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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346년(충목왕 2) |
서북면 평양부 | |
사망 | 1405년 8월 1일[A] (향년 58 ~ 59세) (음력 태종 5년 6월 27일) |
재임기간 | 제4대 영의정부사 |
1403년 8월 12일[2] ~ 1404년 7월 21일[3] (음력 태종 3년 7월 16일 ~ 태종 4년 6월 6일) | |
제5대 영의정부사 | |
1405년 2월 23일[4] ~ 8월 1일[A] (음력 태종 5년 1월 15일 ~ 6월 27일) | |
봉호 | 평양부원군(平壤府院君)
|
시호 | 문충(文忠) |
본관 | 평양 조씨 |
자 | 명중(明仲) |
호 | 우재(吁齋), 송당(松堂) |
부모 | 부친 - 조덕유(趙德裕) 모친 - 고창 오씨 오의(吳誼)의 딸 |
부인 | 고성 이씨 검교문하시중 안정공(安靖公) 이숭(李崇)의 딸 |
자녀 | 장남 - 평양부원군 조대림[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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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의 개국공신이자 사실상 첫 번째 수상으로 조선 최초 법전인 〈경제육전〉과 과전법의 아버지이다. 이성계가 찾아와서 등용한 조선의 제갈량이다. 위화도 회군의 군권의 절반만 가지고 있던 이성계를 도와 조민수를 제거하여 이성계가 군권을 장악하게 한 인물이며, 조선 역사상 최고의 실무형 관료 중 한 명으로, 권문세족 출신이면서도 토지개혁을 주도해 그들을 공중분해시켰다. 그러나 조선 개국 직후 세자 책봉 과정에서 이방석의 세자 책봉을 반대하며 공이 있는 아들을 세자로 책봉할 것을 태조에게 간언하였으나[7]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뒷날 1차 왕자의 난이 발발하자 이방원을 지지하면서 정사공신이 되었다.조선 개국에 있어서의 역할과 존재감은 정도전을 능가했고, 이성계 낙마 사건을 빌미로 친위 쿠데타를 일으킨 정몽주가 반역 세력의 수괴중 하나로 조준을 콕 찝어 상소했을 정도였다. 과전법을 시행하기 위해 전국적인 토지 소유 관계를 전부 파악하고 사병 혁파를 뒷받침하는 등 조준이야말로 조선의 설계자라 해도 결코 과언은 아니다.
문집에 <송당문집>이 있으며 시문에 능했다. 토지 제도는 물론 경제육전을 집필하는 등 법률에도 밝았다. 하륜 등과 함께 경제육전을 편찬한 그는 훗날 세조가 집대성시킨 경국대전에도 큰 영향을 미친 셈이다.
2. 생애
2.1. 집안 내력과 어린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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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준은 조덕유(趙德裕)와 고창오씨(高敞吳氏) 오의(吳誼)의 딸 사이에서 1346년 평양부에서 태어났다.
시조 조춘(趙椿)은 고려 때의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로, 남송으로부터 상장군(上將軍) 벼슬도 받은 바 있다고 한다. 의외로 그 뒤로는 출세한 사람이 없었던 모양으로, 조준의 증조부인 조인규(趙仁規) 전까지는 한미한 집안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조인규는 원래 몽골어 역관으로 원나라 황실의 총애를 업고 출세하는데, 조선 때 편찬된 <고려사> 열전에서 이르길 '국구(國舅-왕의 장인)로서 아들과 사위도 모두 장상(將相)의 반열에 올랐으니 아무도 그와 견줄 수 없었다'며 기록할 정도였다. 네 아들인 서(瑞), 련(璉), 연수(延壽), 위(瑋) 모두 재상에 오르고 딸을 충선왕에게 시집보내는 등, 평양 조씨는 권문세족의 반열에 오른다. 조준은 련의 손자다.
원 간섭기다 보니 당시 엘리트가 되려면 몽골어가 필요했다. 조인규는 각고의 노력으로 몽골어 실력을 완벽하게 만들었는데, 사신으로 온 그를 보고 쿠빌라이 칸이 "몽골어 잘한다. 굳이 중간에 통역[8]을 둘 필요도 없겠네."라고 했다고. 원나라 신하가 속국 고려의 풍속을 아예 몽골식으로 바꾸자며 칸에게 상주한 적이 있었는데, 옆에 있던 조인규가 조리 있게 반박해 '불개토풍(不改土風, 기존의 풍습을 바꾸지 않는다)'이 유지됐다. 원나라에 30회나 사신으로 가 그 권세가 하늘을 찔렀다고 한다.
충렬왕의 신하였던 조인규의 권세는 후궁이나마 딸(후일의 조비)을 세자와 정혼시키면서 절정을 이뤘다. 그러나 행복도 잠시, 조비는 충선왕의 본처인 계국대장공주의 질투 때문에 원나라에 인질로 간다.[9] 심지어 이 사건이 발단이 돼 충선왕도 폐위된다. 그러나 10년 후 충선왕이 지지한 카이샨이 원나라 황제로 즉위하면서, 충선왕도 복위됐고 조비도 복권됐다. 계국대장공주는 이미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나 그들에게 더이상 걸림돌은 없었지만 조비가 귀국했는지 이후 기록은 없다.
또한 조준의 부친인 조덕유 때도 판도판서(版圖判書, 정3품)를 지내는 등 그의 집안은 10촌 내는 거의 고위직을 지낸 명문이었다. 그런 조준이었지만 졸기(사망 후 기리는 글)에서 말하길, 어렸을 때의 조준은 귀공자처럼 굴지 않았다고 한다. 어렸을 때부터 뜻과 기개가 뛰어나며 효도했다는데, 어느날 조준의 어머니는 과거에 급제한 사람이 위풍당당하게 "물렀거라!" 하는 모습을 보자 "우리 아들 놈들이 수는 많아도 한 놈도 과거에 급제한 놈이 없으니 어디에 써먹누"라고 한탄하자 각성한 조준은 과거에 붙었다는 뻔한 얘기가 전해진다. 그러나 이 얘기는 후대에 만든 얘기일 가능성이 있다. 권문세가 중 인천 이씨, 성주 이씨 등과 최정점에 있던 그의 집안 배경이라면 과거 시험을 안봐도 고위직에 쉽게 오를 수 있었다. 고려 말은 과거 시험을 합격해도 집안이 한미하면 별 볼 일 없던 때였다.[10]
1371년(공민왕 20년) 26살의 조준이 책을 끼고 궁전 옆을 지나는데, 마침 수덕궁(壽德宮)에 있던 공민왕이 기특하게 생각해서 불러서 보마배지유(寶馬陪指諭)[11]에 넣어줬다고 한다. 그런데 조준은 공민왕이 홍륜 등 자제위와 난행을 저지르자 "막장에 무슨 말을 할까! 임금이 소인배들과 어울리네!" 하고 탄식했다고. 1374년 과거 시험에 합격한다.
2.2. 우왕 시기
1374년 정당문학 이무방(李茂芳), 밀직부사 염흥방이 주관한 과거에서 급제한다. 조준은 정5품 통례문부사(通禮門副使)로 강원도 안렴사가 되었는데, 백성들에게 두려움과 신뢰를 모두 얻는 동시에 사납고 간사한 무리를 없앴다는 호평을 받았다. 그 무렵 정선군에서 남긴 시다.오래지 않아 동쪽 명주(溟州)땅을 깨끗이 씻으리니, 이 땅의 백성들이여 눈을 씻고 맑아질 날을 기다리라.
조준은 사헌부 장령(掌令)으로 있다가 감문위(監門衛) 대호군(大護軍)으로 옮기면서 「기양소(祈禳䟽)」라는 상소를 올렸다. 그런데 이 상소에 정직하고 성스런 사람을 소외시키고 아첨배와 사악한 무리를 좋아한다라는 강한 구절이 있었는데, 이를 본 김주(金湊) 등은 "이거 위험하다."고 여겼는지 고쳐쓰게 한 일도 있었다. 그 무렵부터도 이미 슬쩍슬쩍 강한 개혁적 성격이 나온 듯.
이후 조준은 순조롭게 승진하여 법률의 일을 맡는 전법판서(典法判書)가 되었다. 이 당시는 한반도 전역을 유린하던 왜구의 공세가 심각한 상황이었다. 이 왜구들은 1380년의 황산대첩에서 심각한 타격을 입었으나, 1383년 정지의 관음포(觀音浦) 전투 전까지도 고려 말 왜구의 침입은 여전히 심각한 상황이었다. 특히 경상도 지역은 왜구의 기세가 심하여 초토화가 될 판이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려군은 사기가 엉망인데다 장수들도 도저히 왜구와 싸우려고 하질 않았다. 고민하던 최영은 조준을 천거하여 체복사(體覆使)[12]로 삼았다.
일종의 감찰관으로 지방에 내려간 조준은 왜구가 와도 머뭇거리며 싸우지 않은 도순문사(都巡問使) 이거인(李居仁)을 불러 "너 이색히 이 따위로 할거야?"라고 다그치고, 병마사(兵馬使) 유익환(兪益桓)을 불러다 아예 참수해버렸다. 그러자 이거인 등은 공포에 질려 "차라리 적과 싸우다 죽지 조준 공의 위세를 거스르면 안되겠다." 하고는 힘껏 싸우니 연이어 승전보가 울리며 경상도 안정을 되찾았다. 이때가 1382년이었다. 전투 이후에 조준은 효자와 열녀로써 적과 싸우다 죽은 사람들의 이름을 도당(都堂)에 올려 그들이 표창을 받게 함으로써 뒷처리도 깔끔하게 했다.
왜구의 준동을 병사를 더 보낸 것도 아니고, 막장인 군사들을 독려한 감찰관 하나로 돈 한 푼 더 안 쓰고 막아내게 되자, 우왕은 대단히 기뻤는지 "양광도와 경상도에 왜구가 무지하게 날뛰잖아. 근데 군대 사기가 막장이라 애들이 잘 싸우지를 않아. 그러니 네가 계속 감찰관으로 뛰면서 겁먹고 안 싸우는 원수들하고 도순무사들 좀 닥달해라."고 말했다. 그러자 조준은 우선 어머니의 나이가 여든 세를 넘었다고 발을 뺐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왕이 계속해서 권고하자 "정 그러면 내가 두 개 도를 관할하며 패전한 장수를 마음대로 처결할 수 있도록 해주신다면 한 번 맡아보겠다."고 말했다.
