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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1-27 04:49:54

제4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

보편 공의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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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일곱 보편 공의회
가톨릭에서만 인정한다.
정교회에서만 인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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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포티오스 분열3. 869~870년 공의회4. 불가리아 선교5. 879~880년6. 의의

1. 개요

제4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는 각각 869~870년, 879~880년에 개최된 일련의 공의회이다. 이 시점부터 가톨릭과 정교회가 따로 공의회를 구분한다.

2. 포티오스 분열

9세기 중반, 콘스탄티노폴리스 세계 총대주교 이그나티오스는 동로마 황제 미카일 3세와 그 외삼촌이자 실권자였던 바르다스의 사생활 문제로 황실과 대립각을 세웠다. 이에 이그나티오스는 쫓겨나고, 포티오스가 새 총대주교 자리에 올랐다. 로마 교황 니콜라오 1세는 처음에는 포티오스의 취임과 이그나티오스의 파면을 인정했지만, 863년 포티오스를 파문하였다.

그러자 포티오스는 867년 교회 회의를 열었고, 여기에 참석한 동방 주교들은 서방 교회의 교의와 의례를 비판하였다. 대표적으로 니케아 콘스탄티노폴리스 신경필리오케 문제, 견진성사 집전권 문제[1], 사제 독신 의무[2] 등이 있다. 이에 포티오스 또한 니콜라오 1세를 파문하는 사태가 벌어진다. 이것이 교회사에서 포티오스 분열로 알려진 사건이다.

3. 869~870년 공의회

새롭게 마케도니아 왕조를 개창한 바실리오스 1세로서는 정치적인 이유로 로마 교회와의 화해를 꾀하고자 하였고, 이에 교황의 뜻대로 포티오스를 파면하였다. 그리고 후속 조치를 위해 공의회를 열고, 새로운 교황 하드리아노 2세는 여기에 교황 사절을 파견하였다.

공의회는 869년 10월 5일 첫 회의로 시작되었으며 이듬해 2월 끝났다. 결과적으로 이 공의회에서 다음을 비롯한 27개조가 제정되었다.

다만 동로마 측은 공의회 후에 사략선을 동원하여 문헌을 탈취 시도하는 추태를 보였다.
공의회는 869년 10월 5일부터 870년 2월 28일까지 황제 특사 바네스의 사회로 회의를 열었다. 개막 당시에는 이냐티우스파 주교 열둘만이 참석한 극히 보잘것없는 회합이었으나, 마지막에는 참석자가 최대 103명까지 늘어났다. 이 공의회의 부수현상 가운데 중요한 것: 포티우스가 로마와의 싸움을 근본적인 차원으로 몰고가자, 로마 교황 사절들 쪽에서도 이 기회를 이용하여 참된 신앙의 규범이자 교회일치의 중심으로서의 교황수위권에 대한 원칙적 인정을 요구했다. 이 일은 '「명예회복 문서」{{{-2 Libellus satisfactionis''}}}를 통해 행해졌던바, 포티우스 추종자들은 복권과 재임용을 원한다면 이 문서에 서명해야 했다. 근본적으로 519년 「호르미스다스 정식」의 표현들을 다시 채택한 이 문서에 따르면, 참된 신앙과 교회일치를 위한 보증은 로마와의 결속에 있다. 포티우스 추종자들에게는 이 문서에 서명하는 것 외에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러나 그 후에 일어난 사건들은 주목할 만하다. 주교들은 황제에게 로마 교회가 콘스탄티노폴리스 교회를 자매가 아니라 마치 여주인의 하녀처럼 취급하는 것을 황제가 용납하고 있다고 불평했다. 황제로서도 로마 사절들이 자신도 원하던 포티우스 사건의 해결을 넘서서서 그것을 교회론 문제의 전반적 해결 기회로 이용하고 있는 것이 매우 불쾌했다. 그래서인지 어느 날 「명예회복 문서」의 서명본들이 사절들의 숙소에서 없어졌다. 그들에게 배정된 하인들이, 물론 높은 분들의 지시로, 그것들을 훔쳐냈던 것이다. 사절들은 즉시 위협하기를, 자기들은 곧바로 떠나 공의회를 흩어 버리겠다고 했다. 그러자 서류들이 "우연히" 다시 발견되었다. 로마 사절인 도서관원 아나스타시우스는 그러나 이 사건 때문에 조심하게 됐고, 그래서 모든 공의회 문서의 사본을 만들어 두었다.
아나스타시우스의 행동이 참으로 적절했음은 공의회가 끝난 뒤에 드러날 터였다. 귀국 길에 사절들의 배가 아드리아 해에서 해적들에게 습격을 당했다. 사절들은 상당히 오랜 기간 잡혀 있다가 개별적으로 풀려났으나, 문서들은 돌려받지 못했다. 그러나 해적들과 그들에게 그 일을 지시했음이 확실한 황제는 도서관원 아나스타시우스가 사본을 만들어 다른 배를 타고 이탈리아로 돌아가리라는 것은 예상하지 못했다. 아무튼 그렇게 하여 이 공의회의 문서들이 후세에 전해지게 되었다. 그리스 교회는 훗날 공의회를 무효로 선언했기 때문에 문서들도 폐기해 버렸다.
-클라우스 샤츠, 《보편공의회사》, 이종한 옮김 (왜관: 분도출판사, 2005), 121-122쪽

