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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c00d45,#94153e><colcolor=#f0ad73> 조선 정승 문정공(文貞公) 맹사성 孟思誠 | |
<nopad> 권오창, 정부표준영정 80호, 2008년 | |
출생 | 1360년 9월 5일[1] (음력 공민왕 9년 7월 17일) |
양광도 온양 (現 충청남도 아산시 배방읍 중리) | |
사망 | 1438년 10월 31일[2] (향년 78세) (음력 세종 20년 10월 4일) |
한성부 | |
묘소 | 경기도 광주시 직동 산27번지 |
시호 | 문정(文貞) |
본관 | 신창 맹씨 |
자 | 자명(自明) |
호 | 고불(古佛),[3] 동포(東浦) |
부모 | 부친 - 맹희도(孟希道) 모친 - 흥양 조씨(興陽趙氏) |
부인 | 동주 최씨 - 최담(崔潭)[4]의 딸 |
자녀 | 슬하 2남 장남 - 맹귀미(孟歸美) 차남 - 맹득미(孟得美)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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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여말선초의 문신.2. 생애
맹사성의 조부인 맹유(孟裕)는 고려 말기의 고위 관리로 최영과 친구 사이였다. 맹유의 아들이자 맹사성의 아버지인 맹희도(孟希道)는 충청도 한산에 자리를 잡고 살았다. 맹희도는 정몽주의 친구였고 맹사성의 아내는 최영의 손녀로 슬하에 아들 둘을 두었다.태종이 맹사성을 종친 세력 강화 용도로 이용해 먹은 적이 있는데 태종에 걸려 사형 직전까지 갔다가 살아난 적이 있다. 사형 대신 유배를 갔으나 한 달 만에 사면되고 1~2년 뒤 관직으로 돌아왔다. 의외로 이때 맹사성을 사면시키게 한 사람이 양녕대군이다. 맹사성에게 교육받은 적이 있어 태종에게 맹사성을 사면해달라고 청하였다. 이 사건으로 아들인 맹귀미가 고문 후유증으로 사망했다. 자세한 것은 조대림 사건 참조.
조선 초의 황희 정승과 함께 세종 시기는 물론 조선 시대를 대표하는 재상이자 청백리의 상징으로 통하며 우의정, 좌의정까지 올랐다. 맹사성은 황희에 비해 관리들이나 정국을 주도적으로 이끌어나가는 박력이 떨어지는 편이었다. 실제 황희는 강직하고 분명하게 자신의 의견을 개진하고 추진하는 인물이었는데 맹사성은 자신의 의견을 내더라도 분명하게 개진하기보다는 우회적으로 신중하게 의견을 내는 스타일이었다. <조선왕조실록>에서도 맹사성의 단점으로 '너무 우유부단해서 강직한 결단력을 내리는 능력이 부족했다'고 적고 있는데 좋게 말하면 부드러운 성품의 호인이었지만 나쁘게 말하자면 물러터진 사람이었다는 소리로 남의 부탁을 거절하지 못하고 남에게 싫은 소리를 잘 못했다. 그래서 <조선왕조실록>에서도 이 점을 크게 까고 있는데 1434년(세종 16년) 음력 8월 7일자 실록을 보면 판이조 맹사성은 너무 착하고 우유부단하며 판서 신개는 "예예"하기만 해 도승지 안숭선이 전선(銓選)을 도맡았다고 서술하고 있다.[5]
그러나 맹사성의 이런 면모는 황희와의 투톱 체제에서 좋게 작용했는데 맹사성의 성품이 황희나 허조 같은 강직한 대신들의 단호함이나 날카로움을 완화시키고 대신들간의 논쟁을 중재해 진정시키는 역할을 했다. 황희와 맹사성은 일종의 상호 보완 관계였던 셈. 음악에 조예가 깊었던 면모답게 섬세함이 요구되는 일처리에서 강점을 발휘했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황희에 가려서 영의정이 못된 것이 아니고 그 자리에 그 인물인 것이다.[6]
흑역사로 황희랑 짜고 사건을 조작한 일이 있다. 황희 문서의 서달 사건 참조.
