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문서는 조선의 국왕에 대해 다룹니다. 다른 뜻에 대한 내용은 영조(동음이의어) 문서 참고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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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 관련 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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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bf1400><colcolor=#ffd400> 조선 제21대 국왕 영조 | 英祖 | |||
출생 | 1694년 10월 31일 (음력 숙종 20년 9월 13일) | ||
한성부 창덕궁 보경당 (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율곡로 99) | |||
즉위 | 1724년 10월 16일 (29세) (음력 경종 4년 8월 30일) | ||
한성부 창덕궁 인정문 (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율곡로 99) | |||
사망 | 1776년 4월 22일 (향년 81세)[1] (음력 영조 52년 3월 5일) | ||
한성부 경희궁 집경당 (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새문안로 45) | |||
능묘 | 원릉(元陵)[2] | ||
재위기간 | 조선 왕세제 | ||
1721년 11월 15일 ~ 1724년 10월 16일 (음력 경종 1년 9월 26일 ~ 경종 4년 8월 30일) | |||
조선 제21대 국왕[3] | |||
1724년 10월 16일 ~ 1776년 4월 22일 (음력 영조 즉위년 8월 30일 ~ 영조 52년 3월 5일) | |||
서명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colbgcolor=#bf1400><colcolor=#ffd400> 본관 | 전주 이씨 | |
휘 | 금(昑) | ||
부모 | 부왕 숙종 모후 인원왕후, 생모 화경숙빈 | ||
형제자매 | 3남 중 2남 | ||
배우자 | 정성왕후 (1704년 혼인 / 1757년 사망) 정순왕후 (1759년 혼인) | ||
후궁 | 정빈 이씨, 영빈 이씨, 귀인 조씨 폐숙의 문씨, 상궁 이씨 | ||
자녀 | 2남 7녀 (2남 12녀)
| ||
종교 | 유교 (성리학) | ||
자 | 광숙(光叔) | ||
호 | 양성헌(養性軒)[4] | ||
봉호 | 연잉군(延礽君)[5] | ||
전호 | 효명전(孝明殿) | ||
묘호 | 영종(英宗) → 영조(英祖) | ||
존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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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호 | 조선: 익문선무희경현효대왕 (翼文宣武熙敬顯孝大王) → 정문선무희경현효대왕 (正文宣武熙敬顯孝大王) 청: 장순(莊順) | ||
섭정 | 왕세자 이훤 (1749년 ~ 1762년) 왕세손 이산 (1776년) | }}}}}}}}} |
영조의 어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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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의 제21대 국왕으로 숙종과 인현왕후를 모시는 무수리 출신이었던 숙빈 최씨 사이에서 차남[6]으로 태어났다.조선 왕실에서 유일하게 세자(世子)가 아닌 세제(世弟)로서 왕위에 오른 군주이다.[7] 즉, 경종의 이복동생으로서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영조는 서출이자 방계로서 왕위에 올랐기 때문에 정통성에 큰 약점이 있었다.[8]
이복형 경종의 재위 도중 신임옥사[9]가 일어나면서 죽을 위기에 놓이기도 했으나, 1724년 30세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다. 상대적으로 늦은 나이에 즉위하였으나 비교적 국정을 잘 이끌어서 대체적으로는 조선 후기의 명군 중 하나로 꼽힌다. 하지만 아들 사도세자를 죽인 비극적인 일로도 유명한 왕이다.
장수한 왕으로도 알려져 있다. 영조는 80세를 넘길 정도로 매우 장수했기 때문에 영조의 재위기간은 장장 52년에 달했는데, 이는 조선 왕사에 있어 최장 집권에 해당하며, 역대 조선의 국왕 중 최장수 군주였다.[10]
2. 생애
자세한 내용은 영조/생애 문서 참고하십시오.3. 인물
자세한 내용은 영조/인물 문서 참고하십시오.4. 어진
<colbgcolor=#bf1400> 연잉군 시절 영조[11] | <colbgcolor=#bf1400> 조선 영조의 어진[12] | <colbgcolor=#bf1400> 전주 어진 박물관에서 새로 그린 영조 전신 어진 |
홍룡포를 입은 영조의 어진은 51세때의 모습으로 1900년(대한제국 광무 4년)에 경운궁 선원전에 불이나 태조, 숙종, 정조, 순조, 문조, 헌종의 어진이 사라지자 고종이 이들 어진을 모사하도록 지시했을 때 같이 제작된 어진으로 조석진(趙錫晉), 채용신 등이 원본을 보면서 그린 이모본(移模本)이다.
전신이 아니고 상반신만 있는 이유는 이 어진의 원본이 진전(眞殿)에 걸렸던 어진이 아니라 영조의 어머니 숙빈 최씨의 사당, 육상궁에 걸렸던 초상화였기 때문이다. 즉 원래 상반신만 있는 그림을 보고 그린 것이라 상반신만 있는 것이다. 이 어진의 원본인 육상궁에 있던 영조의 초상화는 영조의 다른 어진들과 함께 부산 용두산 대화재때 소실됐는데 이 이모본만 유일하게 전혀 훼손되지 않고 살아남았다. 현재 대한민국 보물 제932호이다.
<colbgcolor=#bf1400> 《열성어진》의 영조 초상화 |
5. 가계
5.1. 조상
본인 | 부모 | 조부모 | 증조부모 |
영조 (英祖) | <colbgcolor=#fff3e4,#331c00> 숙종 (肅宗) | <colbgcolor=#ffffe4,#323300> 현종 (顯宗) | |
효종 (孝宗) | |||
인선왕후 (仁宣王后) | |||
명성왕후 (明聖王后) | |||
청풍부원군 김우명 (淸風府院君 金佑明) | |||
덕은부부인 은진 송씨 (德恩府夫人 恩津 宋氏) | |||
화경숙빈 최씨 (和敬淑嬪 崔氏) | |||
증 영의정 최효원 (贈 領議政 崔孝元) | |||
증 우의정 최태일 (贈 右議政 崔泰逸) | |||
증 정경부인 평강 장씨 (贈 貞敬夫人 平康 張氏) | |||
증 정경부인 남양 홍씨 (贈 貞敬夫人 南陽 洪氏) | |||
증 좌찬성 홍계남 (贈 左贊成 洪繼南) | |||
증 정경부인 강릉 김씨 (贈 貞敬夫人 江陵 金氏) |
5.2. 배우자/자녀
- 정비: 정성왕후 서씨(貞聖王后 徐氏, 1693년 - 1757년)
- 계비: 정순왕후 김씨(貞純王后 金氏, 1745년 - 1805년)
- 제1후궁: 온희정빈 이씨(溫僖靖嬪 李氏, 1694년 - 1721년 11월 16일)