4. 불가리아 선교

불가리아 선교에 대한 문제는 이미 미카일 3세와 니콜라우스 1세 교황 때부터 동방과 서방이 불일치를 일으켜왔다. 키릴로스메토디오스 형제가 발칸의 슬라브족 선교를 위해 문자를 만든 것도 이 시기였다. 그런데 포티오스는 불가리아에 대주교좌를 설치해달라는 불가리아 왕 보리스의 요청을 거절했고, 이 때문에 불가리아는 로마와 콘스탄티노폴리스 사이에서 줄타기를 시작하였다.

불가리아 교회의 관할권을 두고 로마와 콘스탄티노폴리스 사이의 세력 다툼은 오랜 기간 지속되었다. 그런데 공의회가 끝나고 총대주교좌로 복위한 이그나티오스가 불가리아 왕 보리스의 요청에 따라 주교 10명을 서품한 것이다. 하드리아누스 2세와 후임 교황 요한 8세는 이에 반발하여 불가리아 선교에 개입하지 말 것을 주장했으나 별 소용이 없었다. 어쨌든 이후 불가리아에 대주교좌가 설치되어 콘스탄티노폴리스 관할이 되었고, 오늘날까지 정교회 국가로 남아있다.

5. 879~880년

주저함 없는 결의와 신앙의 순수함으로, 뿐만 아니라 동요되지 않는 판단력을 지닌 그분의 거룩한 제자들인 사도들의 거룩한 법령들과 교회법적 규정들로, 또 참으로, 한 분이시고 같은 분이신 성령의 영감으로 지도되고 [그리스도인] 설교를 가져온 저 거룩한 일곱 세계 공의회로, 우리 지성의 가슴 속에 확립되어온, 우리 주님과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의 공경할만한 신적 가르침을 공동으로 축성하고 보전하며, 또한 가장 정직하고 흔들리지 않는 결의로 해칠 수 없고 위조될 수 없는 교회법적 제도들을 공동으로 수호하며, 우리는 교회로부터 쫓겨난 자들은 축출하고, 같은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나 그들 자신이 명한 바대로 영예와 성스러운 경의가 마땅한 정교회의 스승들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받아들일 만한 것으로 여긴다.
그러므로, 이 모든 것들을 염두에 두고 또 선언하며, 우리는 아무것도 빼지도 않고, 아무것도 덧붙이지 않는, 교부들에 대한 비난과 용납할 수 없는 공격으로부터 제외되는 사람들에 대한 반감을 내놓는 사악한 자의 독창적인 거짓말에 어떤 이단도 동요되지 않을 때, 빼거나 덧붙이기 위해 아무것도 위조하지 않는 교부들을 통하여 위로부터 우리에게 내려온 가장 순결한 그리스도인 신앙의 이 호로스(규칙)를 '지성과 언어로'(τῇ διανοίᾳ καὶ γλώσσῃ) 기꺼이 받아들이고 또 모든 사람들에게 큰 목소리로 선언한다.
교부들의 호로스들을 위조된 말로 바꾸는 행위에 관해 말하자면 앞의 것보다 더 나쁘다.
따라서, 이 거룩한 세계 공의회는 온마음으로 기꺼이 받아들이고 신적 열망과 지성의 올곧음으로 선언하며, 그 위에 구원의 굳은 체계를 확립하고 곤두세우며, 이와 같이 우리는 생각하고 이 전언을 큰 소리로 모두에게 선포한다.
"한 분이신 하느님 아버지, 전능하신 하느님을 믿나이다 ... 그리고 또 오직 한 분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 … 하느님의 외아들 … 그리고 주님이신 성령을 믿나니, 성령은 성부께서 좇아나시며 … [신경 전체가 열거됨] 그러므로 우리는 이 신앙 고백 안에서 우리가 존재하고 우리가 세례를 주었다고 생각한다. 이것을 통해 진리의 말씀께서 모든 이단은 산산조각이 나고 상쇄됨을 입증하셨다.
우리는 이와 같이 생각하는 사람들을 형제들과 아버지들, 하늘 나라의 상속인들로 등록한다.
그러나 만일 누구든지 감히 신앙의 규칙을, 우리의 복되고 거룩한 교부들에 의해 위로부터 우리 자신들에게까지 널리 펼쳐져 온 성스러운 상징과 견준 다른 설명으로 고쳐 부르고, 저 신적인 사람들의 고백의 권위를 강탈하고 '그 자신이 창안해낸 웅변'(ἰδίαις εὑρεσιολογίαις)을 강요하며 신앙인들이나 이단의 한 종류에서 돌아온 사람들에게 공적인 교훈으로 내세운다면, 그리고 위법적인 말들이나 덧붙임, 덜어냄 따위로 이 성스럽고 공경할 만한 호로스의 유물을 '뻔뻔하게도 완전히 위조한다면'(κατακιβδηλεῦσαι ἀποθρασυνθείη), 그런 사람은 이미 우리 앞에 만장일치가 된 거룩한 세계 공의회의 결의에 따라, 그가 만일 성직자라면 완전한 면직될 것이고, 평신도라면 파문당하여 쫓겨날 것이다..
-제8차 세계 공의회(879~880) 결의문