<태종실록>, <고려사>, <팔도지리지>, <신창경제육전> 편찬을 주도한 인물이기도 한 맹사성은 긴 관직 생활 동안 공평무사하게 일을 처리해 덕망이 높았다. 사람됨이 소탈하고 엄하지 않아 비록 벼슬이 낮은 사람이 찾아와도 반드시 공복을 갖추고 대문 밖에 나아가 맞아들여 윗자리에 앉히고 돌아갈 때에도 역시 공손하게 배웅하여 손님이 말을 탄 뒤에야 들어왔다. 나이가 들어 하직을 간청했으나 세종의 거부로 1435년까지 재직하게 되었고 그 해 나이가 많아서 벼슬을 사양하고 물러났으나 세종은 나라에 중요한 일이 있으면 반드시 맹사성에게 자문했다 한다. 말년에는 고향인 온양에서 여생을 보냈으며 1438년 사망하였다. 맹사성이 세상을 떠나던 날 세종이 모든 국정을 중단한 채 문무백관을 거느리고 문상했다고 한다. 황희 때문에 부각되지 않았을 뿐 맹사성도 당시 기준으로 상당히 장수한 편이다.
3. 기타
- 출생지인 오늘날 충청남도 아산시에는 실제로 맹사성 고택이 있으며 2015년 기준 가장 오래된 민간 가옥이다. 원래는 최영 장군의 집(1330년 최영의 부친인 최원직이 지었다고 함)이었으나 위화도 회군 이후 비어있던 집에 맹사성 일가가 전란을 피해 내려와 살기 시작했다고 한다. 고택, 사당, 구괴정, 맹사성이 심었다는 은행나무단을 망라하여 맹씨행단이라 부른다. 현재도 마을은 신창 맹씨 집성촌이며 인근의 수철리와 휴대리에도 집성촌이 있다.
- 19세에 장원급제하여 파주 군수로 부임하여 자만심이 높아질 때 스님의 조언으로 큰 깨달음을 얻었다. '나쁜 일 하지 않고 좋은 일만 하면 된다'고 이야기를 듣고 어이 없어 하는 맹사성에게 '어린아이도 알지만 실천으로 옮기는건 노인도 어렵다'는 말을 듣고 감탄했다고 한다. 차 한잔 하라고 차를 주는데 넘쳐 흐르는 걸 보고 놀란 맹사성에게 '차가 넘쳐 흐르는건 알면서 지식이 넘쳐 인격이 망치는건 모르냐'는 질문에 부끄러워 방을 나오다 문틀에 부딪힌다. 이걸 본 스님은 '몸을 낮추면 머리를 부딪칠 일이 없다'고 알려주고 실천과 겸손에 대해 깨우침을 얻고 겸손한 청백리가 되었다는 일화가 있다.
(…) 예조에서 아뢰었다.
"관습 도감 제조(慣習都監提調) 맹사성(孟思誠)은 음률에 정(精)하여 거의 선왕(先王)의 음악을 회복할 수 있는데, 근일에 판충주(判忠州)를 제수하였습니다. 신 등은 생각건대 한 고을의 정무(政務)는 사람마다 능한 이가 많지마는 선왕의 음악은 사람마다 능히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니, 청컨대, 맹사성을 머물게 하여서 정악(正樂)을 가르치소서."
태종실록 22권, 태종 11년 윤12월 7일 계해 1번째기사
"관습 도감 제조(慣習都監提調) 맹사성(孟思誠)은 음률에 정(精)하여 거의 선왕(先王)의 음악을 회복할 수 있는데, 근일에 판충주(判忠州)를 제수하였습니다. 신 등은 생각건대 한 고을의 정무(政務)는 사람마다 능한 이가 많지마는 선왕의 음악은 사람마다 능히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니, 청컨대, 맹사성을 머물게 하여서 정악(正樂)을 가르치소서."
태종실록 22권, 태종 11년 윤12월 7일 계해 1번째기사
- 우리 고유 음악인 향악에 조예가 남달라 조선 초기 우리 음악의 기초를 닦는데 큰 공헌을 했다. 마침 박연, 류사눌 등 당시 관리들 중에는 음악에 능한 사람이 많았기에 이들과의 협업으로 조선의 예악이 수월하게 정비될 수 있었다. 박연이 악기를 제작할 때에도 그가 도왔으며 맹사성과 관련된 기록 가운데에서도 그가 음악에 능했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들이 많다. 1411년 판충주목사로 임명될 예정이었을 때 예조에서는 "훌륭한 지방관은 많아도 음악에 능한 사람은 찾기 힘들다면서 맹사성이 거의 선왕의 음악을 회복할 수 있을 정도로 솜씨가 뛰어나기에 삼기 아깝다"는 의견을 낸다. 1412년에도 영의정을 지내던 하륜이 비슷한 지적을 하며 역시 맹사성의 음악 솜씨를 높이 평가한다. 세종의 즉위년에 열린 잔치에서는 음악 이야기가 나오자마자 맹사성의 이름이 튀어나오는데 말 나온 김에 음악 전문가인 맹사성이 관련 서무를 맡아 보게 한 것. 이 밖에도 세종이 음악에 연관된 일을 논의할 때면 맹사성과 상의하는 일이 잦았는데 음악에 정통한 재상으로 모두에게 인정받고 있었던 것.