- 제1왕녀: 화억옹주(和憶翁主, 1717년 4월 22일 - 1718년 4월 8일)
- 제1왕자: 진종 소황제 행(眞宗 緈, 효장세자(孝章世子), 1719년 2월 15일 - 1728년 11월 16일)
- 제2왕녀: 화순옹주(和順翁主, 1720년 3월 8일 - 1758년 1월 17일) - 월성위(月城尉) 김한신(金漢藎)에게 하가
- 제2후궁: 소유영빈 이씨(昭裕暎嬪 李氏, 1696년 7월 18일 - 1764년 7월 26일)
- 제3왕녀: 화평옹주(和平翁主, 1727년 4월 27일 - 1748년 6월 24일) - 금성위(錦城尉) 박명원(朴明源)에게 하가
- 제4왕녀: 화덕옹주(和德翁主, 1728년 8월 3일 - 1731년 2월 18일) - 조졸
- 제5왕녀: 옹주(翁主, 1729년 12월 12일 - 1731년 3월 21일) - 조졸
- 제6왕녀: 옹주(翁主, 1732년 1월 1일 - 1736년 4월 12일) - 조졸
- 제7왕녀: 화협옹주(和協翁主, 1733년 3월 7일 - 1752년 11월 27일) - 영성위(永城尉) 신광수(申光綏)에게 하가
- 제2왕자: 장조 의황제 선(莊祖 愃, 장헌세자(莊獻世子), 사도세자(思悼世子), 1735년 1월 21일 - 1762년 윤5월 21일)
- 며느리 : 헌경의황후 홍씨(獻敬懿皇后 洪氏, 1735년 8월 6일 - 1816년 1월 13일)
- 손자 : 의소세자 정(懿昭世子 琔, 의소세손(懿昭世孫), 1750년 9월 27일 - 1751년 6월 6일) - 조졸
- 손자 : 정조 선황제 산(正祖 祘, 1752년 10월 28일 - 1800년 8월 18일)
- 손녀 : 청연공주(淸衍公主, 1754년 7월 14일 - 1821년 6월 9일) - 광은위(光殷尉) 김기성(金基性)에게 하가
- 손녀 : 청선공주(淸璿公主, 1756년 윤9월 - 1802년 7월 20일) - 홍은위(弘殷尉) 정재화(鄭在化)에게 하가
- 며느리 : 숙빈 임씨(肅嬪 林氏, 출생 미상 - 1773년)
- 손자 : 충정공 은언군 인(忠貞公 恩彦君 䄄, 1754년 - 1801년 7월 9일)[14]
- 손자 : 소민공 은신군 진(昭愍公 恩信君 禛, 1755년 2월 21일 - 1771년 5월 13일)[15] - 조졸
- 며느리 : 경빈 박씨(景嬪 朴氏, 빙애(彬愛), 출생 미상 - 1761년 1월)[16]
- 제9왕녀: 화완옹주(和緩翁主, 1738년 1월 19일 - 1808년 5월 17일) - 일성위(日城尉) 정치달(鄭致達)에게 하가
- 제3후궁: 귀인 조씨(貴人 趙氏, 1707년 10월 16일 - 1780년 10월 5일)
- 제8왕녀: 옹주(翁主, 1735년 9월 19일 - 1736년 9월 3일) - 조졸
- 제10왕녀: 화유옹주(和柔翁主, 1740년 9월 29일 - 1777년 5월 21일) - 창성위(昌城尉) 황인점(黃仁點)에게 하가
- 제4후궁: 숙의 문씨(廢 淑儀 文氏, 생년 미상 - 1776년 8월 10일)
- 제11왕녀: 화령옹주(和寧翁主, 1753년 3월 3일 - 1821년 9월 3일) - 청성위(靑城尉) 심능건(沈能建)에게 하가
- 제12왕녀: 화길옹주(和吉翁主, 1754년 5월 19일 - 1772년 12월 18일) - 능성위(綾城尉) 구민화(具敏和)에게 하가
- 제5후궁: 상궁 이씨(尙宮 李氏, 생몰년도 미상)[18]
6. 여담
- 한국사에 유일무이한 공식 왕세제(王世弟)다. 이전까지 한국사에 형제승계 사례 자체는 많았지만, 그 형제들은 보통 선대왕이 후사 없이 사망한 이후 정치적 결정에 의해 즉위하거나 선대왕이 임종하면서 직접 유언으로 왕위를 물려주거나 했지[19] 태제/세제를 공식적으로 임명한 사례는 나타나지 않는다. 한국은 고대부터 부자세습이 원칙이라 아무리 왕에게 후사가 없더라도 혹여나 후사가 생산되는 것을 기다려야지 세제를 임명하는 것은 공식적으로 "나 더 이상 아들 못 낳소" 하고 인정하는 꼴이기 때문이다. 그만큼 전례없는 세제책봉을 해야 했던 경종의 처지가 열악했다는 소리다. 영조 이전 사례로는 최충헌 묘지명에서 고려 신종을 고려 명종의 황태제였다고 기록하긴 했는데, 정사를 보면 신종은 사저에 있다가 얼떨결에 추대된거라 정식으로 황태제에서 즉위했다기보다는 최충헌 정권에서 즉위를 위해 대충 붙여준 것으로 볼 수 있다. 전례가 없는 만큼 이걸 청나라 황제에게 책봉받아야 했던 연행사들의 입장도 굉장히 난처해져서, 노년의 강희제나 다른 관료들이 "너네 임금 젊은데 웬 세제?"냐며 의문을 표했을 때 이건명이 강희제한테 둘러댄답시고 금상께서 양기가 부족하시다는[20] 무엄한 소리를 했다가 훗날 목이 달아나는 이유가 되어버렸다. 이렇게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책봉 과정에서 조선 혈통 예부상서 김상명[21]이 큰 도움을 줬는데, 조선 사신들이 영조 즉위 후 의주에 있는 김상명의 증조 묘소에 그의 부탁을 받아 대청광록대부조선국절충장군용양위부호군지묘(大淸光祿大夫朝鮮國折衝將軍龍驤衛副護軍之墓)이라는 묘비를 세우기도 했다. 그러나 이를 보고한 신하들이나 들은 영조의 반응은 《영조실록》에나 《승정원일기》에나 몹시 띠꺼운 태도로 남아 있는데, 대략 "ㅉㅉ 오랑캐 주제에 제 뿌리는 잊지 않았으니 기특하네여", "님 근데 절충장군 소리는 뇌피셜 아닌가염?", "에이 좋은 게 좋은 거지 그냥 세워 줘라" 등의 말이 남아 있다. 《영조실록》 기사 《승정원일기》 기사 원문 《승정원일기》 기사 국역 이후 영조 때는 물론 정조 때까지도 이 가문의 사람들이 역관 등의 직책으로 조선 사신단에 자주 따라오기도 했고, 조선 측에서도 이 가문을 통해 이런저런 로비를 이어나가기도 했다.
- 김귀주는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 김씨의 친오빠이며 당색은 노론 벽파이다. 홍봉한 탄핵에 실패한 그는 함경도로 유배를 간다. 정순왕후 김씨의 6촌 오빠 김관주는 먼 훗날 순조 때 정순왕후가 수렴청정을 하면서 우의정에 올랐다. 그러나 순원왕후를 등에 업은 안동 김씨들과 싸우다 져 다시 함경도로 유배를 가서 죽는다. 김조순의 딸 순원왕후는 안동 김씨 세도 정치를 여는 인물이다.
- 영국의 엘리자베스 1세와 많이 닮았다. 이복 형제자매가 있었으며, 서로 형제자매가 정치적으로 대립하고 있었고 아버지의 성격을 닮아 다혈질이고 평소에 검약을 실천하였고 둘다 학업에 열중하면서 학식이 수준이 높았고 장수하면서 재위가 길었다는 점이 비슷하다. 또한 전통적으론 명군으로 분류되었지만, 근래엔 선정과 실정, 애민과 억압, 명석한 두뇌와 인격적 결함이 공존한 복합적이고 입체적인 군주로 평가가 수정된 것도 비슷하다. 차이점이라면 엘리자베스 1세는 혼인하지 않아 직계후손이 없었다는 것 정도. 자신의 혈육이자 다음 대의 유력한 왕위 계승자였던 사도세자와 스코틀랜드 여왕 메리 1세를 죽이라는 명령을 자신이 내렸지만, 운명의 장난인지 결국 사후 왕위는 자신들이 죽인 혈육의 아들들인 정조와 제임스 1세에게 돌아갔다는 점도 비슷하다. 거기에 아버지인 숙종과 헨리 8세는 자기 왕비였던 여자인 희빈 장씨와 앤 불린, 캐서린 하워드를 죽여버렸다. 이것도 차이점이라면 영조는 숙빈 최씨의 아들이라는 것과 엘리자베스 1세는 다름아닌 이 앤 불린의 딸이라는 차이가 있다.
- 영조 말년은 서구에서 급격한 사회 변화가 일어나던 시대다. 다름 아닌 영국에서 산업 혁명이 일어나던 시점이 영조의 치세와 겹친다. 1733년 플라잉 셔틀이 발명되고 1769년에는 제니 방적기와 수력 방적기, 제임스 와트가 증기기관을 개량하였다. 미국 독립 전쟁도 영조가 죽기 1년 전(1775년)에 일어났다.
