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반역향(反逆鄕)은 '반란을 일으킨 고을'을 뜻한다.일종의 연좌제로, 반란을 일으키거나 유교적 이념을 거스르는 중대 범죄가 발생한 지역 전체를 일종의 공범으로 판단하고 반역향으로 지정한다. 반역향으로 찍힌 고을은 갖가지 차별을 받았는데, 작은 범죄는 마을 단위로 차별하기도 했고, 반란 같은 큰 사건은 도 단위에서 이름을 떼버리거나, 행정구역을 낮은 등급으로 강등하거나[1] 해당 고장의 선비에게 과거 시험을 응시하지 못하게 하는 등 다양한 조치를 가했다. 관에서 차별을 하니 백성들에게도 차별 의식이 번져서 반역향으로 찍힌 고을 사람들을 이웃 고을 사람들이 괴롭히는 일도 적지 않게 생겼다.
일반적으로는 반역이 일어난 지역의 행정구역을 강등시키거나 다른 지역으로 편입시키는 조치를 취하지만, 반역자의 출신 지역을 강등시키거나 반역자의 집을 헐어버리고 그 자리에 못을 만드는 조치를 취하기도 한다.
조선왕조실록에서는 반역향을 지정해 행정구역을 낮출 때 강호(降號)라는 표현으로 나온다.
2. 지정 사례(시대 순서)
2.1. 전라도
1430년에 전라도에 속한 광주목이 무진군으로 강등되었는데, 1428년에 신보안이 광주목사로 부임해서 만호인 노흥준의 애첩이자 관기인 소매와 간통하자 노흥준이 신보안을 욕하면서 구타해 죽게 만들었다. 이 일로 조정에서는 미풍양속을 어기고 국법을 무시했다며 노흥준이 처벌해 가산을 몰수하고 가족을 광주에서 추방했으며, 이 때 강등된 광주목은 1451년에 다시 복고되었다.연산군 때인 1498년에는 배목인이 역모를 일으키자 1499년에 구례현을 폐지하고 남원군에 속하게 했는데, 구례현은 1507년에 다시 설치되었으며, 중종 때인 1515년에는 이막동이 가족과 다투어 어머니, 동생, 조카딸을 죽인 죄로 인해 낙안군을 현으로 강등했다.
1531년에는 영광에서 향리 박태근이 군수 임백령의 명령에 엄한 것에 원한을 품고 군수의 아버지와 두 아들의 무덤을 파헤치는 일이 일어나 현으로 강등되었다가 1543년에 복구되었다.
선조 때인 1589년에 정여립의 난이 일어났고 문제는 실제로 본격 봉기하지도 않았는데 선조와 정철 등 서인 측 인사들이 정략적 의도로 뒤집어씌우다시피 한 사건이라는 점이다. 관련 사건으로 야기된 인명 피해는 4대 사화를 합친 이상으로 많았다. 일시적인 피해가 컸으나 어차피 그쪽은 전주가 왕실의 본관이어서 딱히 반역향으로 지정되지 않았다.
인조 때인 1629년에 경원으로 귀양간 양경홍을 비롯한 자들이 후금군을 끌어들여 모반을 시도했다가 발각되었는데,
모반에 연루된 인물 중 이극규가 영광 출신이라 영광군이 강등되었다가 1638년에 복구되었다. 1645년에 나주에서 향리가 나주목사에게 상해를 입히는 일이 일어나 나주목을 금성현으로 강등하면서 나주를 대신한 남원을 넣어 전남도로 바뀌었다가 1654년에 복칭되었다.
영조 때인 1728년의 이인좌의 난으로 나주가 다시 강등되고 광주를 대신 넣어서 잠시 전광도가 되었고 나주는 1735년에 일어난 계수관 역모 사건에도 해당하는 지역이었다. 1755년에 하동에서 윤봉환, 이주가 역모를 일으키려 했고 이주가 영광군 출신이라 영광군이 강등되었다가 1764년에 복구되었다.
