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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영조의 왕녀 화길옹주 | 和吉翁主 | ||
출생 | 1754년(영조 30년) 7월 8일[1] | |
사망 | 1773년(영조 49년) 1월 10일[2] (향년 19세) | |
남양주 궁집[3] | ||
부왕 | 영조 | |
생모 | 폐숙의 문씨 | |
부군 | 능성위 구민화(綾城尉 具敏和) | |
자녀 | 슬하 1남 2녀 장남 - 구명희(具命喜) 장녀 - 김이초(金履初)의 처 차녀 - 윤영명(尹永明)의 처 | |
묘소 | 충북 음성군 생극면 신양리 대지공원묘원[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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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 영조와 숙의 문씨 사이에서 태어난 차녀. 동복 언니는 화령옹주이다.2. 생애
1765년(영조 41년), 나이 11세의 화길옹주는 호군 구현겸[5]의 아들 구민화를 부마로 맞이한다. 구민화는 구선행[6]의 손자로, 전통적인 무반 가문인 능성 구씨의 일원이었다. 영조가 환갑에 얻은 막내딸로 애지중지하던 화길옹주였던 만큼 영조가 사윗감도 직접 골랐다. 구민화에 대한 평판은 좋았는데, 대사헌 김사목은 구민화에 대해 '점잖다'고 평했고, 도승지 윤시동은 '강명(强明)' 즉 '성정이 곧고, 총명하다'고 평했다.그렇지만 화길옹주는 안타깝게도 19세의 어린 나이에 요절했다. 다만 그녀가 사망할 때는 어머니 숙의 문씨와 외삼촌 문성국 등이 몰락하기 이전이어서 다행히 외가가 풍비박산 나는 모습은 보지 않을 수 있었다. 20살도 안 되는 나이에 자식을 셋이나 낳았는데, 너무 어린 나이에 임신, 출산을 반복하다 보니 몸에 무리가 간게 아닌가 싶다.
영조는 화길옹주가 죽자 조회도 열지 않고, 팔순 축하연도 거부했다. 정조가 상소문을 올려 이를 말렸다고 한다.
영조가 화길옹주와 구민화의 혼인을 축하하며 현재 서울특별시 종로구 안국동과 경기도 남양주시 평내동 일대에 토지를 하사했는데, 안국동에 지은 능성위궁(陵城尉宮) 터가 2016년에 발굴되었다. 평내동에 지은 궁(宮)집은 지금도 그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평내동 궁(宮)집에서 화길옹주의 묘가 보였는데, 구민화가 그 묘를 바라보며 지냈다고 한다. 구민화는 그로부터 7년 후인 1800년(순조 즉위년)에 사망했다.
3. 가족 관계
- 시조부 : 구선행(具善行)
- 시부 : 구현겸(具顯謙)
- 남편 : 능성위 구민화(綾城尉 具敏和, ? ~ 1800)
- 장남 : 구명희(具命喜)
- 장녀 : 김이초(金履初)에게 출가
- 차녀 : 윤영명(尹永明)에게 출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