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이스탄불의 이름은 총 세 번 바뀌었는데, 비잔티온(Βυζάντιον)이란 도시국가로 최초 건립되었고, 로마 치하에서 라틴어 명칭인 비잔티움(Byzantium)으로 불렸다. 이후 로마 제국의 수도가 되며 콘스탄티누폴리스(코이네 그리스어: Κωνσταντινούπολις, 라틴어: Constantinopolis)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고, 이후 오스만 제국의 수도가 되어 '콘스탄티누스의 것'이란 의미의 코스탄티니예(قسطنطينيه)가 되었으며, 현대 튀르키예 공화국이 되며 이스탄불(İstanbul)이 되었다.2. 고대 그리스의 폴리스 비잔티온
신화에 따르면, 고대 그리스 아티키 지방 서쪽의 메가라라고 불리는 도시에 비자스(Βύζας)라고 하는 왕자가 있었다.[1] 그는 장자가 아니었기 때문에 아버지로부터 왕좌를 이어받지 못하였다. 그래서 새로운 식민지 도시를 개척하고자 델포이 아폴론 신전의 여사제에게 자문을 구하였는데 그녀는 "눈 먼 자의 도시의 반대편에 도시를 세우라"라고 말하였다. 이 눈 먼 자의 도시의 정체는 칼케돈(Χαλκηδών)[2]이며 이 도시의 개척자가 장님이라고 알려졌기 때문에 그렇게 불리는 것. 혹은 칼케돈보다 그 맞은편이 입지가 훨씬 좋은데도 그걸 몰라본 칼케돈 주민들이 장님이나 마찬가지라는 해석도 있다.여사제의 조언을 들은 비자스는 메가라의 개척자들과 함께 그 땅을 찾아 항해하였다. 목적지 근처에 다다른 비자스 왕자 일행은 한 땅을 발견하였는데 그 땅은 북쪽으로는 금각만이 있고 동쪽으로 보스포루스 해협을 끼고 있어서 항구도시의 입지 조건으로 매우 좋았다. 흑해 연안에 있는 도시들은 지중해로 빠져나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보스포루스 해협을 지나가야 하므로 이 지역의 중요성이 높다. 그래서 그들은 BC 667년 여기에 도시를 세웠고 사람들은 도시의 이름을 왕자의 이름을 따서 비잔티온(Βυζάντιον)으로 불렀다.
칼케돈의 개척자가 장님이라고 여겨지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칼케돈 또한 메가라 사람들에 의해 개척되었고 비잔티온 개척 이전인 BC 685년에 세워졌다. 그런데 그들은 금각만을 끼고 있어서 입지 조건이 더 좋은 보스포루스 해협 서쪽을 개척하지 않고 해협 동쪽에 도시를 세웠다. 그래서 후세 사람들은 칼케돈을 세운 집단들이 도시를 해협 서쪽에 건립하는 것의 이점을 "보지 못하였다"라고 판단하여서 개척자를 장님이라고 여기게 된 것.
그 후 이 도시는 바다와 바다를 낀 항구도시로 발전한다. 그리스 상인을 위한 지역 거점의 역할을 하던 이 도시는 동시대 사람들한테는 그 방탕함과 해이함으로 악명이 높아 어느 여행자는 비잔티온 사람들을 두고 "술독에 빠진 사람들"이라고 깠다고. 죄악의 도시(Sin City)라는 별명으로 금욕적인 사람들에게는 거의 소돔과 고모라 취급을 받는 라스베가스 같은 이미지였던 듯하다.
비잔티온은 BC 491년 다리우스 1세 치세의 페르시아가 점령하였으나 BC 477년 아테네를 위시로 한 델로스 동맹에 다시 탈환되어 그리스계 도시로 쭉 남았다. 기원전 340년에는 마케도니아 왕국의 필리포스 2세의 포위공격을 격퇴해내기도 했다. 이후 기원전 150년에 로마에 공납을 바치는 대신 자치권을 보장받는 형식으로 로마의 질서에 편입되었고, 오랫동안 독립적인 위치를 고수할 수 있었다. 그리고 로마는 이 도시를 라틴어 발음으로 비잔티움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그러나 기원후 193년 다섯 황제의 해 당시 경쟁구도였던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와 페스켄니우스 니게르 중 지중해 동부 세계의 지지를 받고 있던 후자의 편을 들어버리는 악수를 두고 만다. 이때 비잔티움은 여느 동방 도시들과 달리 니게르를 적극 지지한 터라,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진영에 반역향으로 크게 찍혀버렸다. 이미 이 때에도 특유의 촘촘한 방어력은 발휘되고 있었던 것인지, 포위공격은 3년을 끌었고 세베루스의 분노를 돋우게 된다. 결국 196년에 비잔티움은 함락되었고, 주민들은 반역자 취급을 당하고 지역 유지들은 처형됐으며[3] 도시는 약탈과 파괴를 당했다. 하지만 워낙 좋은 땅이었기 때문에[4] 세베루스 황제 치세 때 다시 재건되었다.
