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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5-09-07 01:23:03

제1차 라테란 공의회


보편 공의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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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일곱 보편 공의회
가톨릭에서만 인정한다.
정교회에서만 인정한다. }}}}}}}}}


1. 개요2. 배경
2.1. 서임권 투쟁2.2. 교황 선출의 문제2.3. 보름스 협약
3. 진행4. 결과5. 평가

1. 개요

제1차 라테란 공의회(라틴어: Concilium Lateranum Primum)은 1123년 교황 갈리스토 2세의 주도로 라테라노 궁전에서 열린 가톨릭 보편 공의회로 제4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와 달리 동서대분열 이후 정식으로 가톨릭에서만 개최되고 인정하는 최초의 공의회다.

공의회는 평신도의 교황 선거 참여를 막고 신성 로마 제국 황제와의 서임권 투쟁을 종결하기 위한 목적이었다.

2. 배경

2.1. 서임권 투쟁

신성 로마 제국이 수립된 이래로 제국의 황제들은 독일 지역 주교들을 임명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교황 선출에도 개입했는데 문제는 요한 12세베네딕토 9세처럼 성직자로써 심각한 자격미달임에도 황제의 거수기로 교황이 된 경우가 연달아 일어났던 것이다.

이에 개혁파 교황 선출의 필요성이 대두되었고 하인리히 3세의 주도로 클뤼니 수도원 출신 독일인 교황이 5명 임명되었다. 그러나 이들 역시도 잘리어 왕조와 혼맥이 닿아있는 족벌주의 인사였다는 한계를 가졌다. 한편 하인리히 3세의 아들 하인리히 4세는 교황과 갈등이 있었다. 하인리히 3세가 요절하고 소년왕이던 시절에는 하인리히 4세가 교황에 의존하였으나 황제가 성장하며 성직자 서임권에 관여하기 시작하였기 때문이다. 갈등은 결국 극한으로 치달았고 강력한 교황권을 주장하던 그레고리오 7세는 급기야 그에게 파문을 선고했다. 그리고 황제의 전제 정치에 불만을 품은 제후들이 등을 돌리면서 하인리히 4세는 교황이 머무는 카노사에 찾아가 항복을 선언했다.

그럼에도 서임권 투쟁은 전혀 끝나지 않았다. 사태가 진정되자 하인리히 4세는 군대를 이끌고 로마를 침공해 그레고리오 7세를 폐위시키고 대립교황 클레멘스 3세를 임명했다. 한편 그레고리오 7세의 정식 후임으로 빅토르 3세가 선출되었으나 클레멘스 3세가 로마를 점거하며 즉위를 몇 년간 방해받는다. 빅토르 3세의 선종 이후 교황이 된 우르바노 2세파스칼 2세는 하인리히 4세를 강하게 압박하며 서임권 투쟁을 이어나갔다. 평민 수도사 출신의 그레고리오 7세와 달리 명문가 출신에 정치력이 있던 두 교황은 황제에게 만만찮은 상대였다.

아버지 하인리히 4세를 폐위시키고 왕위에 오른 하인리히 5세도 당시 교황 파스칼 2세와 서임권 투쟁을 벌였다. 파스칼 2세가 선종하자 하인리히 5세는 기벨린파 가문인 프란지파니 가문을 이용해 후임 교황인 젤라시오 2세를 납치, 감금 및 폭행하여 황제 서임권을 인정하도록 강요했으나 젤라시오 2세는 로마 시민들에 의해 구출된다. 이후 선출되는 갈리스토 2세 치세가 되면 하인리히 5세 역시 계속된 파문에 서임권 투쟁을 지속하는데 한계를 느끼고 화의를 요청한다.

이 투쟁기 동안 황제는 3번 바뀌었고 교황은 12명이 선출되었으며, 대립교황은 8명이 옹립되었다.

2.2. 교황 선출의 문제

이 문제는 비단 주교나 수도원장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교황 선거에도 있었다. 니콜라오 2세의 개혁 이후 교황은 선대 교황이 임명한 추기경들이 선출하도록 하였으나 주교들은 세속 군주들이 서임하거나 그들에게 매수되었기 때문에 전혀 독립적이지 못했다.

기독교 공인 이후 교황직은 로마 시민들이 선출하여 동로마 제국 황제의 승인을 받는 형식으로 진행되었고 세속적 권력을 황제가 쥐고 있었기 때문에 교황은 로마시 내부나 교리적 갈등에서만 제한적으로 영향력을 끼칠 수 있었다. 그러나 서로마 제국 멸망과 훈족, 게르만족의 침공으로 상황이 달라졌다. 제국의 권력과 질서가 붕괴된 상황에서 교황의 지위는 단순한 로마의 주교가 아니라 사실상 전 이탈리아의 보호자가 되었다.