고종 때인 1869년에 구례현에서 변란이 일어났다고 해서 구례현은 여러 현의 맨 끝 자리로 강등되었으며, 1859년에 23부제 시행으로 구례현이 폐지되었다.
전라도에서 왕실의 본관이라는 이유로 전주를 의미하는 전(全)자가 갈려나간 적은 없었다.
2.2. 경기도
온수역 문서에 서술되어 있는 것처럼 1438년에 부평 백성들과 그 지역 아전들이 임금이 오지 못하게 간헐천을 막아 버리고 님비를 시전한 사건이 계기가 되었다. 그 결과 온천욕을 즐길 수 없게 된 세종은 대노하여 지역 아전들을 붙잡아 실력행사를 한 다음 부평도호부를 부평현으로 강등시켰다. 이들의 행동은 임금을 속이고 능멸한 '기군망상죄'에 해당하며, 조선시대에 기군망상죄는 '반역죄'와 동급으로 처벌되었으므로 세종의 처벌은 오히려 관대한 편이었다.[2]2.3. 함경도
1467년의 이시애의 난이 계기가 되어 세조가 바꿨는데, 그 전에는 조사의의 난·이징옥의 난도 있었으며, 처음에는 영길도였다가 이시애의 난으로 영흥이 화주목으로 강등되고 함주가 함흥으로 승격하면서 함경도가 되었다. 1470년에 영흥 품관 김영로가 함흥이 반역향이라는 이유로 영안도로 개칭할 것을 청해 이를 따랐다가 1498년에 함흥을 다시 부로 승격해 함경도가 되었다.중종 때인 1535년에는 김부기가 어머니를 죽인 일에 대해 논의하면서 그의 출신 지역인 종성은 큰 고을이기에 강등시키지 않는 대신 김부기의 집을 헐고 그 자리를 파서 못을 만들었다.
2.4. 평안도
성종 때인 1473년에 혜봉이 자신의 누이를 살해한 사건이 계기가 되었다. 승려 혜봉이 자신의 아버지와 의붓 어머니 둘을 시해하려고 한 누이를 살해했다는 이유로 이미 죽은 혜봉의 목을 참수하고 그 집을 헐어 못을 파는 형벌을 내리는 것과 동시에 혜봉이 거주한 평안도의 태천군을 현으로 강등시켰다.중종 때인 1514년에는 증산현의 향리들이 양민과 관속을 호내에 많이 숨겨두고 현령들이 이를 추적하자 관리들이 분노해 대항한 사건이 일어나면서 증산현을 강등시켜 현령 대신 현감을 두었으며, 1595년에 평양, 함종에 편입되었다가 1607년에 복구되었다.
효종 때인 1653년에는 영변부에서 노비가 주인을 살해한 일이 일어나 노비를 복주하고 부사 이영발을 파직시키면서 영변부를 영변현으로 강등시켰다. 이전 시기인 1588년에 선조 때 평양에서 최정보가 맹인 신고함과 작당해 아버지를 살해한 사건이 있었지만, 평양은 다른 군현에 비할 바가 아니라고 해서 격하되지 않은 것으로 보아 평양의 중요성으로 인해 평양 자체가 이름이 바뀐 적은 없었다.
도의 이름이 변경되지 않았지만 1811년에 일어난 홍경래의 난으로 인해 반란 지도자들의 출신지인 안주, 정주, 가산, 곽산 등을 현으로 강등하고 개천, 용강 등의 읍호를 한 등급 낮추게 했다.
홍경래의 난은 세도정치기 거듭된 민란의 포문을 열었던 것으로 평가되어 그 대가는 실로 참혹했다고 하지만, 다른 말로는 홍경래의 난을 통해서 평안도에 대해서 유화적인 정책도 나왔다는 말도 있다.