당시에도 비잔티움(비잔티온)은 유럽과 아시아를 연결하는 거점이자 지중해와 흑해를 연결하는 거점, 그리고 난공불락의 요충지로 잘 알려진 무역 도시 중 하나였다. 하지만 이후의 찬란한 명성과는 달리, 당시의 비잔티움은 인구 100만의 수도 로마나 인구 50만의 제국 제2의 도시 알렉산드리아는 말할 것도 없고, 하다 못해 아테네나 테베처럼 영향력 있는 폴리스가 된 적도 없으며, 오히려 지금의 튀르키예 수도인 앙카라가 더 큰 도시였다. 평범한 무역 도시였던 이 도시의 운명을 완전히 뒤바꾼 사람은 바로 콘스탄티누스 1세였다.
3. 로마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
전통적인 대제국의 수도였던 로마는 150여 년간의 위기를 겪으면서 쇠락했고, 전통적인 다신교 문화와 공화주의적 정치 관례 같은 구시대의 잔재가 여전히 남아 있었다. 때문에 로마 제국의 황제 콘스탄티누스 1세는 사두정치 시절 서방 부제의 자리에 있었을 때부터 천도를 해야될 필요성을 느끼고, 로마를 대체할 새로운 수도의 건설을 구상했다.그가 생각한 새도읍의 조건은 경제적 중심지인 이집트, 소아시아와 문화적 중심지인 그리스를 포함하는 제국의 동방과 가까운 곳이며 당시 제국을 위협하던 가장 큰 세력인 도나우강 이북의 이민족 및 사산 왕조 페르시아와 가까워 이들의 침입에 신속한 대응이 가능한 곳이었다. 본디 그는 새로운 수도를 건설할 자리로 모이시아 속주의 세르디카(Serdica)[5]를 생각하고 있었고 "세르디카는 짐의 로마가 될 것"이라는 말 또한 여러 번 언급했다. 그리고 세르디카 외에도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가 키운 동방 정제의 수도 니코메디아, 사두정치 시절 동방 부제의 수도 시르미움(현재 세르비아의 스렘스카미트로비차, 훗날 제국 제2의 도시가 되는 테살로니카 또한 고려 대상이었다. 하지만 사두정치를 끝내기 위해 시작된 리키니우스와의 내전 도중 치러진 비잔티움 공성전을 통해 비잔티움이 자신의 이상을 구현할 최적의 장소라는 곳을 깨닫게 되었다.
일단 도시가 삼각형의 양변이 보스포루스 해협에 면해 있기에 육지의 한 변만 집중적으로 방어하면 되는 천혜의 요지이다. 그리고 이러한 육지의 한변에는 당대 어떠한 공성 병기로도 뚫을 수 없었다는 테오도시우스의 삼중 성벽을 둘러 철처히 대비했다. 이렇게 완벽에 가까운 방어선을 구축했기 때문에 이 도시를 노리고 수많은 이민족과 반란군들이 쳐들어 왔지만 결국 함락시키지 못했다.[6]
삼각형의 양변이 접한 바다가 단순히 외딴 곳이 아니라 유럽과 아시아를 잇는, 그리고 에게해를 위시한 지중해와 흑해를 잇는 보스포루스 해협이다 보니 전시가 아닌 평시 상황에서는 지정학적인 이점을 살려 사통팔달의 교통의 요지가 될 수도 있다. 한편, 이탈리아의 로마가 수도이던 그 이전 시절의 흑해는 제국의 동북쪽에 있는 내해 정도로 여겨졌지만, 콘스탄티노폴리스가 수도가 된 이후에는 흑해의 중요성이 훨씬 높아졌다고 한다.