헌데 무인 세력들이 이 제안을 대단히 껄끄럽게 여겨 우왕에게 말해 이를 취소시켰다. 이 임명은 백지화 되었지만, 조준은 도검찰사(都檢察使)가 되고 선위좌명공신(宣威佐命功臣)의 호를 내려받는 등 이인임 등에게 물을 먹은 적이 있었던 다른 신진사대부들과 다르게 비교적 순조로운 관료 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 무렵에 조준은 별다른 탄핵을 받지 않았는데도 조정의 상황이 혼란스럽자 "에라, 더러워서 더 못보겠네!"라는 식으로 그냥 낙향해서 4년 동안 방콕 생활을 했다. 그 동안 조준은 지저분한 정치판을 멀리하며 경서와 사서 읽기만을 즐거움으로 삼았다고 한다.[13]
이후 최영이 임견미, 염흥방 등을 제거하고 이름이 있던 조준을 첨서밀직사사(簽書密直司事)로 다시 삼겠다고 했지만, 당시 조준은 모친상이라 이를 핑계로 그냥 조정에 나가지를 않았다.[14]
이 당시 조준이 윤소종, 허금, 조인옥, 유원정, 정지, 백군녕 등과 친구로 지내며 신돈의 자손을 몰아내고 왕씨의 자손을 다시 세우자고 맹세했다고 고려사에 있는 그의 열전에 기록되어 있다. 아무래도 우왕 신씨설이 윤색의 느낌이 강하게 나는 설이기에 이는 후대의 윤색으로 보인다.
위화도 회군 직전에 이성계가 사불가론을 주장했을 때 우려했던 대로 제2차 요동정벌이 시작되자 왜구가 쳐들어왔고, 이에 양광도 안렴사인 전리가 보고를 하자 조정에서는 도흥, 김주, 곽선, 김종연 등 5명의 원수를 급히 파견하여 이를 막았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 때 조준도 원수 자격으로 출전했다고 나와있다. 이후 최영이 실각한 뒤 새로이 관리들이 임명될 때, 지밀직사사 겸 대사헌이라는, 현재로 보면 거의 비서관+감사원장이라는 상당히 큰 관직에 임명되었다. 물론 권문세족 출신의 신진사대부라는 중립적인 역할을 할 수 있는 위치라든지, 여태까지 큰 흠이 없었고 개혁적인 성향을 가진 인물이기에 임명이 된 것일 수도 있다.
이 해에 이성계는 위화도 회군을 단행하여 정권을 장악하는데 성공했다. 정권을 장악한 이성계는 그동안 쌓인 여러 폐단을 혁파해야할 필요성을 느꼈지만, 무장인 이성계 혼자서는 뾰족한 수가 없었다. 그때 조준이 인물이라는 말을 들은 이성계는 조준을 불러 이야기를 나눴는데, 이야기를 해보니 이 사람이 보통 사람이 아닌듯하자 이성계는 크게 기뻐하며 조준을 마치 오랜 친구나 되는 것처럼 대하였고, 자신을 그렇게 후하게 대접해 주자 조준도 기뻐해서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지식을 총동원하여 이성계를 위해 적극 협력했다.
2.3. 창왕 시기
조준이 활약하게 된 이 시기는 이성계 일파에게 있어 정말 중요한 시기였다. 이성계 세력은 그동안 심각하게 부패된 사회적 혼란을 수습하고 개혁 반대 세력을 제거하여 개혁 세력의 기반을 확보해야 할 뿐만 아니라 왕조 교체를 전후한 시기의 혼란을 최소화하고 새로운 왕조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해야 하는 중대한 시기였던 것이다.조준은 이 당시에 필요한 정치, 사회, 경제적 개혁 거의 모든 분야에서 대활약을 하였다. 우선 우왕이 쫓겨나고 창왕이 즉위한 1388년 7월경, 조준은 그 유명한 토지 제도에 대한 상소문을 올렸다.[15]
"어진 정치는 반드시 토지에 대한 정확한 구획으로부터 시작되는 법입니다. 토지제도를 올바르게 함으로써 국가의 살림살이를 풍족하게 하고, 민생을 넉넉하게 하는 것이야말로 지금 우리가 당면한 가장 긴급한 일입니다. 국가의 존속은 민생의 고락(苦樂)에서 나오고, 민생의 고락은 토지제도의 균등 여하에 달려 있습니다. 문왕(文王), 무왕(武王), 주공(周公)은 정전제(井田制)로 인민을 양육하였으므로, 주(周)나라가 천하를 8백년 넘게 소유하였고, 한(漢)나라는 토지세를 경감해 줌으로써 천하를 4백년 넘게 소유하였으며, 당(唐)나라는 백성의 토지를 균등히 하여 천하를 거의 3백년 간 소유하였습니다. 이에 반해 정전제(井田制)를 훼손한 진(秦)나라는 천하를 얻은 지 2세대 만에 멸망하였습니다.
(중략)
옛사람은, ‘나라에 3년 쓸 물자의 비축이 없으면, 나라라고 할 수 없다’라고 말했습니다. 근자에 겨우 수개월 간 서북지방에 군대를 보냈는데도 오히려 나라와 민간의 재정이 지탱하지 못하고 상하가 함께 궁핍하게 되었으니 만약 2~3년 동안 홍수와 가뭄의 재해가 계속될 경우 어떻게 진휼할 것이며 수많은 군사를 먹일 군량은 어떻게 조달하시렵니까? 하물며 지금 전국의 창고가 한꺼번에 텅 비었으니 국사에 드는 비용이 나올 곳이 없습니다. 또 언제 변방에서 전쟁이 터질지 예측할 수 없는 터에 돌발적인 상황이 발생하더라도 가가호호 추렴하기도 어렵습니다. 지금 마침 통토를 측량할 때가 되었으니 액수를 책정해 토지를 지급하기 전에 3년 동안 임시로 국가에서 조세를 거두면 주요한 국사의 비용도 충당하고 관리의 녹봉도 지급할 수 있을 것입니다. 토지제도를 바로 잡기 위한 조치들의 조목은 다음과 같습니다.
1. 녹과전시(祿科田柴) : 시중(侍中)에서 서인(庶人)에 이르기 까지 관직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각자 그 품계에 따라 토지를 계산해 나누어 지급하고 이들을 아문(衙門)에 소속시켜 현직에 있을 때만 그것으로 생계를 삼게 한다.
1. 구분전(口分田) : 개경에 거주하는 제군(諸君) 및 1품에서 9품까지의 현직에 있거나 산직(散職)에 있는 모든 관리들에게 품계에 따라 토지를 지급한다. 첨설직(添設職)을 받은 자는 그 실직(實職)을 감안해 지급하고 모두 해당자의 생존기간으로 한정한다. 그 처가 개가하지 않으면 역시 그가 생존할 때까지 허용한다. 현직 외에 전직[前銜]과 첨설직으로 토지를 받은 자는 모두 5군(軍)에 소속시킨다. 지방에 거주하는 자는 군전(軍田)만을 지급하고 군역에 편입시킨다. 토지를 받은 자가 범죄를 저지르면 나라에 반납하고 승급하면 순서에 따라 추가로 지급한다.
1. 군전(軍田) : 해당자의 기능과 재주를 시험해 20세에 지급하고 60세에 되받는다.
1. 투화전(投化田) : 우리나라에 귀화한 사람의 생계유지를 위하여 해당자 생전에 한하여 지급하고, 사망하면 나라에 반환시킨다. 관직을 받아 구분전을 가지고 있는 자에게는 주지 않는다.
1. 외역전(外役田) : 유수(留守)·주(州)·부(府)·군(郡)·현(縣)의 리와 진(津)·역(鄕)·소(所)·부곡(部曲)·장(莊)·처(處)의 리, 원(院)·관(館)의 직(直)에게 구분전을 전례대로 나누어 지급하고 모두 해당자의 생전으로 한정한다.
1. 위전(位田) : 성황(城隍)43)·향교(鄕校)·지장(紙匠)·묵척(墨尺)·수급(水汲)·도척(刀尺) 등에게 위전을 전례대로 나누어 지급한다.
1. 백정대전(白丁代田)44) : 백성으로서 적에 등재되어 역에 차출되는 자에게는 1호에 토지 1결을 지급하고 조를 징수하지 않는다. 공(公)과 사(私)의 천인으로서 역에 차출되는 자에게도 지급하고 문서에 명확히 기록한다.
1. 사사전(寺社田) : 태조이래 5대 사찰과 10대 사찰 등의 국가비보소(國歌裨補所)로서 개경에 있는 사찰에는 유지 비용을 지급하고, 지방에 있는 사찰에는 시지(柴地)를 지급한다. 『도선밀기(道詵密記)』에 기록된 사찰 외에 신라·백제·고구려 때 창건한 사사(寺社) 및 새로 조성한 사사(寺社)에는 지급하지 않는다.
1. 역전(驛田) : 마위구분전(馬位口分田)47)은 전례대로 나누어 지급하는 데 모두 해당자의 생전에 한정한다.
1. 외록전(外祿田) : 유수(留守)·목(牧)·도호(都護)로부터 고을의 수령과 감무(監務)에 이르기까지 품계에 따라 책정한다. 인구수에 따라 구(口)를 계산하여 녹과전을 지급한다.
1. 공해전(公廨田) : 각 관아의 품계의 높고 낮음과 관원의 많고 적음을 기준으로 지급한다.
1. 무릇 작정(作丁)을 할 경우 공전과 사전은 모두 혁파한다. 20결, 15결, 10결씩으로 묶어서 각 읍마다 천자문으로 ‘정’의 호칭으로 삼고 사람의 성명과 관계없이 함으로써, 뒤에 조업전이라고 우길 소지를 없앤다. 토지의 양전이 끝나고 난 뒤에 법으로 나누어 받게 한다. 공전과 사전에서 거두는 조(租)는 1결당 쌀 20두로 하여 민생을 윤택하게 한다.
1. 책임을 맡은 관리로서 토지 지급 때 1결을 초과해 지급한 자, 1결을 초과해 수령한 자, 토지 회수 때 누락한 자, 토지 반환 때 1결이라도 은닉한 자, 부자(父子)가 관청에 신고하지 않고 사사롭게 주고받은 자, 아비가 사망했는데도 그 아들이 아비가 생계 수단으로 삼던 토지를 반환하지 않는 자, 다른 사람의 토지를 1결 이상 탈취하거나, 공전(公田)을 1결이라도 은닉한 자는 모두 사형에 처한다. 대전(代田)을 받은 백정(白丁)으로 부근의 토지 1결을 숨겨 둔 자, 조를 징수하는 노비로서 공문서를 받지 않고 집행하거나 관아에서 규정한 됫박을 사용하지 않는자는 장 1백대를 때린다. 조를 징수하는 노비로서 1두(斗) 이상을 초과 징수하는 자는 장 80대를 때린다. 토지를 가진 자(食田者) 가운데 노비가 전조를 과다하게 수취한 사실을 알면서도 고발하지 않는 자는 장 70대를 때린다. 양전(量田)할 때 토지 10부(卜) 이상을 숨긴 자는 사형에 처하며 토지를 누락시킨 자도 마찬가지이다. 조를 수취할 때는 노비 2명과 말 1필만을 사용해야 하며 이를 위반한 자에게는 주인과 노비 모두 장 70대를 때린다. 위와 같은 토지 관련 금지조항을 위반하는 자는 사면 대상에서 제외하고 판도사(版圖司)와 헌부(憲府)에 그 명단을 기재하며 그 자손은 대성(臺省)과 정조(政曹)에 취임하는 것을 불허한다."