- 영조 때의 동아시아는 평화로웠다. 청나라는 옹정제의 완벽한 내치, 이를 물려받은 건륭제의 준가르 복속으로 최대 판도를 자랑했고 상공업이 발달해서 조공국들과의 조공 무역이 본궤도에 올랐다. 일본 역시 에도 막부 치하의 안정기로 도쿄 인구는 현재 추산 100만을 넘는다는 태평성대를 맞이했다. 유럽도 아직 산업혁명 초입에 불과한터라 인도 동쪽까지는 본격적으로 손을 뻗지 못했지만 청나라와의 교역으로 문명의 이기를 동쪽에 보내고 있었다. 이런 국제적 상황에서 영조는 청나라와의 교류를 늘렸고 조공 사신들을 통해 조선으로 서방의 문명을 조금씩 들여오고 있었다. 영조가 안경을 썼던 것으로 알려져 있고 담배 등의 상품 작물이나 고구마, 감자, 참마 등 이국적인 구황 작물이 조선 전역에 널리 재배됐다.
- 먹고 살기도 빠듯한데 술 만드느라 곡물을 낭비할 수 없다는 이유로 엄격한 금주령을 내렸다. 재위기간 내내 한 것은 아니고 웬만해선 금주령 시행과 철회를 반복하며 장기간 지속하지는 않았다.[22] 하지만 백성들이 계속 사치를 부리자 말년에 엄격한 금주령을 내렸는데 그게 문제의 소지가 다분했던 것이다. 영조 31년부터 42년까지 있었던 금주령이 그것인데,32년부터 점차적으로 처벌을 엄격하게 하다가 38년에는 사형을 선고했다. 사형을 받은 사람의 대표적인 예가 병마절도사 윤구연인데, 이 사람은 역사책에서 말하는 것처럼 술을 마시다가 걸린 것이 아니라 단지 '그가 소지하고 있는 술단지에서 술냄새가 난다'는 이유로 즉결처형을 받았던 것이다.심지어 당파를 막론하고 신하들이 "그건 너무하지 않느냐"고 사형을 만류하며 변호하자 영조는 되려 그 사람들을 파직시켰을 정도다. 이러한 엄격한 금주령으로 인해 한국 전통주의 발전이 멈추고 서민용 주류들은 품질이 퇴보한다. 자세한 내용은 한국의 전통주 문서의 해당 문단 참고. 결국 나중에 금주령이 느슨해진 이후에 은근슬쩍 윤구연은 사후 복위되는데, 이미 사형당한 사람이 복위되었다고 되살아나는 건 아니고 직위만 원래대로 돌아온 것이다. 사실 이 사건만 보면 영조가 아무리 전제군주제의 왕이라고 하더라도 독재에 가까운 면모가 보인다. 애초에 영조 성격이 원래 이런 것도 있다. 그래서 정조는 즉위 후 금주령을 발포하라는 일부 신하들의 요구도 무시했다.
- 영조 본인이 금주령을 내렸지만 《영조실록》 곳곳에는 자신도 몰래 술을 마셨다는 것을 암시하는 기록이 있다. 본인은 오미자차라 변명했다고 한다. 말년에는 다리병의 고통을 완화하기 위해서 송다(松茶)를 마셨다는 기록이 많은데, 이름은 차이지만 솔잎과 누룩을 넣어 만들었으니 실상은 알코올이 함유된 술이나 마찬가지였다.[23] 1770년(영조 48년)에 영의정 홍봉한을 탄핵하는 김관주의 상소에서 몇 해 전 영조가 송다(松茶)를 내오라 시켰을 때 홍봉한이 금주령 기간이라고 거부해 왕의 체면과 건강에 해를 끼쳤다는 내용이 있는데, 진짜 차가 맞는데 홍봉한이 금주령 핑계로 막은 거라면 몇 년 후에 탄핵당할 일이 아니라 금주령 운운한 그 시점에서 기군망상으로 박살이 났어야 한다.
- 나주괘서사건 당시 역적 윤혜를 국문할 땐 윤혜가 '열성의 어휘'를 한 문서에 적어놓고 "내 아들 이름 지을때 참고하려고 했다!"라며 발악을 하자 극도로 분노하여 거의 발광에 가까운 모습을 보여준다. 실록 이때에 대놓고 아예 "왕이 술에 취했다"라고 기록되어있다.
- 다만 의외로 피휘에는 부정적이었던 모양. 자신의 이름을 즉위 후 약 40년간 발설하지 않았고, 우연히 말하게 된 뒤 시간이 흘러 어느 날 도승지가 상소를 읽을 때 영조의 휘인 금(昑)이라는 단어가 들어가서 읽지 못하고 머뭇거리자 혀를 차면서 괜찮으니까 그냥 읽으라고 명하기도 했다. 이후 선왕의 휘와 발음이 같다고 다른 글자까지 죄다 피휘하는 걸 부정적으로 평가한 기록 또한 존재한다.
- 절제하는 왕이었다. 그의 침실에 누덕거리는 이불과 베개만이 있었고 식사는 아침에는 타락죽, 점심과 저녁에는 밥, 김치, 시금치, 청경채와 같은 채식 위주의 반찬과 고추장 같은 장류 정도뿐이었는데 그마저도 식사는 물론 생일이나 명절, 잔치날에도 소식(小食)했다.여자들의 사치스런 가체를 금하고 족두리로 대신하게 하기도 했다.[24] 연과 여(왕실 가마)의 금박을 주석으로 교체시켰다.[25]
- 영조가 검소하다고 여겨지는 행동도 자세히 분석해보면 전혀 검소해 보이지 않기 때문에 위선자라는 비판마저 있다.[26][27] 특히 금주령을 내렸으면서 정작 자신은 솔잎으로 만든 술인 솔잎주를 마시면서 차를 마신다고 자기합리화를 했으며[28], 왕실에서 쓰는 가마에 금 도금을 금지하는 대신 당시 한반도에서 구하기 매우 힘들었던 주석 도금[29]을 했으며, 영조가 선호하던 음식은 당시 기준으로는 사치스러운 고급 요리인 인삼, 송이버섯, 전복, 꿩고기, 메추라기 고기, 사슴 꼬리, 고추장이었다.[30] 이인좌의 난까지 극복한 군주라는 점을 생각하면 아무리 봐도 재위 후반부의 행적은 위선자에 가깝다. 이 점은 비슷한 시기 '검소'를 빙자한 스페셜 건강 식단 덕에 장수한 청나라 건륭제와도 겹치는 부분이었다. 다만 재위 후반부 당시 영조의 나이는 조선 역대 왕들의 평균 수명인 40~50살을 넘긴 나이라는 것도 감안해야 한다. 왕이 병이 들 경우 그만큼 비상 사태이기에 검소고 뭐고 살아야 한다는 의지가 엿보이는 부분. 그리고 때론 왕권을 과시하기 위해 어느 정도는 사치를 부릴 필요는 있었다.[31] 또한 꿩고기, 송이버섯 등을 좋아한다는 기록 및 솔잎주를 마셨다는 이유로 영조를 위선자라고 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 해당 기록은 [32] 영조의 말을 들은 신하가 백성들에게 추가로 바치게 하겠다고 하자 영조가 이를 거부하는 내용이다. 즉 입맛 없는 70대 노인이 입에 맞는 음식임에도 불구하고 고생할 백성들을 걱정해 고급 음식을 자제한 것.[33] 승정원일기 전체를 확인하면 영조는 보리밥과 채식을 즐기는 등 다른 왕에 비해서 검소한 식단을 유지했고, 전복같은 건 젊을 때 즐긴 음식도 아니다. 학계에서 이야기하는 영조의 업적 중 하나가 왕실에게 바쳐지는 공물진상을 줄이고 백성에게 부담이 덜 되는 방향으로 개혁했다는 것이다.[34] 또한 솔잎주는 관절염이 심했던 영조가 약으로 복용한 것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 영조에 대한 현대의 평가는 엇갈린다. 명군 혹은 성군이라는 대중적인 인식에 초점을 맞춘 긍정적 평가와 비뚤어진 성격과 심각한 권력욕, 실속은 없고 공허한 정책들과 그로 인해 심화된 조선의 병폐에 초점을 맞춘 부정적 평가로 말이다. 부정적인 평가를 내리는 쪽에서는 즉위 이전의 봉호인 연잉군으로 부르기도 한다.[35][36]
- 여러 면에서 운이 좋은 왕이기도 했는데, 조선 왕들 중 제일 장수한 것은 물론 후대인 1954년에 부산 용두산 대화재로 다른 조선 왕들의 어진들이 대부분 잿더미로 변하거나 얼굴이 타버린 상태로 구해진 경우가 태반이었던 상황에서 영조 혼자만 어진 2축을, 그것도 모두 얼굴이 100% 멀쩡한 상태로 건져냈기 때문.[37]
- 영조는 83세까지 살았다.[38] 현대 사회에서도 큰 병 없이 80대면 장수했다는 소리를 듣는다.[39] 장수 비결로 저탄수화물·저지방·채식 위주를 고집한 소식(小食)과 검소한 식단이 거론되는데 좋아하는 과일로는 밤으로 밤을 삶아 먹는 것을 좋아했으며 타락죽과 복령차, 인삼차, 삼령차, 강계다음, 이중탕도 즐겼다고도 전해진다. 그런데 장수 기록에도 불구하고 정작 《영조실록》을 보면 당시에는 영조의 금욕적인 소식과 채식 위주 식단[40]을 주변에서 무척 걱정했다고 한다. 영조의 후궁인 영빈 이씨는 "스스로 먹는 것이 너무 박하니 늙으면 반드시 병이 생길 것"이라고 걱정했으나 영조는 오히려 영빈 이씨보다 오래 살았고 즉위 52년간 큰 병 없이 조선 시대의 최장수 왕이 되었다.