324년 내전을 종결짓고 제국 유일의 황제 자리에 오른 콘스탄티누스는 비잔티움을 제국의 새로운 수도로 선포하였고, 제국의 수도에 걸맞은 도시로 바꾸는 대공사에 착수했다.[7] 이후 이 도시는 '콘스탄티누스의 도시'라는 의미의 콘스탄티노폴리스(Constantinopolis/Κωνσταντινούπολις)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이후 제국의 새로운 수도로 발전하게 되면서 동로마 제국을 넘어 세계적으로 유명한 도시가 되자 '도시 중의 여왕(바실리스 톤 폴레온/Βασιλὶς τῶν πόλεων)'라는 별칭이 생겼고, 더 나아가 도시의 대명사가 되어 그 도시(이 폴리 / η Πόλη / The City)라고 부르게 되었다.[8] 그 뜻을 생각하면 나중에 나오는 터키어 명칭 '이스탄불'과도 상통하는 명칭이다.
콘스탄티누스 사후 제국이 콘스탄티누스의 자식들 및 조카들에 의해 나뉘어지는 일련의 과정을 통해 콘스탄티노폴리스는 제국 동방, 즉 동로마 제국의 수도를 맡게 되었다. 중세 서양 세계의 강대국 중 하나였던 동로마 제국의 수도인 만큼 세계에서 가장 번영한 도시들 중 하나였으며[9] 특히 제국이 경제적으로 절정기에 달했던 콤니노스 왕조 마누일 1세의 치세에는 총 인구 40만여 명 중 외국인 인구가 6만에서 8만에 달했을 정도로[출처] 코스모폴리탄적인 도시로 번영했다.
이 무렵 옛 수도인 로마는 이전부터 쇠락의 길을 걸었지만 천도가 이뤄지면서 핵심자산이 전부 비잔티움으로 옮겨지자 그대로 몰락했다. 그렇다보니 콘스탄티노폴리스 주민들은 로마를 두고 보잘 것 없이 망해버린 동네 정도로 여겼다. 한 예로 968년 동로마 제국에 파견된 신성 로마 제국의 사신인 리우트프란트와 만난 동로마의 환관인 크리스토포루스는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수도를 로마에서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옮긴 이후, 이탈리아의 로마에는 온통 사악한 노예나 빵장수들만 남았소."라고 말했다.[11] 즉,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330년 수도를 로마에서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옮긴 이후로 로마는 쇠락하여 질나쁜 사람들만 남게 되었다는 뜻의 조롱이었다.#
그러나 번영하던 콘스탄티노플은 1204년 도시를 침략해 온 4차 십자군에 의해 3일 동안 도시 전역이 약탈당하고 그들이 세운 괴뢰국, 라틴 제국의 수도가 되면서 본격적으로 몰락하기 시작했다. 1261년, 니케아 제국이 도시를 탈환하고 제국을 재건했으나 도시는 이미 활기를 잃은 지 오래였고 재건된 제국도 점차 쇠락의 길을 겪었다. 결국 동로마 제국이 멸망한 1453년 당시에는 도시 인구가 겨우 4만밖에 남지 않았다. 결국 로마의 마지막 수도 콘스탄티노플은 오스만 술탄국의 메흐메트 2세에 의해 시작된 제20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방전 끝에 결국 함락되었다.
4. 오스만 제국의 수도 코스탄티니예
갈라타 다리(Galata Köprüsü). 화재로 여러 차례 재건되었다가 지금은 석재 콘크리트로 복원되었다. |
오스만 제국은 멸망시킨 동로마 제국의 수도를 그대로 자신들의 수도로 삼았다. 이 시대에는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오스만어로 음차한 코스탄티니예[12](قسطنطينية)라고 불렀으며, 새로운 제국의 수도가 된 도시는 다시 한번 크게 번영했다. 동로마를 정복한 이후 오스만 술탄들은 카이세리 룸(Kayser-i-Rûm)[13]을 자칭하며 종교적 관용, 각종 면세 혜택, 급여 보장 등 다양한 혜택을 보장하여 동로마 제국 말기 인구가 유출되고 초췌해졌던 도시의 영광을 되살리기 위해 노력했다. 그 결과 오스만의 정복 이후 한두 세대 만에 코스탄티니예는 동로마의 전성기 시절 같은 번영과 중요성을 다시 누리게 됐다. 당시 이스탄불은 지금처럼 튀르키예 끄트머리에 위치한 변경이 아니라 발칸과 중동 전역울 지배하고 최전성기에는 이집트와 우크라이나꺼지 뻗어나갔던 대제국의 중앙에 위치한 중심지였다. 파디샤는 수도 코스탄티니예에서 제국 각지로 군사를 출병시켜 지배를 공고히 했다. 전성기에는 헝가리 왕국과, 우크라이나 남부 스텝 지역을 정복하고 중유럽인 빈까지 포위할 정도로 막강했다. 다만 빈 함락에는 실패하고, 이후 대튀르크 전쟁이 시작되면서 오스트리아군이 역으로 오스만 헝가리와 벨그라드를 함락시키고 코스탄티니예를 위협하기도 했었다.
