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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릉 전경 | |||
출생 | 966년 추정[9] | ||
고려 황도 개주 (現 경기도 개성시) | |||
사망 | 992년 8월 6일[8] (향년 26세) | ||
고려 개경 개성부 왕륜사 남쪽 사저 (現 개성시 송악동) | |||
능묘 | 원릉(元陵) | ||
재위기간 | 고려 제4왕후 | ||
979년 이후 ~ 981년 8월 13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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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 | 부왕 대종 모후 선의왕후 | ||
형제자매 | |||
배우자 | 부군 경종, 사통 안종 | ||
자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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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 불교 | ||
작호 | 왕녀(王女) → 왕후(王后) → 대왕태후(大王太后) | ||
시호 | {{{#!folding 고려사 후비 열전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wiki style="margin: -11px -1px -16px" | 경종: 헌정왕후(獻貞王后)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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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고려 태조의 손녀. 고려 제5대 군주 경종의 제4비이자 고려 제8대 군주 현종의 어머니.아버지는 고려 태조와 제4비 신정왕후의 아들 대종 왕욱(王旭), 어머니는 태조와 제6비 정덕왕후의 딸 선의왕후 류씨(柳氏)로 부모는 이복남매였다. 고려 제6대 군주 성종과 경종의 제3비인 천추태후의 여동생.[5]
헌정왕후의 삶은 자세하진 않지만 《고려사》와 《현화사비》에 기록되어 있다. 단, 현화사비 내용은 현종이 부모님인 안종과 헌정왕후를 찬양하고 미화하는 내용이라 《고려사》와 많이 달라 감안해서 볼 필요가 있다.
2. 생애
2.1. 고려사
사촌 남매인 경종과 혼인하면서 동성혼을 피하기 위해 할머니인 신정왕후의 성씨인 황보씨를 따랐다. 허나 경종이 일찍 붕어하자 젊은 나이에 과부가 되어[4] 본궐에서 나와 왕륜사 남쪽의 자택에서 거처하였다.혼자 살던 중 어느 날 꿈을 꾸었고 높은 언덕에서 소변을 봤는데 소변이 나라에 넘쳐 은색 바다를 이루었다. 그런데 이 꿈과 비슷한 부류의 스토리는 많다. 가장 유명한 예는 김유신의 여동생들 중 언니 보희가 이와 비슷한 꿈을 꾸자 부끄러워 동생 문희에게 비단 치마 한 벌을 받고 팔아버렸는데 훗날 문희가 무열왕과의 사이에서 문무왕을 낳고 문명왕후가 된 것. 페르시아 아케메네스 제국의 키루스 2세의 어머니도 이와 비슷한 꿈을 꾸었다.
꿈에서 깨어난 헌정왕후가 점쟁이를 불러 점을 치니 "생자즉왕, 유일국(生子則王, 有一國.)", "아들을 낳을 것이며 그는 왕이 되어 일국을 가지게 된다"는 점이 나왔다. 헌정왕후는 '난 과부가 되었는데 어떻게 아들을 낳는가?' 하고 의심스러워 했다. 고려사에 기록된 내용은 다음과 같다.
경종이 훙서하자 왕륜사 남쪽의 사제로 나가 살았는데 일찍이 꿈에 곡령에 올라 오줌을 누었더니 나라 안에 흘러넘쳐 다 은빛 바다를 이루었다. 점쟁이가 점을 쳐 보고 말하기를, "아들을 낳으시면 왕이 되어 한 나라를 가지리라." 라고 하자, 왕후가 말하기를, "내가 이미 과부가 되었거늘 어찌 아들을 낳겠소?" 라고 하였다.
<<고려사>> <경종 후비 헌정왕후 황보씨 열전>
<<고려사>> <경종 후비 헌정왕후 황보씨 열전>
그런데 태조와 제5비 신성왕후의 아들인 안종 왕욱 역시 왕륜사 근처에 살아 서로 왕래하다가 사랑에 빠져 관계를 맺었다. 현종이 992년 7월 1일(음력)에 태어난 걸 보아 두 사람이 눈이 맞은 건 대략 991년도 즈음으로 보인다. 결국 둘은 야합으로 임신부터 해버리는데 그 아기가 바로 대량원군(大良院君) 왕순(詢), 훗날의 현종이다.