- 식사를 매우 규칙적으로 한 것도 장수 비결로 뽑힌다. 영조의 경우 하루 세 번의 식사를 제철로 만든 채식 위주로 항상 꼭꼭 씹어먹으면서 검소하게 먹었는데(원래 다섯 번이던 것을 영조가 줄인 것.) 밥도 현미, 보리, 흑미, 수수, 콩밥 위주의 잡곡이었으며 여름이면 밥을 물에다 말아먹었고 가뭄이나 홍수가 들면 백성들의 굶주리는 생각을 하며 반찬을 잔뜩 줄이고 간장만으로 식사를 했으며 생강, 대추, 녹두, 인삼도 즐겼다고도 한다. 대신들과 회의를 하다가도 식사 시간이 되면 수라상부터 받았다고 한다. 다른 왕들은 아침은 부득이하게 거르거나 야식을 즐기는 등 식사가 불규칙했지만 영조는 소식을 하되 끼니만큼은 절대 거르지 않고 무조건 제때 꼬박꼬박 챙겼다. 특히나 아들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쫄쫄이 굶고 있는 와중에도 평소처럼 수라상을 받을 정도였다.
- 싫어하는 음식은 기름지고 찬 음식이었으며 가장 좋아하는 반찬은 왕으로서는 소박하게도(?) 고추장이었다.[41] 영조가 즐긴 고추장을 당시의 시대적 배경에서 특별한 별미가 아닌 검소한 반찬으로 보아야 할지에는 의문의 여지가 있다. # 한국에 고추가 전래된 것 자체가 임진왜란 이후라는 것이 정설이고 그 고추를 이용해 담그는 고추장이 문헌에 처음 등장하는 것은 1720년(숙종 46년)에 어의 이시필이 지은 책 《소문사설》로 알려져 있으며 영조 시기의 《승정원일기》 기록에서도 당시는 고추장이 궁중 요리에 도입된 지 얼마 안된 시점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 시절의 고추장은 흔하고 소박한 반찬이 아니라 개발된지 얼마 안 되어 제조법도 널리 알려지지 않고 종종 약재처럼 다뤄지기까지 하던 새롭고 희귀한 진미였다는 것. 반찬을 고추장에 찍어먹었으며 때론 밥과 반찬을 비벼서 비빔밥을 만들어서 먹었다고도 한다. 또한 고추장과 함께 영조가 즐긴 것으로 유명한 밥상의 네 보물이 송이버섯, 전복, 꿩고기인데 이 중 송이버섯은 말할 것도 없고 전복이나 꿩고기 같은 경우도 결코 저렴한 식재료가 아니지만 조선 시대에는 더 말할 나위도 없이 귀하고 값진 식재료들이었다. 영조의 식성은 검소하고 소박하다기보다는 채식 중심으로 소식하지만 몸을 유지하는데 필요한 동물성 단백질 역시 (상대적으로 저렴한 소고기나 돼지고기가 아니라) 전복, 민어, 굴비, 조기, 꿩고기, 메추라기 고기, 사슴 꼬리 등 저지방 고단백에 맛이 좋은 귀한 재료들로 충분히 섭취하고 입맛을 잃지 않도록 자극적인 감칠맛의 고추장까지 챙기는 현대 기준으로 보면 럭셔리 웰빙 스타일에 부합한다고 보는 것이 더 적절하며 검소하다기보다는 영양학적 균형에 맞춰서 잘 먹은 것. 이 때문에 현대 한국의 웰빙 바람과 더불어 영조가 건강면에서 재조명되기도 했다.
- 앞서 언급했듯 영조는 반찬으로 고추장을 즐겨 먹었으며, 아예 고추장이 없으면 식사를 못 할 정도로 좋아했다고 한다. 특히 궁내에서 만든 것보다 민가, 특히 사헌부 지평인 조종부의 집에서 만든 것을 좋아했다. 그런데 조종부는 탕평파 영의정인 이천보의 비리를 문제 삼았던 인물이다. 영조는 이를 당파성의 발로라며 조종부를 괘씸히 여겼지만, 그가 죽고 5년이 지난 후에도 그의 집 고추장을 그리워했다고 한다. 심지어 말년에도 "내의원에서 만든 고추장이 사대부집에서 만든 것만 못하다"고 평했다. 근데 그 조종부라는 사람, 성씨에서 알 수 있듯 순창 조씨다. 거기에 숙종 시대 어의인 이시필이 집필한 요리책 소문사설에도 조종부 집안의 고추장과 그 제조법을 기록했을 정도로 조종부 집안의 고추장은 명성이 자자했다. 제조법도 일반 고추장보다 손이 한참 갔다고.
- 사도세자가 영조에게 고추장을 바쳤다는 주장이 있는데 공식적으로 사도세자가 직접 궐밖에서 고추장을 구해 영조에게 진상했다는 직접적인 기록이 있는 것은 아니다.사도세자가 영조에게 고추장을 처음 주었다는 건 사실이 아님 사도세자가 고추장을 직접 진상했다는 내용은 조선왕조실록에는 없고, 승정원일기 英祖 25年 7月 庚午의 글을 베이스로 삼는데, 여기서도 "苦椒醬은 근래에 담기 시작했는데, 예전에도 있었다면 왕에게 바치게 했을 것이다. 궁궐 밖 서민들 집에서도 고추장이 성행하고 있다.[方外閭閻家則盛行矣]” 정도로만 적혀있다.한국역사연구회 논문 그럼에도 이런 얘기가 나온 것은 이 영조 25년 초에 영조가 세자에게 대리청정을 명한 바 있고 위와 같이 이때 영조가 고추장을 먹고 기력을 회복하였기 때문에 이 시기에 사도세자가 고추장 진상에 뭔가 큰 역할을 하지 않았을까 정도로 추측한 것으로 보인다. 이런 의미로 일단 한국역사연구회 논문에서도 사도세자가 고추장을 영조에게 직접 진상한 것으로 보긴 했지만, 사실 정말로 사도세자가 직접 진상한 것이라면 실록이나 승정원일기에 직설적으로 세자가 왕에게 고추장을 진상했다고 기록했을 것이므로, 단순히 사도세자가 대리청정하던 시기에 처음으로 영조가 고추장을 접했을 뿐일 가능성도 높다. 다만 이와는 별개로 임오화변으로 이어지는 영조-사도세자의 비극적인 관계와 이 고추장 얘기가 굉장히 어울리기 때문에 천일야사에서 아예 영상화하는 등 사람들에게 널리 퍼졌다. 어쨌든 현대 대중에게 널리 퍼진 이야기임에 불구하고 직접적인 실제 기록은 없다는 점에서 삼년산성 149승 1패 얘기나, 미국 보빙사들이 왕릉을 어떻게 밟겠냐면서 피라미드에 올라가지 않았다는 등의 얘기와 비슷한 케이스일 수도 있다.