(중략)
옛사람은, ‘나라에 3년 쓸 물자의 비축이 없으면, 나라라고 할 수 없다’라고 말했습니다. 근자에 겨우 수개월 간 서북지방에 군대를 보냈는데도 오히려 나라와 민간의 재정이 지탱하지 못하고 상하가 함께 궁핍하게 되었으니 만약 2~3년 동안 홍수와 가뭄의 재해가 계속될 경우 어떻게 진휼할 것이며 수많은 군사를 먹일 군량은 어떻게 조달하시렵니까? 하물며 지금 전국의 창고가 한꺼번에 텅 비었으니 국사에 드는 비용이 나올 곳이 없습니다. 또 언제 변방에서 전쟁이 터질지 예측할 수 없는 터에 돌발적인 상황이 발생하더라도 가가호호 추렴하기도 어렵습니다. 지금 마침 통토를 측량할 때가 되었으니 액수를 책정해 토지를 지급하기 전에 3년 동안 임시로 국가에서 조세를 거두면 주요한 국사의 비용도 충당하고 관리의 녹봉도 지급할 수 있을 것입니다. 토지제도를 바로 잡기 위한 조치들의 조목은 다음과 같습니다.
1. 녹과전시(祿科田柴) : 시중(侍中)에서 서인(庶人)에 이르기 까지 관직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각자 그 품계에 따라 토지를 계산해 나누어 지급하고 이들을 아문(衙門)에 소속시켜 현직에 있을 때만 그것으로 생계를 삼게 한다.
1. 구분전(口分田) : 개경에 거주하는 제군(諸君) 및 1품에서 9품까지의 현직에 있거나 산직(散職)에 있는 모든 관리들에게 품계에 따라 토지를 지급한다. 첨설직(添設職)을 받은 자는 그 실직(實職)을 감안해 지급하고 모두 해당자의 생존기간으로 한정한다. 그 처가 개가하지 않으면 역시 그가 생존할 때까지 허용한다. 현직 외에 전직[前銜]과 첨설직으로 토지를 받은 자는 모두 5군(軍)에 소속시킨다. 지방에 거주하는 자는 군전(軍田)만을 지급하고 군역에 편입시킨다. 토지를 받은 자가 범죄를 저지르면 나라에 반납하고 승급하면 순서에 따라 추가로 지급한다.
1. 군전(軍田) : 해당자의 기능과 재주를 시험해 20세에 지급하고 60세에 되받는다.
1. 투화전(投化田) : 우리나라에 귀화한 사람의 생계유지를 위하여 해당자 생전에 한하여 지급하고, 사망하면 나라에 반환시킨다. 관직을 받아 구분전을 가지고 있는 자에게는 주지 않는다.
1. 외역전(外役田) : 유수(留守)·주(州)·부(府)·군(郡)·현(縣)의 리와 진(津)·역(鄕)·소(所)·부곡(部曲)·장(莊)·처(處)의 리, 원(院)·관(館)의 직(直)에게 구분전을 전례대로 나누어 지급하고 모두 해당자의 생전으로 한정한다.
1. 위전(位田) : 성황(城隍)43)·향교(鄕校)·지장(紙匠)·묵척(墨尺)·수급(水汲)·도척(刀尺) 등에게 위전을 전례대로 나누어 지급한다.
1. 백정대전(白丁代田)44) : 백성으로서 적에 등재되어 역에 차출되는 자에게는 1호에 토지 1결을 지급하고 조를 징수하지 않는다. 공(公)과 사(私)의 천인으로서 역에 차출되는 자에게도 지급하고 문서에 명확히 기록한다.
1. 사사전(寺社田) : 태조이래 5대 사찰과 10대 사찰 등의 국가비보소(國歌裨補所)로서 개경에 있는 사찰에는 유지 비용을 지급하고, 지방에 있는 사찰에는 시지(柴地)를 지급한다. 『도선밀기(道詵密記)』에 기록된 사찰 외에 신라·백제·고구려 때 창건한 사사(寺社) 및 새로 조성한 사사(寺社)에는 지급하지 않는다.
1. 역전(驛田) : 마위구분전(馬位口分田)47)은 전례대로 나누어 지급하는 데 모두 해당자의 생전에 한정한다.
1. 외록전(外祿田) : 유수(留守)·목(牧)·도호(都護)로부터 고을의 수령과 감무(監務)에 이르기까지 품계에 따라 책정한다. 인구수에 따라 구(口)를 계산하여 녹과전을 지급한다.
1. 공해전(公廨田) : 각 관아의 품계의 높고 낮음과 관원의 많고 적음을 기준으로 지급한다.
1. 무릇 작정(作丁)을 할 경우 공전과 사전은 모두 혁파한다. 20결, 15결, 10결씩으로 묶어서 각 읍마다 천자문으로 ‘정’의 호칭으로 삼고 사람의 성명과 관계없이 함으로써, 뒤에 조업전이라고 우길 소지를 없앤다. 토지의 양전이 끝나고 난 뒤에 법으로 나누어 받게 한다. 공전과 사전에서 거두는 조(租)는 1결당 쌀 20두로 하여 민생을 윤택하게 한다.
1. 책임을 맡은 관리로서 토지 지급 때 1결을 초과해 지급한 자, 1결을 초과해 수령한 자, 토지 회수 때 누락한 자, 토지 반환 때 1결이라도 은닉한 자, 부자(父子)가 관청에 신고하지 않고 사사롭게 주고받은 자, 아비가 사망했는데도 그 아들이 아비가 생계 수단으로 삼던 토지를 반환하지 않는 자, 다른 사람의 토지를 1결 이상 탈취하거나, 공전(公田)을 1결이라도 은닉한 자는 모두 사형에 처한다. 대전(代田)을 받은 백정(白丁)으로 부근의 토지 1결을 숨겨 둔 자, 조를 징수하는 노비로서 공문서를 받지 않고 집행하거나 관아에서 규정한 됫박을 사용하지 않는자는 장 1백대를 때린다. 조를 징수하는 노비로서 1두(斗) 이상을 초과 징수하는 자는 장 80대를 때린다. 토지를 가진 자(食田者) 가운데 노비가 전조를 과다하게 수취한 사실을 알면서도 고발하지 않는 자는 장 70대를 때린다. 양전(量田)할 때 토지 10부(卜) 이상을 숨긴 자는 사형에 처하며 토지를 누락시킨 자도 마찬가지이다. 조를 수취할 때는 노비 2명과 말 1필만을 사용해야 하며 이를 위반한 자에게는 주인과 노비 모두 장 70대를 때린다. 위와 같은 토지 관련 금지조항을 위반하는 자는 사면 대상에서 제외하고 판도사(版圖司)와 헌부(憲府)에 그 명단을 기재하며 그 자손은 대성(臺省)과 정조(政曹)에 취임하는 것을 불허한다."
이 당시 토지 문제에 대한 격렬한 비판은 조준 외에도 이행, 황순상(黃順常), 조인옥 등도 같이 올렸던 일이지만 조준의 상소문은 그 중에서도 가장 내용이 방대하고 무엇보다 문제 제기는 물론이고 이를 해결해야 하는 이유와 이를 해결할 수 있는 가장 실무적인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거의 판을 깔아주기만을 기다린 사람에게 제대로 판을 깔아준 수준. 조준은 토지 겸병의 폐단으로 토지를 지급받아야 할 관료와 군인 등이 제대로 토지를 받지 못하고 토지 관계 소송과 과다한 조세 징수로 여러 체계가 무너졌음을 지적했다. 그리하여 사전과 토지 겸병을 금지하고 관료, 국역 담당자, 군사에게 토지를 분급하자고 주장했다.
또한 여기서 당시 토지 문제의 심각성을 나타낸 유명한 표현도 나온다. 대토지 소유에 대해 조준은 '주(州)를 타넘고 군(郡)을 포괄하며 산과 내(강)를 표지로 삼아 모두 가리켜 조업전(祖業田)이라고 하면서 서로 물리치며 서로 빼앗으니, 한 이랑의 주인이 5~6명을 넘고 1년에 조(租)를 거두는 것이 8~9차례에 이릅니다. '라고 말한다. 즉 일개 마을 수준을 넘어서 광대한 행정 구역 전체를 장악하고 그 경계를 산이나 하천과 같은 자연 지형으로 삼을 정도였다는 것.
조준의 급진적인 개혁안은 신진사대부들에게 엄청난 화두가 되었다. 정도전, 남은, 조준은 물론이고 이색, 정몽주 등 여러 유학자들은 개혁에는 동의했지만 그 방법에 대해서는 서로 이견이 있었다. 온건 개혁파인 이색을 중심으로 한 세력은 이를 반대했는데 이색의 편을 든 사람은 이림, 우현보, 변안열, 권근, 유백유(柳伯濡) 등이었다. 반면에 정도전, 윤소종은 조준의 주장에 동조했으며 정몽주는 그 둘 사이에서 어느 쪽 편을 들어야할지 고민하고 있었다.[16] 결국 이 논의는 53명의 관료들을 대상으로 논의하게 하였더니 대부분이 이를 찬성했지만 집안이 부유한 사람들은 이를 반대했다.[17] 하지만 이성계는 "당신 하고 싶은대로 해!"라는 식으로 반대에도 불구하고 조준의 주장에 힘을 실어주면서 밀어주었다.
그러자 이상한 일이 발생했는데 갑자기 조준에 대해서 구린 소문이 돌기 시작한 것이다. 알고 보니 토지 제도에 대한 개혁을 반대하는 부유한 집안들에서 조준을 까기 위해 온갖 유언비어를 만들어 퍼뜨린 것이다. 그러나 조준은 아랑곳하지 않고 맞디스를 해가며 물러나기는 커녕 "덤벼봐, 개객히들아!"같은 반응을 보였다. 온갖 압박 때문에 결국 창왕은 조준의 제안을 묵살했는데 물론 허수아비에 어린아이일 뿐인 창왕이 이를 거절했다기보다는 이성계 등이 부담을 느꼈을 것이다. 그러나 조준은 이에 굴하지 않고 1389년 3월 다시 1번 상소를 올렸다.
"토지란 본디 인민을 양육하는 바탕인데, 지금은 오히려 백성을 해치는 도구가 되어버렸으니 사전의 폐해가 이렇게 극심하게 되었습니다. 다행히 하늘의 도움을 받아 성상께서 즉위하시어 일찍이 볼 수 없었던 큰 적폐를 제거하셨으니 이로움을 되살리고 해로움을 없애신 결과를 우리가 분명히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권세가와 권력자들이 그 악습을 그대로 답습하면서, 우리 왕조에서 작성된 법전을 하루 아침에 갑자기 없앨 수 없으며 만약 무리하게 없앤다면 선비들의 생계가 날로 어려워져 필시 장사치나 공장(工匠)이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라고 말하면서 마구 헛소문을 퍼뜨려 사람들을 솔깃하게 만들며 사전을 되살려 자신들의 부귀를 보존하려 합니다."