그러나 두 사람의 문제는 바로 숙부와 조카 관계라는 것이다. 일단 인척관계를 자세히 보면 헌정왕후는 태조 왕건과 제4비 신정왕후의 아들인 대종 왕욱과 선의왕후 류씨의 딸로 태조 왕건의 친손녀이며 왕욱은 태조 왕건과 제5비 신성왕후의 아들로 헌정왕후의 아버지 대종 왕욱의 이복 동생이니 헌정왕후는 왕욱의 조카딸이다.[6] 다만 이복남매간의 근친혼도 당연시되던 고려 왕실의 당시 풍습으로 숙질간 혼인은 여차저차 융통성 있게 볼 수 있는 정도였다. 그러나 헌정왕후는 그냥 과부가 아니라 선왕의 왕후였고 왕욱도 아내와 딸이 있는 유부남이었다.
당시 고려 왕족의 혈통은 감소세를 보였는데 고려 초에 왕족들은 남아도는 왕자녀들의 해결하기 위해 이복남매, 숙부와 조카의 족내혼을 당연시했다. 적어도 두 사람의 관계가 현시대처럼 죄악이나 사회적 매장감은 아니었다는 것은 이렇게 가족 간에 태어난 사생아를 왕인 외삼촌이 보호하고 왕족으로 인정한 것, 부모 역시 사후 추존된 것 등으로 볼 때 추론할 수 있다. 만약 유교를 건국이념으로 삼은 조선시대였다면 상상하기 어려운 전개.
비슷한 경우로 헌정왕후의 언니 천추태후도 김치양과 사통해 아들까지 낳고, 이 아들을 왕위계승자로 만들기 위해 장남 목종을 상대로 난을 일으켰다. 다만 천추태후가 실각해 권력을 잃자 김치양은 아들과 함께 곧바로 처형당한다. 물론 천추태후의 실각만이 원인은 아니고 김치양은 왕족인 왕씨가 아니면서 자기 아들을 왕위에 앉히려던 빼도박도 못하는 반역자라 그렇게 된 것이다. 과부인 태후, 왕후의 사통이 중죄였다면 출산조차 불가능했거나 사통한 남녀 모두 작살났겠지만 그런 거 없었다. (실제로 후대에 비슷한 사례는 적당히 벌을 받았지만)그러나 선왕의 왕후가 과부 상태에서 가까운 왕족과 사통해 신분이 높은 아들을 낳았다는 것은 정치적으로 복잡한 문제에다 둘의 관계를 왕에게 알리지 않아 왕을 속였다는 기군망상의 죄까지 걸고 넘어질 수 있었다.[3]
결국 문제가 터진다. 성종 재위 11년(992년) 7월 1일 밤, 헌정왕후의 가인(家人)들이 소동을 피운 것이다. 당시 헌정왕후는 숙부 안종의 집에서 자고 있었는데 가인들이(이렇게 계속 알면서 숨기다가 자기들도 같이 죽겠다 싶었던지) 마당에 짚을 모아 큰 불을 일으켰다. 김유신이 여동생 문희의 임신을 왕에게 알려 김춘추와 결혼시키기 위해 벌였던 화형 쇼가 떠오르는 부분으로, 모시던 주인들의 관계를 공식화시켜 폭로든 처벌이든 어떻게든 해결해 보려는 의도였을 수 있다. 만약 주인들에게 해를 끼칠 생각이었다면 집에 불을 질렀을 테니.
태조의 아들 집에 불이 났으니 온 조정이 난리가 나 불을 끄러 갔다. 성종까지 직접 출동했다가 한밤 중 그 집에 있는 여동생을 보는 바람에 모든 것이 들통나 버리고, 유교맨이었던 도덕군자 성종은 이에 빡쳐 스캔들을 일으킨 안종을 즉시 사수현[10]으로 유배 보낸다. 고려사 성종 세가엔 992년 7월 임진일에 유배를 보냈다고 나온다.