- 퉁소를 잘 불었다고 하며 평소에 집에서도 퉁소를 즐겨 불어서 맹사성을 찾아온 사람들이 집 밖에서 퉁소 소리를 듣고 맹사성이 집에 있다는 것을 알았다는 야사가 전해질 정도. 실록의 졸기에도 '음률에 능해 스스로 악기를 만들 줄도 알았다'고 기록된 것을 보면 야사는 사실일 가능성이 높다.
- 조선 전기의 시조인 '강호사시가'를 만든 사람이기도 한데 송순과 비슷하게 자연 속에서 자연을 즐기는 자연관이다. 차이점이 있다면 맹사성은 당시 임금을 찬양하면서 지은 것이고 송순은 한정가로 불렀다는 것.[7]
- 맹사성의 할아버지인 맹유가 자신의 며느리가 해를 삼키는 꿈을 꾸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절에 들어가 공부하던 자식인 맹희도에게 부친이 위독하다는 급전을 띄워 집으로 불러들인 후 며느리와 동침하게 하여 태어난게 맹사성이었다고 한다.
- 어느 날 최영이 낮잠을 자고 있는데 용 1마리가 집 앞 배나무를 타고 승천하고 있는 꿈을 꾸었다. 놀라 깨어 밖으로 나가 보니 어린 맹사성이 배나무에 올라 배를 따고 있었다고 한다. 최영이 꾸짖는 척 하며 동태를 살피니 보통 아이들처럼 울거나 도망치지 않고 예의를 갖추어 잘못을 고하는 모습에서 범상치 않음을 보고 손녀사위로 삼았다. 이후 최영이 그 집을 맹사성에게 물려주었는데 준 집이 지금 충청남도 아산시에 있는 맹씨행단(孟氏杏壇)이다.
- 효성이 지극하고 청백하여 살림살이를 일삼지 않고 식량은 늘 녹미[8]로 했고 바깥 출입을 할 때에는 소 타기를 즐겨 보는 이들이 그가 재상인 줄을 알지 못했다고 한다. 이처럼 지혜로우면서도 청렴결백한 맹사성의 성품은 요즘 사람들에게 더욱 귀감이 되고 있다.[9]
- 황소를 타고 수수한 차림으로 다녔다는 일화도 유명. 고향인 온양에 내려갈 일이 있었던 맹사성에게 한 현감이[10] 잘 보이기 위해 그가 지나갈 길을 닦고 맞이할 준비를 했다. 그런데 맹사성은 나타나지 않고 웬 소를 탄 노인이 길을 떡하니 지나갔다. 어이가 없어진 현감이 하인들을 시켜 그 노인을 잡아오려 했지만 노인은 하인들에게 "온양 사는 맹꼬불이가[11] 제 소 타고 제 갈 길 가는데 어찌 바쁜 사람을 붙잡는가?"라고 허허 웃으며 받아치고는 제 갈 길을 갔다. 한참 지난 다음에서야 부랴부랴 맹사성을 따라가던 하인들에게서 보고를 받고서야 그 노인이 맹사성이었다는 것을 안 현감이 사죄하기 위해 달려가다가 인수를 연못에 빠뜨려 버려서 그 연못을 '인침연(印沈淵: 도장 빠진 연못)'이라고 했다는 일화도 유명한 이야기.[12]
- 맹사성은 휴가를 얻어 고향 온양으로 종종 놀러가 낚시를 했다. 어느 날 비가 내려 시냇가의 물이 좀 불었는데 걷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런데 건너편의 한 젊은 선비가 대뜸 낚시 중인 맹사성을 불러 "선비가 옷을 걷고 체통없이 건널 수는 없으니 업어 주시오!"라는 게 아닌가? 건방진 선비의 요구에도 맹사성은 군말없이 건너가 선비를 업어다주었다. 그런데 맹사성이 쓴 삿갓이 얼굴에 비벼지자 신경질이 난 선비가 삿갓을 들어 내동댕이쳤다. 그러자 지체 높으신 분들이나 쓰는 옥관자가 고스란히 드러났고, 선비는 그제서야 이 분이 맹사성 대감임을 깨닫고 부리나케 뛰어내려 신발이 젖는 것도 모르고 도망쳤다. 또는 얌전히 잘 건넌 후 "노인장은 어디 사는 뉘시오?"라는 질문에 "온양 사는 맹고불이오!"라고 답하자 물에 쫄딱 젖어 도망쳤다는 버전도 있다.