"한 가문을 살리기 위한 꾀라면 그럴 만도 하겠지만 그러나 사직과 백성은 어찌 되겠습니까? 혹시라도 사전을 되살린다면, 이것은 우리나라 백만의 민중들을 기름불 속에 던져 넣는 것과도 같습니다. 지금 올바른 정치를 도모하면서 도리어 살아 있는 연혼들에게 우환을 끼쳐서는 안되지 않겠습니까?"
"마땅히 경기의 토지는 사대부로서 왕실을 시위하는 자의 전지로 삼아 생계의 터전으로 제공함으로써 삶의 질을 높여주어야 할 것입니다. 나머지는 모두 혁파하여 왕실과 제사의 비용에 충당하고 녹봉과 군수의 비용을 충족하게 하십시오. 그리고 겸병의 기회를 아예 막아버려 쟁송의 여지를 단절시킴으로써 이를 영원불변의 법전으로 정착시키셔야 합니다."
"그러나 권세가와 권력자들이 그 악습을 그대로 답습하면서, 우리 왕조에서 작성된 법전을 하루 아침에 갑자기 없앨 수 없으며 만약 무리하게 없앤다면 선비들의 생계가 날로 어려워져 필시 장사치나 공장(工匠)이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라고 말하면서 마구 헛소문을 퍼뜨려 사람들을 솔깃하게 만들며 사전을 되살려 자신들의 부귀를 보존하려 합니다."
"한 가문을 살리기 위한 꾀라면 그럴 만도 하겠지만 그러나 사직과 백성은 어찌 되겠습니까? 혹시라도 사전을 되살린다면, 이것은 우리나라 백만의 민중들을 기름불 속에 던져 넣는 것과도 같습니다. 지금 올바른 정치를 도모하면서 도리어 살아 있는 연혼들에게 우환을 끼쳐서는 안되지 않겠습니까?"
"마땅히 경기의 토지는 사대부로서 왕실을 시위하는 자의 전지로 삼아 생계의 터전으로 제공함으로써 삶의 질을 높여주어야 할 것입니다. 나머지는 모두 혁파하여 왕실과 제사의 비용에 충당하고 녹봉과 군수의 비용을 충족하게 하십시오. 그리고 겸병의 기회를 아예 막아버려 쟁송의 여지를 단절시킴으로써 이를 영원불변의 법전으로 정착시키셔야 합니다."
반대파에 대해 초강경한 언사를 사용한 조준은 상소 이후에 반대 세력에 대한 직접적인 공격에 나섰다.
1389년 당시 이색과 조준 등이 대립하고 있었던 것처럼 이성계 역시 위화도 회군의 주역 중 한 사람인 조민수와 대립하고 있었다. 전제 개혁을 반대하던 5도 도통사 조민수는 이색과 이숭인 등의 온건파와 손을 잡고 창왕을 옹립하여 이성계 일파를 상대로 우세를 점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는데[18] 조준은 그런 조민수를 탄핵하는데 앞장섰다. 조민수의 탄핵은 이성계 일파와 그 반대파의 균형의 붕괴를 부르며 이성계 일파의 힘이 더욱 강력해지는 효과를 불러왔고, 뒤이어 김저 사건이 발생하며 온건파 세력은 거의 괴멸되어 조준의 정책은 더욱 힘이 실렸다.[19]
2.4. 공양왕 시기
조민수, 이색 일파가 거의 제거되면서 조민수 등이 추대한 창왕도 폐위되게 되었다. 이리하여 공양왕이 즉위하게 되었는데 조준은 이성계의 뜻과는 달리 의외로 공양왕의 즉위를 반대했다. 그 이유라는게 "정창군(定昌君)[20]은 부귀한 환경에서 자라나 재산 모으는 일이나 잘하지 나라 다스리는 일은 모른다."라는 것.그러나 어찌되었던 공양왕은 왕으로 즉위했는데 처음부터 조준과 공양왕은 사이가 전혀 좋지 못했다. 본래 공양왕은 즉위 이전부터 개인적으로 가지고 있는 땅이 많았는데 토지 개혁을 하게 되면 자신의 땅이 그 대상 중 하나가 되게 되니 좋아하지 못했던 것. 어차피 공양왕 역시 좋은 뜻으로 이성계가 자신을 즉위시킨 것은 아니라는 사실은 알고 있었을 테지만 "돈이나 잘 모을줄 아는 작자다."라고 자신을 디스하며 즉위를 반대한 조준을 좋아할리도 만무했다.[21] 그러거나 말거나 조준은 공양왕이 즉위하기가 무섭게 또다시 3번째로 토지 개혁에 대한 상소를 올렸다.
지금 6도 관찰사가 보고하기에 개간된 토지의 수는 50만결에도 미치지 못합니다. 그런데 공상(供上)은 풍족해야만 하므로 그 중 10만 결을 우창(右倉)72)에 소속시키고 3만결은 4고(庫)에 소속시키고 있습니다. 녹봉은 충분해야만 하므로 10만 결을 좌창(左倉)에 소속시키며 조사(朝士)를 우대해야 하므로 경기의 토지 10만결을 잘라 나누어 주니 결국 남은 것은 17만결에 불과합니다. 6도의 군사와 진(津)·원(院)·역(驛)·시(寺)의 토지나 향리(鄕吏)·사객(使客)·늠급(廩給)·아록(衙祿)의 용도로도 오히려 부족한데 군대에 쓸 물자가 나올 땅은 으레 없는 실정입니다. 그런데도 지금 지방의 토지를 사전으로 나누어 주려고 하시니, 황실에 쓸 물자와 녹봉의 비용도 나올 데가 없는 판에 진·원·역·시 등 여러 명목의 토지는 어디서 나올 수 있으며 방진(方鎭)의 병사와 해도(海道)의 군인에게는 무엇으로 공급하겠습니까? 만일 홍수나 가뭄의 재해가 3~4년 계속된다면 무엇으로 진휼하며, 수많은 병사의 군량은 무엇으로 충당하시렵니까?
결국 공양왕 2년, 공(公)·사(私)의 토지대장들은 시가지에서 불태워졌는데 어찌나 많은 문서를 태우는지 그 불씨가 며칠간이나 갔다고 한다. 그 모습을 본 공양왕은 "내 통치기에 와서 토지 제도가 이렇게 바뀌다니!"하며 눈물을 흘렸다. 이렇게 점점 조준은 공양왕에게 있어서 가장 밉상인 놈이 되고 있었다. 그러던 와중 정몽주는 조준이 사실은 공양왕의 즉위를 반대했다는 사실을 공양왕에게 알렸다. 이후 조준이 우현보를 공격하는 일이 발생했을 때 공양왕은 우현보의 편이었으므로 우현보를 공격하는 조준은 너무나 밉기만 했다. 계속 이렇게 서로 사이가 안 좋다 보니 명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온 조준이 돌아올 무렵이 되자 공양왕은 "아, 내가 또 조준 그 인간 얼굴을 봐야겠네."라고 불평을 했을 정도.[22]
하지만 조준을 보고 싶지 않아도 공양왕은 매일 매일 조준의 일을 접하고 살아야 했다. 개혁에 대한 열의에 불타는 조준이 거의 미친듯이 일을 하며 매일 상소를 올려댔기 때문인데, 당시 조준에 대해 <고려사>에서는 '조준이 헌사(憲司)에 있으면서 올린 건의가 엄청나게 많았다'고 표현할 정도다. 당시 조준은 평리(評理) 겸판상서시사(兼判尙瑞寺事)로 승진해 관리의 선발과 임명을 관장했으며 토지 개혁에 대한 상소는 물론 난잡한 호구 체계의 재정리, 정치 폐단에 대한 항의, 부역의 폐단에 대한 대책, 관리 임명에 대한 절차, 법 시행의 절차, 과도한 이자에 대한 제한, 재판 절차에 대한 번거로움 철폐, 연좌제에 대한 항의, 심지어 백성들에게 가축을 징발하는건 폐단이니 궁중에 사육장을 만들자는 등 그야말로 전방위에 걸쳐 거의 미친 사람 마냥 엄청난 기세로 온갖 건의를 올려대고 있었다. 공양왕의 입장에서는 여기를 봐도 조준, 저기를 봐도 조준이 보이는 환장할 상황이었다.
그런데 개혁파의 의지가 모조리 관철되려는 찰나 마지막 저항이 나타났다. 정몽주를 중심으로 한 세력은 이성계가 낙마 사고로 와병하여 잠시 정계에서 물러난 것을 계기로 반격을 시작했던 것이다. 이에 정도전과 남은 등은 유배형을 받았는데 조준 역시 김진양으로부터 공격을 받았다. 김진양의 이 상소에서는 정도전, 조준, 남은, 윤소종 등이 모두 디스를 당했으나 그 중에 조준에 대한 죄가 가장 상세했다.[23]
또 이를 모의한 정몽주 등은 "먼저 이성계의 보좌역인 조준 등을 제거한 후에 이성계를 도모해야 한다."하며 가장 먼저 제거해야할 대표적인 사람으로 조준을 꼽았다. 그 당시 반대파들에게 있어 조준이 얼마나 부담스러운 인물이었는지 알 수 있는 부분. 결국 조준은 감옥에 들어갔으나 이 모의는 이성계의 귀환으로 싱겁게 막을 내렸고 정몽주 역시 이방원에게 참살되어 실패했다. 감옥에서 나온 조준은 다시 찬성사(贊成事)가 되었고 곧이어 판삼사사(判三司事)가 되었다. 마침내 조선의 건국이 실현되었고 이성계를 추종하는 문무 신료들은 모두 모여 엄청난 행렬을 이루면서 이성계의 집으로 가 그를 왕으로 추대했다. 이 때 유독 대사헌(大司憲) 민개(閔開)만이 고려의 종말을 슬퍼하며 우울한 얼굴을 하고 있자 고깝게 여긴 남은이 민개를 죽이려 한 것을 조준이 만류했다고 한다.
2.5. 정도전과의 관계
두 사람은 철저하게 직업적인 사이로 사적인 친분이 존재하지 않았다. 정도전이나 육룡이 나르샤 같은 2010년대 사극에선 실권이나 건국과정 공적에서 한 수 처지는 3인자 내지는 아예 정도전 아래사람으로 그리고 있는데 실제 이 둘은 이성계라는 1인자 아래에서 대등한 2인자로 각자의 분야에서 낸 성과를 내세워 경쟁하던 사이였다. 회사로 비유하자면 회장 아래서 자기 기획안 내세우며 박터지게 경쟁하는 이사들.실무담당 조준과 사상가 정도전이 함께 추진했다고 잘못 알려진 고려말 전제개혁은 철저하게 조준의 작품이었고 정도전의 계구수전은 개혁파들 사이에서조차 이슈가 되지 못해 정도전은 존재감을 전혀 보여주지 못했다.