로마인들의 거룩한 교회에 있는 친교의 공유자이자, 공동 참가자이며, 상속자인 우리의 형제 총대주교이자 공동 예배집전자이며 가장 경탄스럽고, 지극히 경건한 하느님의 대사제인 포티를 받아들입니다 ... 우리는 그를 가식 없이 받아들입니다. 그 누구도 그를 거슬러 개최된, 그에게 불리한 부당한 공의회를 따라서는 안 됩니다. 그 누구도. 이는 소떼처럼 행동하는 많은 이들이 보기에 옳았기 때문에 우리 보다 앞선 복된 성직자들이 그에 대한 반대표를 냈었습니다. 니콜라우스와 하드리아누스는 포티를 거슬러 교묘하게 꾸며낸 이유들을 증명하지 못했기 때문에 포티를 반대하는 모든 것들이 이제는 중지되고 추방되었습니다...
-교황 요한 8세, 바실리오스와 레온과 알렉산드로스 황제에게 보내는 편지(Mansi vol xvii, cls. 400D & 401BC. For the Greek see Dositheos op. cit. p. 281f)
성하(Your Reverence)를 거슬러 소집된 공의회를 우리의 복된 전임 교황 하드리아누스가 이 회의에 참가하지 않은 것과 몇몇 다른 이유들 때문에 우리는 이를 무효화 했고, 제거하고, 우리의 기록 보관소에서 추방했습니다.
-교황 요한 8세, 포티 총대주교에게 보내는 편지(Mansi vol. xvii cl. 416E. For the Greek see Dositheos op. cit. p. 292)
우리는 이러한 행위들을 규탄했고, 소위 8차 공의회라 불리는 이것을 우리의 기록 보관소에서 제거하고 단죄하여(anathematize) 지극히 거룩한 우리의 총대주교 포티와 연합했습니다. 우리는 또한 당신 스스로 앞서 언급했던 포티를 거슬러 쓰이고, 말하여졌던 소위 8차 공의회라 불리는 것을 거부하지 않는 이들을 파문했습니다.
-교황 요한 8세, 포티 총대주교에게 보내는 편지(Mansi vol. xvii, cl. 472AB)
8차 세계 공의회의 사례는 이러한 차이를 명확히 할 뿐만 아니라, 동방 정교회와의 분리 이후 로마 교회의 자의적 공의회의 발전을 나타내는 계기를 제공한다. 천주교 신자들에게 8차 세계 공의회는 869~870년에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열린 8차 세계 공의회이며, 이그나티(이그나티우스)를 총대주교좌에 복위시켰고, 다른 사항 중 콘스탄티노폴리스 세계 총대주교인 포티(포티우스)에 대한 단죄가 포함되어 있어 이그나티 공의회라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그나티 공의회는 정확히 10년 후에 열린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에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는 것은 현대의 연구에 의해 명확히 확인된다. 이 공의회는 성 포티와 그의 동료 사제들이 무죄임을 밝혀 주고, 성 포티가 다시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총대주교좌에 복위했으며, 동방교회와 서방교회 모두에게 서명을 받았다. 천주교는 어떻게 공의회의 사실을 무시하게 되었을까? 파파도풀로스 케라메오스(Papadopoulos Kerameus)에 이어 879~880년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의 가장 철저한 연구의 저자인 요한 메이어(Johan Meijer)는 천주교의 교회법 학자들이 12세기 초에 처음으로 제8차 세계 공의회(이그나티 공의회)를 언급했다고 지적했다. 드보르닉(Dvornic)과 다른 학자들과 함께, 메이어도 이것이 의도적으로 행해진 것이라고 설명했는데, 이는 이들 교회법 학자들이 그 공의회의 교회법 조항 22항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실, 그들은 “이 공의회는 879-880년의 포티 공의회에 의해 무효화 되었고, 그 법령(Acts) 또한 교황청 기록 보관소에 보관되었다”는 사실을 간과하였고, 나중에 천주교에서 오히려 이 포티 공의회를 “Conciliabulum Oecumenicum Pseudooctavum(거짓 8차 세계 공의회)”로 불렀고(그들 스스로도 포티 공의회에 교황사절을 보내 동의와 서명을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이것을 그들 자신의 선택에 대한 또 다른 8차 세계 공의회의 대립 공의회로 암묵적으로 인정하였음이 흥미롭다!
The 8th Ecumenical Council:Constantinople IV (879/880)and the Condemnation of the Filioque Addition and Doctrine