고려사에 따르면 만삭 상태로 이 소란을 겪은 헌정왕후는 큰 충격을 받아 "참한곡립(慚恨哭泣)", "화가 나고 부끄러워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이 부분이 고려사에 적힌 유일한 헌정왕후의 심리묘사이다. 안종이 처벌을 받게 되어서 화가 났는지 아니면 들킨 게 부끄러웠는지 그도 아니면 고려사 서술자가 마음대로 상상해 적은 것인지 정확히 알 수가 없다. 다만 뜻밖의 사태에 놀라는 건 당연했을 것이다.
안종의 집이 왕후의 집과 더불어 서로 가까워 그로 말미암아 더불어 오가면서 정을 통하였는데 산달이 가까워 와도 사람들이 감히 말하지 못하였다. 성종 11년(992) 7월, 왕후가 안종의 집에서 머물자 그 집안사람들이 장작을 뜰에 쌓아 놓고 불을 질렀다. 불길이 막 솟아오르자 백관이 불을 끄러 달려오고 성종도 급히 와 안부를 물으니, 집안사람들이 결국 사실대로 알렸으며 이에 안종을 유배보냈다.
<<고려사>> <경종 후비 헌정왕후 황보씨 열전>
<<고려사>> <경종 후비 헌정왕후 황보씨 열전>
쫓겨나는 안종과 이별하고 돌아오던 헌정왕후는 집 앞에서 산기를 느끼고 아이를 낳다 사망한다. 고려사 후비 열전에서는 아이가 너무 빨리 나와 집 안으로 들어가기도 전에 문 앞에서 낳고 바로 죽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아이는 왕가의 성을 물려 받아 왕순(王詢)으로 명명되고 그래도 조카라고 성종이 신경을 써 유모에게 맡겨 도성인 개성에서 키웠다. 그 후 말을 시작한 아이가 성종을 아버지라고 부르자, 성종은 가엾게 생각해 사수현에 유배되어있던 아버지 왕욱에게 아들을 보내 그가 죽을 때까지 몇 년간 부자가 함께 살 수 있게 해 주었다.
2.2. 현화사비
헌정왕후 사후 26년이 지난 1018년, 현종은 황비(皇妣) 황고(皇考)[2]를 위해 현화사(玄化寺)를 짓고 1021년에 현화사비(玄化寺碑) 비석을 세워 부왕과 모후를 추모했다.그런데 이 현화사비에 적힌 안종, 헌정왕후에 대한 내용이 고려사와 조금 다르다. 현화사비엔 헌정왕후가 경종의 왕후였던 부분은 쏙 빠지고 처음부터 안종의 왕후였던 것처럼 서술되어 있다. 또한 헌정왕후가 993년 3월 19일에 대내 보화궁에서 붕어했다고 한다.(以其年三月十九日, 崩于大內之寶華宮.) 즉, 현종을 낳고 8개월 정도 더 살았던 것이다.
성종이 헌정왕후를 위해 후계자 목종을 시켜 제사를 지낸 것이나 능묘 조성을 위해 도감을 설치한 것은 고려사에 등장하지 않는 기록이다. 현화사비는 현종이 직접 세웠으니 현화사비가 맞다고 볼 수도 있으나, 그 내용의 신빙성에 다소 의문이 가는 부분이 있다. 가령 비석엔 안종이 유배 가서 죽은 부분을 '거란을 피해 남하했는데 급병에 걸려서 죽었다.'라고 써놨고, 당시 만월대에 있던 현종이 '안종을 부축하며 같이 내려 왔다.'고 써져있는데 문제는 당시 현종의 나이는 유아의 나이에 불과했다는 것이다. 현화사비는 현종이 부모를 기리기 위해 세웠으니 왜곡 미화했다고 볼 수 있는 부분이다.