2.5. 충청도
명종 때인 1547년의 양재역 벽서 사건으로 바꾸었는데, 수십 명의 목이 잘리고 나머지 몇백 명이 대거 유배를 가는 대형 옥사였으며 문정왕후는 "내 기가 막혀서 말이 안 나온다. 반역의 땅 충주를 강등하여 유신현으로 삼고 충청도는 이제 청홍도라고 불러라." 라는 서릿발 같은 명령을 내리게 된다.다른 지역보다 자주 변경되는 지역으로 조선의 역사 516년에서 32회나 개명되었으며, 충공도, 청공도(3회 28년), 공충도(4회 27년), 충홍도(3회 5년 이하), 홍충도(1회, 1년), 공홍도(3회 30년) 등으로 변경된 저이 있으며, 충청도라는 이름을 보전한 적이 있는 시기는 인종, 선조, 경종, 헌종 정도로 충청도의 명칭은 충청도가 아니었던 기간이 충청도였던 기간보다 길다(…).
한양과 가깝다는 이유로 정치적 사건에 휘말리기 쉬운데다가 대체 불가능한 핵심 중심지가 부재했다고 할 수 있어서 이름이 자주 바뀐 것으로 보인다. 충청도의 주요 도시인 충주, 청주, 공주, 홍주는 경상도의 경주, 평안도의 평양, 함경도의 함흥 같은 도의 인구적/문화적 중심의 역할을 한 지역이 아니라 도시 네 개가 거의 비슷한 인구를 유지할 정도로 대체 불가능한 핵심 중심지가 없었다.
1735년 계수관 역모 사건에 충주, 청주가 모두 연루되어 공홍도로 바꿨다. 비슷한 식으로 공홍도·공충도로 불렸던 시기도 있었다.
2.6. 경상도
선조 때 1601년 길운절, 소덕유의 역모 사건이 계기가 되었는데, 반란을 일으킨 지역은 경상도가 아닌 제주도였지만, 제주도를 대신해 길운절의 출신 지역으로 경상도에 속하는 선산부를 현으로 강등시켰다. 중종 때인 1532년에 경산현의 백성 전범이 어머니를 살해한 일로 경산현을 강등시켰다.영조 때인 1728년 이인좌의 난이 일어났고 반란은 삼남 전역에서 발생했지만 그중 영남이 가장 끈기 있게 저항했기 때문에 진압에 가장 큰 애를 먹었고 결국 대구에 평영남비(平嶺南碑)가 세워졌다.[3] 결국 100년 넘게 영남 유림의 대과 응시가 금지되었으며, 도 이름 자체가 바뀌지는 않았다.
영조 재위 시기에는 경상도 뿐만 아니라 말썽을 빚은 지역이 한두 군데가 아니라서 전라도, 강원도, 충청도도 반역향으로 지정되었다. 특히 영조 11년의 계수관 역모 사건으로 전라도는 전광도(나주를 반역향 지정), 강원도는 강춘도(원주를 반역향 지정), 충청도는 충주·청주 두 곳이 다 반역향(…)이라 공홍도로 바꿨다.
2.7. 제주도
선조 때 1601년 길운절, 소덕유의 역모 사건이 일어나 제주도를 강등시키려고 논의했는데, 제주도의 지리적 특성상의 이유로 인한 관리의 불편함, 고려에서도 강등시킨 적이 없다는 점을 들어 제주도 대신 반란자들의 출신지를 강등시키는 처분을 했다.2.8. 황해도
1395년에 서해도에서 풍해도로 바꾸었다가 1417년에 황해도가 되었으며, 광해군 때인 1616년의 해주 옥사 사건이 계기가 되었다. 문제는 대북 세력이 소북 세력을 억누르기 위한 정략적 의도로 뒤집어씌운 사건으로 해주목이 강등되어 연안도호부가 대신해 황연도라고 했다가 인조반정으로 인조가 왕이 되면서 이름은 복귀되었다.2.9. 강원도
1561년에 강릉의 역무원인 홍봉량이 계모를 시해한 일로 강릉대도호부를 강등시켜 했다가 관리를 교체하고 홍봉량의 집을 헐어 연못을 만들며, 홍봉량의 악행을 거부한 계모의 선행을 알리는 것으로 악을 징계할 수 있다고 건의해 강등하는 것을 막았다.현종 때인 1666년 강릉의 생매장 사건이 일어났고, 강릉에서 박귀남이 전염병에 걸려 부인이 딸·사위와 공모해 생매장하자 강릉대도호부를 강릉현으로 강등하며, 강원도를 강릉 대신 양양을 붙여 원양도로 했다.
