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0 0;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e6bd0e, #f9d537 20%, #f9d537 80%, #e6bd0e); color: #670000; min-height: 31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rowcolor=#670000> 태조 후 | 혜종 후 | [ruby(정종, ruby=定宗)] 후 | 광종 후 |
1 신혜왕후2 장화왕후3 신명왕후4 신정왕후5 신성왕후6 정덕왕후 | 1 의화왕후 | 1 문공왕후2 문성왕후 | 1 대목왕후 | |
<rowcolor=#670000> 경종 후 | 성종 후 | 목종 후 | 현종 후 | |
1 헌숙왕후2 헌의왕후3 헌애왕후4 헌정왕후 | 1 문덕왕후2 문화왕후 | 1 선정왕후 | 1 원정왕후2 원화왕후3 원성왕후4 원혜왕후5 원용왕후6 원목왕후7 원평왕후 | |
<rowcolor=#670000> 덕종 후 | [ruby(정종, ruby=靖宗)] 후 | 문종 후 | 순종 후 | |
1 경성왕후2 경목현비3 효사왕후 | 1 용신왕후2 용의왕후3 용목왕후 | 1 인평왕후2 인예왕후 | 1 정의왕후2 선희왕후 | |
<rowcolor=#670000> 선종 후 | 숙종 후 | 예종 후 | 인종 후 | |
1 정신현비2 사숙왕후 | 1 명의왕후 | 1 경화왕후2 순덕왕후3 문정왕후 | 폐 연덕궁주폐 복창원주1 공예왕후2 선평왕후 | |
<rowcolor=#670000> 의종 후 | 명종 후 | 신종 후 | 희종 후 | |
1 장경왕후2 장선왕후 | 1 의정왕후 | 1 선정왕후 | 폐 태자비 왕씨1 성평왕후 | |
<rowcolor=#670000> 강종 후 | 고종 후 | 원종 후 | 충렬왕 비 | |
1 사평왕후2 원덕왕후 | 1 안혜왕후 | 1 정순왕후폐 경창궁주 | 1 제국대장공주 | |
<rowcolor=#670000> 충선왕 비 | 충숙왕 비 | 충혜왕 비 | 공민왕 비 | |
1 계국대장공주 | 1 복국장공주2 조국장공주3 경화공주4 공원왕후 | 1 덕녕공주2 희비 윤씨 | 1 노국대장공주6 순정왕후 | |
<rowcolor=#670000> 우왕 비 | 공양왕 비 | |||
폐 근비 이씨 | 1 순비 노씨 | |||
}}}}}}}}} |
<colbgcolor=#f9d537><colcolor=#670000> 고려 순종의 제2왕후 선희왕후 | 宣禧王后 | |||
출생 | 연대 미상 | ||
김양검의 사저 | |||
사망 | 1126년 2월 22일 | ||
능묘 | 미상 | ||
재위기간 | 고려 태자비 | ||
미상 | |||
고려 연복궁주 | |||
미상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colbgcolor=#f9d537><colcolor=#670000> 본관 | 경주 김씨 | |
부모 | 부친 대경 김양검 (大卿 金良儉) 모친 미상 | ||
형제자매 | 미상 | ||
배우자 | 순종 | ||
종교 | 미상 | ||
거처 | 연복궁(延福宮) | ||
작호 | 태자비(太子妃) → 연복궁주(延福宮主) | ||
시호 | 화순공의선희왕후 (和順恭懿宣禧王后) | }}}}}}}}} |
[clearfix]
1. 개요
순종의 제2비. 시호는 순종 宣혜대왕과 宣 자 돌림이다.경주 출신 대경(大卿) 김양검(金良儉)의 딸이다.
2. 생애
남편 순종이 태자일 때 결혼해 태자비가 되었다. 《고려사》 후비열전에 의하면 남편과 사이가 매우 좋았지만, 어찌된 일인지 시아버지 문종이 심하게 그녀를 싫어하여 순종이 왕위에 오르기 전에 폐출되었다. 그런 까닭에 생전엔 왕후가 되지 못하고 대신 연복궁주(延福宮主)라 불리었다. 인종 4년인 1126년 2월에 사망하자 인종의 명에 의해 복권되었고, 태묘에서 제사를 지내고 순종의 묘실에 합사되었다.남편인 순종과의 사이에 자식이 없어 태후의 시호를 받지 못했다. 인종이 宣 자 돌림 시호를 올리고 공의(恭懿)의 시호를 추가했고, 이후 고종이 화순(和順)의 시호를 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