- 영조는 큰 병을 앓지도 않았고, 조선 왕들의 유전 고질병인 종기나 당뇨도 없었지만[42][43] 그렇다고 병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특히 영조는 어릴 때부터 죽을 때까지 한약을 입에 달고 사는 잔병치레 체질이었다. 알레르기와 회충에도 시달렸는데 특히 입으로 회충을 토하는 일이 자주 있을 정도여서 회충 탕약을 자주 복용했다고 한다. 소화불량이나 소화장애로 고생했고 말년에는 극심한 피로와 하지 무력감, 건망증[44]에 시달리기도 했었다. 그야말로 중병만 안걸렸다뿐 골골백세였는데 한의학에서 이야기하는 소음인적 체질인 비위허냉(脾胃虛冷) 체질이라서 산증(疝症)[45]에 시달리며 살았다.
- 친모인 숙빈 최씨를 왕비로 추존하려 했으나, "후궁을 중전으로 승격시키지 말라"는 부왕 숙종의 유언과 함께 국법으로 금지시켰기 때문에 성사시키진 못했으며, 이에 대한 설화가 있다. 영조가 잠행을 하면서 백성들을 만나보고 있는데 한 나무꾼이 나무를 팔면서 소령릉 근처에서 베어왔다고 말하는 것이었다. 숙빈 최씨는 후궁이므로 무덤 또한 원래는 소령원이라고 불러야 하는데 이 나무꾼은 무식해서 단지 '주상 전하 어머니의 무덤이니 왕릉이겠지'라고 여기고 소령릉이라고 생각없이 말한 것. 영조는 "내 어머니의 무덤을 왕릉으로 불러 주다니!"라고 기뻐하며 그 나무꾼을 불러다가 소령원 수봉관(종3품) 자리를 주었다고 한다. 다만 이러한 일화는 덕흥대원군을 필두로 상당히 많은 편이라 단순 민담/야사로 읽는 게 낫다.
- 영조의 사주와 관련된 야사가 전해져 온다.[46] 사람의 인생은 사주팔자에 달려 있다는 말에 대해 생각한 영조는 자신과 생년월일이 같은 사람을 찾아서 데려오라는 명령을 내렸다. 얼마 뒤 농촌에서 꿀벌을 키우며 살아가는 한 노인이 어명을 받고 영조를 알현하게 되었다. 영조가 묻자 노인은 영조와 같은 해, 같은 월, 같은 날, 같은 시각에 태어났다고 말했다. 영조는 앞서 말한 사주팔자 이야기를 꺼내며 노인과 영조는 같은 사주인데 자신은 국왕이고 노인은 평범한 농민이라며 사주라는 게 맞는지 틀렸는지 모르겠다고 말하자 노인은 이렇게 말했다. "소인에겐 자식이 8명이니 이는 전하께서 다스리는 전국 8도와 같고, 소인이 키우는 벌통이 360개이니 이는 전하께서 다스리는 360개 고을의 갯수와 같으며, 그 벌통에 사는 벌이 700만 마리이니 이는 이 나라 백성들의 수와 같습니다. 사주라는 것이 과히 틀린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이에 영조는 노인의 대답에 감탄하며 큰 상을 내리고 고향으로 돌려보냈다고 한다.
- 고려 말의 장수인 최영의 사당은 말에 탄 사람이 근처를 지나가면 갑자기 비바람이 심하게 불어서 말에서 내려 걸어가야 했다. 영조가 능행을 위해 지나가다가 비바람이 불자 영조는 최영에게 "고려도 500년이나 지속되었거늘 뭘 더 바래서 이런 행패를 부리느냐!"라고 호통을 쳤는데 비바람이 그쳤다고 한다. 영조의 아버지인 숙종도 이런 일이 벌어지자 "최영 네 놈이 현명하였다면 왜 고려가 망했겠느냐? 썩 물러가라!"라고 호통을 쳤는데 마찬가지로 비바람이 그쳤다고 한다.
- 여러 사대부와 대신들이 기생을 끼고 놀았다는 사실이 밝혀지자 불같이 화를 내며 모조리 다 처벌하고, 대신들에게 좋은 말로 할때 자수하라고 욕하며 윽박질러 신하들이 공포에 떨며 약을 먹고 좀 진정하라고 애원할 정도였다.실록,실록 이때 금주령을 범한 자들을 효시하라고 한 권극도 걸려 장형을 맞고 귀양가다가 죽는다.실록[47] 나중에 너무 지나쳤다고 판단했는지 자수한 이들은 용서해주고, 또 슬며시 귀양간 사람들을 용서해준다.
- 이렇듯 화를 낼땐 불같이 화를 내며 욕설과 가혹한 처벌을 남발하고 엉엉 울다가 나중에 진정됐을땐 또 용서해주고 하는 일이 빈번하여 영조의 강박증과 성격장애를 의심하는 글도 있다.#[48]
조중회라는 신하가 영조가 종묘 대신 어머니 숙빈 최씨의 사당에 먼저들렀다고 그것이 옳지 않다는 간언을 하여 영조의 심기를 불편하게 한 일이 있었다. 영조가 "조중회를 당장 귀양보내라!"하고 노발대발하였는데, 하필 조중회가 충신 중의 충신이라 많은 신하들이 반대를 하였고 영조가 "당장 귀양 보내지 않으면 대신 네놈들을 귀양보내리라!"하고 역정을 냈는데 그러더니 갑자기 엉엉 울며 내가 늙으니 저런 것들이 내 말을 안듣지.라고 하더니 연못 물에 빠져죽겠다면서 발만 잠기는 웅덩이에 들어간 채 군사들을 웅덩이 주위에 둘러서게 하여 신하들의 출입을 막았다.[49][50] 당연히 감히 왕명을 어길수도 없으니 다들 어쩌지 못해 당황만 하고 있었다. 유일하게 알현을 허락받은 세손도 안절부절못하며 영조를 뜯어 말리는데도 영조는 조중회의 목을 베어와야만 연못에선 나오겠다고 버티었다. 세손은 조중회의 목을 가져오라고 신하들을 다그쳤으나 그렇다고 평상시 옳은 말을 자주 하는 충신의 목을 제대로 된 명분도 없이 벨 수는 없었다. 결국 타협책으로 조중회를 흑산도로 위리안치[51]하기로 하자 영조가 "이제야 속이 후련하구나!"라며 연못에서 걸어나와 당당히 입궐하였다. 그리고 이 난리를 쳐놓고는, 조중회가 흑산도에 도착하기도 전에 다시 불러들였다. 귀양 보내던 것까지 취소하고! 이 해프닝 이후로 사람들이 영조가 노망난 거 아니냐고 수군댔다고 한다.