성지로 보호받던 로마 지역은 라벤나 총독부로부터 공식적인 자치권을 부여받는 로마 공국으로 개편되었고 프랑크 왕국 시대에 피핀의 기증으로 교황령이 수립되면서 교황의 세속권은 군주와 다름없었다. 이렇게 되자 교황 선출에도 로마의 대가문들이 관여하기 시작했다. 마로치아로 대표되는 소위 창부정치의 시대가 시작된 것이다.

신성 로마 제국 수립 이후로도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고 교황 선출은 황제 세력과 로마 귀족 세력의 투쟁으로 변질되었다. 시간이 지나 로마 토착 가문들과 게르만족 영주들의 영향력은 약화되었지만 신성 로마 제국 황제가 압도적인 우위를 차지하며 황제가 교황을 임명하는 상황이 되었다. 하지만 교황이 황제의 즉위를 정당화하기 때문에 두 권력은 순환 구조에 봉착했다.

이런 혼란 속에 니콜라오 2세를 필두로 등장한 개혁파 교황들은 이 문제를 바로잡고자 추기경단 선거 제도를 확립해서 평신도의 선거 관여를 막고 더 이상 대립교황이 등장하지 못하도록 할 필요가 있었다.

2.3. 보름스 협약

서임권 투쟁을 종결하고자 하인리히 5세갈리스토 2세보름스에서 협정을 맺는데 이것을 보름스 협약이라고 한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성직자는 교회법의 규정에 따라서 선거되며, 황제는 서품권을 포기하고 황제권에 의한 영토 및 이에 따른 정치적 권리의 수여만을 행사한다. 단, 성직 선거에는 황제 내지는 그 대리인이 입회한다.

2. 독일 영내에서 황제에 의한 봉토 수여는 주교 서품 때 행해지는 주교 축성 예식에 앞서 거행되며, 부르군트와 이탈리아에서는 축성 예식이 봉토 수여식보다 앞서 거행된다.

3. 주교령 및 교황령에서는 이러한 협정은 적용되지 않고 교황에 대한 순명 서약만을 한다.

4. 모든 제국의 성직자는 황제에게 충성 맹세를 해야 하며 서약을 어기는 경우 황제는 별도의 제한 없이 그들을 처형할 수 있다.

이는 황제의 권위를 최대한 살려주는 방식으로 진행되었으나 결론적으로 황제가 제국 영내의 주교 및 수도원장의 서임권을 완전히 포기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로써 서임권 투쟁은 공식적으로 종결되었다.

3. 진행

유럽 전역의 가톨릭 국가들에서 약 300명의 주교와 600명의 수도원장이 참석하였다. 공의회는 1123년 3월 18일에 소집되어 성직매매, 성직자의 축첩, 교회 재산 강탈과 교회 문서 및 화폐 위조를 금지하는 법령이 통과되었다. 공의회는 또한 십자군에 대한 면죄부를 재확인하였으며, 에스파냐 재정복이 십자군 원정과 동등한 지위에 있다고 인정하였다.

또한 갈리스토 2세는 그레고리오 7세 재위 시행했던 교회 개혁을 복원하고 교황의 지위를 회복하고자 노력했다. 그는 로마 주변 교회들을 재조직하고 개혁했으며, 콘스탄츠의 콘라트를 시성하고, 성변화와 연옥을 부정하는 학설을 펼친 피에르 드 브루아의 가르침을 단죄했으며, 잉글랜드의 헨리 1세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요크의 서스턴 주교를 승인하고, 요크가 캔터베리 교구로부터 독립하도록 했다. 갈리스토 2세는 1124년 12월 13일에 선종했고, 교황 호노리오 2세가 그의 뒤를 이어 선출되었다.

4. 결과

5. 평가

제1차 라테란 공의회의 내용은 이미 보름스 협약과 지역 공의회, 시노드로 등장한 내용들로 특별히 독창적으로 추가된 내용이 없었다. 다만 보름스 협약의 내용을 명문화했단 점과 동서 대분열 이후 최초의 가톨릭만의 자체적인 보편공의회였다는 점, 그리고 정치적인 논쟁을 보편 공의회로 해결하는 전통을 만들었단 점에서 의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