맹사성이 길을 가다 정자에서 쉬는데, 거기에 어떤 젊은 선비가 먼저 와 있었다. 맹사성의 검소한 옷차림을 보고 정체를 알아채지 못한 젊은이가 그를 놀릴 양으로 "우리 '공당놀이'란 걸 해 볼까요? 댁은 말 끝에 '~공'이라고 하고 나는 말 끝에 '~당'이라고 하는 거요"라고 제안했다.[13] 그리하여... "그대는 어딜 가는공?" / "한양에 간당." "한양엔 왜 가는공?" / "벼슬자리 구하러 간당."("과거를 보아 맹 꼬부리/맹 정승을 뵈러 간당"이라는 식으로 나오기도 한다.) "한양가서 벼슬자리 줄 사람 있는공?" / "없당." "그럼 벼슬자린 어떻게 얻으려고 하는공?" / "나도 모른당." "그럼 내가 벼슬 하나 주면 어떤공?" / (폭소하며) "바라지도 않는당."(혹은 "가당찮은 소리 맙시당.") 그 후 시간이 지나 맹사성이 신참 관리들의 하례를 받게 되었는데, 마침 그 자리에 예전에 자신을 놀리던 그 젊은이도 있었다. 이에 장난기가 동해 장난을 걸었다. "자네, 나를 알아보겠는공?" / (고개 들고는 깜짝 놀라) "아, 알아보겠당." "그래, 지금 기분이 어떠한공?" / "주, 죽고만 싶당."("죽여주사이당.", "그저 죽어지어당." 등의 버전도 있다. 맹꽁이 서당에선 "죽어지당! 죽어지당!") 주위에 있던 다른 대신들이 '갑자기 뭔 공, 뭔 당?' 하면서 궁금해하자 맹사성이 일화를 얘기해 주었고 좌중은 웃음바다가 되었다고 한다. 이후 맹사성은 과거에 연연하지 않고 그 선비를 잘 보살펴 뒤를 봐 주었다고 한다. |
- 야사에서는 벼슬자리 구하러 가던 선비와 벌인 언어유희(지금 시각으로 보면 야자타임 겸 통신체)인 '공당문답'으로 유명하다.[14] 조선시대 야사 중에는 이런 식으로 '소박한 차림으로 있던 당대 권력자를 미관말직이나 과거 보러 가는 젊은이가 몰라보고 놀려먹었다가, 나중에 궐에서 젊은이를 다시 만난 권력자가 거꾸로 놀려먹는다'는 이야기들이 있는데, 젊은이가 이 때 대응을 잘 해내면 권력자가 "허허 이 친구 보통내기가 아니구먼"하면서 지난 날의 무례도 탓하지 않고 잘 보살펴준다는 결말을 맺고는 한다.[15] 맹사성이 먼저 공당문답을 제안했다는 버전도 있는데 이 버전은 공당문답의 상대 젊은이가 '웬 미치광이가 찝적대냐'는 식으로 속으로 생각하다가 나중에 맹사성의 은혜를 입은 뒤 공당문답의 인물이 맹사성임을 알자 대경실색한다는 내용이다.
- 한때 나이를 속이고 3살 아래의 계묘년(1363)생 행세를 하며 계묘년생 관원들의 친목회인 계묘회에 어울렸는데, 이후 왕이 나이를 묻자 거짓말을 할 수 없으니 솔직하게 경자년(1360)생이라 고하자 계묘회에게 한 소리 들었다는 일화가 《맹꽁이 서당》에 소개되어 있다.
- 자녀로는 맹귀미와 맹득미가 있다. 맹귀미는 조대림 사건에 휘말려서 고문을 받다가 후유증으로 사망했다. 맹득미는 이시애의 난 때 진압군에 종군했다가 전사했다.