오늘날 이스탄불의 모습은 대부분 이 시기에 형성된 것이다. 19세기 중후반의 갈라타 다리를 묘사한 그림에서 볼 수 있는 스카이라인은 현재에도 크게 달라지지 않은 채 그대로 이어지고 있다. 또한 구 성벽 이내로 한정되던 이스탄불 행정구역이 점차 갈라타부터 시작해 카드쾨이, 위스퀴다르, 메지디예쾨이 등으로 확대되기 시작한 것도 19세기의 일로 원래 인구가 많았지만 특히 19세기 후반 불가리아의 독립과 20세기 초 발칸 전쟁으로 인해 약탈과 학살을 피해 이주해온 무슬림 인구가 폭증하면서 시가지 확대가 불가피했다.
1912년 제1차 발칸 전쟁 당시 불가리아군이 차탈자(Çatalca)까지 내려와서 코스탄티니예를 위협한 적이 있었다. 이 지역은 오늘날 이스탄불 광역시에 포함되어 있을 만큼 이스탄불과 지척에 있는 거리다. 또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코앞인 보스포루스 해협에 영국 함대가 몰려와 위협을 가한 바 있으며, 1918년 오스만 제국이 협상국에 항복하자 영국군이 승전국 자격으로 무혈 입성하여 점령했다.
1919년 세브르 조약으로 인해 오스만 제국은 사분오열될 위기에 처했고 그리스 왕국은 1차 대전 승리의 여세를 몰아 동로마 제국의 고토를 회복하기 위해 동트라키아와 아나톨리아를 공격했지만, 이미 영국군이 점령한 상태였던 코스탄티니예까지 노릴 수는 없었다. 이후 그리스군은 무리하게 아나톨리아 내륙까지 진공했다가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에게 패퇴당했고, 아타튀르크가 아나톨리아 수복을 마무리하자 영국이 개입했다. 영국은 에게해의 섬들과 코스탄티니예를 포함한 동트라키아 지방 중 하나를 선택하라는 제안을 했고 아타튀르크는 후자를 선택하여 코스탄티니예는 튀르키예인의 품에 돌아왔다.
5. 튀르키예의 이스탄불
이스탄불의 중심 업무 지구인 레벤트(Levent)의 야경 |
1922년 오스만 제국이 멸망하고 1923년 튀르키예 공화국이 출범하면서 수도의 지위는 상실하고, 아타튀르크를 수반으로 하는 신생 튀르키예 정부는 오스만 왕가와 귀족들을 반역자로 규정하여 모두 추방했고 오스만 시절의 기득권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아나톨리아 땅의 튀르크계 발원지와 같은 척박한 땅 앙카라로 천도하였다.[14] 이때 도시의 정식 명칭은 코스탄티니예에서 이스탄불(Istanbul)로 바뀌었고 이것이 현재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한때 동로마 제국의 수도였던 만큼 그리스인들이 많이 거주하고 있었다. 1923년 그리스-튀르키예 인구 교환 협정 당시에 이스탄불 전체 인구의 1/3이 그리스인인 현실을 고려해 이스탄불의 그리스인들은 추방에서 제외되었다. 하지만 이들에 대한 박해는 아타튀르크 사후 특히 1950년대 들어 키프로스 문제와 관련해 그리스와의 갈등이 심해지자 가속화되었으며 이 시기 튀르키예 정부의 묵인 속에 이루어진 시민들의 조직적인 약탈과 폭행까지 행해져 1960년대를 기준으로 인구는 급감하게 된다. 1955년은 아직 영국 식민지였던 키프로스에서 키프로스는 그리스라며 그리스와 통합을 요구하는 시위와 폭력 행위가 극에 달해 있을 시절이다. 아테네에서도 반 튀르키예 시위가 있었고, 특히 이스탄불과 마찬가지로 로잔 조약을 통해 추방에서 제외된 트라키아 서부 지방의 튀르크계 주민들에게도 박해가 벌어졌다. 그러자 튀르키예에서도 반 그리스 여론이 치솟기 시작했고, 그게 폭력 사태로까지 번졌다.
