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præfectus urbi(s), præfectus urbanus고대 로마의 관직으로 수도인 로마와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치안 및 질서 유지를 담당하며 국왕, 집정관, 황제 등 통치자가 부재할 때 행정을 대신 수행하는 직위이다. 서울특별시장과 서울경찰청장의 권한을 합친 것으로 이해하면 쉽다.
2. 상세
할리카르나소스의 디오니시오스에 따르면, 로물루스가 로마 왕국을 건국했을 때 쿠스토스 우르비스(Custos Urbis: 도시의 수호자)를 창설해 자신의 부관으로 삼았다고 한다. 그는 왕이 없을 때 원로원의 수장인 프린캡스 세나투스와 함께 대리인으로서 로마의 치안을 담당하며, 프린캡스 세나투스가 사망하면 원로원에서 가장 나이 많은 10명 중 한 사람을 프린캡스로 지명할 수 있었으며, 긴급 상황 시 로마를 지키기 위해 군대를 소집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가 보유한 임페리움은 로마 성벽 안에서만 유효했다. 임기는 알려진 바 없지만 종신직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기원전 509년, 마지막 국왕 루키우스 타르퀴니우스 수페르부스가 루키우스 유니우스 브루투스 등의 혁명으로 축출되었다. 티투스 리비우스 파타비누스에 따르면, 로마 왕국 시대의 마지막 쿠스토스 우르비스가 긴급 회의를 소집한 뒤 로마 공화국 최초의 집정관 루키우스 유니우스 브루투스와 루키우스 타르퀴니우스 콜라티누스를 선출했다고 한다. 쿠스토스 우르비스는 로마 공화국 출범 후에는 집정관에게 선임되다가 기원전 487년부터 부족 민회에서 선출되는 것으로 변경되었고, 전직 집정관 만이 이 자리를 역임할 수 있었다.
쿠스토스 우르비스는 로마 공화국이 출범한 후에도 비슷한 임무를 수행했다. 그들은 집정관에 의해 선임되어 로마 시의 치안을 담당했으며, 집정관이 부재할 때 행정을 주관했다. 그의 권한 중에는 원로원과 부족 민회 소집, 전쟁 시 시민병을 동원해 로마 시를 경비하는 것 등이 포함되었다. 그러나 기원전 450년 십이표법 제정을 위해 소집된 10인 위원회(Decemvirs)에 의해 대부분의 권한을 박탈당하면서, 오직 로마 시내에서 제사를 지낼 때 경비를 담당하는 일만 수행했다.
이후 프라이펙투스 우르비(præfectus urbi: 도시의 행정관)로 명칭이 변경되어 한동안 활동하다가 로마 시의 행정, 치안, 사법 전반을 다루는 법무관이 신설된 이후 유명무실해졌다. 다만 집정관과 법무관 등 고위 행정관들이 라틴 축제에 참석하기 위해 4일 동안 로마를 떠나야 할 때 집정관에 의해 임시로 임명되어 로마 시를 관리했다. '라틴 축제의 프라펙투스 우르비(preafectus urbi feriarum latinarum)'로 일컬어진 이들은 주로 젊은 귀족이 맡았으며, 공화국 시대에 활약했던 귀족들의 비문에는 재무관 이전에 주어진 이 역할을 맡은 사실이 종종 기록되었다.
기원전 26년, 최초의 로마 황제 아우구스투스는 자신이 부재할 때 로마 시를 전문적으로 관리해줄 관료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자각하고, 친구이자 측근인 가이우스 킬리니우스 마이케나스의 조언에 따라 프라이펙투스 우르비를 부활시켰다. 그는 프라이펙투스 우르비에게 로마 시 질서를 관리하는 데 필요한 모든 권한을 부여했으며, 로마 자체를 넘어 오스티아와 포르투스 항구 등 로마 시 주변 100 로마 마일(약 140km) 지역까지 다스리도록 했다. 또한 우르비가 제 역할을 할 수 있도록 수도 경찰대인 코호르테 우르바나에( cohortes urbanae), 야간 경비원(vigiles) 등을 우르비의 권한 아래 두었다.
처음으로 이 관직을 맡은 이는 마르쿠스 발레리우스 메살라 코르비누스였다. 그러나 그는 며칠 후 자신은 이 직무를 수행할 능력이 없다며 사임했다. 히에로니무스의 연대기에 따르면, 그는 이 관직의 부당함을 지적하며 6일만에 사임했다고 한다. 아마도 공화정을 심정적으로 옹호하던 그 입장에서 아우구스투스 정권에 불만을 품은 인사들을 뒷조사하는 임무를 맡은 것에 불만을 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후 이 관직을 맡은 이는 은퇴가 임박한 원로원 의원으로서, 대개 아프리카 또는 아시아 총독을 역임했다. 우르비 선임은 황제의 의중에 따라 이뤄졌는데, 아우구스투스 시대엔 우르비 선임이 산발적으로 이뤄졌고 종종 재임 도중에 사임했지만 27년 티베리우스가 카프리 섬에 은둔하면서 우르비를 선임한 이래 종신직으로 굳어졌다.