4. 대중매체
- 1996년 KBS1 드라마 용의 눈물에서는 배우 임혁주[16]가 연기했다. 왕권파의 인물로 그려지며 청렴한 모습으로 그려진 것은 맞지만 강직한 캐릭터로 묘사되기 때문에 쓴소리를 많이 하고 소리도 많이 친다. 후반에는 이화와 함께 민무질 형제를 벌해야 된다는 대사가 절반이다. 양녕대군과 함께 사신단에 포함돼서 명나라로 가던 도중 이지성이 민무질 형제를 옹호하자 발끈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 2008년 KBS 드라마 대왕 세종에서는 배우 안대용이 연기했다. 온화하고 청렴한 성품으로 나오지만 용의 눈물의 모습에 비해서는 능글맞고 말 속에 뼈가 있는 면모가 강하다. 첫 등장부터 피리를 불며 황소를 타고 입궐하는데 그 모습을 못마땅하게 여긴 허조가 한 소리 하자 맹사성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저 녀석(타고 온 황소)을 빈청(조정의 회의실)에 끌고 가지 않은 것만으로도 다행으로 여기게. 저 녀석이 있는 짐승 우리가 빈청과 다를 게 뭔가? 시끄럽지, 당최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듣기 힘들지." 그리고는 "자네가 예조참판이라길래 내 예조판서 직 받을지 말지 고민 많이 했다."고 허조를 디스한다.
윤회가 사망한 78회를 마지막으로 소리 소문없이 하차한다. 실제로 윤회가 1436년에 죽고 맹사성이 그로부터 2년 뒤(1438년)에 죽은 데다가, 바로 다음 에피소드인 79회는 1441년의 시점을 다루고 있으니 당연하다.
[1] 율리우스력 8월 28일[2] 율리우스력 10월 22일[3] 허리가 굽어 '맹꼬불'이라는 별명이 있었는데 이를 한자로 음차한 것.[4] 최영의 아들.[5] 요즘 식으로 말하면 행정안전부 장관과 인사혁신처장이 너무 유약해서 대통령비서실장이 인사를 전횡하는 상황이라 생각하면 된다.[6] 예를 들어 축구에서 프란츠 베켄바워와 게르트 뮐러를 바꿀 수가 없는 것처럼 황희는 영의정의 일을 잘 하는 인물이고 맹사성은 좌의정의 일을 잘 하는 인물인 것. 그 분야에 출중했기 때문에 자리 변동이 없었던 것이다.[7] 이 시절에는 임금에 대한 찬양시를 짓는게 딱히 이상하지 않은 시절이었다. 맹사성이 임금에 아부하느라 지은 시가 아니라 그냥 유교적 덕목이었다는 것.[8] 녹미는 조정에서 봉급으로 주던 쌀로 보통 묵은쌀이어서 햅쌀에 비해 맛이 없었다.[9] 황희는 의외로 비리 문제를 많이 터뜨린 편이다.[10] 버전에 따라서는 아예 그 일대의 수령들이 죄다 모여서 진을 치고 있다고도 한다. <맹꽁이 서당>의 경우는 2명으로 묘사했다. 지명이 구체적으로 언급되는 경우에는 진위(현재의 평택시 진위면) 현감, 양성(현재의 안성시 양성면) 현감 등으로 언급된다.[11] 그의 호, 고불을 살짝 비틀어서 등이 꼬부라졌다는 뜻의 언어유희를 구사[12] '침인연'이라고 불리는 판본도 있으며 조선시대에 이렇게 공인(公印)을 잃어버리는건 '익직'이라 하여 파면을 면치 못하는 중죄에 속했다.[13] 의문형 어미인 '-고'가 변하여 된 공公과 종결형 어미인 '-다'가 변하여 된 당堂이 서로 운자韻字가 맞추어져 한시漢詩적 율격을 형성하는 것이다. 그리고 진짜 중요한 부분은, 노인인 맹사성이 '-고'의 성격으로 묻는데 청년인 선비는 '-다'의 성격으로 답하게 되어 장유의 구분이 무너진다는 것이다. 선비는 이것을 노리고 놀려 먹을 양으로 '공당문답'을 제안했던 것.[14] 선비가 곧바로 공당놀이로 대답하자 맹사성이 크게 감탄했다는 버전의 이야기도 있다.[15] 송시열도 이런 이야기가 있고, 흥선대원군도 파락호 노릇을 하던 시절 한 젊은 무관에게 왕족답게 처신하라고 한 소리 듣고 뺨까지 맞았다가 대원군이 된 후 그 무관을 불러 지금도 그럴 수 있겠냐고 호통을 쳤는데, '지금도 대원위 대감께서 왕족의 위신을 떨어뜨리신다면 얼마든지 그럴 수 있다'고 대답한 그 무관의 꼿꼿함을 높이 사 금위대장 자리를 주었다는 이야기가 있다.[16] 2000년 KBS 드라마 태조 왕건에서는 박영규 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