1675년에 강원도로 복칭되었다가 1683년에 원주에서 남편을 죽인 죄인이 생겼다는 이유로 원주를 대신한 양양을 넣어 강양도라 했다가 1688년에 양양이 역적의 출생지라고 해서 양양을 대신해 춘천을 넣어 강춘도로 바뀌었다가 1693년에 강원도로 복칭했다.
1729년에 이인좌의 난에 가담한 박필현의 출생지라고 해서 원주 대신 춘천을 붙여 강춘도로 변경했고 원주는 1735년에 계수관 역모 사건에 원주가 관련되었다. 1738년에 복칭되었다가 1782년에 대역 죄인으로 죽은 자가 강릉에 거주한 이유로 강릉을 빼고 춘천을 붙여 원춘도라고 했다가 1791년에 강원도로 복칭했다.
3. 영향
이러다 보니 거의 전국이 한 번씩은 반역향으로 찍힌 경험이 있게 되었다. 예외는 한성과 경기도인데, 물론 한성과 경기도에서도 흉악범죄와 반란은 자주 있었으며 조선의 권력을 독점한 지방이란 특성상 오히려 반역은 타 지방보다 자주 있었다. 그러나 한성은 그 반역향 지정을 하는 왕과 고관들이 사는 수도 지역인 이상 반란이 있든 없든 당연히 스스로 차별할 수는 없으니 지정을 할 수가 없고 경기도 역시 이름도 특정 지역 이름에서 따온 것이 아니라 서울 주변 지역을 통틀어 부르는 이름이었기 때문에 글자를 바꿀 수도 없고 경기도 전체를 반역향으로 찍으면 수도 한성이 반역향에 포위된 꼴이 되니 모양새가 굉장히 사나워진다. 그 대신 경기 지역에서는 인천·부평처럼 고을 단위로 반역향을 찍어 행정구역의 격을 낮추는 우회적인 처분만 내려졌다.조선 중기에 지방 기반의 사림과 사색당파가 강성했던 것과는 달리 후기로 가면 서울과 경기도의 문벌 가문 중심의 세도정치가 강해지는 경향이 나타나는데, 이는 거의 모든 지방이 이런저런 핑계로 반역향이 돼버리면서 지방 기반 고관대작들이 사라진 것[4]과 연관성이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조선 후기의 이런 구도의 고착화가 대한민국의 서울 공화국 현상까지 이어지고 있다는 해석도 제기되고 있다.