우르비는 황제가 제정한 법률을 시민들에게 널리 알리고, 로마에서 상업 활동을 하는 상인들을 감독하고, 해외에서 로마 시에 곡물을 공급하는 책임을 맡았으며, 테베레강의 배수, 하수 및 물 공급 시스템을 관리하는 관료들을 감독하고, 기념물의 유지 관리 역할도 수행했다. 가장 중요한 임무는 로마 시에 거주하는 수많은 시민들에게 값싼 곡물을 배급하는 것이었다. 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면 폭동이 일어나서 황제의 눈 밖에 나 좋지 않은 결과를 맞이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세월이 흐르면서 법무관의 사법 권한이 유명무실되는 것에 반비례하여 우르비의 사법 권한이 강화되었다. 그들은 로마 시에서 발생한 형사 문제에 대한 사법권을 행사했는데, 황제가 개입하지 않는 한 그들의 선고는 절대적이었다. 행정 명령에서도 상당한 권력을 행사했는데, 이탈리아의 행정관들도 로마의 우르비가 내린 명령에 복종했다. 그러다가 디오클레티아누스가 사두정치를 도입한 이래 황제가 로마 시에 군림하지 않게 되면서, 우르비가 사실상 로마 시 최고 권력자로 군림했다. 콘스탄티누스 1세가 기독교를 공인한 이래 100여 년 동안 로마 제국이 기독교화되었지만, 우르비는 이교도로 남은 이탈리아 원로원 의원들의 전유물로 남았다. 퀸투스 아우렐리우스 심마쿠스는 프라이펙투스 우르비로서 승리의 제단 파괴를 명령한 그라티아누스, 발렌티니아누스 2세, 테오도시우스 1세와 논쟁을 벌이기도 했다.
프라이펙투스 우르비는 서로마 제국이 멸망한 후에도 로마의 최고 행정관으로서 형사 사건에 대한 재판을 주관하고 도시 행정을 관리했다. 이들은 동고트 왕국의 국왕을 섬겼다가 유스티니아누스 1세의 서로마 고토 수복 전쟁 후에는 동로마 황제에게 복종했고, 나중에는 교황의 관료로 활동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실권을 잃고 명예직으로 취급되었고, 이 직책을 맡은 인물은 교황 그레고리오 1세가 573년에 이 직책을 역임한 것을 끝으로 더 이상 전해지지 않는다. 로마 시의 프라이펙투스 우르비에 대한 마지막 언급은 879년 말이었다
359년 9월 11일 또는 12월 11일, 콘스탄티우스 2세는 제국의 새로운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전문적으로 관리할 프라이펙투스 우르비를 신설했다. 이 관료는 그리스어로 '호 에파르코스 테스폴레오스'(ὁ ἔπαρχος τῆς πόλεΩς, ho eparchos tēspoleōs, 도시의 지사)로 칭해졌는데, 대개 '에파크(Eparch)'로 간략화한 용어로 불린다. 에파크는 콘스탄티노폴리스 원로원에 소속된 의원의 일원이었으며, 원로원 회의를 주재하는 공식 수장이기도 했다. 따라서 에파크의 지명은 원로원의 공식 비준을 받아야 했다.
에파크는 황제가 부재할 시 콘스탄티노폴리스 시내의 행정권, 사법권을 행사하고 콘스탄티노폴 시와 인근 지역의 치안을 전적으로 책임졌다. 다만 530년대에 도시의 치안과 규제에 관한 일부 권한이 두 개의 새로운 관직으로 넘어갔다. 535년에는 군인 20명과 소방관 30명을 지휘하는 프라이토르 플레비스(praetor plebis)가 치안과 소방 업무를 맡았고, 539년에는 지방에서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불법 이주한 이들을 적발해 추방하고 공공 관습을 감독하고 성범죄자와 이단자를 기소하는 임무를 맡은 검안관(κοιαισιτΩρ)이 신설되었다.
에파크의 위상은 시간이 지나면서 더욱 강해졌다. 황제가 외적 및 반란 세력과의 전쟁을 치르느라 정신없는 사이에, 그들은 최고 재판관이자 행정관으로서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존폐를 좌지우지했다. 이와 별도로 콘스탄티노폴리스 마그나우라 궁전 대학교(Πανδιδακτήριον τῆς Μαγναύρας)에서 일할 교사를 선임하고 도시에 곡물을 분배하는 일도 담당했다. 해야 하는 일이 이토록 많았기 때문에 그를 보좌하는 하급 관료들도 많았다. 9세기의 제국 행정 체계를 다룬 <필로테오스의 클레톨로지온(Κlamτορολόγιον)>에 따르면, 도시 길드를 감독하는 심포노스(σύμπονος)와 사법 및 경찰 업무를 담당하는 로고테테스 투 프라이토리오우( λογοθέτις τοῦ πραιτΩριου)가 에파크의 핵심 부관이었으며, 도시의 여러 지구를 담당하는 관료와 항구와 통행료 등을 감독하는 검사관, 길드의 수장 등이 에파크의 지휘를 받았다고 한다.
이렇듯 강력한 위세를 떨치던 에파크는 1204년 제4차 십자군 원정으로 동로마 제국이 일시적으로 멸망하면서 자취를 감췄다. 1261년 미하일 8세가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수복하면서 동로마 제국이 부활한 후, 콘스탄티노폴리스의 행정관은 케팔라티케우온(κεταλατικεύΩν: 수장)이 맡았지만, 콘스탄티노폴리스가 쇠락할 대로 쇠락했기 때문에 오스만 제국에 멸망할 때까지 이렇다할 권세를 누리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