사족으로 사실 현종 왕순이 아버지에게 이 모든 이야기를 들었을지는 기록이 전무하니 알 수 없지만, 들었다 해도 아버지가 사망할 당시 왕순의 나이가 고작 4~5살 무렵이니 제대로 이해할 순 없었을 것이다. 아니 오히려 성인이 된 후 주변인들에 의해 알게 되었을 확률이 더 높다. 안종 입장에서도 어린 아들한테 "너는 불륜으로 태어난 아이다." 라고 말하긴 상당히 곤란했을 것이다.[1] 현종이 잘못 알고 있었든 아니면 알면서도 의도적으로 왜곡했던 간에 부모를 미화한 몇몇 부분들로 인해 고려사의 기록이 진실에 더 가깝다고 보는 견해가 우세한 편이다. 다만 고려사는 조선시대에 쓰여졌으며 그 기록 또한 내용이 간략한데다 설화적인 요소가 강하게 드러나는 부분들이 있어, 당시의 기록인 현화사비 내용도 어느 정도 참조해서 볼 필요는 있다.
3. 시호
그녀의 시호는 고려사에 두 개, 현화사비에 한 개가 전해진다.고려사에는 하나는 헌정왕후, 또 하나는 효숙왕후(孝肅王后)다. 헌정왕후는 동생 성종이 시호를 올렸는데 아마 경종 헌(獻)화대왕의 왕후로서 헌(獻) 자 돌림 시호를 받은 듯 보이고 효숙왕후는 효숙왕태후를 줄인 것으로 안종 효(孝)의대왕의 왕후로서 효(孝) 자 돌림 시호를 다시 받고 현종이 자신의 친모이니 왕태후로 올려 추존한 것이다.
현종은 즉위한 1009년에 효숙왕태후(孝肅王太后)로 추존하고 원릉(元陵)의 능호를 올렸다. 1017년 5월에 혜순(惠順)이라는 시호를 추가하고, 1021년 6월에 혜순(惠順)을 고쳐 인혜(仁惠)라 하였으며, 1027년 4월에 선용(宣容)을, 고종 40년 10월에 명간(明簡)을 추가하였다.
현화사비에는 순서가 바뀌어 인혜가 앞에 오고 고려사엔 없는 시호가 추가되어 시호를 줄여부른 효숙인혜왕태후(孝肅仁惠王太后), 전체 시호로는 효숙인혜순성대왕태후(孝肅仁惠順聖大王太后)가 등장한다.
4. 여담
고아가 된 아들 왕순은 이후 성종이 궁궐에 데려와 길렀다. 그런데 왕순은 태조의 직계 손자라는 강력한 혈통이었다. 아버지는 태조의 아들, 어머니는 태조의 친손녀. 외할아버지는 태조의 아들, 외할머니는 태조의 딸.때문에 왕순은 이모에게 견제를 당해 절로 도망쳐 쥐죽은 듯 살았지만 그럼에도 여러차례 암살의 위협을 받다 겨우 왕위에 오른다. 사실 왕순의 등극도 권신에 의해 허수아비 격으로 왕위에 앉은데다 즉위 직후엔 북적의 침입도 겪었지만 모두 악착같이 헤쳐나가 결국 나라를 중흥시키니 그가 바로 현종 원문대왕이다.
참고로 고려의 마지막 왕인 공양왕까지 모든 고려의 국왕들이 현종의 후손들이니 모두 헌정왕후의 후손들이기도 하다.
헌정왕후의 일대기는 신라 시대 김문희, 김춘추 일화와 묘하게 비슷하다. 다만 헌정왕후는 꿈을 직접 꾸었지만 문희는 언니 김보희가 꾼 꿈을 비단치마 한 벌을 주고 샀다는 차이가 있다. 또 안종 및 김춘추와 사통하고, 집이 불타고 상급자가 알게 되는 것까지는 같지만, 문희와 김춘추의 속도위반은 김유신이 둘을 엮으려고 사실상 의도한 것
5. 대중매체
- 2009년 KBS 대하드라마 《천추태후》에서는 신애가, 아역은 박은빈이 맡았다. 작중 그녀는 황후 자리에는 전혀 관심도 없다가 정략결혼으로 인해 억지로 경종과 혼인한 것으로 나왔다. 이후 자신에게 진심으로 잘 대해준 안종 왕욱을 항상 사모하며 그와의 로맨스를 갈망하는 것으로 그려진다. 그러나 이로 인해 오라비인 성종의 노여움을 사게 되고, 결국 훗날 현종이 되는 아들 왕순을 출산하고는 산고로 인해 세상을 떠나는 것으로 연출되었다.