- 야사에 따르면 노망에 대한 해프닝이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같은 "영조가 노년에 노망이 났다", 조중회가 영조의 화를 키웠다, 세손이 말렸다라는 내용을 실제 《영조실록》 내용과 검토해보면 전혀 다르게 해석할 수 있다. 우리가 영조 노망으로 알고 있는 내용은 1743년(영조 19년) 《영조실록》에 나오긴 한다. 노여움을 보이고, 눈물까지 흘렀으니 《영조실록》 내용도 같은 것 아닌가 싶은 이도 있겠지만.. 영조 19년은 왕이 50세가 되는 해이다. 또 설화에서 나오는 이야기처럼 세자 또는 세손이 말려서 화를 풀은 것도 아니다. 영조가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조중회를 용서한 것이 1748년(영조 24년)으로, 영조 나이 55세 때였다. 세손은 저때 태어나지도 않았다.[52] 《영조실록》과 《국조보감》, 《승정원일기》를 찾아보아도 연못에 뛰어든 기록은 없다. 나이가 들면서 이런 증세는 더 심해졌다. 하지만 영조는 자신의 증상을 치매나 노망이라 하지 않고 소화기 장애의 후유증으로 생기는 담증인 담후(痰候)라 불렀다. 기억력 장애 현상이 자신의 지병이었던 소화기 질환에서 비롯했다고 우긴 것이다. 하지만 영조가 말년에는 실제로 치매 증강과 난청 등을 겪었다고 한다. 재위 51년(1775년) 81세 때에는 영조의 치매 증상이 매우 심해졌다. 정조가 세손 시절부터 쓴 존현각일기에는 영조의 치매 증상이 얼마나 심했는지 그대로 나타난다. “영조의 담후(치매)가 덜했다 더했다 오락가락하니, 하교(下敎)는 좋은 쪽으로 해석해서 동요가 없도록 해야 할 것이다. 헛소리로 한 하교의 반포는 절대 금한다.” “헛소리를 하시는 중에 내리신 하교가 한두 번이 아니다.”라는 기록이다. 심지어 영조는 신하들에게 전날 자신의 정신 상태가 어땠는지 확인하기까지 했다.##
我國百物, 無不受害, 而唯猫無害。今予進着, 則四方效之, 猫將盡矣。此豈齊宣王易羊之意乎?
우리나라의 여러 물건 중에 해를 입지 않은 것이 없으되 오직 고양이만이 무사하다. 지금 내가 이것을 입으면 사방에서 이 효과를 보려 할 것이니 고양이가 장차 씨가 마를 것이다. 이것이 어찌 제선왕이 양을 바꾼 뜻[53]이라 하겠는가?
영조 20년 11월 5일 승정원일기 기록
우리나라의 여러 물건 중에 해를 입지 않은 것이 없으되 오직 고양이만이 무사하다. 지금 내가 이것을 입으면 사방에서 이 효과를 보려 할 것이니 고양이가 장차 씨가 마를 것이다. 이것이 어찌 제선왕이 양을 바꾼 뜻[53]이라 하겠는가?
영조 20년 11월 5일 승정원일기 기록
- 애묘가였던 아버지 숙종의 영향을 받아 고양이를 아낀 것으로 보인다. 키운 것은 확인되지 않으나, 실록이나 승정원일기를 보면 팔의 통증 때문에 꽤 오랜 시간 동안 신하들이 고양이 가죽을 붙이고 자라고 권했으나, 근 두 달이나 아예 대답하지 않고 다른 처방에 대해 얘기하기도 하고, 맹자 등의 고전을 인용하며 말을 돌리고 실랑이를 벌이거나 백성들이 너도 나도 고양이 가죽을 근육통에 쓰려 할까봐 두렵다느니 하는 핑계를 대다가 마침내 '옛날부터 수라간에서 고양이가 오고 가는 걸 봐서 불쌍하다'라고 실토하는 훈훈한 에피소드가 실려 있다. [54] 이 실랑이가 의외로 족히 몇 년을 갔는데, 기록을 보면 근육통이 너무 심했는지 결국 중간에 한 번 시험해 보긴 한 모양.
7. 대중매체
자세한 내용은 영조/대중매체 문서 참고하십시오.8. 관련 문서
- 금주법(금주령)
- 급유방
- 균역법
- 노비종부법
- 동구릉
- 몽어노걸대
- 몽어유해
- 백자 달항아리
- 백자 철화포도원숭이문 항아리
- 백자 청화운룡문 항아리
- 백자 청화죽문 각병
- 병장도설, 속병장도설
- 사도세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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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혜경궁 홍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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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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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을 빛낸 100명의 위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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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오화변
- 조선/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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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부식 | 지눌 | 의천 | 이종무 | |
정몽주 | 문익점 | 최충 | 일연 | |
최영 | 황희 | 맹사성 | 장영실 | |
신숙주 | 한명회 | 이이 | 이황 | |
신사임당 | 곽재우 | 조헌 | 김시민 | |
이순신 | 태조 | 정종 | 태종 | |
세종 | 문종 | 단종 | 세조 | |
사육신 | 생육신 | 논개 | 권율 | |
홍길동 | 임꺽정 | 삼학사 | 박문수 | |
한석봉 | 김홍도 | 김병연 | 김정호 | |
영조 | 정조 | 정약용 | 전봉준 | |
황진이 | 홍경래 | 김옥균 | ||
안중근 | 이완용 | 윤동주 | 지석영 | |
손병희 | 유관순 | 안창호 | 방정환 | |
김두한 | 이상 | 이중섭 | ||
간접적으로 언급된 인물/단체 | ||||
민족대표 33인 | 김좌진 | |||
홍길동전의 저자 허균[1] | ||||
기울임체 는 부정적으로 언급된 인물이다. [1] 실제 홍길동을 언급한 건지 후대 인물 허균이 창작한 의적 홍길동을 언급한 건지 논란이 있지만 간접적인 언급으로 소설 홍길동전에서 대중화된 의적 이미지를 노래 가사로 사용했으므로 저자 허균을 생각하고 언급한 것일 가능성이 높다. | }}}}}}}}} |