1930-40년대까지만 해도 튀르키예와 그리스 관계는 상당히 좋은 편이었지만, 동구권의 공산화로 인해 잔뜩 긴장한 양측 정부는 극단적인 민족주의 이데올로기를 강조하기 시작했고, 둘 다 제정신은 아니었다. 또 오스만 제국이 소멸되고 나서 오스만 제국 국적이 말소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국적을 튀르키예 공화국으로 신청하지 않은 그리스계 무국적자들이 이스탄불에 상당히 많이 살고 있었는데, 그동안 이들은 외국인도 아니고 자국인도 아닌 상태로 거주 허가증만으로 버티며 살아가고 있었지만, 이때의 키프로스의 반 튀르크 시위 이후 법적 이유를 들어 하나 둘 추방했다.[15] 백여 년이 지난 2015년 현재는 거주민의 겨우 0.01%만이 그리스계이다. 이들은 정교회를 믿는 인구만 한정한 것으로 마찬가지로 그리스 혈통이지만 19세기 말과 튀르키예 독립 전쟁 시기 그리스에서 추방된 무슬림인 기리틀리(Giritli)의 수는 훨씬 더 많으며, 오스만 제국 시절에 튀르크화된 그리스계 인구는 여전히 이스탄불 인구의 상당수를 차지하고 있다.
사실 튀르키예에서 종교가 아닌 혈통으로 '그리스계'를 따지는 것은 의미가 없는 것이 튀르키예의 영토인 아나톨리아 반도, 그중에서도 인구가 밀집된 해안의 평야 지대에는 고대부터 많은 그리스계 도시들이 건설되어 있었고, 로마 제국 시대에는 제국 내에서도 인구수로 상당히 두드러지는 속주였다. 이후 동로마의 쇠락으로 튀르크인들이 이 땅을 정복하고 지배하기는 하였으나 당연히 기존의 주민들(대체로 그리스계로 여겨지던 그리스어 사용자들)에 비하면 소수였기에 문화적 동화와 통혼을 통해 융합되면서 현재의 '튀르키예인' 개념이 탄생한 것이다. 혈통적인 그리스계를 따지자면 현재 튀르키예인의 상당수가 튀르크인 도래 이전부터 현지에 터 잡고 살던 그리스인들로 혈통이 이어진다.
1960년대부터 1980년대 사이에는 튀르키예의 산업화와 더불어 이스탄불의 인구가 폭증하기 시작했다. 비록 수도는 앙카라로 이전했지만 오스만 제국 시절부터 남아 있던 인프라는 어디 안 가고 남아 있었고, 비록 그리스인들이 추방되었다지만 정작 오스만 제국 시절부터 엘리트 계급으로 군림하던 그리스인, 아르메니아인, 유대인 유력 가문들은 대부분 그대로 남았고, 지리적으로 유럽과 인접하여 이스탄불 위주로 산업화가 이루어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1960년대까지만 해도 이스탄불 하면 오늘날 관광 중심지인 구 성벽 내와 갈라타, 위스퀴다르, 카드쾨이 정도로 한정되어 있었지만 그 전까진 논밭이나 임야지였던 곳에 시골에서 이주해온 사람들이 마구잡이로 집을 짓기 시작하면서 본격적인 난개발이 시작되었다. 물론 정부도 가만히 있진 않아서 단속도 했지만, 이들은 공무원들이 죄다 퇴근한 밤중에 건물을 지었고, '밤에 지어진 집'이라는 뜻의 게제콘두(Gecekondu)가 여기저기 들어서자 정부도 하는 수 없이 수도와 전기를 공급해주었다. 우리나라 개발독재 시절에야 그냥 국유지 무단 점유로 다 구속하고 불도저로 죄다 밀어버렸겠지만 이슬람 관념상 집없는 사람을 내쫓긴 좀 그래서 일단 지어진 집들은 인가를 해 주었던 것이다. 하지만 밤중에 몰래몰래 날림으로 지은 달동네가 멀쩡할 리는 없었고, 지진이나 각종 사고로 피해를 많이 겪었다. 한때 이스탄불 내 주택의 무려 65%가 무허가 게제콘두였던 시절도 있었지만, 현재는 대부분 제대로 된 주택이나 아파트로 개선된 상태이다. 하지만 이미 개발된 부지에 대한 전면 재개발은 현재까지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으며, 게제콘두 시절 형성된 비좁고 구불구불한 도로도 개선되지 못하고 남아 있어 이스탄불의 악명 높은 교통 정체의 원인이 되고 있다.