- 2016년 SBS의 《보보경심 려》에서는 직접 등장하지는 않았지만, 훗날 안종이 되는 14황자 왕욱(남주혁 분)이 안부 차 이복형인 8황자 왕욱(훗날의 대종 선경대왕, 강하늘 분)의 집에 들렀다가, 자신이 열렬히 사랑했던 우희를 빼닮은 한 소녀를 만난다. 이 때 그 소녀를 보고 "너, 욱이 형님의 딸이지?"라고 묻는 장면이 나왔다. 훗날의 인연을 암시하는 장면인 셈.
- 2023년 KBS 《고려 거란 전쟁》에서는 작중 시점이 이미 사망한 후라 직접 등장하지는 않으나, 3회 천추태후의 대사 중에서 현종이 태어날 당시 현종을 낳았던 동생에 대한 애착을 이야기하면서 잠시 언급된다. 이후 28화에서 현종이 다시 언급한다.
6. 관련 문서
[9] 천추태후의 생년과 아버지 대종의 사망년도를 가지고 추측한 것이다. 그리고 대종의 부인이자 이들의 어머니인 선의왕후가 성종이 젖니를 갈 나이에 사망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보통 그 때가 7~8살 때임을 감안하면 최소 967년 경에는 사망했다는 걸 추측해볼 수 있다. 그러면 헌정왕후의 출생년도가 자연스레 965년~966년 사이로 좁혀지는 셈.[8] 음력 성종 16년 7월 1일[7] 할머니인 신정왕후의 성[5] 천추태후의 언니이자 성종의 누나일 확률도 있다. 현화사비에 나오는 구절 '成宗大王之次姉也'에서 손위 누이 '자'(姉)가 있어 뜻풀이하면 성종대왕의 둘째 누나다. 다만 오늘날 누나의 남편을 자형(姉兄)이 아니라 손아래 누이 매(妹)자를 써서 매형(妹兄)이라 한다던가 누나나 여동생 상관없이 남매(男妹)라고 하는 것으로 보면 손위 누이 '자'(姉)를 그냥 여자 형제 단순히 누이의 의미로서 쓰였을 가능성도 있다. 어쨌든 연구가 더 필요한 부분.[4] 10대 중반에 사별했다.[6] 참고로 헌정왕후의 어머니 선의왕후도 태조 왕건의 딸(제6비 정덕왕후 소생)이다. 헌정왕후의 부모인 대종과 선의왕후도 이복남매, 헌정왕후의 전남편인 경종의 부모 광종과 대목왕후도 이복남매다. 보면 알겠지만 태조 왕건의 아들들은 혜종과 정종을 제외하곤 대부분 이복누이와 결혼했다.[3] 거기다 넘겨주기엔 아들일 경우, 아이의 출신이 너무 높았다. 태조 왕건의 친손자이자 외증손자, 외할아버지는 왕건의 아들, 외할머니도 왕건의 딸, 친부도 왕건의 아들, 생모가 왕건의 손녀, 외손녀라는 어마무시한 극근친을 자랑한다. 부모보다 태조 왕건과 핏줄상으로 진하게 가깝다![10] 지금의 경상남도 사천시[2] 족보상으로 비는 어머니 쪽, 고는 아버지 쪽을 이른다. 즉 황비 황고는 황제의 어머니와 아버지를 이르는 말.[1] 더구나 고려사 기록에 의하면 안종은 그 사통 때문에 유배까지 당한 처지였으니 더 말하기 어려웠을 것이다.