[1] 조선 왕 27명 중 최장수[2] 다른 조선 왕릉과는 달리 파묘(破墓) 자리에 다시 쓴 능이라는 것이 특징이다.[3] 조선 왕 27명 중 최장 집권[4] 이 호는 영조가 재위 전에 살던 사가(잠저)인 창의궁(昌懿宮)의 한 누각 이름으로 부왕 숙종이 친히 내려 지어주었다. 영조는 이를 그대로 자기 아호로 썼다.[5] 봉호로 알려진 왕이며, 연잉군이란 봉호는 황해도 연안(延安)에서 유래했다.[6] 숙빈 최씨의 장남으로 태어났다고 대부분 생각하지만, 이전에 태어났었던 영수(永壽)라는 아기가 있었으나 요절했다고 한다. 그래서 영조 순서는 둘째이다.[7] 정종의 남동생 태종은 왕세제가 아니라 왕세자 신분이었다.[8] 생모 숙빈 최씨는 궁녀의 허드렛일을 도맡는 무수리 출신이었다.[9] 훗날 영조를 지지해준 노론 4대신이 집권 여당인 소론 측의 공격으로, 이때 사약을 받고 대거 죽었다.[10] 2위는 74세의 나이로 숨을 거둔 태조. 즉위 기간은 6년.[11] 그림 출처 - 국립고궁박물관. 이 링크에서 다운로드 가능.[12] 그림 출처 - 국립고궁박물관. 이 링크에서 다운로드 가능.[13] '영종'으로 적혀있어 의아해 할 수 있는데, 영조의 원래 묘호는 상술했듯 '영종(英宗)'이었다. 나중에 영조로 바뀐 것. 정조 역시 원래 묘호는 '정종'이었으나 후대에 '정조'로 바뀌었다.[14] 정조의 바로 밑의 이복동생이자 조선 제25대 임금 철종의 할아버지이다. 유배를 강화도로 가게 되면서 본인 은언군과 그의 일족이 신유박해로 풍비박산이 났고 은언군 또한 사약을 먹고 결국 죽는다.[15] 사도세자의 서자이자 정조의 이복동생. 은신군은 17살의 나이로 요절했다. 그러나 왕위 계승 단절의 위험을 미리 알고 했는지 몰라도 선견지명으로 인조의 3남 인평대군의 직계후손인 남연군이 은신군의 양자로 입적되면서 그의 봉사손을 맡아 제사를 지내게 했는데, 훗날 정조계의 헌종과 효종계의 철종이 각각 1849년과 1863년에 죽으면서 모든 왕통 직계가 단절되었는데, 선원록에 기재된 바로 법적상 은신군의 증손자이자 흥선군의 차남 이명복이 또 순조의 아들인 익종(효명세자)의 아들로 입적하면서 왕위 계승을 하여 즉위하게 된다. 불행히 일찍 죽었지만 양자로 편입된 남연군 그 일가 덕분에 사후에는 거대한 후손들에게 제사도 제대로 대접받는 등 여러모로 큰 혜택을 누리게 되었다.[16] 경빈 박씨는 원래 사도세자가 제일 아끼는 후궁이었다. 그러나 사도세자가 부왕 영조로부터 정서적, 정치적으로 학대를 당하는 와중에 정신병이 들었고 옷을 입히는 시중을 하다가 의대증이 도진 사도세자에게 끝내 맞아 죽었다.한 맺힌 억울한 죽음 이로 인하여 임오화변이 결정적으로 일어나는 계기를 마련했다.[17] 태어난 3년 뒤의 어린 아이였던 은전군은 당시 아버지 사도세자가 할아버지였던 영조로부터 갖은 질책과 학대를 다 받으면서 의대증과 같은 정신병이 발발하자 어머니였던 빙애, 즉 경빈 박씨를 때려 죽일 때 같이 있었다는 이유로 칼 치고 문 밖 (하엽생(荷葉生))연못에 던져버려 죽을 위기에 처했다. 다행히도 이를 알아챈 (은전군에게는 할머니가 되는) 정순왕후에 의해 구해진다. 어머니가 맞아 죽은 것도 억울할텐데 1년 뒤 아버지 또한 임오화변으로 죽게 되면서 고아가 되어 상궁 손에 자라게 된다. 추후, 이복형 정조가 즉위한지 1년만에 존현각에 침입했던 사건인 '정유역변으로 주모자인 홍낙임(정조의 외삼촌)이 은전군을 추대하려 했다고 자백하게 되어 결국 정조는 이복동생인 은전군을 눈물을 머금고 사약을 내려 강제로 죽게 하였다. 철종 대에 와서야 신원 복권되고 고종 대에 '효민(孝愍)'이란 시호를 내리게 되었다.[18] 《승정원일기》 1735책 (탈초본 92책) 정조 18년(1794년 청 건륭(乾隆) 59년) 9월 13일 (정유) 남공철에게 전교하기를,"선조(先朝, 영조)의 승은을 입고 70세가 넘은 사람으로 단지 이 사람만 있으니, 오늘 마땅히 기억하는 거조가 있어야 하므로,노(老) 궁인 상궁 이씨의 집에 해조로 하여금 옷감과 식물을 특별히 제급(題給) 하게 한 뒤에 초기하라." 하였다.[19] 문종(고려)이 이런 케이스다. 정종(고려 10대)이 죽기 하루 전에 전위했다.[20] 이게 무슨 소리냐면 왕이 고자라 애를 못 만든다라는 소리다![21] 평안도 출신 김신달리 형제의 후손으로, 정황기 만주에 편입되었다. 조선 사신들 말마따나 뿌리는 잊지 않았는지 조선과 관련하여 이런저런 편의를 많이 봐줘서 명사 편찬 과정에서 인조반정이 찬탈 내지 반역으로 기록되는 것을 막기도 했다. 건륭제의 후궁 숙가황귀비는 이 사람의 종손으로, 이 가문은 가경 연간에 만주식 성인 긴기야씨를 사성받는다. 종손인 김간 역시 건륭 연간 많은 업적을 남긴 권신이어서 청사고 열전에 이름이 오를 정도의 강건성세 네임드 중 하나다.[22] 조선시대에 흉년이 들면 금주령은 보편적으로 내려졌다.[23] 실제로 관절염에 효과를 봤는데 찜찜해서 그런지 그 다음해부터 금주령을 풀었다. 그리고 얼마 안되서 복용을 중단한 걸 보면 술을 좋아하지는 않았던 모양.[24] 다만 가체를 금지한 것은 궁중 한정이다. 어디까지나 사치를 금하기 위한 것이었으므로 국가의 공식 행사 때는 가체를 착용했다. 가체 금지령에 대한 세세한 사항을 정해놓지 않았던 탓에 정작 시행 시간이 7년 밖에 못 되어 실패했기에 나중에는 가체를 다시 전면 허용했다.[25] 근데 이게 사실이라면 영조가 "생각이 없다"라고 봐야 한다. 분명히 즉위 도중에 구리와 주석은 수입해야 한다는 것을 뻔히 알았으면서도 이런 지시를 내린 걸 보면 영조가 괜히 위선자라는 평가를 받는게 아니다. 최소한 금과 은은 당시에 조선에서 채굴이 가능했다. 다만 상징성 때문이라면 그럴 수도 있다. 금과 은이 조선에서 나는 건 맞지만 조선은 공식적으론 금과 은이 나라에서 잘 안 난다고 우겼다. 이유는 원나라-고려 시절에 금과 은을 조공으로 바치느라 고생해서. 그래서 그냥 아예 안 난다고 우기고 근거를 위해 제대로 채굴도 안 했다. 그리고 당연히 명나라에는 금과 은 대신에 돗자리, 인삼 등을 조공으로 바쳤다. 근데 이제 와 금과 은을 대량으로 채굴했다가는 거짓말할 것이 뽀록날 게 아닌가? 문제는 왕이 직접 금은으로 된 물건을 쓰면 아래에서 무슨 생각을 할까? 왕부터가 구리나 주석을 쓰면서 검약 퍼포먼스라도 하면 아랫사람들도 "그래도 왕이 검소하게 하려고 하는데 우리가 사치를 하기는 좀..." 라며 그나마 억제라도 하지, 그런 것도 없다면 "왕이 쓰는데 나 정돈 좀 써도 되겠지?" 라는 심정으로 더할 수 있다. 그러다 보면 결국 언젠가는 중국(청나라)에 조선이 금은이 많다는 말이 돌 것이다. 그럼 고려처럼 금은을 삥 뜯길 수 있다는 공포가 현실이 될 가능성이 생긴다. 거기다 사치재로서 금은의 수요가 늘어나면 어느 시점에서는 조선 내의 금은으론 수요를 감당할 수 없는 시점이 올 것이고, 결국엔 타국에서 수입해와야 할 것이다. 그나마 조선이 금과 은으로 금화와 은화를 만들어 화폐로 유통하는 국가라면야 어떻게 경제에 도움이 될수도 있겠지만 조선이 그 정도로 경제가 발전한 것은 아니다. 게다가 조선은 이미 상평통보 발행을 위해서 구리를 수입해 쓰는 상황이었다.[26] 다만 이는 학계의 의견과는 매우 다르다. 인터넷 커뮤니티의 밈에 가깝다고 봐야 한다.[27] 당대 사람들 시선에도 영조는 매우 검소한 임금이었다.[28] 특히 솔잎주는 당시에는 비싼 고급 술이었다.[29] 참고로 주석은 알루미늄 이전에 호일로 쓰던 생각보다 비싼 금속이었다.[30] 현대로 치면 송로버섯, 푸아그라, 캐비어를 선호하면서 자기가 검소하다고 언플한 셈. 심지어 송이버섯, 전복, 꿩고기, 메추라기 고기는 21세기인 현재에도 값비싼 최고급 음식 재료다. 그나마 지금은 흔하디 흔한 고추장마저 이 시기에는 비교적 덜 흔했다.[31] 참고로 위에 언급한 겸손하다는 엘리자베스 1세도 수많은 보석을 사들여서 수집품으로 모아두었다고 한다.[32] https://sillok.history.go.kr/id/kua_14407028_004[33] 사초를 기반으로 사관들이 편집해서 작성하는 실록에 이러한 기록을 남긴 거 자체가 영조가 검소했음을 칭송하기 위한 목적으로 보인다.