4. 조선 이전의 사례
반역향은 이미 고려 왕조에서도 지정하고 있었다. 예를 들어 경주는 동경(東京)이었으나, 동경민란을 진압하면서 1204년 경(京)에서 해제되었을 뿐 아니라 경상도라는 이름에서 경(慶)을 삭제해 상진안동도(尙晉安東道)라고 부르기까지 했다. 15년 후 다시 복권되지만 1308년 원나라의 압력으로 3경 제도가 폐지되면서 최종적으로 경주가 된다.5. 외국의 사례
- 로마 제국의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황제 시절 외세와 협력해 내전을 벌인 페스켄니우스 니게르를 지지한 비잔티움과 최후까지 세베루스 황제와 제위 경쟁을 벌인 클로디우스 알비누스의 사령부 역할을 한 루그두눔(오늘날의 프랑스 리옹)이 반역향으로 찍혀 세베루스 재위 기간 내내 큰 고생을 했다. 두 도시는 적국 도시처럼 함락 후 약탈되고 도시 지역 유지들과 주민들이 반역죄로 처벌받은 데다 살아남은 사람들도 로마 시민권자임에도 엄청난 세금 등을 납부하도록 명령받고 차별을 받는 등 고생했다. 이때 두 도시에 대한 처벌은 지나칠 정도로 혹독해 반강제로 클로디우스 알비누스의 병참기지로 이용된 루그두눔 주민이나 니게르에게 협력했어도 항복해도 똑같은 처벌을 받을 운명이었던 비잔티움 주민들은 다른 지역 로마인들에게도 동정을 받았다고 한다. 참고로 콘스탄티노폴리스가 되기 전 이 당시의 비잔티움은 소도시였다. 한편 어떻게 보면 비잔티움이 후대에는 반역향이나 천대받기는커녕 새로운 수도가 되어 본거지인 이탈리아에서는 망한 로마를 1000년이나 더 끌고 가게 된 것은 얄궃다고 할 수 있다.
- 삼국시대 말기 위나라의 수춘삼반. 단 위나라 기준으로는 왕가가 아닌 실권자(권신) 가문이었던 사마씨에 대항한 것이다.
- 일본 보신 전쟁에서 에도 막부에 끝까지 충성하며 왕사와 싸운 아이즈 번 등 오우에츠열번동맹(奧羽越列藩同盟)이 다스렸던 고신에쓰-도호쿠 지역의 마을들이 반역향으로 찍혀서 "시라카와 노녘은 뫼 하나가 온 문"(白河以北 一山百文)[5]밖에 안 한다는 과장된 말이 나돌았고, 야스쿠니 신사는 보신 전쟁에서 막부에 충성하는 번을 진압하다 죽은 이를 신으로 모시기 위해 지어져서 패배자는 역적이라며 배제하고[6] 후쿠시마 제1 원자력 발전소도 오우에츠열번동맹에 가담했던 소마나카무라번(相馬中村藩)이 다스렸던 땅에 세워졌다. # # 막부파가 아니라 근왕파에서도 이런 일이 일어났다. 사가현(당시 사가번)은 메이지 유신의 주역 중 하나였다. 그러나 사가 번 인사들이 메이지 6년 정변에서 패배하여 중앙 정계에서 축출된 이후, 사가의 난 을 일으켜 진압당했다. 1886년부터 7년간 반란의 주역이었던 사가현은 이웃한 나가사키현에 흡수된다.
- 미국은 남북전쟁에서 패배한 남부연합 가맹 주들은 연방의 군정을 겪으며 연방 가맹주의 자격이 정지되었다. 이는 19대 러더퍼드 B. 헤이스 대통령 대에 가서야 해제되었다.
[1] 예: 부평도호부→ 부평현[2] 인천·부평처럼 고을 단위로 반역향을 찍어 행정구역의 격을 낮추는 처분만 내릴 수 있어 경기도 자체는 화를 면했다.[3] 영남을 평정했다는 뜻. 이 비는 경상감영에 세워져 있었으나 왕조가 망함과 동시에 헐어져서 비문의 내용만 경북대에 남아있다.[4] 반역향으로 지정됨→ 해당 지역 출신 권력자들이 몰락, 고관대작으로의 승진에 불이익→ 반역향이 해제된 이후에도 고관대작에 해당 지역 명문가 출신들이 없어 출세에 어려움→ 해당 지역 명문가는 중앙권력에 진출하지 못하고 향반으로 전락[5] 문은 질량 단위면서 화폐 단위로 시대 및 지역마다 다르지만 아주 작은 단위다.[6] 야스쿠니 신사/논란 문서를 읽으면 알겠지만 이건 일본의 전통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