정도전이 자신의 존재감을 강하게 드러내며 부각되는 시기는 전제개혁보다 이후에 척불 운동을 주도하면서부터였다. 그리고 정도전이 조준의 전제개혁 논의에서 아무런 영향력도 발휘하지 못한 것과 동일하게 조준도 정도전의 척불 운동에 동참하지 않았고 관련 논의에 끼어들지조차 않았다.
또한 정도전과 조준의 시문을 보아도 둘 사이에 이렇다할 교우관계는 보이지 않고, 오히려 정도전은 조준의 전제개혁 논의가 진행 될 때까지도 반대파인 이숭인, 권근과 친하게 지냈다. 그 둘과 사이가 멀어진 건 자신이 주도한 척불운동 때부터였다. 그리고 정도전의 척불론은 정도전 개인의 사상에 기인한 바가 가장 크지만, 이걸 현실정치에서 적용하는 와중에서 척불론 주장은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려는 목적도 있지 않았느냐는 주장이 강하게 제기되고 있다. 즉. 조준이 전제개혁 논의를 주도하며 이성계 다음가는 개혁파의 이인자로 부상하자 정도전은 자신의 위상을 다시 높이고 주도권을 놓지 않기 위해 척불론을 강하게 주장하고 이를 위해 교우관계까지 끊어버리는 열성을 보였다.
다시 한번 정리하자면 토지개혁이 최대 화두였던 공양왕 시기의 이성계 일파의 2인자는 정도전이 아니라 조준이었다. 정도전의 존재감이 조준을 넘어서는 것은 조선 건국 이후 천도를 비롯한 각종 기틀을 다져나가고, 이성계에 의해 세자로 책봉된 이방석의 후견인이 되었을 시점부터다.
이럼에도 정도전이 다한 것처럼 대중들이 곧잘 오해하는건 조준이 실무관료 성향이 강해서 앞에서서 거창하게 떠들기 보다는 뒤에서 묵묵히 행정실무에 전념하길 선호했기 때문이다. 오히려 자신에게 큰 권력이 집중되는 것을 꺼려서 조선 건국 이후 태조가 군권을 맡기자 애써 사양하려 했고, 식읍도 거부했다.
이성계가 주는거 다 받아먹으며 주변의 원한을 사든 말든 자기 소신껏 밀고나가려 했던 정도전과 정반대의 모습인데 이런 성향 차이로 여말선초 당시에도 조준이 한 일을 정도전이 주도했다고 여기는 시선들이 많았다. 오죽했으면 정도전 본인이 내가 안했는데 왜 싸잡아 욕하냐고 투덜거릴 정도였다.
2.6. 태조 시기
조선 건국 이후에도 조준은 이성계의 돈독한 신임 속에 엄청난 대우를 받았다. 이성계는 위풍당당하게 즉위한 바로 그날 저녁 몰래 조준을 자신의 집으로 불러 이야기를 나누다 대뜸 "5도 병마(五道兵馬)를 모두 경에게 위임하여 통솔하게 하겠다."며 나라의 군권을 맡겼다. 이후 개국공신의 위치를 정할 때[24] 조준은 문하좌시중(門下左侍中)이었던 배극렴에 이어 우시중(右侍中)으로서 바로 다음에 언급되었는데 조준보다 먼저 언급된 유일한 인물인 배극렴이 곧 사망하였고 바로 문하좌시중에 임명되어 최고의 위치에 오르게 되었다.누가 보더라도 파격적인 대우에 권력이 조준, 정도전, 남은에게 집중되자 이에 대한 성토도 나왔을 정도인데[25] 변중량은 "조준, 정도전, 남은이 정권과 병권을 손에 쥐고 있는 것은 옳지 못하다."라고 말하기까지 했다. 헌데 그 말을 들은 이성계는 "그 사람들은 내가 제일 믿고 신뢰하는 사람들인데 어디 의심할 사람이 없어서 그 사람들을 의심해? 괘씸한 놈!"이라는 반응을 보이며 변중량을 감옥에 집어넣었을 정도. 이러한 사태를 예상했는지 조준은 그 이전부터 평양의 식읍과 도통사의 관직을 사양하는 등 몸을 사리는 모습을 보여주었는데 권력을 내려놓으려고 해도 이성계가 윤허하지 않아 그럴 수 없었다. 신하가 권력을 사양하는데 임금이 억지로 군권 등을 더해주는 괴이한 일이 발생한 것. 이성계는 조준이 피부병으로 몸져 눕자 사람을 시켜 문병하게 하면서 "병을 고치려면 마음을 편안하게 해야 하니 나라 일 근심하지 말고 편안하게 요양해라."고 당부하는 등 그야말로 지극정성이었다.
이 무렵까지 정도전과 조준은 서로 친하지도 않고 서로가 하는일에 관여하는 일도 없었지만 어느 정도 존중은 하는 사이였다. 이들이 틈이 벌어지기 시작한 것은 정도전, 남은 등이 제3차 요동정벌에 대한 의지를 드러내면서부터였다.
정도전이 요동 공격에 대한 의지를 천명하고 이를 공개적으로 이야기한 1397년부터는 둘의 사이가 크게 벌어지는데, 남은의 경우 정도전의 생각에 동의했던 반면에 조준과 김사형은 이를 반대하고 나선 것. 조준과 김사형이 반대하자 여기서 남은이 앞장서서 조준을 적대시하는 행동을 저지르는데, 정도전과 조준 사이가 요동 정벌에 대한 의견 차이로 벌어지기 시작하던 와중에 신덕왕후 강씨의 릉과 관련된 문제로 조준과 김사형의 당여로 볼 수 있는 유원정과 조화, 신효창이 엮여들어가는 사건이 발생한다. 그러자 남은은 조준과 김사형을 해당 사건에 엮어 정치적인 위신을 실추시키려는 시도를 하였지만, 이는 처음에 관련된 문제로 국문을 당하던 전시가 끝까지 조준과 김사형의 이름을 언급하지 않음으로써 실패한다.
조준은 얼마 뒤에 병으로 인하여 휴가를 청하였는데, 정도전, 남은 등이 찾아와서 군사를 출병시키는 문제를 이야기하자 조준은 "사대의 예로서는 말할 것도 없고 명나라의 위세가 엄청난데 무슨 공격임?"이라고 말했다. 정도전은 지속적으로 이 문제를 위해 조준을 설득하려고 노력했지만 그 때마다 조준은 "지금 천도 이후 백성들의 사정이 좋지 않아 원망이 많은데 그들이 우리를 제대로 따르기나 하겠음? 요동 치려다 나라가 망해요."는 식으로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으며, 결국 병중에서 일어나 이성계를 찾아가서 재차 요동정벌에 대해 반대 의견을 내비쳤다.
처음에 정도전과 남은이 임금을 날마다 뵈옵고 요동(遼東)을 공격하기를 권고한 까닭으로 《진도(陣圖)》를 익히게 한 것이 이같이 급하게 하였다. 이보다 먼저 좌정승 조준이 휴가를 청하여 집에 돌아가 있으니, 정도전과 남은이 조준의 집에 나아가서 말하였다.
"요동(遼東)을 공격하는 일은 지금 이미 결정되었으니 공(公)은 다시 말하지 마십시오.”
조준이 말하였다.
"내가 개국 원훈(開國元勳)의 반열(班列)에 있는데 어찌 전하(殿下)를 저버림이 있겠습니까? 전하께서 왕위에 오른 후로 국도(國都)를 옮겨 궁궐을 창건한 이유로써 백성이 토목(土木)의 역사에 시달려 인애(仁愛)의 은혜를 받지 못하였으므로 원망이 극도에 이르고, 군량(軍糧)이 넉넉지 못하니, 어찌 그 원망하는 백성을 거느리고 가서 능히 일을 성취시킬 수 있겠습니까?"
또, 정도전에게 일렀다.
"만일에 내가 각하(閣下)와 더불어 여러 도(道)의 백성을 거느리고 요동을 정벌한다면, 그들이 우리를 흘겨본 지가 오래 되었는데 어찌 즐거이 명령에 따르겠습니까? 나는 자신이 망하고 나라가 패망되는 일이 요동(遼東)에 도착되기 전에 이르게 될까 염려됩니다. 임금의 병세가 한창 성하여 일을 시작할 수 없으니, 원컨대 여러분들은 내 말로써 임금에게 복명(復命)하기를 바라며, 임금의 병환이 나으면 내가 마땅히 친히 아뢰겠습니다."
그 후에 조준이 힘써 간(諫)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ㅡ 태조 7년 8월 9일의 기록
"요동(遼東)을 공격하는 일은 지금 이미 결정되었으니 공(公)은 다시 말하지 마십시오.”
조준이 말하였다.
"내가 개국 원훈(開國元勳)의 반열(班列)에 있는데 어찌 전하(殿下)를 저버림이 있겠습니까? 전하께서 왕위에 오른 후로 국도(國都)를 옮겨 궁궐을 창건한 이유로써 백성이 토목(土木)의 역사에 시달려 인애(仁愛)의 은혜를 받지 못하였으므로 원망이 극도에 이르고, 군량(軍糧)이 넉넉지 못하니, 어찌 그 원망하는 백성을 거느리고 가서 능히 일을 성취시킬 수 있겠습니까?"
또, 정도전에게 일렀다.
"만일에 내가 각하(閣下)와 더불어 여러 도(道)의 백성을 거느리고 요동을 정벌한다면, 그들이 우리를 흘겨본 지가 오래 되었는데 어찌 즐거이 명령에 따르겠습니까? 나는 자신이 망하고 나라가 패망되는 일이 요동(遼東)에 도착되기 전에 이르게 될까 염려됩니다. 임금의 병세가 한창 성하여 일을 시작할 수 없으니, 원컨대 여러분들은 내 말로써 임금에게 복명(復命)하기를 바라며, 임금의 병환이 나으면 내가 마땅히 친히 아뢰겠습니다."
그 후에 조준이 힘써 간(諫)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ㅡ 태조 7년 8월 9일의 기록
내심 요동 공격은 무리라고 생각하는 이성계는 조준의 말을 듣고 좋아했는데 사태가 계속 이렇게 되자 남은은 화가 나서 조준에게 "댁들 같은 작자들하고는 큰일을 논할 수 없다."고 디스를 했다. 이 때부터 남은은 조준과 사이가 멀어졌고 이성계 앞에서 조준을 험담하기도 했다.[26] 그러나 이성계는 "개소리 하지마!"라며 남은을 질책했지만 이성계는 남은도 아꼈기에 따로 벌을 주거나 하지는 않고 조준에 대한 욕만 못하게 했다.
