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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01 23:52:45

조말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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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c00d45><colcolor=#f0ad73> 문강공(文剛公)
조말생
趙末生
파일:조말생 초상.jpg
[1]
출생 1370년(공민왕 19)
사망 1447년 5월 11일 (향년 77세)
(음력 세종 29년 4월 27일, 향년 78세)
시호 문강(文剛)
본관 양주 조씨
근초(謹初), 평중(平仲)
사곡(社谷), 화산(華山)
경력 영중추원사, 예문관 대제학, 병조판서
부모 부친 - 조의(趙誼)
모친 - 양주 신씨(楊州 申氏)
부인 평산 신씨(平山 申氏)
자녀 장남 - 조선(趙璿)
차남 - 조찬(趙瓚)
3남 - 조근(趙瑾)
장녀 - 신대홍(辛帶紅)의 처
1. 개요2. 생애3. 가족 관계4. 여담5. 대중매체

[clearfix]

1. 개요

조선 초기의 문신으로 태종사돈이다.

양주 조씨 문강공파의 중시조이다.

2. 생애

1401년(태종 1년) 문과장원 급제해 삼사 관원, 이조 정랑 등 엘리트 코스를 밟았으며 특히 승정원에 7년 동안 있으면서 출셋길을 달렸다. 태종으로부터 원래 왕실사위에게 주어지는 종1품 정덕대부 품계를 받자 조말생이 사양했지만 태종은 "앞으로 천천히 대신[省宰]을 시키고자 하니 사양말라"고 했다고 한다.[2] 세종 즉위를 앞두고 형조판서가 되었다가 즉위 후 병조판서가 되어 8년 동안 있었다. 1421년 맏아들 조선(趙璿)이 신빈 신씨[3]의 둘째 딸 정정옹주(貞靜翁主)와 결혼하여 부마가 되기도 했다.

이렇게 순탄하기만 할 것 같았던 출셋길은 1426년 김도련(金道練) 사건에 연루되어 실각하게 되면서 멈추게 된다. 김도련은 아버지 대부터 수십여 년에 걸쳐 노비 소송을 자기에게 유리하게 이끄는 대가로 노비 판결을 받은 노비 중 일부를 수많은 관료들에게 불법 증여했다. 조선 시대판 권력형 게이트라고 할 수 있는 이 사건에서 조말생이 증여받은 노비의 숫자는 36명으로 연루된 사람들 중 최대였다. 더욱이 조말생은 태종 연간에 승정원에 있으면서 형조의 노비 소송 업무를 담당한 적이 있었기 때문에 혐의가 더욱 중대했다. 액수로 따지면 당시에 뇌물 수수죄로 사형을 선고받는 최소 한도인 80관의 9~10배인 780관에 달해 처형될 위기였으며 실제로 대간들의 사형 요구 상소가 빗발쳤다. 세종은 일단 조말생을 충청도 회인(오늘날 충청북도 보은군 회인면)으로 귀양보냈으나 여론은 가라앉지 않았다.

조말생은 사건 2년 뒤인 1428년 당시 유배지였던 평산에서 풀려났다. 조말생을 한양에 들어올 수 없게 하라는 상소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다시 2년 뒤인 1430년 직첩을 돌려받자 대간들은 가만 있지 않고 궁 앞에 멍석을 깔고 전원 사직 시위를 벌였지만 세종은 무시했다. 결국 다시 2년이 지난 1432년 조말생은 동지중추원사로 관직에 복귀할 수 있었다. 하지만 다시는 의정부육조의 요직에 앉지 못했다. 1433년 함길도 관찰사로 북방에 가서 사민정책(徙民政策)에 대한 보고를 올렸고 이후 주로 중추원에 있으면서 군사 행정 업무를 도왔다. 3도 도순문사로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 일대의 축성 부지를 선정하기도 했다. 조말생은 장수하여 1439년 궤장[4]을 하사받았고 70세가 넘은 고령의 고위 관료들이 들어가는 기로소에 들어갔다.

