로 비난을 받았다. 그러면서 그 누구도 10년간 하급 성직자 신분으로 지내지 않고서는 주교로 승격될 수 없다고 선언했다. 또한 포티오스를 서품한 그레고리오스 역시 정죄하였고, 로마의 수위권을 인정했으며, 성상 공경에 대한 제2차 니케아 공의회의 결정을 재확인했다.

그리하여 서방과 동방 교회의 분열은 봉합되었지만, 불가리아를 서방 교회로 되돌리는데 동의해달라는 하드리아노 2세 교황의 뜻과 포티오스 못지 않게 불가리아에 대한 동로마 제국의 입장을 강하게 교수하는 이그나티오스의 주장이 충돌하면서, 양측의 감정은 여전히 좋지 않았다. 또한 이그나티오스는 정교회 관할 지역이 급격히 팽창하면서 성직자를 갈수록 구하기 힘들어지자 포티오스를 따랐던 인사들을 복귀시켜 교회의 요직에 앉혔으며, 874년 또는 875년 포티오스가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돌아오는 걸 허용했다.

877년 10월 23일 이그나티오스가 사망한 뒤, 바실리오스 1세 황제는 포티오스를 총대주교에 재선임했다. 황제는 교황의 수위권을 인정할 테니 포티오스의 선임을 받아들여달라고 요청했다. 교황 요한 8세는 사라센의 연이은 침략에 시달리는 와중에 동로마 제국과 마찰을 빚을 여유가 없다고 판단하고, 포티오스의 복직을 받아들였다. 879년부터 880년까지 다시 열린 제4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는 공식적으로 로마 교황과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의 화해를 선포했다.

하지만 포티오스는 교황의 특사단이 니케아 신경필리오케를 추가한다면 인정해주겠다는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 대신 불가리아를 로마 교황에게 되돌려주겠다고 약속했지만, 불가리아 차르 보리스 1세에겐 그럴 마음이 없었기에 유명무실한 약속일 뿐이었다. 그는 성령성부 뿐만 아니라 성자에게서도 발현된다는 필리오케의 논리는 니케아 신경에 의해 확고하게 구축된 삼위일체론을 변질시키는 이단적 행위로 여겼기에, 서방의 요구를 절대로 들어주지 않았다. 886년 포티오스가 퇴임한 후에도 정교회는 이러한 입장을 고수하였고, 이는 훗날 동서 대분열을 야기하는 단초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