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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5-09-07 01:11:25

제5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


보편 공의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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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일곱 보편 공의회
가톨릭에서만 인정한다.
정교회에서만 인정한다. }}}}}}}}}


1. 개요2. 배경3. 진행
3.1. 바를람 vs 팔라마스3.2. 아킨디노스 vs 팔라마스3.3. 마세오스, 그레고라스 vs 이시도로스3.4. 프로코로스 vs 필로테오스
4. 결과5. 평가

1. 개요

제5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그리스어: Ε΄ Σύνοδος τῆς Κωνσταντινουπόλεως)은 1341년부터 1368년까지 황제 안드로니코스 3세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소집한 정교회공의회이다.

제4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와 달리 동서대분열 이후 정식으로 정교회에서만 개최되고 인정하는 최초의 공의회다.

또한 공식적으로 정교회의 마지막 공의회인데 정교회에서 공의회라는 용어는 로마 황제가 주재할 때만 쓰는 표현이기 때문이다. 이후 보편 공의회와 같은 권위를 가진 주교회의도 시노드라는 용어를 썼다.

2. 배경

동로마 제국에서는 헤시카즘이라고 불리는 영성주의 운동이 있었다. 이는 3세기 기도 매듭 문화에서부터 기원했는데 묵상과 기도, 명상을 통해 신과의 합일에 이르는 것을 목적으로 했다. 그런데 14세기 무렵부터 이탈리아 남부 지역에서 스콜라 철학을 공부한 수도자들을 중심으로 헤시카즘을 신비주의 이단으로 규탄하는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이들은 헤시카즘의 대표인 그레고리오스 팔라마스가 신의 본질과 활동을 구분하는 것을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이성 합일론에 근거하여 비판했다.

결국 이 논쟁은 주교회의나 세계 총대주교의 회칙 정도로 끝나지 않을 것으로 보였고 안드로니코스 3세는 보편 공의회를 개최하여 이 문제를 해결하기로 하였다.

3. 진행

3.1. 바를람 vs 팔라마스

첫 회의는 1341년 6월 10일에 동로마 황제 안드로니코스 3세성 소피아 대성당에서 소집했다. 총대주교 요안니스 14세가 공의회를 주재하였으며 공의회에는 아토스 산에서 온 약 150명의 주교, 사제, 평신도 및 수도사가 참석했다. 그렇게 시작한 제1차 회의는 헤카시즘 반대파이자 스콜라 철학자였던 세미나라의 바를람을 비난하는 방향으로 이어졌다. 대다수의 참석자들은 헤시카즘 전통을 옹호하였고 스콜라 철학을 들여온 반대파를 서방 교회의 이단으로 공격했다.

한편 바를람의 주요 지지자였던 안드로니코스 3세 황제는 1차 회의가 끝난 지 닷새 만에 서거했다. 바를람은 처음에는 팔라마스를 상대로 자신의 주장을 펼칠 두 번째 기회를 기대했지만, 곧 자신의 주장을 계속하는 것이 무의미하다는 것을 깨닫고 칼라브리아로 떠나 이름을 베르나르도로 바꾸고 로마 가톨릭으로 개종하였다. 바를람이 떠난 후, 그레고리오스 아킨디노스가 새로운 팔라마스의 주요 비판자로 나섰다.

3.2. 아킨디노스 vs 팔라마스

안드로니코스 3세의 후계자는 요안니스 5세였는데 나이가 어려 안드로니코스의 친척이자 최고행정관이었던 요안니스 칸타쿠지노스가 섭정을 맡았다. 요안니스 칸타쿠지노스는 다시 성 소피아 대성당에서 두 번째 회의를 소집했다. 1341년 8월에 열린 제2차 회의는 1차 회의와 다를 것 없이 아킨디노스를 비난하고 헤시카즘을 공인한 이전 회의의 결과를 재확인했다. 특히나 요안니스 칸타쿠지노스가 헤시카즘을 지지했기 때문에 상황은 더 불리했다.

그러나 아킨디노스와 그의 지지자들은 1344년에 열린 제3차 회의에서 팔라마스와 그의 제자 이시도로스 부키라스를 파문하는 짧은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이는 헤시카즘 전체에 대한 비판으로 이어지지 못했고 헤시카즘은 중요 교리로 남아 있었다.

그런데 이 논쟁은 당대에 벌어지던 요안니스 5세와 섭정 요안니스 칸타쿠지노스 사이의 내전이 맞물리면서 정치 싸움으로 번졌다. 요안니스 5세는 섭정 요안니스 칸타쿠지노스를 불신하였고 결국 그가 라틴 제국 잔당을 소탕하기 위해 펠레폰네소스로 원정을 간 사이 그를 섭정직에서 파면하고 자신의 친위 세력을 새로운 섭정단으로 임명한다. 그들은 요안니스 칸타쿠지노스의 어머니 마리아 팔레올로고나를 유폐하여 살해했고 칸타쿠지노스 가문의 재산을 몰수하고 그의 친척들을 체포했다. 이 소식을 들은 요안니스 칸타쿠지노스는 회군하여 요안니스 5세를 폐위하고 스스로 요안니스 6세로 즉위했다.