조말생은 관직을 유지한 대신 본인 뿐만 아니라 가족까지 탄핵과 비방에 시달려야 했다. 대표적인 예시가 바로 아들들인 조근, 조찬과 관련된 사건이다. 조말생의 막내아들인 조근이 과거에 합격해서 합격자 등록을 위해 예문관에 갔다가 한참 뒤인 2일 뒤에나 합격자 등록이 이루어진 일이 발생하는데 이유는 아버지 조말생의 전과 기록 때문이었다. 조말생은 당시 예문관의 수장인 대제학 직위에 있었는데 자기 부하들이 상관인 자신의 전과 기록 때문에 아들의 합격자 등록을 지연시킨 것이다. 당시 조말생은 위세를 회복했던 터라 "부하 관리들이 망령되게 상관인 제 잘못을 논해 제 아들까지 피해를 입게 되었고 부서의 수장을 기만하였으니 무슨 낯으로 같은 부서에서 상하 예의를 차리며 직무를 수행하겠습니까? 신을 해임시켜주시길 바랍니다"라면서 세종에게 자신의 해임을 요청하는 상소를 올렸다. 이를 알게 된 세종은 일단 합격자 등록에 관련된 인물들을 처벌하는 정도로 끝냈다. 이때가 세종 20년 3월(서기 1438년)의 일이었는데, 몇 달 지난 그해 10월에 조말생의 차자인 조찬이 사헌부 감찰 벼슬을 제수받게 되자, 조찬에 대해서도 비슷한 이유로 사헌부가 고신 서경을 거부하는 사건이 벌어진다. 일단 세종은 사헌부에 조찬에 대한 고신 서경을 명령하는데, 그럼에도 사헌부는 '장물죄를 범한 조말생의 아들인 조찬이 사헌부 감찰직에 있을 수 없다'며 고신 서경을 반대했는지 실록에 무려 세종 23년(1441년)까지 조찬의 임명장에 서명하지 않은 이유, 사헌부 감찰에 조근을 앉힐 수 없는 이유를 아뢴 기록이 남아있다. 상황이 이렇게 돌아가자 조말생은 이걸 반격의 기회로 보았는지 아들들의 고신 서경을 해달라는 상소문을 올리는데, 이 상소문에 자신은 무죄인데 억울하게 죄를 받았다며 뇌물 수수 혐의를 전면 부정하고, 재조사를 해달라는 내용을 써 놓았다. 즉, 표면적으로는 자기 아들의 고신 서경 문제를 내세운 것이지만, 그 속내는 자신의 오점인 뇌물 사건에 대해 무죄임을 주장하는 것이 조말생의 의도인 것.

그러나 세종은 조말생에 대한 탄핵이 이어질 때마다 다른 혐의는 부정할 수 있어도 오로지 이 사건만은 부정할 수 없다는 자세를 고집했으며, 이러한 조말생의 의도를 파악했는지 사헌부에 그저 '조말생의 아들들 임명장에 서명이나 하라'는 명령만을 내렸을 뿐, 조말생의 무죄 주장과 재조사 요청은 끝내 들어주지 않았고 무응답으로 일관했다. 태종의 측근이라면 평생 보호했던 세종은 조말생을 복귀시켰지만 그의 부패함은 끝내 묵과하지 않은 것.[5] 말년에 이르러 세종에게 사직하겠다는 청을 계속 올렸으나 세종은 들어주지 않았는데 실록을 보면 조말생의 사직 기록은 이렇다.

평생을 탄핵에 시달리기도 해서 사직 상소를 끈질기게 올렸지만 전부 반려되고 1447년 사망했다.[7] 다만 단순히 죽기 전까지 부려먹은 것이 아니고 정치적인 보호를 위한 쇼맨쉽에 가깝다. 같은 사건에 연루된 좌의정 이원과 비교해보면 이 점이 명확하게 드러나는데, 이원 역시 태종이 아꼈다는 이유로 세종 연간에 정승에 이르렀지만 조사 과정에서 과거에 이원이 태종의 명령을 어기고 능멸한 혐의가 밝혀지자 세종은 가차없이 공신 녹권과 직첩을 빼앗고 유배한 뒤 다시는 불러들이지 않았다. 조말생은 순전히 세종의 효심 덕분에 살아남은 것이다.[8] 또한 세종은 아무리 능력있는 신하를 오래 등용한다 해도 절대 의지가 없는 신하는 등용하지 않았다. 때문에 죽기 직전까지 부려먹혔다는 의견은 세종 특유의 인사 스타일을 다소 오해한 것이다. 후에 문강공이라는 시호를 받았는데 문(文)은 학문에 부지런함을 뜻하고 강(剛)은 지난 오점을 고친 것을 뜻하는 의미로 내린 시호라고 한다. <세종실록>의 조말생 졸기에서는 기개있고 도량이 크며 일처리 방식이 너그럽고 후덕했지만 뇌물 사건의 오점이 커서 정승이 되지는 못했다는 평을 남겼다.