[34] 대표적으로 언급되는 게 표고버섯과 건대구에 추가로 살을 덧대는 관례가 있다. 보기도 좋고 먹기도 좋았지만, 살을 덧대는 과정에서 건대구 여러 마리가 추가로 필요해져 백성의 부담이 더 증대되기 때문이다.[35] 사육신이 세조를 수양대군이라는 봉호로 낮추어서 불렀던 것이라든가, 폐위되어서 묘호를 받지 못한 광해군이나 연산군의 사례에서 알 수 있듯이 폭군이나 암군을 즉위 이전의 봉호로 부르면서 깎아내리는 것은 적어도 조선 시대부터 이어져 내려온 제법 유구한 전통이다. 그래서 현대에도 조선의 역대 임금들 중 보편적으로 평가가 나쁜 폭군 내지 암군이었거나 그 정도는 아니지만 작정하고 까려면 충분히 깔 여지가 많은 인물들을 묘호가 아닌 봉호로 부르는 것을 자주 볼 수 있다. 시대 순서대로 하자면 수양대군, 하성군, 능양군, 연잉군(영조). 실제로 이인좌의 난 때도 반군들은 영조를 연잉군이라고 깎아서 불렀다.[36] 봉호도 아닌 휘(본명)를 대놓고 부르는 이성계나 이방과, 이방원 같은 사례도 있기는 한데 이 경우는 이들을 깎아내리는 의도로 쓰는 것이 아니라 주로 '고려의 신하'와 '조선의 왕'이라는 그들의 2가지 상반된 정체성 중 '고려의 신하' 쪽을 강조하는 용도로 쓰이는 것이다. 실제로 태조, 정종, 태종은 태어날 때는 왕족이 아니라 고려의 신하였으며 조선의 임금이 아닌 고려의 신하로서도 (성공한 쿠데타의 주역들인만큼) 한국사에서 상당히 중요한 인물들이기 때문에 본명이 많이 쓰일 수밖에 없다.[55] 당연하다면 당연한 얘기지만 저 셋을 제외한 나머지 조선 임금의 휘를 '이X', '이XX' 식으로 대놓고 부르는 경우에는 얄짤없이 깎아내리는 의도로 쓰인 것으로 해당 인물을 묘호는커녕 봉호로 불릴 자격도 없는 자, 다시 말해 연산군이나 광해군만도 못한 쓰레기로 취급하는 극도의 멸칭이다.[비단 왕만이 아니라 그 시대 기준으로 생이름을 부른다는 건 결례였다. 혹은 자신과 특정 누군가를 지칭할 때 자신은 생이름으로 타인은 자나 호 같은 것으로 부르는 건 명백히 자신을 낮추고 그 사람을 높여부르는 것이었다. 더군다나 '태정태세문단세'로 시작되는 묘호는 잘 알려져 있는 반면, 휘는 피휘 문제로 인해서 해당 글자가 봉인되어버리는 불편을 최소화해주기 위해서 일부러 일상 생활에서 안 쓰이는 소위 벽자로 지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덜 알려져 있는 것을 감안하면 더욱 그렇다.[37] 철종 어진의 경우는 입술 부분이 소실되었고 원종 어진은 귀 부분이 탔으며 순종 황룡포본 어진도 왼쪽 얼굴 상당부분이 불탄 채로 건져졌다.[38] 어디까지나 조선 국왕 중 가장 장수한 거지 영조보다 오래 산 역사적 인물들은 찾아보면 의외로 많다. 장수왕, 강감찬, 최충, 최우, 일연, 황희, 효령대군, 정인지, 정인홍, 이원익, 송시열, 허목 등. 그나마도 정인홍과 송시열 등은 노환도 아니고 사형 집행으로 사망했다. 정인홍과 송시열이 사형을 안 당했으면 90살을 넘을 가능성이 높았다.[39] 다만 의학과 공중 보건이 발달한 현대에는 80살을 넘기는 사람이 상당히 많다.[40] 다만 몸보신을 할 때만큼은 전, 전복, 건어물, 새우젓, 조기, 민어, 굴비를 비롯한 해산물, 탕평채, 두부, 꿩고기, 메추라기 고기, 사슴꼬리, 신선로 등을 먹어 단백질 보충도 확실하게 해 주어서 균형잡힌 알맞은 식단을 짰다.[41] 고추장으로 유명한 전라북도 순창군이 서울대학교 선정 전국 최장수 지역으로 선정되기도 하였다.[42] 이를 근거로 진짜 왕통이 아니라는 주장도 있기는 하지만 극소수의 견해.숙종의 허약하고 화기가 많으며 소화기관 약한 체질을 그대로 물려받았다.[43] 왕들의 종기나 당뇨는 잘못된 생활습관으로 생기는 경우가 많은데 영조는 제사를 직접 주관하면서 자주 씻었고, 식사량도 매우 적었다.[44] 영조는 나이를 먹으면서 여기서 발전하여 치매까지 걸리기도 했다. 허나 나이를 감안하면 치매에 걸려도 이상할게 없는 나이다.[45] 아랫배에 병이 생겨 배가 땡기듯 아프고 대소변이 잘 나오지 않는 병증.[46] 관련 일화에서 영주의 사주는 사갑술인데 실제 영조의 사주는 갑술년 갑술월 무인일 갑인시다.사실은 아니라고 봐야한다.[47] 여기서 또 권극한테 남병사 윤구연이 죽은 것을 책임을 돌려 타박하는데 권극의 말은 사실 임금의 뜻에 맞게 영합한 것에 가깝고, 윤구연은 사실 영조가 금주령을 범한 본보기로 죽인 것이다.# 자수한 이들 중에 나머지는 용서해주고 권극만 처벌한 것은 금주령으로 인해 죽은 사람들을 의식한 것으로 보인다.[48] 여담으로 영조만이 아니고 숙종부터 조선왕들 중에는 화나면 무서운 군주들이 많았다. 숙종은 어머니인 명성왕후도 질겁할 정도였고 경종은 평소엔 어벙했지만 정말로 화나면 주변에서 쩔쩔맬 정도였고. 예시로 대리기간 중에 갑자기 느닷없이 승지고 뭐고 꺼지고 나문하라고 말할 때가 있었는데 주변에서는 너도나도 쩔쩔매며 어쩔줄 몰랐고 왕이 된 후에 노론측에서 상소를 올렸을 때 마음에 안 드는 구절이 나오자 "결탁이니 교통이니 하는 소리는 무엄하다! 다시는 번거롭게 하지 말라!"라고 하자 노론은 찍소리도 못했다. 그리고 김일경의 상소가 올라오자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노론측 인물들을 싸그리(훈련대장, 승지, 삼사, 삼정승) 갈아엎었다. 정조도 영조 못지않게 욕설을 갈겼고 화낼땐 크게 화냈으며, 순조는 평소엔 조용하지만 자기가 고집부리고 싶을때는 주변 의견 씹어먹고 행하기 일쑤였다. 현종비 명성왕후랑 성격이 후대 왕들에게 유전된 모양이다.[49] 빠져죽겠다면서 웅덩이에 발만 잠갔다는 내용으로도 노망이 났다고 추측이 가능하다. 영조 본인은 웅덩이의 깊이를 인지하지 못 하는 것이다[50] 하지만 이 때가 한겨울이었다. 아무리 발만 잠기는 깊이라 해도 동상이 걸리거나 고뿔에 걸릴 수도 있고, 노인이라 자칫하면 폐렴이나 동상 후유증 같은 걸로 사망할지도 모르니 신하들은 애가 탈 수 밖에 없었다.[51] 귀양 중에서도 가장 급이 높은 걸로, 가족이나 제자 등이 함께 갈수도 없고 집 주변에 가시나무를 심어 출입을 금하며 밥만 겨우 받아먹을 수 있게 하는 것이다.[52] 정조는 1752년(영조 28년) 생이다.[53] 제선왕이 제물로 끌려가던 소가 벌벌 떠는 것을 보고 불쌍해 양으로 대체하게 한 것을 맹자가 칭찬한 고사.[54] 이게 좋지 않게 보였는지, 두고두고 '다른 약재를 먹었을 때도 (왕이 먹었다면서) 너도 나도 따라서 해 먹더라. 지난번에 고양이 가죽을 권한 자가 있었는데, 내가 붙였다면 너도 나도 근육통에 따라서 고양이 가죽을 붙여 조선 고양이가 씨가 말랐을 것 아니냐'라면서 몇 번이나 비판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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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 그리고 이 세 사람이 특별히 하대받을 정도로 악인도 아니다. 태조는 조금 갈리긴 해도 왕으로서의 업적이 이정도로 평가절하받을 정도는 아니고 정종은 그냥 태종 허수아비고 태종은 업적이 많은데다 아들을 잘 뒀다. 세종을 위한 발판을 만들어준 것만으로도 설명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