[1] 그녀의 어머니 케로엣사가 바로 이오의 딸이다.[2] 오늘날 이스탄불의 카드쾨이구[3] 이때 비슷한 혐의로 지역 유지들이 처형되고, 주민이 약탈, 강간, 폭력 등 피해를 입고 엄청난 세금을 강탈하듯 빼앗기며 고생한 동네가 클로디우스 알비누스가 터를 잡고 근거지로 삼은 루그두눔(프랑스 리옹)이다.[4] 특히 세베루스의 장남인 카라칼라가 비잔티온의 재건을 적극 주장했다.[5] 지금의 불가리아 수도 소피아.[6] 4차 십자군 전쟁 당시 십자군에게 함락당한 적이 있지만, 십자군은 성벽을 뚫고 들어온 게 아니라, 금각만(골든 혼)을 건너 들어왔다. 그리고 최후에 함락시킨 오스만군도 성벽을 무너트리고 밀려온 것이 아니라 비밀 쪽문의 문단속을 제대로 못해 이 문으로 병력이 밀려들어와 함락시킨 것이었다.[7] 이 당시 콘스탄티누스는 비잔티움을 새 로마(Nova Roma)라고 불렀다.[8] 오해하는 사람이 많지만, 이 별칭은 동로마 제국에서 도시라고 할 수 있는 곳이 오직 콘스탄티노폴리스 뿐이라는 의미가 아니다. "모두가 아는 그(The) 도시(City)"라는 의미이고, 콘스탄티노폴리스의 명칭도 그런 의미에서 이해하여야 본 의미에 가깝다. 이외 같이 특정 도시를 'The City'라고 칭하는 용례는 구약성경과 현대 영어에서도 나타난다. 가령 영국 영어에서 The City라고 하면 런던 일부 지역을 일컫는다.[9] 이와 비견할 만한 도시는 후우마이야 왕조의 코르도바, 아바스 왕조의 바그다드, 당의 장안, 북송의 카이펑 뿐이었다. 전부 당대 손꼽히는 강대국의 수도였다.[출처] J. Phillips, The Fourth Crusade and the Sack of Constantinople, 144.[11] 고대 서양에서는 빵집 주인이나 혹은 빵을 파는 빵장수를 가리켜 도둑이나 사기꾼이라는 나쁜 이미지가 있었다. 고대 서양에서는 마을마다 주민들이 가져오는 밀가루를 반죽하고 구워서 빵으로 만들어 파는 빵집이 하나씩 있었는데, 빵집 주인들 중에서는 주민들로부터 받은 밀가루 중 일부를 몰래 빼돌려서 숨겨놓고 밀가루 상인들한테 팔아넘기는 식으로 돈을 버는 악덕 업자들도 많았다. 그런 이유로 고대 서양에서 상대방을 비난할 때 빵집 주인이나 혹은 빵장수라는 말을 썼다.[12] 정확히는 아랍어로 '콘스탄티누스의 것'이라는 뜻의 알 쿠스탄티니야(Al Qusṭanṭīniyya/قسطنطينية)를 음차했다. 한편 서유럽에서는 20세기 초까지도 빈번하게 콘스탄티노플로 불렀다.[13] 로마 황제라는 뜻의 튀르키예어. 다만 유럽 국가 상대로만 외교적으로 사용했고, 보통은 파디샤라는 칭호를 제일 많이 사용했다.[14] 즉, 이 천도 자체가 오스만 제국과의 완전한 종언을 선언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아타튀르크는 튀르키예 공화국이 오스만 제국의 후계 국가임을 전면 부정했고 오스만 제국 구 황실에 대해선 조금의 관용조차 베풀지 않고 오로지 척결해야 할 대상으로만 취급했다.[15] 영화 "터치 오브 스파이스"의 주인공 가족들도 엄마와 외할아버지는 튀르키예 국적을 가지고 있으므로 이스탄불에서 계속 살아도 되지만, 주인공의 아버지인 사바스 야코비디스가 무국적자라 합법적으로 추방되는 모습을 통해 당시의 시대상을 반영하고 있다. 당시 튀르키예 정보기관 요원은 이슬람으로 개종하면 추방하지 않겠다고 꼬시지만, 아버지는 5초 동안 망설이다 결국 거부하고 그리스행을 택한다. 하지만 이스탄불에 대한 미련은 여전히 아버지의 마음을 흔들고, "세상에서 가장 긴 5초였다."라고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