그의 묘는 경기도 남양주시 수석동에 위치하고 있다.

3. 가족 관계

※『씨족원류』를 참고했다.

4. 여담

파일:조말생 초상.jpg
鶴坡先生遺像讚(학파선생 영정 찬미/ 撰者 : 趙末生(조말생 1370-1447) 世宗때 文臣, 領中樞院事

稟得山川 靈氣有盛 (품득산천 영기유성) 품성을 산천에서 얻었으니 신령스런 정기가 넘쳐있고
文武兼才 忠義定性 (문무겸재 충의정성) 문무를 겸전하고 충의의 성품을 품었도다.
功尊秩高 形端容正 (공존질고 형단용정) 귀한 공 높은 지위에 형체는 단정하고 용모도 바르구나.
遺像在世 觀者起敬 (유상재세 관자기경) 남긴 상이 세상에 있어 보는 이마다 공경심을 갖게 하네.

5. 대중매체


[1] 이 초상화는 조말생의 초상화라고 전해지지만 복식이 조선 중기 이후의 것이라서 조말생의 초상화가 아니라는 의견이 많다. 설령 맞다고 해도 조선 중기 이후 다시 그린 그림으로 추정된다.[2] 세종 29년 4월 27일 무오 2번째 기사. 조말생의 졸기[3] 태종의 후궁으로 3남 7녀를 낳았고 태종의 병구완을 맡을 정도로 총애를 받았다.[4] 나라에 공이 많은 원로들에게 주는 지팡이와 의자.[5] 조말생의 장점은 세종 재위기에 꼭 필요했던 국방 관련 능력으로 추정되는데 조말생은 8년간 병조판서로 재직했으며 태종이 상왕으로 물러난 시기에 행해진 조선군의 대마도 정벌 당시에도 병조를 담당하고 있었다. 6년 만에 복귀한 직후에 함길도 관찰사로 보내 북방을 안정시키고자 했고, 대부분의 경력을 중추원에서 군무 관련 자문을 받거나 삼남 지방에 성을 쌓으며 보냈다.[6] 해당 인물이 사망했을 때 그의 행적과 평판 등을 종합해서 평한 글[7] 마지막 상소를 올린건 죽기 몇 개월 전으로 내용은 풍질에 걸려서 오늘 내일 할 것 같을 정도로 힘드니 제발 사직시켜 달라는 내용이었다. 능력도 있고 그만한 의지도 있는 신하가 있으면 신뢰하고 한 번 채용하면 끝까지 써먹는 세종의 인사 스타일을 고려하더라도 이쯤 되면 잔인한 수준.[8] 참고로 세종은 아버지인 태종에 대한 존경심은 컸던 것으로 보이나 그를 보좌한 주요 신하들에 대해서는 평을 낮게 한 경우가 많았다. 이원도 그랬지만 박은, 하륜에 대해서도 평이 낮았고 이숙번에 대해서는 공과가 양립한다는 식으로 평가했다.[9] 이 때 문과 장원급제가 조말생, 무과 장원급제가 이징옥이었다. 과거가 끝난 후 벌어진 연회 자리에서 태조가 태종이 보낸 차사를 쏘아죽였다는 소식이 전해진다.[10] <용의 눈물> 스트리밍을 통해 이 모습을 본 네티즌들은 "저러니 세종이 죽을 때까지 부려먹지."라는 드립을 친다.[11] 2004년 KBS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에서는 윤두수 역, 2011년 KBS 드라마 <공주의 남자>에서는 문종 역.[12] 영의정으로만 언급되지만 시기상으로 황희일 수 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