또다른 문제는 바로 세자 책봉 문제였다. <태조실록>에 의하면 배극렴, 조준, 정도전 등이 태평할 때는 적장자를 세우고 난세에는 공이 있는 아들(이방원)이 되는 것이 옳다고 주청했는데, 사실상 이방원을 세자로 추천하는 것이었다. 태조는 신덕왕후 강씨의 소생인 이방번을 밀었고 재상들은 신덕왕후의 소생이 되어야 한다면 이방석이 되는 것이 낫다고 상의하여 배극렴이 이방석을 세자로 책봉하시라고 주청을 올렸다. <태종실록>에는 강씨가 엿듣고 눈물을 흘리자 태조가 조준에게 종이와 붓을 주며 이방번을 쓰라고 하였으나 거부하였고 이방석을 세자로 삼는 것이 결정된 후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이렇게 기본적으로 틈이 생긴 상황에서 무인정사가 벌어졌다. 당시 정도전, 남은과 좌정승 조준은 알력이 생기기는 했지만 이성계의 신임을 받고 있는 조준은 이방원 일파와는 달리 그리 급할게 없던 상황이었기에 왕자들의 싸움에 깊게 말려들어갈 이유는 별로 없었다. 1차 왕자의 난에서 조준은 적극적인 참여보다는 관망하는 태도를 취하려고 했는데 이방원이 자신을 소환하자 사태가 어찌 흘러갈지 점을 쳐보며 질질 빼고만 있었다. 이를 보다 못한 이방원은 이숙번을 보내 우정승 김사형과 조준을 데려왔고 그 때서야 조준은 나와 이방원에게 동조하였다. 다만, 이 점을 치는 행위는 어떻게 해서든 최대한 시간을 벌어보려던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조준은 갑옷으로 무장한 가병들을 거느리고 나왔다고 되어 있는데 처음에는 반란 진압을 시도하려 했지만 이미 상황이 기운 것을 깨닫고 이방원에게 설득되었다고 볼 수도 있다. 1차 왕자의 난 당시에 적극 참여하지는 않았지만 어찌되었건 이방원을 위해 움직였으므로 정사공신(定社功臣)에 책봉되었다. 이는 조준이 지속적으로 정도전과 정치적 대립을 벌인 탓도 있고 세자 책봉 논의 당시 적장자 쪽을 지지했기에 이방원 입장에서는 그를 끌어들이는 것이 나쁠 것이 없었다. 난의 정당성을 보장해주고 신구 세력간의 갈등을 막아줄 수 있는 이름있는 원로 인사라는 측면도 있었다. 난이 일어나고 여러 사람들이 자리를 움직이는 와중에서도 조준과 김사형은 계속 정승의 자리를 유지한 것이다.[27]
2.7. 정종과 태종 시기
그러나 아무래도 이성계의 압도적인 지지를 받던 당시보다는 권력이 약해질 수 밖에 없었다. 눈치 빠른 조준은 먼저 선수를 쳐서 사직하겠다는 의사를 표시했는데[28] 정종은 "다 내가 덕이 없는 탓이다."며 조준의 사직을 만류했지만 결국 정승에서 물러나 판문하부사가 되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사헌부 등에서는 "조준이 음란하고 사치스러우며 남의 전답과 노비를 빼앗은 것이 수도 없이 많다"며 탄핵을 올렸고 이에 정종은 "내가 아는 사실과 다 다르니 개소리하지 마라."고 일축했다. 하지만 정종이 일축했다고 해도 이런 상소가 올라왔다는 것 자체가 조준의 정치적 영향력이 크게 약화되었다는 이야기였다. 이후 1400년 8월 조준이 불손한 말을 했다는 빌미로 권근, 조박, 민무구, 민무질 등은 조준을 탄핵했는데 이에 조준은 분이 나서 "나는 그런 말을 한 적이 없습니다."라고 말하며 눈물을 흘렸고 결국 조사를 위해 감옥까지 들어갔다. 이 때 정종이 조준을 보호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나서 결국 조준은 석방될 수 있었다.이런 상황에서 태종이 즉위하자 조준은 다시 한 번 정치 생활을 할 수 있었다. 태종의 입장에서는 자신의 등극이 확실해진 상황에서 조준 같은 문인 원로는 왕자의 난 이후 강력해진 종친과 무인 세력을 견제하는데 필요한 자원이었다. 1401년 다시 판문하부사가 되고 작위 제도 개편으로 평양부원군이 되었으며 같은 해 다시 모든 관직을 내려놓았다가 1403년 영의정부사가 되었다. 1404년 조준은 오랜만에 좌정승이 되어 정계에 복귀했으나 역시 자신을 절대적으로 신뢰한 이성계 때와는 달리 조준은 번번히 자기 뜻과 다른 자들에게 반대를 받으며 이전과 같은 권력 행사는 하지 못했다. 행정 능력이 뛰어나고 같은 공신이지만 태종의 신임과 권세는 하륜에게 밀렸다. 1405년 결국 다시 영의정부사로 밀려난 조준은 자신이 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나라일을 하다가 같은 해 세상을 떠났다. 이후 태조 묘정에 배향되었다.
그의 장남 조대림과 외손자 정효전은 모두 태종의 딸들(경정공주, 숙정옹주)과 혼인해 부마가 되었고 이로써 조준 가문은 왕실의 사돈이 되었다. 태종은 조대림을 군부에 배치해 군권에 대한 왕실의 장악력이 약해지는걸 방지하고자 했는데 뒷날 여기에 얽혀 조대림 사건이 벌어진다. 결국 억울하게 역모 누명을 썼다는 점이 이방원의 함정 수사에 의해 밝혀져 곤장만 맞고 풀려났다. 이후로도 태종 시절에 계속 벼슬을 했는데 명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오고 백성들을 구휼하는 등 평탄하게 벼슬살이를 했다. 이후 명나라와의 외교 담당을 하며 관직을 지내다 1430년 세상을 떠났으며 강안(康安)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3. 평가
조준은 국량(局量)이 너그럽고 넓으며, 풍채(風采)가 늠연(澟然)하였으니, 선(善)을 좋아하고 악(惡)을 미워함은 그의 천성(天性)에서 나온 것이었다. 사람을 정성으로 대접하고 차별을 두지 아니하며 현재(賢才)를 장려 인도하고, 엄체(淹滯) 를 올려 뽑되, 오직 미치지 못할까 두려워하며, 조그만 장점(長點)이라도 반드시 취(取)하고, 작은 허물은 묻어두었다. 예위(禮闈)를 세 번이나 맡았는데, 적격자라는 이름을 들었다. 이미 귀(貴)하게 되어서도 같은 나이의 친구를 만나면, 문(門)에서 영접하여 관곡(款曲)히 대하고, 조용히 손을 잡으며 친절히 대하되, 포의(布衣) 때와 다름이 없이 하였다. 사학(史學)에 능하고, 시문(詩文)이 호탕(豪宕)하여, 그 사람됨과 같았다.
조준 졸기
조준 졸기
실질적인 제도 개혁에 있어서는 정도전, 남은 등을 포함한 주역 건국 공신들 중에서도 핵심적 주체로 꼽히는 인물.[29]
위화도 회군 이후 전제(田制) 개혁을 통해 새 왕조 출현에 필요한 경제적 기반을 단단히 쌓고, 조선 건국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고 평가받고 있다. 고려말 개혁의 청사진을 혼자 그리다시피한 조선 건국의 핵심으로 정도전이 친우였던 이숭인을 내치고 조준을 가까이 하려고 했던 모습이나 요동 원정 문제에 있어 조준의 동의를 구하려 노력했다는 점에서 당시 조준의 위치를 엿볼 수있다.
조준은 기득권층인 권문세족이라고 볼 수 있는 출신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개혁이 필요하고 또 개혁적 상황이 발생할 수 밖에 없었던 여말선초의 혼란기에서 자신이 주동적으로 적극 개혁을 주도함으로써 정치적 위치를 확보한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원 간섭기를 통해 성장한 평양 조씨라는 권문세족의 일족이었음에도 시대의 변혁에 휩쓸려나가지 않고 자신의 입지를 적극적으로 확보했던 것이다.
그는 이성계의 절대적인 지지를 바탕으로 문제의 실질적인 분석, 이를 해결하기 위한 방안, 그리고 이를 시행하는데 필요한 행동력을 모두 보여줌으로써 단순한 왕씨와 이씨의 정권 교체 수준을 벗어난 진정한 세대 교체를 이루는데 지대한 공헌을 했다. 조준은 정치, 사회, 경제 등 거의 모든 방면에 걸쳐 개혁안을 내었는데, 이는 조준의 폭넒은 식견을 보여줌과 동시에 조준이 그러한 악습과 부패를 적극적으로 시정할 의사가 있는 인사였음을 보여준다.
조준은 성리학을 공부한 인물이었고 다른 인물들처럼 전대의 태평성대를 모델로 하여 고려 말기의 혼란과 부패를 해소하려고 했는데, 다른 사람들과 다른 점이 있다면 조준은 기강의 확립과 실제 행정을 담당하는 지배 계층의 행정 수행 능력을 중시하며, 그의 개혁안에서도 이러한 점이 엿 보인다는 점이다. 조준의 재상론은 정도전식의 자기 수양을 부지런히 하고 군주의 나쁜 점을 바로 잡는 도덕적 재상보다는 국가 통치에 필요한 행정 실무 능력을 더 중요시 했다고 여겨진다.
조준의 무수한 건의와 제안, 개혁들은 단순히 "이를 해결해야 한다."는 부분을 떠나 "실질적으로 문제들을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가?"를 절실히 보여주었고, 비록 실제 적용되는 과정에서 어느정도의 변동은 있었을 지언정 대부분 수용되었다. 이런 점에서 볼때, 조준은 500년 왕조인 조선의 개국에 있어 지대한 공헌을 세운 정치가로써 한국사의 정치가를 통틀어서도 차지하는 입지가 꽤 크다고 볼 수 있다.
재밌는 것은 조준이 독학으로 성리학을 공부했다는 것이다. 고려 말기에 성균관을 통해 개혁적 성향을 가진 성리학자들이 육성되고 개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사람이 정도전이지만, 조준은 이와 달리 독자적으로 공부를 하며 자신만의 사상을 마련했고 이성계라는 동조자를 만남으로써 자신의 의지를 실행 할 수 있었다. 따라서 그만큼 이성계로부터의 신임은 절대적이었는데, 워낙에 신임이 두터웠기에 만년에 이를수록 이 때문에 비방을 듣기도 했다.