이그나티오스는 877년 사망하였다. 콘스탄티노폴리스 세계 총대주교 자리에는 포티오스가 복위하였다. 바실리오스 1세 입장에서는 어차피 불가리아 문제로 서방과의 일치는 물 건너 갔고, 동로마 국내 사정도 안정되어 있었으니 눈치 볼 것이 없었다. 황제는 공의회를 개최하기로 결정하였다.

879년 11월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개회하여 이듬해 3월 5일까지 개최된 이 공의회에서는 포티오스를 파문한 869년 공의회의 결정을 뒤엎는 한편, 필리오케 문제에 대해서도 필리오케의 삽입을 규탄하였다. 당대의 교황 요한 8세는 이 결정에 당연히 반발했지만 결국 포티오스의 복직을 받아들였다.

라고 천주교 측에서는 주장하지만 이는 사실과 다르다. 879~880년 공의회는 869~870년 공의회 보다 더 많은 주교들과 사절들이 참여했으며, 로마 교황 또한 교황사절을 보내어 869년의 공의회에서 이루어진 모든 내용을 무효화 하고 필리오퀘를 단죄하는 879년 공의회의 모든 회기록에 서명을 했다.

그러다가 12세기 초 천주교에서 교회법학자들에 의해 다시 869년의 공의회에 대한 언급이 나오는데, 이는 그들이 869년 공의회에서 결의된 교회법 조항 22항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이후 천주교에서는 자신들 스스로 교황사절을 보내어 동의하고 당시 교황 요한 8세 본인 또한 받아들인 879년 공의회를 거짓 8차 세계 공의회라고 부르기 시작했다.출처

6. 의의

이러한 일련의 사건은 이미 중세 초부터 다양한 형태로 드러난 동방과 서방, 로마와 콘스탄티노폴리스의 균열을 다시 한 번 보여줬다. 이는 결국 200년 후 동서 대분열이라는 결과로 나타나고 말았다.

가톨릭에서는 869년의 공의회만을 '제4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이자 제8차 세계 공의회로 인정한다. 정교회에서는 제2차 니케아 공의회 이전의 7개 세계 공의회만을 세계 공의회로서 인정하나, 879년 공의회를 정교회의 교리로서 인정한다. 다만 개개인에 따라서는 879년의 공의회를 세계 공의회로 간주하는 경우도 있다.

포티오스 1세는 정교회에서 성인으로 공경 받으며, 한편 이그나티오스 1세는 가톨릭과 정교회 양쪽에서 성인으로 공경받는다.

[1] 견진성사는 주교만 집전할 수 있는가?[2] 천주교는 성직자에게 독신의 의무가 있지만, 정교회성공회에서는 결혼한 자에 대한 서품이 허용된다.[4] 특히 정교회에서는 독신 사제만 주교가 될 수 있으나, 성공회에서는 결혼한 사제도 주교가 될 수 있다.[3] 원문: 사서 아나스타시우스의 라틴어 번역본. 번역 출처: 덴칭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