요안니스 5세를 지지하였던 콘스탄티노폴리스 세계 총대주교 요안니스 14세는 헤시카즘 반대파였다. 때문에 요안니스 5세의 친위 쿠데타가 일어난 시기 아킨디노스의 파벌은 황제와 섭정이 된 총대주교의 권위를 빌려 팔라마스를 파문할 수 있었던 것이었다. 하지만 요안니스 6세 즉위 후 1347년 2월 2일에 4차 회의가 소집되었다. 회의는 당연히 요안니스 6세에 대적한 아킨디노스를 단죄하고 요안니스 14세를 세계 총대주교 자리에서 해임하였다.이로써 팔라마스의 승리를 확정했다. 또한 이전에 파문되었던 이시도로스 부키라스가 후임 세계 총대주교로 선출되었고, 이시도로스는 이후 회기를 주재하였다.

3.3. 마세오스, 그레고라스 vs 이시도로스

1347년 7월, 에페소스 대주교 마세오스가 주도하고 약 10명의 주교가 참여한 회의는 수도 외곽에 있는 20명의 주교들의 지지를 얻어 자체적으로 스콜라 철학에 기반한 강령을 발표했다. 이에 이시도르는 1347년 8월, 제5차 회의를 열며 마세오스를 비난하는 강령을 발표하며 보복했다. 마세오스는 1350년에 팔라마스에 대한 비난을 철회하며 잠시 이시도로스 측과 화해했다.

이후 1351년 5월, 요안니스 6세는 마세오스를 따르는 니키포로스 그레고라스를 교부 문헌의 체계적인 검토와 토론을 통하여 설득하고자 블라케르나이 궁전에서 제6차 회의를 소집했다. 그 결과 그레고라스마저 단죄당했고 마세오스는 에페소스 대주교직에서 해임되었으며, 남아 있던 헤시카즘 반대파는 파문당했다. 7월 말에 회개를 촉구하는 회의가 열렸고, 황제, 총대주교, 그리고 많은 대도시와 관리들이 새 강령에 서명했다. 회의가 끝났을 때 팔라마스는 확실히 무죄 판결을 받았고 그의 반대자들은 정죄되었다.

3.4. 프로코로스 vs 필로테오스

1359년, 그레고리오스 팔라마스가 사망한 후, 수도사 프로코로스는 팔라마스의 가르침을 놓고 대수도원의 수도 형제들과 갈등을 빚었다. 결국 그는 라브라에서 팔라마스를 성인으로 기념하는 것에 대해 공식적으로 항의했고, 그의 주장은 1368년 제7차 회의에 상정되었다.

콘스탄티노폴리스 세계 총대주교 필로테오스 코키노스가 주도한 이 회의는 프로코로스를 정죄하고 그레고리오스 팔라마스를 성인으로 선포하였다. 이로써 헤시카즘 교리의 비판자들은 모두 진압되었고 장장 24년간 7차례에 걸친 제5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는 마무리되었다.

4. 결과

안드로니코스 3세와 그의 아들 요안니스 5세를 비롯한 정통파와 스콜라 철학을 배운 이탈리아 유학파 신학자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기존 헤시카즘 기도는 정식 교리로 채택되었다. 또한 요안니스 6세그레고리오스 팔라마스에 대적하였던 1차 회의의 바를람, 2-4차 회의의 아킨디노스, 5-6차 회의의 마태오, 7차 회의의 프로코로스 모두 패배하여 정죄되었다.

5. 평가

이 논쟁은 단순히 헤시카즘을 이단으로 볼 것인가의 문제일 뿐 아니라 점점 위상이 높아지는 서방 교회의 신학에 대해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의 문제였다. 동로마 제국이슬람 제국의 등장 그리고 결정적으로 제4차 십자군 원정으로 인한 일시적 멸망으로 국운을 달리한 상황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제5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에서 일관되게 스콜라 학파를 비난한 것과 달리 가톨릭 공의회에 참석할 때는 비굴한 모습으로 각종 요구들(필리오퀘, 교황수위권 인정)을 받아들여야 했다.

정교회의 신학은 카파도파아 교부철학을 비롯한 삼위일체론위 디오니시우스에서 출발한 부정신학이 발달했다. 가톨릭 신학의 교부철학과 스콜라 철학이 이성을 통해 신의 섭리를 밝혀내려고 노력했다면 정교회의 신학은 신의 속성이 아닌 것을 파악하는 한편 구체적으로 신의 본질과 원리에는 집중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동로마인들은 스콜라 철학의 주장들은 지나치게 형이상학적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한편 공의회 전체가 팔레올로고스 내전으로 점철되어 중단되고 재개되기를 반복하면서 동로마 제국의 몰락을 암시하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