조준은 이성계가 잠저 시절에 직접 초빙해서 모신 인사로, 이성계에게 그야말로 절대적인 신임을 받았고 그 지지를 바탕으로 조선초기의 국가행정 절차를 거의 다 본인 손으로 만들어냈으며, 정도전이 요동 정벌 논의에서 조준을 설득하려고 노력하고, 왕자의 난 당시에도 관망하던 조준을 이방원이 억지로 자기편으로 만들어 정당성을 확보하려 했을만큼 당대에는 거물 중의 거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행정적인 부분을 떠나서 정치권력적 다툼에서는 정도전의 요동 원정에 동의하지 않아 남은 등에게 욕을 먹은 것 외에는 크게 존재감을 보이질 않았는데, 본인 자체가 철저하게 실무에만 치중한 실무형 재상 포지션으로 남아 정도전 vs 이방원을 비롯한 개국공신 신료들 및 종친들의 대립에 크게 말려들지 않았다. 일처리 자체는 이성계의 지지를 등에 엎고 이를 이용해서 일사불란하게 불도저처럼 밀어붙이는 편이었지만, 권력적인 측면에서는 다소 도를 넘을 정도로 본인에게 힘을 실어주는 이성계에게 부담을 느껴 스스로 권력을 내려주길 원하며 몸을 사리거나, 왕자의 난 직후에 눈치 빠르게 먼저 사직의사를 내는등, 어디까지나 실무자로서 관점에서 권력을 이용하기는 했지만 권세 자체를 탐하는 부분에서는 선을 지키는 편이었다. 이때문에 너무싸고 도는 이성계의 다소 과한 신임때문에 종종 볼멘소리를 종종 듣기는 했지만, 그 정도로 절대적인 권력을 한때 누린 개국공신치고는 태조 시절은 물론이거니와 정종 시절, 그리고 힘빠진 태종시절에도 얼굴마담격 원로로서 무탈하게 대접 받을 수 있었다.
여러가지로 거대한 족적을 남긴 대정치가지만, 스스로 자처한 저런 철저한 실무자 포지션 때문에 정치투쟁 중심의 사극에서는 다소 다룰만한 부분이 적은지라, 대중적인 인식에서는 저평가를 떠나 "아예 그런 사람 있나?" 싶은 정도의 투명인간 취급을 받는 편이다.
정도전 재평가를 주도한 원로학자 한영우의 학설을 기반으로 이 환경이 재구성한 용의 눈물과 정도전이 워낙 히트를 쳐서 이 캐릭터를 2020년대 이르도록 여말선초를 다른 사극들까지 일관되게 가져다 써서 대중들에게 전혀 피드백이 되지 않고 있다.
이를테면 조선 최초의 성문법전인 경제육전(經濟六典)은 조선 법전의 중대한 근간인 경국대전 반포 이전까지 조선 왕조의 정치, 사회 질서에 유지에 막대한 영향을 끼친 물건으로, 이는 조준의 주도로 편찬되었기에 조준의 사상이 조선 초기 국가 통치에 큰 영향을 미쳤다고 볼 수 있다. 헌데 대중적 인식에서는 정도전의 사찬 사서인 조선경국전(朝鮮經國典)이 훨씬 더 각인되어 있거나, 혹은 경제육전 등도 정도전의 주도로 편찬되었다고 오해하는 경우도 있다. 조선경국전은 사찬이므로 명목상의 법전이고, 조준의 원육전은 태조 초기에 완성된 정식 법전으로 이후에 속육전을 거쳐서 이어졌으니 역할의 비율이 완전히 다르다. 이후 조준이 편찬한 경제육전을 원육전 혹은 조준육전이라고 부르고, 이걸 태종시기에 개창한 것을 속육전 또는 하륜육전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세종 시기에 이직과 황희의 손에 수정을 거친 것이 경국대전으로 이어진다. 그러므로 조선의 법률적 기틀은 사실상 조준과 하륜이 다졌다고 봐야한다. 조선 건국 후 막강한 권한을 움켜진 정도전조차 일부러 조준과 가까워지려고 하고 조준의 동의를 구하려고 했을 정도이니, 조준의 무게감은 거대하다 할 수 있다.
태조에게 제생원을 부활시키자고 건의한 인물이기도 하다.
4. 영혼의 파트너 김사형
조준이 좌정승이었던 시절, 우정승이었던 사람은 김사형 이라는 인물이었다. 그리고 이 두 사람은 개국초기의 그 할일 많았던 시절에 8년을 같이 좌우정승으로 호흡을 맞춘 콤비였다. 모르긴 모르되 조준으로서는 실무 과정에서 가장 얼굴을 많이 본 사람이 김사형이었을 것이다.이 두 사람의 성격은 정반대였는데, 강직한 성정인데다 태조의 신임을 바탕으로 실무에서 과감하게 일을 추진하고 워낙에 불도저처럼 밀고나가 이 과정에서 다소 비난도 받았을 정도의 사람이 조준이었다면, 김사형은 반대로 남에게 미움 살 일도 하지 않고 성격도 좋아 비호감 취급을 당하지도 않았으며, 관대하고 너그러운 성격으로 유명했다. 아예 졸기에서 한번도 탄핵을 당하지 않았으니, 시작도 잘하고 마지막을 좋게 마친 것이 이와 비교할 만한 이가 드물다 라고 할 정도로 적이 없는 스타일이었다.
완전히 다른 두 정승은 기묘하게 궁합이 좋았는데, 김사형은 일단 크고 작은 일은 조준에게 전부 맡겨서 조준이 그 실무능력으로 착착 처리하게 하고, 김사형은 옆에서 이를 거들고 보좌하며 빠진 부분을 보충해주는 식이었다. 인간적인 부분에서도 조준이 일 잘하고 대신 옆에서 말 걸기 힘든 상사 느낌이라면, 김사형은 긴장관계를 옆에서 풀어주는 그런 스타일이었다고 한다. 김사형의 졸기에서
김사형이 조준과 더불어 8년 동안 함께 정승노릇을 하였는데, 조준은 강직하고 과감하여 거리낌 없이 국정(國政)을 전단(專斷)하고, 김사형은 관대하고 간요한 것으로 이를 보충하여 앉아서 묘당(廟堂)을 진압하니, 물의가 의중(依重)하였다.
라고 할 정도로 이 두 사람의 조합은 상당히 시너지가 좋았다고 한다.
5. 대중매체
여말선초가 드라마에서 많이 다뤄진 시기이고 이 시대의 중요한 정치가 중 1명이지만, 아직까지 드라마에서는 정도전이 태조의 핵심 참모로 묘사되고 있다. 실제로 정전제와 재상중심정치를 먼저 주장한 것은 조준이었고, 전제개혁, 관제개혁, 조선의 법체계를 완성한 것은 그와 김사형이었다.- 1996년 KBS 드라마 <용의 눈물>에서는 배우 문창길[30]이 연기했다. 존재감이나 이미지가 강렬한 캐릭터는 아니지만 유들유들한 성품의 정치가로 그려졌으며 정치판에서 조정의 중신으로서 여러 정치인들의 대립을 중재하거나 조정을 이끌어 가는 모습이 묘사되어 있다.
1회 위화도 회군 전후 시점부터 배극렴 정도전 남은 등과 함께 혁명 동지로 등장한다. 이성계 낙마 사건 이후 정몽주에 의해 실각하여 귀양을 가기도 하지만 정몽주가 타살된 이후 개경으로 돌아오고 태조 옹립에 참여하며, 개국 직후 배극렴과 더불어 정승의 반열에 오른다. 세자 책봉을 논의하는 과정에서는 "지금은 국초이므로 '공과 능력이 있는 왕자'가 세자로 적합합니다" 라고 어전에서 아뢴다.
맹호림이 연기한 친동생 조견(조윤)이 고려에 대한 충절을 지키려고 초야에 은거하다가 태조의 부름을 받고도 응하지 않았다는 야사가 그려지기도 하는데[31] 작정하고 태조에게 무례를 저지르는 조견과 그를 참아넘기는 태조 사이에서 전전긍긍하는 모습이 묘사되기도 한다.
정도전의 수하처럼 그려지지 않았다는 점이 돋보이는데, 극중에서는 정도전에 비해 비중도 적은 편이고 정치력도 한 수 아래인 것처럼 묘사되지만 그럼에도 영향력을 무시할 수 없는 것처럼 그려진다. 특히 정도전이 자신에 대한 불만을 해소하기 위해 모든 관직을 내려놓고 자신이 추진하던 사업들을 조준이 맡도록 돌리는 대목이 있는데, 비록 바지사장 격이기는 하지만 바지사장도 아무나 시키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비중 있는 정치가로 나오기는 한 편이다. 특히 일품인 장면은 자신을 찾아와 요동 정벌을 설득하려던 정도전[32]과 마주앉아 그의 독단으로 시국이 어지러워지고 있다고 지적하고 재상 중심 정치의 맹점[33]을 지목하며 설전을 벌이는 부분. 하지만 정도전에 반대하면서도 정안군의 세력에 가담하는 것은 주저했다.
1차 왕자의 난이 벌어지자 "너희들이 뭔데 난을 일으키느냐"며 분개하지만 어쩔 수 없이 정안군이 주도하는 정국을 따르게 된다. 이 때 숙청 작업으로 죽어나간 시체를 사이에 두고 이방원과 마주쳐 서로를 응시하는 대목은 숨은 명장면. 이후로는 정안군의 강요로 인해 태조의 어전에 나아가 정도전, 남은, 심효생 등이 주살되었음을 아뢰고 바깥 상황을 전한다. 태조는 자신이 신임했던 조준도 자신을 배신했다고 생각하고 크게 노한다[34].
현실 참여 행정가, 정치가답게 이왕 1차 왕자의 난이 터졌으니 하루빨리 정안군을 보위에 오르도록 하는 것이 사직의 안정을 위해 순리라고 주장한다.
태종 즉위 후 조정 개편(82회)에서는 평양백에 봉해져 조정의 실무에서는 다소 멀어지나, 조정의 원로로서 꾸준히 대우받는다. 태조와 태종이 마침내 화해하는 모습을 지켜보며 눈물을 흘리는 장면도 있고(107회), 109회에서 다른 관료들과 회의를 마치고 나가는 길에 갑자기 쓰러져 사망하는 것으로 퇴장한다[35].
110회 초반부에 한양으로 다시 천도한 이후의 왕실 상황을 대략 설명하는 부분에서 태종과 조준, 권근이 사돈 관계를 맺었다는 해설이 나오는데, 조준의 아들인 조대림이 직접 등장하지는 않는다.
여담으로 정도전 역의 김흥기, 조준 역의 문창길은 KBS 드라마 '하늘아 하늘아' 역에서 홍봉한(사도세자의 장인 어른)-홍인한 형제 역으로 출연한 바 있다.
- 2015년 SBS 드라마 <육룡이 나르샤>에서는 배우 이명행[37]이 연기했다. 제22화에서 언급되고 제23화에서 처음 등장하는데 정전제를 시행하기 위해 전국을 누비며 독자적으로 양전을 했다는 각색이 가미되었다. 처음에는 현재의 고려가 정전제를 할 수 없다는 염세적인 생각에 출사를 거부했지만 정도전의 설득에 이성계의 당여로 합류한다. 목적을 위해 무리수도 감내해야 한다는 열혈 과격 인사로 나오며 역사처럼 요동정벌 문제로 정도전과 대립한다.
- 2021년 KBS 드라마 <태종 이방원>에서는 배우 노영국이 연기했다.[38] 전반적으로 이성계 지지 세력의 필두 역할을 하기는 하지만, 드라마의 초점이 이성계와 이방원의 가족 스토리에 맞춰지면서 이방원의 스승 역할을 가져가며 가족 스토리에 개인적인 인간 관계로 얽힌 정도전에 비해 캐릭터의 개성은 전작 정도전 때보다 약해졌다. 도당에서도 대놓고 정도전에게 상석을 양보하고 있어 얼핏 봐선 수상이라는 점이 전혀 티가 나지 않을 정도. 그래도 무인정사 이전에 아버지에게 홀대받고 권력에서 배제된 이방원에게 밤중에 몰래 제왕학 책인 대학연의를 선물하는 장면이 나오는 등, 은근히 이방원을 지지하는 것으로 묘사된다. 태종 이방원(드라마)/등장인물 문서 참조.
[A] 율리우스력 7월 23일[2] 율리우스력 8월 3일[3] 율리우스력 7월 12일[4] 율리우스력 2월 14일[A] [6] 태종의 차녀 경정공주의 부마.[7] 나이도 적당하고 능력이나 의욕 면에서도 가장 우수했으니 이방원을 추천했어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당시 방우는 이미 호적에서 파인 데다가 사망했고 방원의 동생 방연도 조선 건국 직전에 이미 사망한 상태였다. 방과, 방의는 왕위에 뜻이 없었으며 방간은 공이 없지는 않았지만 능력이 부족했다. 방번, 방석은 세자가 되기에는 너무 어렸다.[8] 이전까지는 고려 포로 출신 강수형을 통역으로 두고 있었다.[9] 쿠빌라이의 딸비록 서녀이지만 막냇딸은 충렬왕과 혼인한 제국대장공주로 충선왕의 친어머니였다. 이 때문에 충선왕은 쿠빌라이 사후 황제가 된 손자 올제이투 칸과 동열에 위치하게 되었으며, 대칸을 결정할 수 있는 쿠릴타이에 참석할 수 있게 되었다. 물론 그렇다고 충선왕이 몽골의 대칸자리에 오르는 것은 불가능하였는데, 몽골도 우리와 마찬가지로 모계 혈통 역시 따지는 곳으로 대칸이 되기 위해서는 칭기즈 칸의 정비였던 보르테의 부족인 옹기라트 출신의 소생이어야 했다. 그러나 쿠빌라이의 손자 항렬이라는 점에서는 동등하였기에 올제이투는 제국대장공주가 쿠빌라이의 딸이 아니라는 헛소리까지 하면서 격하시키고자 하였다. 한편 충렬왕 시기에도 쿠릴타이에 참석하는 것이 가능하였으나, 충렬왕은 쿠빌라이의 부마(駙馬) 자격이였던 것과는 달리 충선왕은 쿠빌라이의 외손(外孫)이라는 위치였기에 권위에서 차이가 있었다.[10] 다만 마냥 지어낸 이야기라고 간주하긴 힘든게, 이성계가 집안에서 유일하게 과거에 급제한 이방원을 유독 자랑스러워했다는 이야기에서 보듯, 과거급제가 출세 코스에 직결되는 것은 아니었더라도 당시에도 충분히 의미가 큰 성과였다. 물론 이 경우 집안은 대대로 무인이던 이씨 가문에 처음 나온 급제자라 명문가 중 명문가인 조준 가문과는 매우 다르긴 하다. 그래도 당시에 가장 중요한 잣대 중 하나이던 학문적 성과를 인정받았다는 것이니 충분히 의미가 있었다. 아들들의 출세가 보장되었다고 해도 나라로부터 유능한 인재란 것을 공식 인증받고 싶어하는 것은 있을 수 있는 일이다. 일례로 현대의 창업자 정몽준은 다른 아들들도 충분히 명문대 출신임에도(연세대, 한양대 등) 6번째 아들 정몽준이 유일하게 서울대에 입학하자 유독 자랑스러워했다는 애기가 있다. 즉 재벌가나 명문가처럼 아들들의 부와 권력이 보장되어 있는 상황에서도 부모로서 자식이 수재란 것을 인정받기를 원하는 '배부른 욕망'을 갖는다는 건 충분히 가능성 있는 일이다.[11] 조선왕조실록에서는 보마배행수(步馬陪行首)로 나온다.[12] 고려시대 지방에 보내던 임시 사행. 왜구의 침입이 극심했던 공민왕 및 우왕 연간에 집중적으로 파견되었다. 왜구가 침입한 지역의 민정을 살펴 보고하고, 전투를 독려하며, 그 상황을 점검하는 일을 맡았다.[13] 이때 조준은 처제의 남편이었던 김지 등과 함께 국가 조세제도 및 행정체계, 지리, 예술, 문학등을 집대성하는 공부를 한다. 요즘의 집권 스터디라고 할까. 조준은 이 결과물을 주관육익이라는 편찬물로 펴내는데 현재는 존재하지 않는다. 밑에서 나오는 조준의 토지개혁안은 이 스터디의 결과물에서 나온 것.[14] 이는 고려사의 기록인데,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이 해 조준이 밀직제학(密直提學)이었다는 언급도 있다.[15] 조준은 출신이 권문세족이었지만 권문세족들의 폐해를 고치려는 뜻을 갖고 있었다. 당시 권문세족들은 대토지 소유를 바탕으로 매관매직은 물론 자영농의 토지를 뺏는 것도 모자라 같은 땅에 대한 수조권을 여러 세족들이 국가에 복수로 등록해 나라를 좀먹고 있었다.[16] 다만 정몽주의 경우는 이후 창왕 폐지에 동참하며, 토지 개혁에 대해 매우 부정적인 태도를 취하던 공양왕 옹립한 이후에 과전법 진행에 대하여 반기를 들었다는 서술이 딱히 없는 것을 보면 토지개혁에 반대하는 입장이었을 가능성은 낮으며, 암묵적으로 지지하거나, 토지개혁을 진행하는 것을 묵인하는 입장이었을 가능성이 높다.[17] 공양왕도 즉위 이전에 가진 땅이 많아서 즉위 이후에도 조준을 싫어했다고 한다. 그런데 조준 역시 부유한 집 출신이었다.[18] 조민수는 당시 유배 중이던 이인임과 그의 인척인 근비 이씨를 등에 업고 이성계 일파를 숙청하려 했었다.[19] 김저 사건 이전까지만 해도 조민수가 탄핵되어 쫓겨났을 지언정, 이색, 변안열, 이숭인, 우현보 등의 반대파들이 있었으나, 김저 사건이 발생한 이후 앞서 언급한 이성계 반대파들이 김저 사건과 함께 싸그리 귀양 및 처형을 당하며 증발했다. 그나마 혐의를 벗고 남겨져 있던 것은 이숭인 정도였다.[20] 공양왕[21] 왕위 책봉에 대한 논의는 이성계 일파끼리의 논의였지만 정몽주가 공양왕에게 "조준은 전하의 즉위를 반대했다."고 일러바쳤다.[22] 이 때 조준은 훗날의 영락제인 연왕 주체를 보았는데 다른 사람들에게 "저 사람 보통 사람은 아니니 계속 저러고 있을 것 같지는 않다."고 말했다.[23] 정도전은 출신에 대한 죄, 남은은 변란을 선동한 죄, 윤소종은 후설을 만들어낸 죄를 열거하는데, 조준에 대해서는 변란을 선동하고 권세를 농단하며 여러 사람을 꾀어내 협박했으며 관직을 잃는 것을 두려워하는 건달 무리와 비위를 맞추어 향응했다며 맹렬한 공격을 가한 것 뿐 아니라 조준이 공양왕 옹립에 반대했다는 소문을 공론화시켜서 조준에 대해서만큼은 공양왕이 사면하는 것을 반드시 막아야 한다는 의지를 드러낸다.#[24] <조선왕조실록> 태조 1년 8월 20일 2번째 기사[25] <조선왕조실록> 1394년 11월 4일 기사#[26] 창고 관리나 장부 정리 등 말단 행정직하면 딱이라고 대놓고 뒷담화를 깠는데 물론 그 배후에는 정도전이 있었다. <육룡이 나르샤>에서도 이 부분이 반영되어 남은이 요동 정벌에 반대하는 조준을 일컬어 말, 되나 세던 사람이라고 디스한다.[27] 원래 이런 일에 직접 힘쓴 사람들이 2등공신이 되고 실제로 아무 일도 하지 않은 원로들이 1등공신이 되는 일이 있는데는 이런 이유가 있다. 한마디로 총알받이 겸 물귀신 작전같은 것이라고 이해하면 편하다.[28] 당시 정종은 "내가 어젯밤에 꿈을 꾸었는데 조준이 사직하려고 하더라?"라고 했는데 진짜 조준이 사직 상소를 올렸다. 조준이 조만간에 물러나려 한다는 분위기 자체를 그전부터 느꼈다는 소리일것이다.[29] 『이성계의 위화도회군과 제도개혁』, 김당택[30] 2001년 SBS 드라마 <여인천하>에서는 남곤 역, 2017년 개봉한 영화 <남한산성>에서는 김상헌에게 죽임을 당하는 뱃사공 역.[31] 실제 역사에서는 형과 같이 이성계를 추대하고 개국공신이 되었다.[32] 이 부분도 정도전이 그냥 찾아가는 것이 아니라 조준을 설득하는 것이 대단히 중요하다고 강조되며, 극 후반까지 인상적인 캐릭터로 나오는 이숙번이 "헛수고니 가지 마시라" 라고 만류하는 부분도 나온다. 정도전은 이숙번을 꾸짖고는 길을 나서지만, 가는 동안에는 헛수고가 분명하다고 독백한다.[33] "국왕 중심 정치는 국왕의 자질에 따라 나라의 운명이 갈리기에 비합리적" 이라 주장하는 정도전에게 "권력을 분립시키면 서로 독점하려 싸움과 혼란이 날 수밖에 없을 것이며, 지금도 그렇게 되어 가고 있지 않는가"라고 주장한다.[34] 조준이 배신했다고 생각하자마자 "조준이 니가!" 하고 분노하며, 뒤에 이지란과 대화를 나누면서 "조준이 그 놈도 개 같은 놈이다" 라는 대사를 치는 당면도 있다.[35] 다만 조준이 특이한 것은 아니고, 멀쩡하게 돌아다니던 인물이 어느날 갑자기 아프다거나 피곤하다거나 하는 티를 내다가 픽 쓰러져 사망하는 장면은 극중에서 자주 나온다. 아무래도 등장 인물이 워낙 많다 보니 일일이 챙기기가 어려웠던 듯한데, 조준 외에도 설장수나 이화, 하륜 등등이 거의 비슷한 느낌으로 쓰러져 죽는다.[36] 2000년 KBS 드라마 <태조 왕건>에서는 견훤의 넷째 아들인 금강 역, 불멸의 이순신에서는 무의공 이순신 역, 대조영에서는 무승사 역, 대왕세종에서는 이천 역을 맡았다.[37] 소설가 이명행과는 동명이인. 배우 이명행은 2018년 미투 운동 당시 정도전을 연기한 배우 조재현과 더불어 성범죄로 연루되면서 실형을 선고받았다.[38] 노영국의 사극 유작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